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80화
혹시 과거로 회귀한 경험이 있는가?
나는 있다.
차원 이동 두 번이면 됐지, 어떻게 과거로까지 나를 날려 보낼 수가 있지?
정말 시스템은 양심이라는 게 없는 새끼였다.
설마 특별 관리 대상 운운하는 게 특별히 더 괴롭힌다는 뜻이었나?
확인한 결과 현재 내가 있는 곳은 놀랍게도…… 2005년에 막 들어선, 추운 겨울의 제주도였다.
여기서 한 가지 풀린 의문이 있었다.
처음 마계에 진입했을 때 시스템 오류가 일어나 모든 장비가 해제됐었다.
당시에는 상황에 밀려 깊게 생각하지 못했는데, 여기가 과거의 대한민국이라면 이해가 된다.
스마트폰도 없는 2005년 시점의 대한민국에는 시스템도, 던전도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참고로 내 핸드폰은 여전히 먹통이었다.
아직 와이파이도 채 깔리지 않았던 시기라서인지, 혹은 던전 내여서 작동하지 않는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어쨌든, 시스템의 영향이 아직 없는 세계에 내가 갑자기 나타났으니 오류가 생긴 것이다.
물론 그래도 아직 남아 있는 의문은 있었다.
내가 지금 시간을 거슬러 과거 시점의 대한민국에 온 것인지, 혹은 단순히 던전 내의 필드로서 구현된 영역에 있는 건지.
그걸 구분할 방법은 단순하다.
파바밧!
강렬한 스파크가 튀면서 피부에 찌릿한 아픔이 달렸다.
눈앞에 펼쳐진 수평선은 언뜻 평온해 보였으나, 이 앞은 내게 허락되지 않은 영역인 듯했다.
- 플레이어, ‘방랑하는 구도자’는 던전 클리어 전에 해당 필드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쳇.
나는 바다에 띄웠던 종이 나룻배의 방향을 해변 쪽으로 돌렸다. 소지창에서 썩어 가고 있던 아이템 하나가 빛을 보나 했더니 역시 아니올시다, 였다.
어쨌거나 이걸로 확실해졌다.
결론적으로 이곳은 2005년 시점의 제주도를 구현한 필드고, 나는 아직 던전 속에 있다.
그러니 조건 미달인 채로 필드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제한을 받는다는 것이겠지.
“아직도 많이 남았어요?”
나룻배가 해변에 가까워지는 것을 지켜보던 여자가 크게 외쳤다.
모래 위에 앉아서 내가 하는 짓을 지켜보고 있던 여자는 지루한지 해변에 모래성을 몇 번이나 쌓는 중이었다. 검은 모래가 잘 뭉치지 않는 건지 제대로 된 모양으로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저 여자의 이름은 정소현.
이번 던전 공략의 클리어 조건 대상이다.
“슬슬 집에 가 봐야 할 시간인데.”
정소현은 아까 전부터 급한 일이라도 있는 건지, 계속해서 시계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인지는 몰라도 저 모래 위에 앉아서 내 기행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사실 이유를 알 것 같긴 했다.
“아이, 참. 더 기다리라고? 알았어요, 알았어.”
짜증이 났는지 정소현이 다시 한번 본인이 만든 모래성을 발로 차서 부쉈다.
저건 내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저 투덜거림은 본인이 모시는 신인 청룡에게 하는 말이다.
정소현의 몸을 휘감고 있는 청룡은 무료한 눈으로 정소현이 모래성을 만들었다가 부수었다 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이 어떤 소통을 하는지는 들리지 않지만, 정소현이 가끔 혼잣말을 하는 것을 보면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나는 그 모습을 빤히 응시했다.
저 청룡은 아무리 봐도 양태원이 모시고 있던 신과 같은 존재다.
하지만 양태원은 대한민국에서 자신만큼 강한 신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게다가 저 정도로 강력한 존재가 설마 둘이나 존재할 리도 없다.
즉 지금 정소현의 몸에 휘감겨 있는 청룡은 양태원의 신과 동일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양태원이 10살 무렵에 신내림을 받았다고 했지?’
사실 지금 내가 있는 2005년의 대한민국과 현실이 연속성 있는 세계라고 생각하더라도 시간상의 모순은 없다.
이 시점에서 양태원은 고작해야 5살이니까.
그러므로 ‘원래’ 한국에서는 정소현이 죽은 후…… 청룡이 다른 인간, 즉 양태원에게로 옮겨 갔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정소현이 죽지 않은 채로 청룡이 양태원에게 옮겨 갔을 가능성도 있다만, 클리어 조건이 조건이니만큼 부정적인 쪽으로 추측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뭘 그렇게 봐요?”
내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었는지 정소현이 인상을 찌푸리며 이미 다 무너진 모래성을 이번에는 주먹으로 부쉈다. 포션을 마시고 나은 손이었다.
정소현은 겉보기에는 현재의 나와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20대 초반에서 중반 사이라는 말이다.
마계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는 무속인 복장을 하고 있어서 몰랐는데, 던전에서 나오자마자 일상복으로 갈아입으니 앳된 얼굴이라는 것이 확 느껴졌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일단 아이템을 소지창으로 넣었다.
필드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은 확인했으니 됐다. 아이템이 사라지는 것을 보며 정소현이 입을 헤 하고 벌렸다.
“다시 봐도 신기하네요. 어떻게 물건이 그렇게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거지? 마술사라도 되는 거예요?”
“아뇨, 안타깝지만 마술에는 재능이 없어서.”
애초에 마법에 재능이 없어서 용사가 된 몸이다.
용사라…… 그래, 시스템상 내 클래스는 여전히 용사였다.
나는 슬슬 어두워지기 시작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계와 전혀 다른 푸른 하늘은 백록담에 오르기 전에 보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실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이 정말로 과거의 대한민국인지, 혹은 필드인지는 그리 중요한 사실이 아니긴 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나는 그냥 저 클리어 조건을 달성하면 그만이다.
클리어 조건에 명확한 시한이 없다는 것이 걸리긴 했지만, 이곳이 던전인 이상 단기간 내에 어떤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는 건 명백했다.
그것도 정소현의 생존을 위협할 만한 사건.
그러니 내게 필요한 것은 약간의 인내심뿐이었다. 사건이 닥치면 해결하면 그만이니까.
그렇지만 이 상황이 얼마 전 내가 겪었던…… 저주에 걸린 유령들의 던전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백록에게 구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말했고, 백록은 내게 자격을 증명하라고 했다.
하지만 이미 결과가 정해져 있는 던전에서 대체 무엇을 증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클리어 조건이 정소현의 생존인 이상, 던전 내에서 무슨 일을 벌이건 현실에서 정소현은 이미 죽었을 확률이 높다.
그리고 죽음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 점 때문에 못내 입이 썼다.
하지만 정소현에게 그것을 내색할 수도 없는 일. 나는 최대한 태연한 어조로 대화를 이었다.
“……제가 보기엔 그쪽이 훨씬 더 마법사 같은데요. 그 청룡도 그렇고, 마계에 진입한 것도 그렇고요.”
사실 아직 시스템이 등장하지 않은 이 시점에서 저런 힘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놀라웠다. 2005년쯤에 나는 그냥 평범한 코흘리개 꼬맹이였을 텐데 말이지.
백록이 클리어 조건을 굳이 정소현의 생존으로 건 이유도 저 강대한 힘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정소현이 내 말을 듣고 눈을 껌벅껌벅 움직였다.
“어, 마계라고 부르는구나? 하긴, 서양에서 말하는 모습과 가까우니 그쪽이 더 잘 맞네요.”
“예? 그럼 뭐라고 부릅니까?”
“지옥이죠. 인간을 유혹하는 마귀들이 사니까.”
하기야 시스템상 명칭이 마계일 뿐, 한국인에게 익숙한 개념으로 따지자면 지옥이 더 익숙하긴 했다.
악마들 이름은 대부분 서양식이긴 하다만.
뭐, 그 새끼들 이름이야 내 알 바 아니다.
또 악마가 사는 세계인 데다, 그들과 계약한 희생양이 영원히 마계에서 노역하며 살아간다는 걸 생각하면 지옥이라고 불러도 크게 틀린 말도 아니고.
사실 명칭 따위는 딱히 중요한 일도 아니다. 내가 궁금한 것은 따로 있었다.
그럼 정소현은 마계가, 아니, 지옥이 어떤 곳인지 알면서 진입했다는 뜻인데.
“그 지옥에는 대체 왜 간 겁니까?”
아무래도 내가 마계로 진입했던 것은 정소현이 마계에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지켜야 할 인물을 따라 내 위치도 정해진 것이다.
하지만 대체 왜 정소현이 마계에 있었는지, 그걸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정소현이 마계에서 행동하는 것을 보면 상당히 익숙해 보이는 것이 초행길도 아니었다. 자의로 마계에 몇 번이나 들락거리다니, 누가 봐도 미친 짓이 아닌가.
심지어 현재 대한민국에는 시스템과 던전이 존재하지 않는다. 즉, 정기적인 공략을 통해 포화도를 낮춰야 하는 상황도 아니란 말이다.
그런데도 정소현이 굳이 마계에 있던 이유가 궁금했다.
어쩌면 그 이유가 클리어 조건과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르니, 정보 수집 차원에서라도.
내 질문을 들은 정소현이 샐쭉하니 웃었다. 웃으니 의외로 장난꾸러기 같은 인상이었다.
“글쎄요, 지옥에 갈 정도로 업을 쌓은 건지도 모르죠.”
창연한 오색의 기운을 두른 청룡을 등에 업고서 씨알도 먹히지 않을 소리를 하는군.
내가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응시하자 뜨끔했는지 정소현이 웃으며 손가락으로 자신의 볼을 긁었다.
“아, 이거 농담이 안 먹히는 사람이네. 알겠어요, 알겠다고요. 설명해 주면 되잖아요. 왜 이렇게 저 사람을 좋아하는 거야? 질투 나네, 진짜.”
후반은 내가 아니라 청룡에게 말하는 것이다.
홀로 몇 마디 더 중얼거리는가 싶더니 이윽고 정소현이 나를 홱 째려보았다.
감정 기복이 심한 타입인가.
“설명하는 건 괜찮은데, 이야기가 좀 길어요. 그래서 여기서 이야기하기에는 좀 그렇고.”
하기야 슬슬 해가 저물기 시작하니 날씨가 더 추워지기 시작했다. 바닷가의 바람은 세차고 칼처럼 날카로웠다.
“아, 그럼 이 근처 카페라도…….”
“에이, 돈 아깝게 무슨 카페예요. 그냥 우리 집으로 가죠.”
어라, 이런 걸 데자뷔라고 하던가.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비슷한 대화를 분명 며칠 전에 했던 것 같은데. 아니, 바로 어제던가.
“초면인 사람을 그렇게 쉽게 집에 초대해도 됩니까?”
“에이, 초면이긴 하지만 청룡이 보장한 사람이잖아요. 길손은 기쁘게 맞이해야지.”
그렇게 말하는 정소현의 표정은 천진난만한 개구쟁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웃는 입술 사이로 뾰족한 덧니 하나가 보여서 그럴지도 몰랐다.
“더불어 청룡 님이 말씀하시길, 저더러 며칠간 길손의 옆에 꼭 붙어 있으라고 하시는데요.”
“제 옆에요?”
“네, 횡액을 피해야 한다는데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는 모르겠고요. 뭐, 제가 봐도 길손께서 길운을 가져다줄 것 같긴 한데요.”
“……그런 것도 알 수 있습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며 청룡을 흘끗 바라보았다. 하지만 청룡은 딱히 내 쪽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무심하기도 하지. 나한테도 힌트를 주면 좋으련만.
그나저나 저 횡액이라는 거…… 현재 내게 주어진 클리어 조건과 관련이 있는 거겠지.
그리고 그걸 청룡이 이미 알고 있다, 라.
“그럼요, 제가 왜 무당이겠어요. 그런 걸 알 수 있으니 무당이지.”
정소현은 자랑스러운 듯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런 던전이 발생했다는 것 자체가 결국 청룡은 정소현에게 닥칠 불행을 알고 있었음에도 막지 못했다는 뜻이니까.
이거 머리가 복잡해지는데. 청룡쯤 되는 존재가 막지 못한 횡액이 대체 뭐지?
“우리 집 넓으니까 며칠 밤 정도는 재워 드릴 수 있어요. 대신 공짜는 아니고요.”
어쨌든 저쪽에서 숙소까지 제안해 준 덕분에 일이 쉽게 풀리고 있었다.
나야 정소현의 목숨을 지켜야 하는 입장이니, 정소현이 허락하지 않더라도 최대한 가까운 곳에서 머물 셈이었다.
사실 정 안 되면 몰래 따라가 근처에서 노숙할 생각도 했는데, 같은 집에서 머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일이었다.
“감사합니다. 돈이라면 지불하죠.”
“돈은 됐고요. 집에 있는 동안 애 보는 것 좀 도와주실래요?”
“예?”
“애요, 애. 제 아들이요.”
아, 아들?
그 단어를 들은 순간 약간 정신이 혼란스러워졌다. 정소현과 아들이라는 존재가 쉽사리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에 정소현은 아무리 봐도 20대 초반이나, 많게 봐도 중반이었다. 아이가 있다기엔 너무 어리지 않나?
아니, 아니지. 그런 거야 개인차가 있으니까.
나는 빠르게 혼란을 수습하고 거절의 대답을 입에 올렸다.
“저, 애 볼 자신 없습니다만…… 아까 보셨잖아요. 힘 조절을 못해서. 그냥 돈으로 지불하고 싶습니다.”
나는 힘 조절 한번 잘못하면 연약한 아이의 뼈를 부술 수 있는 사람이다. 부러트리는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바스라질 것이다. 그런 상황에 무서워서 애를 어떻게 만지냐.
하지만 정소현은 심오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애 볼 때 제일 중요한 게 바로 체력이니까.”
“체력이요?”
“네, 애가 다섯 살쯤 되면 똥강아지처럼 집 안을 파괴하고 다니는 파괴왕으로 변신하거든요. 아, 사진 볼래요? 사진이 어디 있더라…….”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정소현이 희희낙락하며 바지 주머니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팔불출인가 보다.
으레 핸드폰의 사진첩을 꺼내어 보여 줄 줄 알았는데, 정소현이 꺼내든 것은 바지 주머니에 접어 넣어 보관하고 있는 사진이었다.
그렇지, 이곳이 2005년이라는 것을 잊을 뻔했다.
“이거 보세요. 저랑 닮았죠?”
정소현이 사진을 내 앞으로 들이밀었다.
초점이 잡히지 않을 정도로 가까이 들이댄 터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서야 했다.
이윽고 그 사진을 본 나는 눈을 깜박였다.
그것은 폴라로이드 사진이었다.
사진 속의 어린애는 아주 개구쟁이처럼 보였다. 놀이터에서 찍은 듯했는데, 미끄럼틀 바로 아래 있는 진흙탕에서 뒹굴기라도 했는지 옷이 엉망진창이었다.
흰 이빨을 다 드러내고 웃고 있는 모습.
“귀엽죠?”
정소현은 정해져 있는 대답을 강요했지만, 나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사진은 한 번 접혀 있긴 했지만, 그 안에 찍혀 있는 얼굴을 알아보기에는 충분했다.
“……하.”
두통이 일었다.
내가 머리를 감싸 쥐자 정소현이 깜짝 놀랐다.
“왜, 왜 그래요? 그렇게 못생겼어요?”
그게 문제가 아니다.
사진을 보자마자 깨달았다. 이제까지 품었던 의문의 절반은 사진 속 꼬맹이의 얼굴을 보자마자 해결되었다.
X발. 개 같은 시스템.
사진에 찍혀 있던 것은 5살짜리 꼬마 시절의 양태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