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70화
“이 아이 말이야. 살 수 있겠지?”
“글쎄요,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생사는 운명에 거는 것이니까요.”
침울한 목소리에 검을 손질하던 것을 그만두고 아리아드네를 돌아보았다.
아리아드네의 눈길은 작은 침상에 누워 있는 아이를 향하고 있었다.
성력으로 몸을 침범했던 마기를 정화했고, 포션을 몸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쏟아부었으나, 눈을 뜨기 전까지는 살아날지 어떨지 알 수 없다.
물론 걱정되는 것은 이해한다만, 아리아드네의 모습은 걱정 그 이상으로 어두웠다.
“너답지 않게 의기소침해 보이네.”
아리아드네가 설핏 웃는 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고개를 돌리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성직자로서 해서는 안 될 말이지만.”
“해 봐.”
“때로는 무력함을 느껴요. 제가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누워 있는 아이의 이마에 놓인 물수건을 갈아 주면서 아리아드네는 비관적으로 말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정해져 있는 운명인 거지요.”
나는 침묵했다.
타르토스의 성직자들은 시스템이 나타난 순간 이 모든 것을 정해진 운명으로 받아들였고, 그 운명을 정당한 궤도로 올려놓겠다는 사명을 가지고 성력을 발현했다고 한다.
아리아드네 또한 그런 성직자 중 하나였다. 아리아드네는 자주 ‘운명’을 입에 올렸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다지 받아들일 수 없는 사고방식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에 온 이후로 너무 많은 죽음을 봐 왔다.
시스템의 악의에 맞서기에 인간은 너무도 나약했다. 힘을 가진 자들은 탐욕스럽고, 약한 것들은 무방비하게 내던져졌다.
이런 것을 운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난 운명 같은 거 안 믿어.”
“알아요. 당신은 성직자가 아니니까.”
“그래서 네 말에 딱히 좋은 소리는 안 나오는데…….”
평소라면 지친 아리아드네에게 굳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자리를 떠나, 자고 있는 루카스나 알리시아라도 깨워서 술이나 진탕 마시러 갔겠지.
하지만 그때는 어쩐지 꼭 말해 줘야만 할 것 같았다.
“너는 이 도시 영주의 감기나 고치러 갈 수도 있었어.”
아리아드네가 이곳에 왔다는 소식이 알려졌을 때 도시의 영주가 사람을 보냈다. 최근 날씨가 쌀쌀해져 몸이 좋지 않은데 한번 봐줄 수 없겠냐는 용건이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자신의 성력에는 한계가 있고, 지금 아리아드네의 곁에 더 절실히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리아드네에게는 그 외의 다른 것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저 아이는 네가 아니었다면 살지 못했을 거야.”
그것은 신의 행사가 아니라 아리아드네가 선택한 것이다.
“네가 날 살린 것과 마찬가지로.”
신의 도구라 자신을 격하하지만, 내가 보기엔 아리아드네야말로 이따위 세상을 관조하는 신보다 더욱 신다웠다.
내 말을 들은 아리아드네는 이윽고 고개를 돌렸다.
마침내 마주한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만일 그 또한 운명이었다면요?”
한숨이 절로 튀어나왔다. 역시 괜히 말을 꺼낸 것 같다. 성직자와 내가 무슨 말을 하겠다고.
“……그냥 자라.”
“당신을 구하는 것이 제게 주어진 운명이었을지도.”
“야.”
슬슬 진짜 짜증이 나려고 했다. 한마디 쏘아붙이려 하는데 아리아드네가 꿈꾸는 것 같은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럼 저는 그 운명에 감사해야겠어요. 이런 친구를 만났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아리아드네의 고개가 그대로 고꾸라졌다.
“아리아드네?”
놀라서 침대 맡으로 다가가 보니 아리아드네는 이미 앉은 채로 잠들어 있었다.
어쩐지 괴상한 소리를 한다, 싶었다. 이미 정신은 반쯤 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지간해서는 저런 속내를 털어놓지 않는 앤데.
하기야 오늘 쟤가 한 일을 생각해 보면 죽도록 피곤할 법도 하지. 그냥 이대로 내일 아침까지 자라.
나는 아리아드네 대신, 색색 숨소리를 내는 아이의 볼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손 너머로 가냘픈 온기가 느껴졌다. 이 세상에서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라고 생각될 만큼 연약한 숨결.
성력과 포션을 쏟아부어도 채 낫지 않은 상처가 아이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아무도 도울 수 없는 의지의 싸움이다.
지금 이곳에서 가장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아이를 내려다보며 나는 그 손을 잡아 주었다.
이 온기가 아주 약간의 도움이라도 되기를 바란다.
괜찮아. 넌 분명히 살 수 있을 거야. 아리아드네가 살려 낸 녀석들은 대부분 끈질기거든.
운명 따위는 얼마든지 엿 먹일 수 있다는 걸 보여 줘.
아리아드네에게도, 신이라는 작자에게도.
* * *
……나는 새벽부터 지저귀는 새소리 때문에 눈을 떴다.
그리고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역시나,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광경이다.
흰 천장, 병실 특유의 소독약 냄새, 일정한 기계음과 누군가가 복도를 돌아다니는 나직한 소리.
며칠 전까지 내가 입원해 있었던 VIP 병실의 풍경 그대로였다.
손을 들어 보니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그리고 양다리에는 깁스가 되어 있다.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 그렇게 심한 상처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며칠 전에 퇴원한 환자가 다시 실려 왔으니 움직이지 말라는 의미로 해 놓은 걸까.
그건 그렇고, 이쯤 되면 내 주거지는 병원의 병실을 하나 빌려서 꾸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정부에서 받은 주거지의 실효성을 의심하며 일단 불편하게나마 핸드폰 화면을 확인해 보았다. 핸드폰은 병실 침대 옆 탁자에 놓여 있었다.
다행히도 내가 확인한 날짜에서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다.
시각은 새벽 5시 20분.
저번처럼 며칠씩 기절하지는 않았던 모양이군.
어쩌다 이 병실로 다시 입원하게 된 건지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벨리알을 엿 먹이고 던전 밖으로 나온 건 좋았는데…… 던전을 나오니 이미 석양이 지고 있었다.
피곤한 몸을 가누고 있는데,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등산객 무리가 나를 보고 손가락질하며 비명을 질렀다.
“으, 으아아악!”
“사람이야? 신고해!”
“구급차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그 반응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던전을 막 나선 내 꼴은 아주 볼만했을 것이다. 전신에 만티코어의 살점이며 피가 묻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여기는 던전 입구잖아.
이제까지 던전 공략을 끝내고 나온 헌터가 한둘이 아니었을 텐데 너무 과도한 반응이었다.
역시 던전 입구 근처에는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천막이라도 세워 놓으라고…….
그렇게 홀로 투덜거리는데, 배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격렬하게 울렸다.
“아, 배고…….”
프다, 라고 생각하는 시점에서 의식이 끊겼다.
“………….”
결국, 지나가던 등산객이 구급차나 경찰차를 불러 줘서 내가 병원까지 온 거겠군.
과도한 반응을 보였다고 투덜거려서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희미한 기억 속에, 잠시 정신을 차렸을 때 구급대원이 나를 보고 헌터냐고 물어봤던 것 같다. 나는 가물가물한 정신으로 최민혁에게 연락을 취하고 다시 기절했다.
그래서 결국 헌터 전용 병원 쪽으로 이송된 모양이다.
이제 명료해진 머리로 되짚어 보니 기절을 한 내 상태도 납득이 갔다.
상처 자체는 사실, 기절할 정도로 아프지는 않았다.
다만 마계에서 나온 동시에 부여된 페널티도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니 앙겔루스의 가호가 신나게 내 몸에 침투한 마기와 독을 정화한 것이겠지.
그런데 사실 앙겔루스의 가호가 내리는 정화는 마력을 어마어마하게 먹는다.
내 마력 수치야 문제가 없지만, 그걸 받는 몸뚱어리는 이미 소모될 대로 소모되어 있었다.
그러니 갑자기 몸에 과부하가 걸릴 만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마계 한 번 갔다가 기절까지 하다니.
영 한심한 꼴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다가 병원이 한국에서 가장 익숙한 장소가 되어 버리겠다.
‘그래도 얻은 게 없는 건 아니니까.’
이번에 마계에 간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정도 있었다.
물론 첫 번째는 시스템이 준 퀘스트의 진위 여부 확인이었다.
운명의 씨앗이라는 게 진짜 존재하는지부터 알아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물론 악마의 말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지만, 벨리알의 반응을 보면 ‘운명의 씨앗’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뭐, 아쉬운 점이 있기는 했다. 나는 여전히 운명의 씨앗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으니.
벨리알의 입이 조금만 가볍거나 머리가 나빴다면, 대체 운명의 씨앗이라는 게 무엇인지도 물어보았을 텐데 아쉬웠다.
그러나 벨리알의 경악한 얼굴을 보면 악마에게서 더 이상의 정보를 얻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다.
아쉽지만, 일단 존재 여부를 파악한 것만으로도 만족해야겠지.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현재의 능력치에 적응하기 위해서였다.
침대에 앉은 채 팔을 휙휙 돌려 보니 잘도 돌아갔다.
전보다 확실히 몸이 개운해졌고, 움직임에도 힘이 덜 들어갔다. 내가 이 몸을 어떻게 써야 할지 정확히 파악했기 때문이다.
현시점에서 가장 필요한 경험을 쌓은 덕분이다.
마계였기에 클래스 보정이나 내 파트너의 사기 보정이 먹히지 않았다.
말 그대로 이 몸뚱어리만을 가지고 맞선 정면 승부였던 것이다.
덕분에 현재의 능력치에는 확실하게 적응했다.
지금 상태에서 이 정도의 힘으로 주먹을 뻗으면 상대에게 어느 정도의 타격을 줄 수 있을지 확실히 감이 왔다.
그리고 지금의 능력치가 어느 정도인지도 파악되었다.
만일 여러 요소가 부재하다면, 혼자서 A급 몬스터 몇십 마리를 잡는 건 요령이 좀 필요했다.
그리고 S급 데스나이트를 단신으로 상대해 죽이려면 천운이 필요할 것이다.
벨리알의 경우는 아예 논외이고.
뭐, 능력치 부분은 차차 해결해 나가면 될 일이다.
이건 서브 퀘스트가 발생한다는 것을 볼 때 시스템도 도와줄 것으로 보였다.
내가 생각하는 대로 시스템이 이 세상의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나를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저쪽도 내가 능력치가 높은 쪽이 좋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급할 것이 없다.
현실을 냉정하게 파악했을 때 지금 나는 타르토스를 구하기 위해 시간에 구애될 필요는…… 없는 거니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속에서 쓴물이 올라오는 듯했지만, 참고 넘겼다.
나는 시야 한구석에 처박아 둔 퀘스트 창을 중앙으로 옮겼다.
아무리 봐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계속 보게 된다.
- 메인 퀘스트 : 운명의 씨앗을 수집하여 운명을 변화시키십시오.
- 보상 : 멸망한 세계의 복구
이제부터는 운명의 씨앗이 무엇인지, 도대체 무슨 운명을 바꾸라는 것인지 알아보아야겠지.
갈 길이 아직도 먼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저 퀘스트가 정말로 가능한 것이고, 내가 원하는 보상이 명시되니 희망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멸망한 세계의 복구.
그 보상이 적혀 있는 문장은 끔찍했다. 내 세계가 이미 멸망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으니까.
그러나 동시에 희망이기도 했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운명 같은 거, 난 안 믿어.”
성직자인 내 친구에게는 약간 미안하지만 내 생각은 여전했다.
이미 정해져 있는 운명 따위는 없다.
아니, 설령 있다고 한들 상관없다.
세계가 멸망했다면 다시 구해 낼게. 정해진 운명이 있다면 뒤집을게.
반드시.
* * *
“도대체 A급 던전에서 뭘 했기에 이렇게 상처를 입은 거예요?”
몇 시간 후, 날이 밝은 내 병실에 뜻밖의 손님이 한 명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