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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77화 (78/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77화

오토바이에서 내리며 헬멧을 벗은 양태원이 내 맨얼굴을 보고 흠칫했다.

“누나, 혹시 우리 집에서 자는 거 많이 불편했어요? 엄청 피곤해 보이는데.”

“아니, 난 잠자리 안 가려.”

모포만 있으면 맨바닥에서도 잘 잔다. 아니, 사실 모포 같은 게 없어도 나뭇잎이라도 그러모아 어떻게든 잘 잔다. 양태원의 집에서 자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것과 별개로 피곤한 것이 사실이기는 했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며 아파 왔다.

나는 언제 나와 그런 대화를 나누었냐는 듯이 양태원의 몸을 둘둘 감고 있는 청룡을 노려보았다.

내가 잠을 설친 것은 전적으로 저 용이 내뱉은 선문답 같은 발언 때문이었다.

뜬구름 잡는 말을 내뱉은 용은 내가 무슨 뜻이냐며 몇 번을 다시 물어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언제 나와 대화를 나누었냐는 듯 시치미를 떼는 것 좀 보라지.

지금도 내 시선을 느끼지 못할 리 없을 텐데 완전히 이쪽을 무시하는 태도였다.

……한번 베어 봐?

에이펙스의 광검도 명색이 용사의 성검인데 어쩌면 저런 존재를 상대로도 먹힐지도 모른다.

- 에이펙스의 검이 침묵합니다. 그냥 검인 모양입니다.

야, 이 비겁한 자식. 자신 없다고 내빼기야?

쳇, 나는 혀를 찼다.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타르토스 대륙을 주름잡던 레나가 이게 무슨 꼴인지 모르겠다. 착수금이랍시고 뜬구름 같은 소리나 듣고, 단서 하나를 구하지 못해 쩔쩔매고 있다니.

심지어 그 단서를 들으려면 저 파마의 검이라는 아이템을 아무것도 모르는 꼬맹이 손에 쥐여 줘야 한다?

이거, 왠지 남 좋은 일만 하는 것 같은데.

“……왜 그렇게 노려보세요? 저 무서운데여.”

갑자기 불똥을 맞은 양태원이 내 시선을 받고 오들오들 떨었다.

……내가 애 데리고 뭐 하는 짓이냐. 관두자.

나는 전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와 양태원이 도착한 곳은 오토바이를 끌고 올라올 수 있는 한라산 초입의 주차장이었다.

등산로 입구에는 이제 녹이 슬어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한라산 국립 공원 등산 허용 안내

현재 한라산 백록담은 던전 출현으로 인하여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일반 등산객은 입산 시 던전에 진입하지 않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표지판 뒤로 산을 굽이굽이 올라가는 길이 보였다. 인기척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사람이 별로 없네. 인터넷에서는 관광지 다 됐다고 하더니.”

“일반인들이 자주 오르는 건 이쪽 코스가 아니라서요. 이쪽은 헌터들이 많이 쓰는 코스라는 소문이 나서 암묵적으로 정해진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하긴, 산중에서 일반인이 헌터를 만나면 무서울 수도 있겠다.

양태원이 무릎을 툭툭 두드리며 준비 운동을 시작했다.

“일단 올라가죠? 지금부터 올라가도 도착하면 오후가 되겠지만.”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니 현재 시각은 오전 6시.

일반적으로 한라산 백록담 코스는 왕복 9시간 정도라고 들었으니 이 녀석의 예측이 타당하긴 하다만.

“태원아, 너 고소 공포증 있냐?”

“예? 아뇨, 그런 거 없는데요. 왜, 왜요?”

“응, 없다니 다행이고.”

나는 충분히 줄일 수 있는 시간을 괜히 낭비하는 건 딱 질색이었다.

양태원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서자 무언가를 예감한 듯, 양태원은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무속인이라 그런지 감은 정말 좋네.

“누, 누나.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진정하세요. 지금 엄청 무섭거든요?”

“괜찮아, 괜찮아. 너한테 해가 되는 짓 안 해.”

“지금 얼굴만 봐서는 절대 못 믿겠…… 으악!”

순식간에 내 어깨 위에 짐짝처럼 올라가게 된 양태원이 소리를 질렀다.

“아야. 아야, 누나! 이거 엄청 아파요! 누나 어깨가 내 배를 찔러서 아파요!”

그야 근력 수치가 올라가서 사람 하나를 둘러메는 것 정도야 일도 아니게 되었다만, 내 체구 자체는 그리 큰 편은 아니니까.

그나저나 이 녀석, 역시 청룡만 믿고 체근민 수치는 제대로 올리지도 않은 것 아냐? 그러니 이런 산길을 올라가는 데 4시간이나 필요하다고 하는 거지.

“엄살 부리긴. 좀 참아.”

나는 한쪽 팔로 양태원의 허리를 단단히 둘러맨 후 씩 웃었다.

“한 시간이면 도착할 테니까.”

오랜만에 등산을 하려니 신나는데. 심지어 뒤를 쫓는 암살자도, 앞에서 매복하며 기다리는 용병도 없는 상황이잖아.

이쯤이야 쉽지.

- 님페의 바람을 사용합니다.

이제 사용 제한 시간 창 따위는 사라졌다는 점이 매우 마음에 든다.

퍽!

흙길을 박차고 오를 때마다 자갈이 사방으로 튀었다. 가끔 내가 내는 소음에 놀라 달아나는 청설모가 보였다.

“악, 악, 악! 청룡 님, 보고만 있지 말고 뭐라도 좀 해 주세요!”

물론 내가 바닥을 걷어찰 때마다 리듬에 맞추어 비명을 지르는 양태원이 나보다 사위의 침묵을 깨트리는 데 일조했다는 말은 해 둬야겠다.

결국, 30분쯤 지났을 때 나는 양태원의 등짝을 한 대 때렸다.

“시끄러워, 좀! 엄살 피우지 마!”

“누나가 반대 상황이 되어 봐요. 이게 안 아픈가!”

어라, 생각해 보니 내가 정말 반대 상황이 되어 본 적은 없었네. 음, 루카스한테 한번 신세를 졌던가? 아니던가?

“그럼 나도 반대 상황이 되면 참을게. 됐냐?”

“그게 뭐가 됐다는 거예…… 아, 혀 깨물었어.”

이제 좀 조용해지겠군. 정말 기절이라도 했는지 양태원은 한동안 정말로 조용해졌다.

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곳곳에 등산객을 위한 안내 표식이 존재해서 다행이었다.

“……이쯤인가?”

그리고 우리는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백록담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어깨 위에 얹은 양태원이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있었으므로 슬슬 내려놓아야 할 때라고 판단한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우욱! 머, 멀미…….”

아니나 다를까, 바닥에 내려놓은 양태원이 두 손으로 입을 감싸며 바닥으로 허리를 숙였다.

아이고, 등을 두드려 주자 양태원이 몇 번 헛구역질을 했다.

“우웨웩…… 아침 먹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이래서 저한테 밥 먹지 말고 나가자고 한 거였어요?”

“응, 그렇지.”

“너무해…….”

“너무하고 뭐고, 네가 너무 연약한 거야.”

양태원이 충격받은 얼굴을 했으나 이건 사실이었다.

어제부터 관찰해 본 결과 양태원의 신체 능력은 헌터보다는 일반인에 가까워 보였다.

아무래도 청룡이라는 치트키가 있는 만큼 성력, 아니, 도력으로 밀어붙이며 던전을 공략해 온 모양이었다.

지금까지야 마계처럼 도력으로 정화 가능한 던전만 공략했으니 그래도 됐겠지만, 만일 정말 헌터로 활동할 거라면 체근민 수치를 올리는 것은 필수적이었다.

아리아드네만 해도 성력으로는 대륙 최고 수준이었지만 결국 한계를 느끼고 체근민 수치를 올리는 것에 집중했으니까.

마력 또한 충분히 단련된 몸이 아니면 활용하기 어렵듯이.

“게다가 너 스스로 도력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겠지.”

멀미의 고통에 흐리멍덩하게 풀려 있던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바닥에 엎드려 있던 소년이 고개를 들고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어, 그건…….”

나도 머리가 있다.

어제 양태원이 뱉은 말과, 그리고 청룡이 꺼낸 부탁을 종합해 생각해 보면 거기서 도출되는 결론은 결국 하나 아닌가.

뭐, 이런 세상에 사연 하나 없는 사람이 있을까.

나야 마계로 이어지는 던전만 막을 수 있다면 상관없으니 이렇게 한마디 하는 것 이상으로 참견할 생각까지는 없다만.

“나도 알아. 쓸데없는 충고인 거. 그냥 하는 말이야.”

내 파트너가 나더러 꼰대라고 놀리더라도 이번에는 화내지 않겠다.

“자, 가자. 그 검이란 거 뽑으러.”

*   *   *

백록담.

동서로는 600미터. 둘레 3킬로미터에 달하는 분화구에 물이 고여 만들어진 호수.

분화구 주위로는 등산객을 위해 만들어진 길이 있다.

직접 와 본 적은 없지만 나도 한국에서 살아왔으니 백록담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고 있었다.

“와.”

저도 모르게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백록담에 오른 순간 눈앞에 펼쳐진 것은 내가 익히 알던 것과는 전혀 다른 광경이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넓은 분화구에 완전히 물이 차올라 있었으니까.

원래 분화구의 일부에만 고여 있던 호수는 이제 마치 바다처럼 보였다.

양태원이 울타리 사이로 호수의 표면에 손가락을 찍었다가 물을 털어 냈다.

“예전과 가장 달라진 것 중 하나죠.”

“만져도 돼? 독성이 있으면 어쩌려고.”

“아직까지 보고된 사례는 없는 걸로 알아요.”

분화구 전체에 차오른 호수의 중앙으로 눈을 돌리자 던전임을 표시하는 마름모꼴의 모양이 떠올라 있었다.

던전을 인식하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 던전에 입장하였습니다.

- 던전 클리어 조건 : 백록담 수호령의 시험에 통과하십시오.

- 클리어 보상 : 청동검, 천부인(天符印) 중 하나, 파마의 검.

- 단, 클리어와 던전 탈출은 별개로 이루어집니다. 해당 던전의 탈출 조건은 해당 구역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던전에 입장할 때는 보통 흰빛이 터져 나오면서 몸이 이동했다는 확실한 감각이 들기 마련이다. 완전히 다른 세계의 풍경이 펼쳐지기도 하고.

하지만 지금은 입장했다는 메시지가 뜰 뿐 달라지는 것은 전혀 없었다.

보이는 것은 아까 전과 같은 백록담이었다.

그러나 같은 풍경에서 단 하나 달라진 것이 있다.

넘칠 듯 차올라 있던, 하늘과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맑은 호수의 중앙.

아무것도 없던 그곳에 지금은 검 한 자루가 떠올라 있었다.

모든 삿된 것을 제압한다는 청동으로 만들어진 검.

실제로 보니 정말 홀릴 정도로 아름다운 선을 가진 검이었다. 호수 위에 떠오른 청동검의 주변에는 오색의 상서로운 기운이 떠돌고 있었다.

전래 동화에 나오는 선녀의 날개옷이 저런 모양이었을까?

전투용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순간 나조차 현혹될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 에이펙스의 광검이 불만을 표시합니다.

허리에 매달린 내 파트너가 분노에 몸을 떠는 것이 느껴졌다.

질투하지 마. 애도 아니고.

어차피 시스템이 사람들의 믿음에 맞추어 가장 그럴싸한 모양으로 만들어 냈을 가능성이 높지 않나. 외양에 혹할 정도로 어린애는 아니다.

나는 양태원을 돌아보았다.

“그래서, 이제 저 검에 접근하면 되는 거야?”

“네, 맞아요.”

“그럼 쉽네.”

보고서를 읽어 본 바로는, 일단 호수 중앙에 떠오른 검에 가까이 접근하기만 하면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른다고 했다.

대부분의 경우 평범하게 헤엄을 치거나 스킬을 썼고, 아이템을 쓰는 사람도 있었다.

나도 딱히 특별한 방법을 쓸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저 검에 가까이 접근하는 방법 자체가 특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양태원의 몸을 휘감고 있는 청룡도 슬쩍 한쪽 눈을 들어 이쪽을 주시할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중요한 건 이다음이라 이거지.

나는 한 번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럼, 간다.”

- 님페의 바람을 사용합니다.

콰앙!

한 발, 울타리를 넘어 호수에 발을 내리찍는 순간 거대한 물보라가 일었다. 졸지에 물을 뒤집어쓴 양태원이 비명을 지르는 것이 들렸다.

“악, 누나!”

님페의 바람이 내가 물에 빠지기 전에 날아오르는 것을 도와주었다. 몇 발자국 만에 나는 순조롭게 호수 중앙으로 접근했다.

청동검이 바로 눈앞에 다가온 그 순간.

내가 무의식중에 손을 뻗는 것과 동시에 물 밑에서 투명한 벽이 솟아올라 청동검을 빈틈없이 감쌌다.

사방으로 물방울이 튀었다.

나는 벽에 부딪치기 전에 아슬아슬하게 발을 멈추고는 그 자리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수호벽이 출현했다는 건……!

- 파마검의 수호자가 출현하였습니다.

그래, 이렇게 나오셔야지!

울타리 너머에서 양태원이 신나게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저거예요, 저거!”

그래, 나도 보인다.

나는 호수 위에 갑자기 나타난 한 존재를 바라보았다.

마치 호수의 표면이 대지라도 되는 것처럼 물 위에 고고하게 서 있는 존재.

그것은 아름다운 백색의 사슴이었다.

- 파마검의 수호자 : 백록

그걸 본 순간, 존재의 아름다움과는 별개로 나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백록담이라고 수호자가 백록이라는 건 너무 태만한 거 아니냐?”

- 시스템 관리자가 특별 관리 대상 ‘방랑하는 구도자’ 의 주장을 인지하였습니다.

-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습니다.

“이런 미친 새끼가…….”

이제껏 조용하다가 설마 이딴 헛소리에 반응할 줄은 몰랐다.

나는 이를 부득 갈았다.

이왕 특별 관리 대상 취급할 거면 질문에나 똑바로 대답하라고! 심지어 이번의 내 말은 기각당한 거냐?

- 수호자는 당신의 자격을 시험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스템의 처사에 열 받아 할 여유도 없었다.

흰 사슴은 표면에 물결조차 일으키지 않고 우아한 몸짓으로 내게로 다가왔다. 사슴의 발굽이 닿은 자리가 희게 얼어 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서서히 물 위로 내려섰다. 얼어붙은 표면이 아슬아슬하게 내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백록이 내게 물었다.

- 너는 이 검으로 무엇을 하려 하느냐?

이제껏 이 던전에 도전했던 다른 헌터들이 받은 것과 같은 질문이었다.

어느 정도의 능력치만 있다면 모두가 들을 수 있다는 질문.

나는 숨을 골랐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모든 헌터가 이 질문에 무어라 대답할지 연구해 오지만, 미리 준비한 대로 대답할 수 있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그것은 양태원도 마찬가지였다.

준비한 대답이 있었으나 그렇게 솔직한 대답을 뱉어 버린 이유.

파마의 수호령이 질문을 던지면 본인도 모르게 진심을 토로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신계 마법을 거는 건 아닐까 생각했는데 앙겔루스의 가호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럼 마법은 아니라는 건데…… 나는 흰 사슴의 까만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아무런 사고 과정도 거치지 않고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구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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