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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79화 (80/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79화

나는 머리를 짚었다.

머리가 뜨끈했다.

일단 상황을 한번 정리해 보자.

백록담의 수호령인 백록이 자격을 시험한답시고 나를 던전에 입장시켰다.

그래서 눈을 뜬 순간 ‘마계’에 있기에 여기에서 무언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막상 시스템상 떠오른 클리어 조건은 정소현이라는 사람의 생존이었다. 정황상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여자의 이름이 정소현이겠지.

나는 추측을 기정사실화하기 위해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저는 강예나라고 합니다.”

내 인사를 들은 여자가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하하하, 하고 웃었다.

“아주 예의가 바르시네요. 이런 상황에 통성명이라…….”

“저한텐 아주 중요한 거라서.”

여자가 어? 혹시 이 사람 또라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 표정을 지었으나 넘기기로 했다.

“정소현이에요. 상황이 이렇지만 반갑습니다.”

맞군.

알고 보니 지나가던 개미 이름이 정소현이라 클리어에 실패했다는 결말은 없을 듯싶다.

정소현이 손에 든 방울을 한 번 더 울렸다. 그러자 푸른 불꽃이 마기에 대항해 스파크를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일전에도 같은 현상을 본 적이 있다. 아리아드네의 성력 또한 마기에 접촉했을 때 저런 반발 작용이 일어났었다.

정소현이 그 현상을 보고 약간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큰일이네. 지금 하늘에 있는 놈도 강력한 편인데 그보다 더 큰 악마가 접근하고 있네요.”

복잡해졌던 머리가 그 말을 듣자 잠시 단순해졌다.

이 상황에서 마몬보다 더 강력한 악마가 다가오고 있다면 그건 하나밖에 없었다.

릴리스.

내 기운을 느끼고 이쪽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릴리스가 온다면 용사를 기리는 망토를 장착하더라도 승패는커녕 생사도 장담하기 어렵다. 빠른 우선순위의 정리가 필요했다.

마음을 정한 나는 입을 열었다.

“제가 여기서 시간을 끌고 있을 테니 최대한 멀리 가세요. 저 새끼들은 제 존재 때문에 여기로 모여드는 겁니다.”

악마들은 용사 클래스의 존재감에 홀려 몰려들고 있다. 그러니 나에게서 멀어질수록 일정 수준 이상의 안전은 담보될 것이다. 이 던전을 클리어하려면 정소현이 살아남는 게 제일 중요하니까 그게 맞지.

아직도 약간 뿌연 시야 너머로 날파리처럼 미친 듯이 날아다니고 있는 마몬이 보였다.일단 저 새끼를 족치고 릴리스도 어떻게든 오래 막아야 한다.

클리어 조건인 정소현의 생존이 정확히 언제까지 담보되어야 하는지는 알 수 없다만, 지금은 그 이상의 방법이 없을 것 같다.

“어, 그쪽…… 강예나 씨 때문에 모여드는 거라고요?”

하지만 그렇게 말했는데도 정소현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맞습니다. 그러니까 빨리 가세…….”

“이것저것 궁금한 건 많은데요.”

정소현은 심지어 손을 내저으며 내 말을 도중에 끊었다.

“일단 설명은 됐고, 얼른 여기서 나가고 봅시다.”

응?

내가 되묻기도 전에 정소현이 빠르게 다음 말을 이었다.

“수호부의 지속 시간도 슬슬 한계라서. 혹시 뭐, 이쪽에 굳이 남아 있을 이유라도 있어요?”

“네? 그건 아닌데…… 나갈 수 있다고요?”

그러니까 마계에서 나갈 수 있다는 말을 하는 건가?

정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당연하죠. 들어왔으면 나갈 수도 있는 것이 세상의 이치 아니겠어요? 아무리 이곳이 지옥이라고 해도 그 이치는 같답니다.”

“어, 어떻게?”

“그야 이렇게.”

여자가 넓은 소매에서 작은 거울을 꺼내 보였다.

손거울만 한 크기였던 거울은 여자가 입김을 불어넣는 것과 동시에 사람 하나만큼의 크기로 늘어났다.

커다란 거울을 땅에 내려놓은 여자가 나를 돌아보았다.

“여기를 통과하면 됩니다. 저는 아직 결계를 유지해야 하니 먼저 가세요.”

이게…… 말이 되나?

나는 미심쩍은 마음을 채 감추지 못한 채로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이란 것은 모름지기 무언가를 비추려고 만들어진 것일 텐데, 지금 눈앞에 놓인 거울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예사 물건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이 갑작스러운 희소식에 기뻐하기엔 내가 겪어 온 일이 너무 많았고, 이 상황은 너무 의심스러웠다.

정말 이렇게 이 던전에서 탈출이 가능하다고? 이걸 믿어도 되는 건가? 판단이 빠르게 서지 않았다.

딱히 이게 함정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건 아니었다.

정소현이라는 여자가 나를 함정에 빠트린다고 해서 이득을 얻는 상황도 아니니까.

다만 내가 의심스러운 것은 상황이 너무…… 뭐랄까, 쉽게 풀린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방금 전까지 릴리스와 생사결을 벌일 생각까지 했는데 이런 해결책이 생겨나다니. 솔직히 10년간 시스템에 시달려 온 몸으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에잇, 생각은 나중에 하고……!”

그때였다.

정소현이 움직이지 않는 내가 답답했던 건지 손으로 등을 밀려고 했다.

그다음 벌어진 일은 무의식중에 일어난 것이었다.

등으로 무언가가 다가온다고 느낀 순간.

뻑!

그저 손을 쳐 냈다고 하기에는 커다란 소리가 났다.

그도 그럴 것이다. 내 손에도 느껴지는 타격감이 상당했다. 힘 조절을 전혀 하지 못했다.

정소현은 커다래진 눈으로 내게 맞은 본인의 손을 바라보았다.

‘망했다.’

누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머리가 싹 식었다.

누가 보기에도 정소현의 손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부풀어 오르고 있었으며…… 내가 느끼기에도, 지금 나는 저 여자의 뼈를 부쉈다.

“……아니, 그…… 죄송합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것조차 면구했다.

정소현에게서는 악의도 살의도 느껴지지 않았고, 그저 내 등을 밀려던 것뿐이었으니까. 방금 것은 명백하게 과장된 반응이었다.

나는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우습게도 멀쩡한 이쪽이 떨리고 있었다.

X발. 욕이 절로 튀어나오네.

“저기요. 괜찮아요?”

고개를 들자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한 여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손을 뒤로 감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그, 부상에 대한 건 제가 포션을…….”

“아니, 됐고요. 일단 지금 당장 나가죠.”

여자가 부풀지 않은 다른 손으로 거울을 가리켰다.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거울 주위에서 푸른 기운이 꺼지기 직전의 불처럼 점멸하고 있었다.

“슬슬 한계예요. 만약 나가지 않겠다면 저 혼자서라도 나가겠어요. 대신 제가 나가면 이 수호 결계도, 거울의 틈새도 유지되지 않는다는 건 명심해 둬요.”

뾰족한 말투는 당연했다. 누가 봐도 이건 내가 정소현의 말을 믿지 않고 의심하다가 손까지 부러트린 상황이니까.

상황이 꼬이려니 이렇게도 꼬이는군.

어쨌거나 던전 클리어 조건이 ‘정소현의 생존’인 이상, 이 여자와 행동을 같이해야 한다.

어차피 저 말이 거짓이라고 판단하고 믿지 않는다고 해 봤자, 이대로 마계에 있다간 결말은 개죽음뿐이다.

그러느니 차라리 조금이라도 승산이 높은 쪽에 도박을 해 보는 게 나았다. 사실 너무 당연한 답인데 이걸 곧바로 판단하지 못하고 있었다니. 머리가 너무 복잡해졌나.

결심을 한 나는 곧장 거울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지만 무시했다. 생리적인 반응 따위에 낭비할 시간은 없다.

괜찮을 거야.

설령 괜찮지 않더라도 그렇게 만들면 된다.

원래대로라면 거울의 표면에 닿아야 했던 발은 허공을 건너는 것처럼 거울을 통과했다.

동시에 주위의 풍경이 변화했다.

- 필드, ‘대한민국 제주도’에 진입합니다.

마계에서 벗어나자 숨을 쉬는 것부터 달라졌다. 괴롭고 무겁게 느껴지던 사지는 완벽하게 자유의 몸이 되어 가벼워졌다.

비틀거리는 걸음을 애써 똑바로 세우며 몇 걸음 더 걸었을 때, 무복을 입은 정소현이 거의 뛰는 것처럼 거울 속에서 빠져나왔다.

“와, 아슬아슬했다!”

그리고 정소현이 뛰어나오는 것과 동시에 거울이 갑작스럽게 커다란 파열음을 내며 손거울 크기로 쪼그라들었다.

쨍그랑하는 소리를 내며 거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내가 주우려고 했지만 정소현이 먼저 허리를 굽혀 거울을 주웠다.

다치지 않은 손이었다.

“……저, 감사합니다. 그리고 상처부터 치료하시죠.”

나는 소지창에서 곧바로 포션을 꺼냈다. 상급 포션이었다. 단순한 골절이라면 하급 포션으로도 치료할 수 있지만 나도 양심이 있었다.

그런데 정소현은 내게서 포션을 받아 들지 않았다. 대신 내가 내민 포션 병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걸로 대체 뭘 하라는 거죠?”

“예?”

어조가 공격적이라면 겨우 그깟 걸로 내 상처를 보상하려 드는 거냐는 해석도 가능했겠지만, 뭔가 이상했다. 정소현의 물음은 정말로 의아한 것처럼 들렸으니까.

마치 내 손에 들린 포션이 정말로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처럼.

아니, 그게 가능한가?

헌터라면 포션을 한 번도 보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 심지어 대한민국에서는 조한율이라는 랭커가 포션을 상당히 값싸게 공급하고 있기 때문에 귀한 물건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저런 반응이 나오는 거야?

잠시간의 침묵 이후, 정소현이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일단 내 손에서 포션을 받아 들었다.

“좋아요, 이걸 마시라는 거예요?”

“어? 네, 그렇습니다만…….”

“청룡 님이 마셔서 손해 볼 건 없다고 하니 일단 그럴게요.”

그리고 정소현은 포션을 열더니 정말로 꿀꺽꿀꺽 마시기 시작했다.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와, 진짜 나았잖아? 완전 신기하네. 이게 대체 뭐야?”

정소현이 놀란 눈으로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시퍼렇게 멍이 들어 부풀어 올랐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완전히 바스라진 것도 아니고 뼈에 금이 간 정도의 상처였으니 상급 포션은 과분할 정도다. 솔직히 한 모금 정도면 완치될 상처였는데.

“……설마 포션 복용하는 게 처음입니까?”

“포션?”

정소현이 생소한 단어를 들은 것처럼 내가 말한 단어를 반복했다.

슬슬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혹시…… 정소현이 이상한 게 아니라, 내가 이상한 게 아닐까?

주위의 풍경을 둘러보았을 때 그 불길한 예감은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바다?”

왜냐하면, 지금 내 눈에는 망망대해가 펼쳐져 있었으니까.

나는 그제야 내가 딛고 있는 대지를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바닥에 닿는 것이 부드럽다, 했는데 부츠를 신은 발에 밟히는 것은 검은색의 모래였다.

고개를 조금 올리면 파도에 부딪혀 오랜 세월 깎여 나갔던 해변의 돌들이 보였다. 들이마시는 공기에도 소금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이건 이상했다.

내가 알기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마계와 연결된 던전은 수리산 도립 공원에 있는 것뿐이었다. 그러니 마계에서 빠져나왔다면 그쪽으로 나와야 했다.

“여긴 대체 어디지?”

그런데 이곳은 아무리 봐도…….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향해 정소현이 불퉁한 어조로 말했다.

“어디냐니. 제주도인데요.”

그래, 정소현의 말대로 이곳은 누가 봐도 제주도였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백록담에서 마계로 진입한 것까지는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나는 마계에서 빠져나왔다. 그러니 수리산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백록담으로 돌아가는 게 정상이지 않나?

그런데 이번엔 제주도의 한 해변이라고?

애초에 시스템 메시지에도 왜 이곳이 필드로 표시되는 건지 의문이었다.

상황을 정리하려니 머리가 아팠다.

일단 차근차근 생각해 보자.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던전 클리어 여부였다.

나는 마계에서 빠져나왔고, 현시점까지 정소현도 살아 있으니 던전은 클리어된 건가?

하지만 그렇다기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데. 백록의 시험이라는 것이 겨우 이런 것일 리가 없다.

“던전 클리어 조회 좀 해 봐. 클리어된 거 맞아?”

- 해당 던전 클리어 조건 : ‘정소현’의 생존

예상대로 떠오르는 메시지의 내용에는 변함이 없었다.

즉, 마계에서 탈출하는 것은 클리어 조건과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좀 더 상세하고 정확한 조건이 필요했다.

“던전 클리어 조건 상세 조회.”

그러나 이번에는 응답이 없었다.

끙, 나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거 도저히 답이 안 나오는데.’

아무래도 나 혼자 이 상황을 이해하려고 머리를 싸매 봤자 해결이 되지 않을 것 같다.

결국 나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이제 던전 밖으로 나왔으니 핸드폰이 작동할 것이다.

그럼 양태원에게 연락을 취하는 게 우선이었다. 시간이 그리 오래 지나지는 않았으니 양태원은 아직 백록담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내가 던전에서 나온 후 혹시 백록에게 무슨 변화가 나타나지는 않았는지 물어봐야겠다.

“어, 뭐야.”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핸드폰이 먹통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화면을 두드려 봐도 5G는커녕, 전화도 연결되지 않았다. 근처 기지국이 파괴되기라도 했나? 아니면 핸드폰이 고장 나기라도…….

“저기,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제가 기다려 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궁금해서요.”

내가 이래저래 당황해 방법을 찾아보고 있는데 정소현이 말을 걸었다.

“뭡니까?”

“방금 던전이니 뭐니, 그거 뭐랑 이야기하는 거예요? 제 눈에는 딱히 혼백이 보이지도 않아서.”

그 말에 놀라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쳤다. 정소현이 손을 든 채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손에 들고 있는 그거, 뭐예요?”

나는 대략 열두 번 정도 핸드폰과 정소현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내 손에 들려 있는 것은 평범한 스마트폰이었다.

이쯤 되면 그냥, 총체적으로 이 모든 것이 이상했다.

그러니까 정소현 쪽이 아니라 내가.

“대체 무슨 일이…….”

그때였다.

누가 버린 건지 모를 신문지 한 장이 해변을 나뒹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기묘한 바람이 그 신문지 한 장을 위로 밀어 올렸다.

공교롭게도 바람은 내 쪽으로 불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얼굴에 신문지를 뒤집어쓰기 전에 날아오는 그걸 잡아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신문의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

한국의 신문지에서 내가 모르는 생소한 단어가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대한민국을 꽤 오랫동안 떠나 있었고, 떠나기 전에도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던 만큼 시사에 관심이 많은 편은 아니었으니까.

그렇지만 신문지에 실려 있는 한 부분은, 도저히 모를 수가 없었다.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는 기사 제목 말고, 옆에 작게 적혀 있는 글씨.

오늘의 날짜.

2005년 1월 27일

……뭐야, 이게?

나는 신문지를 들고 멍청히 그 자리에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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