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73화
물론 나도 19년간 한국에서 살아온 만큼 무당이라는 존재에 대해 알고는 있었다.
다만 일상생활에서 마주할 일은 별로 없었다. 다들 그렇지 않나? 기껏해야 가끔 인터넷에서 재미있는 썰을 주워들은 정도였다.
그래서 존재는 하되 나와는 별 상관은 없다고 생각해 왔었는데, 이렇게 시스템이 나타난 후 마주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설마 이런 옷차림을 즐겨 하는지도 몰랐고.
그야 공략 보고서를 볼 때 어리겠군, 골 때리는 놈이구나, 하는 감 정도는 왔다만.
양태원은 새로 시킨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힘없이 말했다.
“정식 클래스 명칭은 무속인이에요.”
심지어 양태원은 시스템이 존재하기 전부터 무속인이었다고 한다. 신내림을 받은 것은 10살 무렵이었고.
“사실 전 시스템 출현도 예지했었어요. 아무도 안 믿어 줘서 문제였지.”
“진짜?!”
“네. 뭐, 저도 구체적인 것까지는 몰랐지만 제가 모시는 신께서 귀띔해 주셨거든요.”
그 말에 자연스럽게 지금은 눈을 감고 있는 청룡으로 시선이 갔다.
눈을 감고 있는 용의 주위에는 오색의 상서로운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던전에 몬스터가 나타나는 세상이지만 이건 이것대로 초현실적인 광경이었다.
“그래 봤자 저는 기껏해야 자연재해가 세계구급으로 일어난다고 생각했지만요.”
“그건 그것대로 무서운데.”
“뭐, 저 말고도 다들 신년 운세 볼 때쯤에 느꼈을걸요? 이거 이상하다, 올해는 죽을 운이 들어온 사람이 왜 이렇게 많지? 하고.”
소름 끼치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군.
그나저나 양태원의 말을 듣다 보니 궁금한 게 생겼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너 말고도 무속인 클래스로 활동하는 사람이 꽤 많은 모양이네?”
“그거야 당연하죠. 신년 운세 봐 주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 사람들이 뭐 다 사기꾼이겠어요?”
솔직히 사기꾼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내가 궁금한 것도 다른 점이었다.
“그럼, 왜 다른 사람들 놔두고 미성년자인 네가 던전 공략을 주도하게 된 거야?”
사실 양태원을 만나기 전 주어진 권한으로 정부 데이터베이스를 좀 뒤져 보았다.
데이터베이스라고 해 봤자 현재 등록된 클래스 목록을 훑은 정도이긴 했지만 그래도 양태원 외에 무속인, 종교인 등의 클래스를 발현한 인간들이 있는 건 확인했다.
그것도 꽤 많은 숫자였다.
그래서 궁금했다.
왜 하필 미성년자에 불과한 양태원이 최전선에 나서야 했는지.
“아, 그건 간단해요. 다른 무속인들은 저만큼 못 버텼으니까.”
양태원이 제 몸을 휘감고 있는 청룡을 가리키며 설핏 미소 지었다.
“대한민국에서 이 정도로 큰 신을 모시는 건 저뿐이에요. 설마 이렇게 강력한 신이 길거리 돌멩이처럼 굴러다닐 리는…… 아야, 아파여.”
눈을 감고 있던 청룡은 사실 대화를 듣고 있었는지 꼬리 부분으로 철썩, 하고 양태원의 등짝을 때렸다. 상당히 친근해 보인다.
“하여튼, 다른 선택지가 없었어요. 마계에 진입한 순간 자신이 모시는 신과의 연결이 완전히 끊겨 버린 사람도 있었고, 아예 돌아오지 못한 사람도 많았으니까요.”
무거운 한마디였다.
겉으로 보기에 한국 던전의 상황은 그럭저럭 안정화된 것처럼 보였지만, 역시 초반에는 여러모로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었겠지.
내 표정이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양태원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보실 거 없어요. 어쨌건 이제까지 별일 없이 살아남기는 했으니까. 마계라고 해도 일단 마기만 버틸 수 있으면 B급 정도의 몬스터를 공략하는 건 일도 아니니까요.”
“……그래, 그 던전 말인데.”
긍정적인 건 좋은 일이다만 지금의 나는 저 태도에 찬물을 끼얹어야 할 참이었다.
나는 헛기침을 해 주의를 환기시켰다.
“나도 바로 이틀 전에 공략했었거든.”
내 말을 들은 양태원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헐, 진짜요? 용사라서 마기를 버틸 수 있는 건가? 잘됐다! 그럼 앞으로 누나와 제가 번갈아 가면서 공략해도 되겠네요. 저도 솔직히 혼자 공략을 책임지는 건 좀 부담스러웠는데…….”
나는 손을 내저으며 계속해서 이어지는 말을 끊었다.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그런데 내가 사고를 좀 쳐서, 이제부터 마계 던전은 공략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고 봐야 할 것 같아.”
신나게 떠들어 대던 말이 뚝 끊어졌다. 표정도 순식간에 얼었다.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양태원에게 나는 최대한 간결하게 이 상황을 설명하기로 했다.
“넌 이제까지 마계에서 보스 몬스터와 마주친 적은 없었을 거야. 그렇지?”
“어, 네. 솔직히 보스 몬스터라는 게 존재하는지도 몰랐는데요. 조건 자체는 그냥 B급 몬스터를 처치하는 거잖아요.”
“맞아. 그런데 내가 이번 공략 과정에서 보스 몬스터와 조우했어.”
물론 벨리알은 시스템상 몬스터로 분류되지 않으므로 보스 몬스터라고 부르기에는 어폐가 있다. 다만 그걸 설명하자면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니 편의상 보스 몬스터 정도로 설명했다.
“와, 대박.”
그런데 계속 얼어 있을 줄 알았던 양태원이 내 설명을 듣고서 어울리지도 않게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눈동자에 기대감과 흥분이 엿보였다.
“그 던전, 마계잖아요. 마계의 보스 몬스터라면 설마?”
“그래, 마왕이야.”
“와아!”
무슨 스포츠 경기라도 보는 줄 알았다. 양태원이 만세를 부르듯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마왕이라니, 그런 게 진짜로 존재해요? 무슨 게임도 아니고!”
“……실제로 보면 게임에서나 만나는 게 좋다고 생각될걸.”
벨리알 같은 유해한 존재는 솔직히 평생, 더는 만나고 싶지 않다. 말 한마디 섞는 것만으로도 산치를 깎아 먹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내 표정을 보고 느낀 바가 있었는지 양태원이 헙, 하고 숨을 들이켰다.
“아, 죄송해요. 그래도 용사와 마왕의 대결이라는 게 아무래도 고전적으로 마음을 들끓게 하는, 뭐 그런 게 있어서.”
고전적인 거 좋아하네.
그래도 마왕의 존재 자체를 믿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예상까지 했으니 믿어 준 것만 해도 고마울 지경이다.
“음, 그런데 그게 무슨 문제가 되는 거예요? 클리어 조건이 바뀐 건 아니잖아요. 보스 몬스터는 내버려 두고 일단 클리어만 하면 포화도 관리는 되는 거 아닌가?”
하지만 믿고 말고를 떠나 양태원은 아직 이 상황이 어떻게 굴러가게 된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사실 저 의문이 아주 그릇된 것도 아니었다.
대부분의 던전에서 보스 몬스터는 자신의 영역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보스 몬스터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클리어를 진행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아니, 사실상 클리어 조건이 바뀐 것이나 다름없어. 다음 진입부터는 벨리알…… 그러니까 마왕은 헌터의 진입 위치 부근에서 대기하고 있을 테니까.”
이제까지 해당 던전에 진입하는 헌터들은 벨리알과 마주칠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것은 마계의 필드가 워낙 넓고, 애초에 마계에 출입한 인간의 존재 따위는 너무 미약해 벨리알이 느끼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이제까지 마계에 진입했던 헌터들은 B급 이상의 몬스터를 찾기 위해 꽤 오랜 시간을 들여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단단히 깽판을 쳐 버린 상황이다.
벨리알은 지독하게 집요하고, 시스템이 나타난 인간의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도 알고 있었다. 던전 포화도에 대해 알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니 분명, 내가 던전에 진입한 위치에서 다음 진입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제야 내 설명을 알아들은 양태원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 그럼 이제부터 그 던전에 들어가면 무조건 마왕, 그러니까 보스 몬스터와 싸워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
심지어 실제로는 보스 몬스터가 아니고, 일반 헌터로서는 대적하기 힘든 상대라는 점에서 최악이다.
‘……이렇게 될 거란 예상을 하긴 했지만.’
입맛이 썼다.
양태원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사실 내가 마계에 진입하지 않았다면 이런 상황이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 또한 처음부터 상황이 이렇게 굴러갈 거라는 건 알았다.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내가 필요했기 때문에 저지른 일이다.
“세상에, 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당장 포화도가 터지면 마계 생물들이 밖으로 튀어나오는 거 아닌가요? 정부에는 얘기해 보셨어요?”
한편, 상황을 완전히 이해한 양태원의 말이 급해졌다.
마계의 생물들을 접해 본 양태원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이라면 당연한 반응이다.
“아니, 정부에는 이야기하지 않았어.”
“네? 왜 이야기하지 않으신 거예요? 당장 일반인들 출입부터 막아야 할 것 같은데.”
그게 정론이긴 하지. 나도 안다. 나도 정부에 끝까지 비밀로 할 생각은 아니었다.
“수습할 수 있으니까.”
다만, 사후 보고가 될 것이다.
사고를 치고 수습하지도 못한 상태로 정부에 알리는 것과 수습을 끝낸 후 알리는 것은 천지 차이니까 말이다.
여기서 더 정부에 발목 잡히는 짓을 할 필요는 없지.
“수습할 수 있는 일인데 굳이 알려서 사람들의 불안만 부추길 필요는 없잖아?”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가 이틀 전 공략을 마친 상태라 포화도에는 일단 여유가 있다.
그사이에 나는 내가 이번에 저지른 사고를 무마시킬 작정이었다.
내 말을 들은 양태원이 깜짝 놀랐다.
“어? 수습이 가능하다고요? 아, 잠깐만. 설마 아까 청룡 님이 하신…… 가능하다는 게?”
양태원이 말을 더듬었다. 양태원이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청룡의 한쪽 눈이 슬그머니 떠지는 것이 보였다.
웃음이 슬쩍 새어 나왔다.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계로 이어지는 던전을 없앨 거야.”
사고는 쳤다만 수습 방안이 없는 건 아니었다.
평범한 던전이라면 먹히지 않지만 마계로 이어지는 던전에만 먹히는 방법이 하나 있다.
“성력, 아니, 네 경우에는 도력인가?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건 마기와 반대되는 힘이지. 그래서 마기가 충만한 마계에서도 오염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거고.”
“네, 그건 그렇죠. 기본적으로 저의 힘은 사악한 것을 멸하는 힘이니까.”
그 근본에 있는 믿음이나 발휘되는 영역이 조금 다를지 몰라도, 양태원의 공략 보고서를 보면 그 결과물은 내가 아는 성직자와 별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성직자가 어떤 식으로 마계를 봉인했는지 이미 본 적이 있다.
“그래, 자격 있는 자의 피를 제물로 삼고 또 네 악을 멸하는 힘이 있으면 ‘봉인’이 가능해.”
아리아드네가 이 방법으로 마계와 연결된 던전의 봉인에 성공했으니까.
“마침 나는 용사라 자격이 있고, 너에게는 힘이 있지. 딱 좋잖아.”
평범한 던전이 아니라 악귀가 새어 나오는 던전에만, 또 악을 멸하는 ‘성직자’와 기꺼이 희생할 ‘용사’가 있을 때만 먹히는 편법이다.
게다가 마침 이 한국에도 성력을 가진 녀석과, 희생은 몰라도 흘릴 피 정도야 얼마든지 있는 용사도 있다.
뭐, 시스템상 내 클래스는 아직 용사니까 써먹을 수 있을 때 써먹어야지.
내 말을 들은 양태원이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턱을 긁었다.
“그렇게 무슨 헌혈하는 것처럼 말씀하셔도 말이죠…….”
“죽는 것도 아닌데 이 정도면 싸게 먹히는 편이지.”
나는 웃으며 내 목을 한 번 긋는 시늉을 해 보였다.
“피야 살아만 있으면 계속 생성되는 거 아니야?”
“누나, 그러다 진짜 죽어요.”
어린애 주제에 냉정하기는.
내 말을 이리저리 재보는 듯하던 양태원이 곧 결심한 듯이 입을 열었다.
“사실 저도 악귀를 봉인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이 먹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은 이미 해 봤어요.”
나는 그 말에 반색했다.
솔직히 나는 아리아드네가 타르토스에서 마계와 이어진 던전을 봉인하는 것을 곁에서 도왔을 뿐, 그 주체는 아니었다. 그래서 정확히 어떻게 성력을 운용해야 하는 것인지는 모른다.
그러다 보니 만일 양태원이 봉인 방법을 전혀 모른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는데, 다행히 바로 감을 잡은 것 같다.
“이미 시도해 본 적도 있어?”
“그야 당연하죠. 저라고 좋아서 저런 지옥에 한 달에 한 번씩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하지만 이제까지는 성공하지 못했어요. 마계라는 게 워낙에 사이즈가 크다 보니 제 도력으로는 부족해서…… 흠.”
양태원은 고민에 빠진 채 홀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평범한 신칼로는 끊어 낼 수 없었는데…… 그럼 도액을 없앨 수 있는 무언가가 따로 필요하다는 거잖아. 그리고 그걸 용사가 손에 넣어야 한다니…… 그게 뭐지?”
“……네 신은 그런 건 대답 안 해 주냐?”
“네, 별로 친절하지는 않으시다니까요. 그래도 가능하다고는 하셨으니 방법 정도는 제가 알아서 추측해야…… 아.”
양태원이 갑자기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아악!”
칼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비통한 목소리였다. 카운터에 있던 직원들이 일제히 이쪽을 돌아보는 것이 느껴졌다.
잔뜩 열이 오른 양태원이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엑스칼리버다!”
“……으응?”
엑스칼리버?
그거 영국 전설 아니야? 그게 갑자기 여기서 왜 나와?
그건 그렇고, 사람들의 시선이 너무 쏠려 있었다. 나는 스무 살의 흑역사를 제조하는 현장을 더 두고 볼 수 없어 양태원의 어깨를 손으로 내리눌렀다.
“잠깐만,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자.”
“그거네, 그거야!”
하지만 양태원은 그런 통제가 듣는 상태가 아니었다. 양태원은 오히려 내 손을 잡고 붕붕 흔들었다. 팔이 아프다.
“그래서 용사님이 필요하다고 했나 보다. 그걸 뽑으려면 용사 클래스여야 했던 거죠!”
그러니까 왜 갑자기 엑스칼리버 타령이냐고. 내가 재차 그 의미를 물어보려던 때였다.
- 천부인(天符印) 중 하나인 청동검.
훅, 하고 커다란 눈동자가 바로 눈앞에 들이밀어졌다. 청룡의 몸을 휘감고 있던 기운이 다가와 마치 족쇄처럼 나를 옭아매었다.
어느새 다시 눈을 뜬 청룡은 웃는 모양으로 내게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 목소리는 뇌리에 직접 울려 퍼지는 듯했다.
- 파마(破魔)의 검이 필요하다.
그 뒤의 양태원도 이런 상황을 예측하지는 못한 듯 그저 눈을 크게 뜨고 있을 뿐이었다.
“……양태원.”
나는 조용히 양태원을 불렀다.
“네, 네?”
“그 엑스칼리버란 거, 자세히 말해 봐.”
뭔지는 모르겠다만 그래, 뭐 좋아.
그 엑스칼리버란 게 어디에 박혀 있는 검인지는 모르겠지만, 산을 통째로 뽑는 한이 있더라도 뽑아내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