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82화
바람이 찼다.
연도와 상관없이 제주도의 바람은 거셌다.
나는 낮은 담벼락 옆에 주저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 떠오른 별은 세월을 타지 않고서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이렇게 하늘만 보면 이곳이 과거인지, 혹은 현재인지 도저히 구분하기 어려웠다.
“휴우.”
거실에 손님용 이불을 깔아 준 정소현에게는 미안하지만 도통 잠이 올 것 같지 않은 새벽이었다.
잠도 오지 않는 김에 검이나 수련할까, 해서 나왔는데 검도 영 손에 잡히지 않았다. 허리에 찬 에이펙스의 광검도 조용했다.
스트레스 때문인지 옆구리 부근이 뻐근하게 아파 오고 있었다. 딱히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었다.
서늘한 바람이 폐부를 채우자 한동안 들지 않던 욕구가 솟아났다.
연초 태우고 싶다, 진짜.
애들이랑 끊기로 약속한 다음에 정말 단 한 번도 손대지 않았는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간절한지 모르겠다.
이게 다 만악의 근원인 시스템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던전을 만들어 낸 거지?
물론 이번에 나를 시험이라는 명목으로 이딴 곳에 보낸 건 흰 사슴 새끼다만, 사실상 시스템과 별다를 바 없는 존재인 것 같다.
도대체 이런 던전에서 뭘 시험할 수 있다는 건지 모르겠네. 젠장.
“……됐다. 정신 차리자.”
양 뺨을 툭툭 치니 아팠다. 통각은 정상이었고, 이게 꿈은 아니라는 뜻도 되었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지만 말이야.
하지만 뭐, 바라는 것과 현실이 일치하는 경우가 더 드물지 않은가. 이제는 그 불일치에 실망하는 시간조차 아깝다.
시스템이 X같은 짓을 하는 게 한두 번 일도 아니고.
현실에 절망할 시간에 뭐라도 하나 더 시도해 보는 게 결국 후회가 남지 않는 길이라는 걸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각오도 어느 정도 하긴 했단 말이지.’
그야 아이템 이름부터가 무려 천부인이다. 대한민국 단군 신화에 관련된 아이템이니만큼 얻는 과정이 어려울 것쯤은 각오한 바였다.
그리고 사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현재 던전은 아직까진 그리 끔찍하지 않았다.
당장 지난 던전만 생각해 봐도 그렇다.
저번에는 눈을 뜨자마자 갑자기 아무런 백업 없이 십만 대군 앞에 던져지지 않았는가.
그것에 비하자면 이번에는 마계에 던져지긴 했어도 정소현이 나를 구해 주었고, 당장 ‘횡액’이란 게 시작될 것 같지도 않았다.
또 마계에서 ‘용사를 기리는 망토’의 사용 시간을 헛되게 날려 보내지 않았기에 일단 최종 병기도 남아 있는 셈이다.
다만 이 던전의 배경이 너무 친숙한 나머지 뒷맛이 영 찜찜하다는 것뿐.
이것까지 난도에 포함되어서 보상이 파마검쯤 되는 아이템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만.
‘그러니까 남은 문제는 하나뿐이다.’
아직까지 이 던전은 정식으로 시작되지 않았다.
즉, 나는 아직 내가 무엇으로부터 정소현을 지켜야 하는지를 모른다.
여기서 이 정보를 알아낼 수 있느냐, 없느냐로 이 던전의 난도가 대폭 갈릴 것이다.
“그러니까 말 좀 해 봐.”
어느새 옆에 다가와 있던 거대한 청룡이 고요한 모습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허공에 떠오른 거대한 용의 모습은 이 평화롭고 한적한 광경과 끔찍하게 어울리지 않았다.
“정소현한테 얘기한 횡액이란 거, 구체적으로 뭘 말하는 거야?”
며칠 내로 닥친다는 횡액.
누가 봐도 이 던전의 클리어 조건인 정소현의 생존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 뻔했다.
그것에 대비하려면 정보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정보를 얻으려면 청룡에게 물어보는 것이 제일 빠르다.
횡액을 예지한 만큼 그 정체도 알고 있을 확률이 클뿐더러, 무엇보다 청룡은 정소현에게 호의적이니 여자의 목숨을 구하고 싶어 할 것 아닌가.
그래서 나는 청룡이 내 물음에 곧바로 대답해 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내 말을 들은 청룡이 허공에서 한 번 몸을 뒤집었다.
뭐야. 묘기하나?
몸을 뒤집은 청룡이 대가리를 거꾸로 한 채 내 얼굴 앞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솔직히 말해서 좀 괴기스러운 모습이었다.
- 참으로 건방지구나.
“뭐어?”
뜻밖의 반응에 얼이 빠졌다.
심기 사나운 존재의 눈길이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 나를 모시는 사제도 아니요, 나를 모시는 이에게 대가를 지불한 것도 아닌데 그리 뻔뻔하게 요구하다니.
……이렇게까지 공격적인 태도로 나온다고?
나는 아래위로 시선을 옮겨 청룡을 전체적으로 훑어보았다.
당연히 내가 만난 청룡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혹시 아닌가?
그 불손한 눈길에 열이 받기라도 했는지 청룡의 눈길이 한층 더 사나워졌다.
- 왜 그렇게 보는 거지?
청룡의 뒤로 비치는 밤하늘도, 집의 정경도 거의 비슷한데 나를 대하는 태도가 이렇게 다르니 혼란스러웠다.
어제, 혹은 15년 후 미래 시점에서는 나한테 상당히 친절했던 것 같은데.
그냥 파마의 검을 위해 내게 태도를 굽혔던 건가?
“에라이.”
나는 혀를 찼다.
하기야 저 정도 되는 존재가 내게 호의적인 쪽이 이상하긴 했다. 무작정 기대려던 내가 멍청한 거지.
쳇, 뭐 하나 쉽게 가는 법이 없군.
“건방이고 뭐고 내 알 바 아니고, 내가 아는 건 정소현은 곧 죽는다는 거야. 이대로라면…… 아마, 반드시.”
하지만, 청룡의 태도가 조금 까칠하다고 해서 포기할 내가 아니었다.
- 무어라?
“아니, 생각을 좀 해 보라고. 아무리 용이라도 대가리는 있잖아.”
따라서 내 말투도 불퉁해지기는 했다만.
나는 끈질기게 말을 이었다.
“그쪽도 정소현이 그 횡액이라는 것에 휩쓸려 죽을 위기에 처한다는 건 알고 있을 거 아니야. 신인지 뭔지 하는 용이니까.”
청룡이 내 말에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투명하고도 거대한 눈동자가 불쾌하다는 감정을 담고 나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무언의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겨우 이 정도 압박감 따위에 굴할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어쨌거나 내가 아는 청룡과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청룡은 본질적으로는 같은 존재다.
거기다 양태원에게는 무척 호의적이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정소현을 보는 청룡의 눈길에도 애정 같은 반짝거림이 깃들어 있었다.
설령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한들 지금의 청룡도 분명 정소현을 구하고 싶어 한다.
그러니 내 옆에 있으라는 소리를 했을 테고.
“네가 아끼는 사람을 살리려는 거야. 뭘 알아야 대비를 하지. 좀 협력적으로 나오면 어디가 덧나?”
하지만 청룡은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
- 제법 당돌하구나, 아해야. 내게 그런 식으로 말하는 인간은 네가 처음이다.
“말했지. 그런 건 내 알 바 아니라고.”
- 나는 네 목숨 따위는 당장에라도 거둬들일 수 있다.
“목숨이 아까워서 물러설 거면 여기 오지도 않았어.”
주먹을 꺾자 뚜둑, 하는 소리가 났다. 이 말의 진정한 의미를 청룡은 모르겠지만.
내 말에 청룡의 투명한 눈동자에는 이제 사나움을 넘어 노기가 깃들기 시작했다.
-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내가 지키는 인간이 곧 죽을 운명에 처해 있는 것은 맞다. 그런데 그게 대관절 그대와 무슨 상관이라고?
이거, 생각보다 설득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내게 얼마나 여유 시간이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청룡의 협조는 필수적이었다. 그러려면 내가 정말 정소현을 도우려고 한다는 것을 청룡이 믿어야 한다.
그렇다면 내 정보도 어느 정도 오픈할 필요가 있다.
나는 큰맘 먹고 한 번 심호흡을 한 뒤 입을 열었다.
“사실 나는 미래에서…….”
내가 모든 것을 속 시원하게 털어놓으려던 그때였다.
- 경고!
시야가 크게 뒤흔들렸다. 붉은색 글씨의 경고창을 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 해당 던전에서 플레이어의 모든 발언은 차단되지 않습니다.
단, 주변 인물에게는 대화가 제한되어 들립니다. 정체를 의심받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
- 왜 그러지?
내가 말을 하다 갑자기 입을 다물어 버리자 청룡이 기이하다는 눈길을 보내왔다.
하지만 내게 그 눈길을 받아칠 만한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 나도 이 상황이 기이한 동시에…… 아주 낯익었다.
분명히 지난 던전에서도 이런 경고 메시지가 떴었지.
‘그래도 이상해.’
이건 말이 안 된다.
이 메시지를 보았을 때 나는 설정상 던전 안의 다른 인물에게 ‘빙의’된 상태였다.
그렇기에 당시에는 일종의 밸런스 패치를 위한 룰 추가 정도로 이해했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이런 경고 메시지가 뜰 이유가 없지 않은가.
설마 내가 여기서도 강예나가 아닌 다른 인물로 보이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만일 그랬더라면 정소현에게 내 이름을 소개할 때 이미 경고창이 떴을 것이다.
그런데도 시스템상 저런 경고창이 떴다는 건…… 대체 뭘 숨기라는 거지?
현재 던전 공략 중이라는 발언으로 대체 내가 무슨 정체를 의심받는다는 거야?
‘……아니, 아니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머릿속에 번뜩이는 것이 스쳐 지나갔다.
“정체를 의심받지 않도록…….”
한 번 더 조건을 중얼거리자, 그 위화감이 한층 더 느껴졌다.
내 정체. 즉, 내가 던전을 공략하는 중이라는 것을 던전 안의 인물이 알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벼락 맞은 것 같은 깨달음이 머리를 덮쳤다.
그렇게 되면…… 이 사람들은 본인이 던전 속의 존재라는 것을 인지하게 되겠지.
그걸 깨달은 순간 누군가에게 둔기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시스템이 정확히 어떤 식으로 던전을 구현하는지는 모른다.
그저 나는 이곳이 15년 전에 이미 벌어졌던 과거를 재구성한 것이라고 추측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 던전 속의 정소현도, 어린 양태원도, 청룡조차 그 사실을 모른다.
자신들이 시스템에 의해 재구성된 던전 속의 존재라는 것을.
그리고 그걸, 이 사람들이 알게 두어서는 안 된다고.
시스템 메시지는 내게 그렇게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X발.’
나는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욕을 하지 않으려고 해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대체 이게 뭐 하는 짓거리야……?”
이건 마치…… 시스템이 벌이는 인형극에 참여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나는 인형극 안의 인형들에게 너희는 인형이라는 사실을 폭로할 수 없는 광대다.
물론 그 점도 열 받긴 하지만, 더 화가 나는 점은 따로 있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머리를 감싸 쥐었다.
나야…… 그래.
이 던전을 클리어하게 되면 파마의 검을 손에 넣을 수 있다.
또 청룡에게는 파마검을 넘겨주는 대가로 메인 퀘스트인 운명의 씨앗이 뭔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지.
……하지만 이 던전 속의 사람들은 대체 뭐냐고.
이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냐는 말이다.
내가 여기서 정소현의 목숨을 구한들 현실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여긴 시스템이 구성한 인형극 무대일 뿐이고, 이곳은 이미 흘러가 버린 과거니까.
설령 내가 이 던전을 클리어한다고 한들 정말로 구해 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 앙겔루스의 가호가 당신의 정신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옅은 흰색 글씨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 메시지를 보니 약간은, 아주 약간은 열이 올랐던 머리가 식었다.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겨우 이런 걸로 무릎이 꺾일 수야 없지.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자.’
일단은 청룡을 설득해 정보를 얻고, 이 던전을 공략한다. 그게 최우선이다.
일단, 먼저.
그건 나만의 마법의 단어다. 저 단어는 당장 앞으로의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게 해 준다.
아무리 깊은 수렁에 빠졌다고 해도 그대로 빠져 죽을 게 아니라면 뭐든 해 봐야 한다.
팔과 다리를 허우적거리지 않는다면 그것이 정말로 무용한 일인지조차 알 수 없으니.
물론 차라리 모르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는 것도 부정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땅으로 내려트렸다.
발치에는 내 모습의 그림자가 어둠과 분간할 수 없게 드리워져 있었다.
“이건…… 정소현한테 너무하잖아. 안 그래?”
정말로, 너무하다. 내 말을 기다리는 청룡에게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혼자서 저렇게 열심히 공략…… 아니, 공략도 아니지. 하여간 뭘 하는데, 보답을 받기는커녕 죽을 위기에 처하다니.”
물론 세상사라는 게 노력한다고 해서 다 보답받지 못한다는 것은 안다.
그래도 보답받았으면 했다. 적어도 누군가를 위해 싸운 사람이 어린애를 혼자 남겨 두고 죽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그래서 어떻게든…… 뭐라도 해 주고 싶은 것뿐이야.”
내가 감히 이들을 도울 수 없다는 건 알겠다. 내가 뭘 한들 무엇 하나 바뀌는 게 없다는 것도 알겠다.
그렇다고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이런 건 온당하지 못하잖아…….”
안 그러냐, 루카스.
내 동료 중 누가 이 자리에 있었더라도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기묘하게도 그 상상이 지금의 나를 위로했다.
청룡에게 그렇게 대답한 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 묘한 아해로다.
한참 동안 침묵하며 나를 주시하던 청룡이 겨우 입을 열었다.
- 좋다, 알려 주마.
청룡이 두 눈을 깜박이며 대단한 비밀을 말하는 것처럼 속삭였다.
- 곧 지옥과 이 세계의 경계가 무너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