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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83화 (84/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83화

세계의 경계가 무너진다.

정소현에게 들은 게 있었으므로 그 내용에서 쉽게 유추 가능한 것이 있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곧 그 악마들이 한국으로 넘어온다는 거야?”

- 그래.

청룡이 긍정했다.

즉 마계와 한국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고, 그 균열을 넘어 마계의 악마들이 한국으로 넘어오게 된다는 건가.

“……악마 놈들이 한국으로 넘어오면 어떻게 되는데?”

- 지옥이 되겠지.

청룡이 평이한 어조로 끔찍한 말을 했다.

- 세상의 균형이 무너지면 귀문이 열리지 않은 인간들도 모두 마귀의 영향을 받게 된다. 서로를 미워하고 증오하다가, 결국 인간은 자신의 영혼조차 지키지 못하게 될 것이다.

우주를 담은 것 같은 눈동자에는 악의가 엿보이지 않았다. 그저 당연한 미래를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 그렇게 이 세상이 인간의 것이 아니라 악귀의 것이 된다.

선문답처럼 들리기는 한다만, 여하튼 이 세상이 망한다는 거지.

대충 알겠다.

시스템에 익숙한 내 식대로 말하자면, 저건 결국 던전 브레이크다.

던전의 포화도가 넘쳐서 던전 안의 몬스터가 현실 세계로 흘러나오는 것이니까.

뭐, 예상 가능한 범위 내의 사건이기는 했다.

청룡의 보호를 받는 정소현쯤 되는 존재가 생존의 위협을 받으려면 던브 정도는 일어나야 납득이 되지.

다만 그렇다고 해서 일이 쉬워진 건 아니었다.

나는 혀를 찼다.

‘제일 바라지 않던 전개인데.’

던전 브레이크는 언제나 일정 이상의 위험을 동반한다. 예측할 수 없는 위험 요소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악마쯤 되는 존재가 이쪽으로 기어 나온다면 더더욱 그렇다.

혹시라도 마왕 중 누군가가 튀어나온다면 정소현은커녕 내 생존조차 장담하기 힘들다.

특히 릴리스라도 튀어나와 봐라. 까딱 잘못했다간 나는 곧장 마계에 산 채로 직배송되어 릴리스의 유리관 속에 박제될 미래만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왜 던브…… 아니,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거야? 그걸 막으려고 정소현이 마계를 정화한 거 아닌가?”

청룡이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 인간의 힘으로 천재지변을 막을 수 있더냐?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날 수밖에 없단다.

어차피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라…….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나는 일단 수긍했다.

그래, 앞으로 일어날 일이 아니라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대신 반대로 생각했을 때, 2005년의 나는 악마니 뭐니 하는 존재를 영화나 드라마 외에서 본 적이 없었다.

그건 즉, 정소현이 혼자서 이 던전 브레이크를 막았다는 뜻이 된다.

다만, 그것과 별개로 정소현은 생존의 위기를 맞았고, 결국은…….

머리를 한 번 세차게 흔들고, 나는 이어서 질문했다.

“그럼 그 던전 브레이크, 아니, 경계가 무너지는 건 언제지?”

- 앞으로 이틀간은 손 없는 날이라 악귀가 들어오지 못한단다.

손 없는 날.

내가 영 어리둥절한 표정이자 청룡이 설명해 주었다.

- 인간을 방해하는 악귀들이 활동하지 못하는 길한 날을 뜻하지.

이렇게 들으니 기억이 나긴 했다. 음, 이사를 할 때 손 없는 날에 하라고 했던가? 어디 달력에서 본 것 같기도 한데.

“그런 민속 신앙이 정말 현실에도 적용되는 거야?”

심지어 이건 한국의 미신이고, 악마 새끼들은 어디 쪽인가 하면 물 건너 서양의 느낌인데 말이다.

하기야 무당의 도력이 악마에게 통하는 시점에서 한국의 민속 신앙이라고 통용되지 않을 리도 없나.

청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 이곳은 인간의 세상이다. 인간이 믿는 것에 힘이 깃드는 것은 당연한 이치 아니더냐?

“……글쎄.”

인간이 믿는 것에 그렇게 큰 힘이 깃들기 마련이라면 왜 시스템이란 게 생겨난 것인지 모르겠네.

어쨌거나 이건 청룡에게 할 말은 아니었기에 나는 그 악의 어린 질문은 마음속으로만 담아 두기로 했다.

“그럼 시기는 사흘 후라고 가정하고, 장소는 어디야? 설마 한국 전역에서 악마가 빗발친다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산발적으로 악마들이 나타난다면 내가 아니라 내 동료들이 전부 한국에 있더라도 막지 못할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청룡은 바로 장소를 지정해 주었다.

- 악마가 넘어오는 곳은 이 지역에서 하늘과 가장 가까운 장소다.

청룡의 말을 듣자 내 고개도 자연히 한곳을 향했다.

현재 시야에서는 보이지 않는 높디높은 산의 정상.

젠장, 그래.

지역이 제주도인 만큼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긴 했다만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군.

이런 건 예상을 좀 벗어나 주었으면 싶었다.

그래도 일단 나는 청룡에게 감사부터 표하기로 했다.

“하여간 고마워. 덕분에 어느 정도 대비할 수 있겠네.”

사흘 후. 백록담 정상에서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날 예정이고 몬스터의 종류는 악마다.

이걸 안 것만으로도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정해졌다.

그때 문득 청룡이 말을 꺼냈다.

- 나는 인간을 믿지 않는다.

“뭐?”

- 그러니 네가 한 말도 믿지 않는다.

이 시점의 청룡에게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인간 불신에 걸려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그냥 피식 웃었다.

“그런데도 내게 그런 정보를 알려 준 이유는 뭔데?”

- 정소현이 죽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역시나, 청룡의 본질적인 성격은 변하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듣기에 저 걱정은 진심이었다.

그거면 됐다.

청룡이 내게 준 정보가 거짓은 아니라는 뜻일 테니.

- 나는 일정 이상 인간에게 간섭할 수 없다. 그저 날 받아들일 그릇이 되는 아해에게 그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힘만을 빌려줄 수 있을 뿐이지.

“그런 것치고 나한테는 이것저것 잘도 말했잖아.”

- 네가 감당할 수 있기에.

영혼마저 들여다볼 것 같은 심유한 눈동자. 하늘에 둥둥 떠 있던 거대한 청룡은 어느새 바닥에 몸을 눕혀 나와 비슷한 위치에 자리해 있었다.

- 만일 받아들이지 못했다면 너는 이 자리에서 즉사했을 것이다.

“뭐어?”

- 이것이 내가 정소현에게 이 예지를 말해 줄 수 없는 이유기도 하지.

황당하네. 아무래도 나는 나도 모르게 죽음의 위험에 처해 있었던 것 같다.

입술이 절로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너, 나한테 도움을 요청하는 입장인데 그런 걸 잘도 말하네. 내가 너 때문에 정소현을 구할 생각이 없어졌다고 하면 어쩌려고?”

- 그게 진심이 아님은 안다. 네 영혼을 들여다보았다고 하지 않았느냐?

대체 내 영혼이 어떻길래 저런 소리를 하는 거지?

그래 봤자 나는 속 좁은 인간이고, 조금 빈정이 상한 건 사실인데 말이지.

“웃기고 있네.”

나는 코웃음을 치며 허리에 매달린 검을 툭 쳤다. 역시 저거 한번 베어 보지 않을래, 파트너?

“그나저나 나는 가능한데 정소현은 안 된다고? 그거 대체 무슨 기준이야?”

- 말했을 텐데. 그릇의 차이라고. 하기야 참으로 기묘하구나. 겨우 서른 해 남짓 살아온 아해 같은데 어찌 이리…….

“아, 됐어.”

영혼의 상처가 깊고 어쩌고.

내 기준으로 며칠 전, 청룡의 기준으로는 15년 후에 한 말의 반복일 텐데 들어 봤자 뭐 하겠는가.

“그래서, 그쪽 결론이 뭔데? 나를 믿지 못하시겠다?”

과연 저 청룡의 눈에 내 영혼은 어떻게 보일까. 거짓말쟁이나 사기꾼으로 비치지는 않았을까. 차라리 그렇다면 좋겠다.

하지만 청룡의 눈에 비치는 것은 새벽의 별무리뿐이었다.

더 이상 노기도, 의심도, 분노도 보이지 않는 그 눈동자는 처음 보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그 눈동자에 담긴 것은 간절함뿐이다.

미래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 내 친우를 도와다오.

그 소원조차도 같다.

……참, 나.

나는 피식 웃으며 검을 두드렸다.

“안 그래도 그럴 참이라고 몇 번을 말하냐?”

그 말에 이번에야말로 내 파트너가 반응했다.

청명한 검명이 새벽의 차가운 공기 속으로 울려 퍼졌다.

*   *   *

다음 날 아침.

나는 정소현에게 볼일이 있다고 말하고 바로 집을 나섰다.

횡액이란 것의 정체가 백록담 근처에서 일어나는 던브라면 굳이 하루 종일 정소현 옆에 붙어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오히려 정소현을 백록담에서 떨어트려 놓는 것이 클리어에 유리했다.

다만 던브가 일어난다는 예지는 정소현에게 전해 줄 수 없고, 정소현은 내 옆에 있어야 한다는 청룡의 말만 들은 상태이니 혹시 나를 붙잡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

“아, 네. 알겠어요! 태원아, 잠깐만. 양말 거꾸로 신었잖니!”

아침의 정소현이 워낙 바빴기 때문이다. 꼬맹이를 어린이집에 보낼 준비를 하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나는 살짝 집을 빠져 나왔다.

뭐, 여차하면 청룡이 그냥 집에 있으라는 말 정도는 해 주겠지.

청룡의 정보대로라면 앞으로 남은 시간은 이틀.

여유롭다면 여유롭고, 빠듯하다면 빠듯한 시간이었다.

냉정하게 생각하자면 겨우 이틀 정도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긴 했다.

던전 브레이크의 규모가 어느 정도로 일어날지는 모르는 일이고, 넘어올 악마들의 등급도 아직 모르니까.

그래도 준비할 수 있는 것은 다 해 둘 생각이었다.

그래서 곧장 백록담으로 향한 것이었는데.

“이게 편하긴 하네.”

나는 나를 뻔히 보면서도 별것 아니라는 태도로 지나가는 등산객을 보며 가면을 매만졌다.

내가 착용한 가면은 물론 ‘은의 장막’이었다.

저번 일산 호수 공원에서 사용했을 때는 헌터들의 거리가 멀어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는데, 아무래도 이 아이템에는 내 얼굴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과 동시에 내 존재감을 없애는 효과도 있는 것 같았다.

이거 어릴 적 만화 영화에 나오던 변신 히어로라도 된 것 같아서 좀 설레는데.

어쨌든 이 가면 덕분에 2005년도 한국에 맞지 않는 옷차림을 한 나를 보아도 사람들은 별다른 동요 없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눈치를 보다가 슬쩍, 백록담에 등산객을 위해 설치된 안전대를 넘어 맨바닥으로 뛰어내렸다.

풀썩, 가볍게 흙바닥에 착지했지만 여전히 나를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좋아, 여기까진 순조롭고.”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넓디넓은 백록담에는 겨울이라 그런지 물이 별로 고여 있지 않아 대부분이 마른 평지에 가까웠다. 탁 트인 정경과 맑은 하늘이 절경이었다.

다만 이틀 후에 이곳으로 악마가 몰려올 거라고 생각하니 심경이 여러모로 복잡했다.

“와, 경치 좀 봐.”

“진짜 올라오길 잘했다. 오늘 날씨도 좋네.”

등산객들이 즐겁게 수다를 떠는 소리가 들렸다.

모처럼 정상까지 왔는데 그 즐거움을 방해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지금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백록담 근처에 있는 저들을 쫓아내는 것이었다.

아무리 이곳이 던전 내라고는 하지만, 등산객이 괜히 휘말려서 죽는 걸 보았다간 내 정신에 심히 타격이 갈 것 같아서 말이다.

‘적어도 3일간은 이 근처에 있으면 안 되지.’

하지만 어떻게 그리 만들 수 있느냐.

가장 쉬운 방법은 정부에서 피난 권고를 내리는 것이겠지만, 현재는 불가능하다.

시스템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는 지금 상황에 신분조차 불분명한 내가 악마가 쳐들어올 예정이니 한라산 근처를 비워 주시오, 라고 정부에 얘기해 봤자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고 끝이겠지.

그래서 이번엔 아이템을 좀 활용해 볼 생각이었다.

“자, 어디 보자. 소지창.”

나는 소지창에서 아이템을 소환해 손에 들었다.

이번에도 내가 겨울을 대비한 다람쥐처럼 모아 둔 물건을 활용한 것이었다면 조금 뿌듯했겠으나, 이건 본래 가지고 있던 물건은 아니었다.

이 아이템은 청룡이 어제 내 계획을 듣고 전해 준 것이었다.

손에 들린 것은 낡고 빛이 바랜 종이였다.

이렇게 보면 한없이 초라해 보이지만 이래 봬도 상당히 상급 아이템이다.

종이를 펼치자 웅혼한 필체로 쓰인 글자가 보였다. 나는 망설임 없이 곧바로 아이템을 사용했다.

“풍운뇌우제의 축문을 사용한다.”

시동어를 말한 순간, 축문 가장자리부터 푸른 불이 붙었다.

화르륵, 하고 순식간에 타오른 푸른 불은 축문을 한 줌의 재로 만들었다.

회색의 재가 된 축문이 바람을 타고 내 손에서 휙 빠져나가 멀리 퍼졌다.

풍운뇌우제(風雲雷雨祭).

제주도에서 대대로 지내 온 유서 깊은 제사로, 본래 기우제에는 여러 절차가 필요하지만 청룡이 준 축문을 활용하면 별다른 절차, 심지어는 도력이 없더라도 비를 내릴 수 있다고 했다.

청룡쯤 되는 존재가 준 아이템이어서 그런지 효과가 확실했다.

우르릉!

곧바로 하늘에서 빛이 번쩍거리더니 천둥소리가 뒤늦게 천지를 진동시켰다.

등산로 위의 등산객들이 그 소리를 듣고 웅성대기 시작했다.

“어, 어어? 비 올 것 같은데?”

“일기 예보엔 비 소식 없었는데.”

“저기 봐.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온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과연, 저 멀리서 먹구름도 몰려오고 있었다.

누가 봐도 부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이걸 알아차릴 사람은 현시점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정말 여러모로 청룡 같은 존재는 사기라니까. 그러니 양태원처럼 경험 없는 꼬맹이도 마계를 공략할 수 있었던 거겠지만.

“얼른 내려가야겠다. 빗줄기가 굵은데?”

“해 지면 답 없다. 빨리 가자.”

사람들은 어느새 굵게 떨어지기 시작한 빗방울에 제각기 짐을 챙겨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현명한 판단이다. 이걸로 삼 일 내내 비를 내릴 예정이거든.

이대로 폭우와 천둥 번개가 지속되면 아무도 백록담까지 올라오지 못하겠지.

“자, 그럼 방해꾼도 사라졌겠다.”

악마 새끼들을 맞이할 준비를 해 볼까.

나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번에야말로 내 소지창에 처박아 두었던 아이템들을 싹 털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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