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84화
아이를 어린이집 차에 태워 보낸 후 겨우 한숨 돌릴까, 하는 시점이었다.
정소현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화창하기 그지없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강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검은 먹구름들은 한라산 정상에 급격하게 생성되고 있었다.
그걸 보는 정소현의 얼굴 또한 따라서 흐려졌다.
“이상하네. 오늘 비 소식은 없었는데.”
비 소식이라 함은 단순히 기상청의 예보를 뜻하는 게 아니었다.
정소현이 말하는 것은 자신의 ‘감’이었다.
항상 아침에 눈을 뜨면 당일 날씨가 어떨지 감이 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오늘은 정소현의 감에 따르자면 분명히 맑은 날씨가 될 터였다. 그래서 겨울 햇살에 빨래를 말리기로 계획까지 세워 놓았었다.
그러니까, 아무리 사소해 보일지라도 이건 정말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정소현은 슬쩍 제 곁에 있는 거대한 용을 올려다보았다.
“어제부터 왜 그래?”
아니, 어쩌면 이상함을 넘어 불길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정소현의 물음에 곧장 대답해 주어야 할 청룡이 시선을 돌리며 딴청을 피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소현은 표정을 찌푸렸다.
“정말 불길하네. 설마 청룡 님이 그러는 거, 그 길손과 관계가 있어?”
-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구나.
정소현은 그 말에 오히려 답을 확신했다.
청룡은 정소현이 묻는 것에 대부분 답하지만, 그럼에도 답하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정소현 본인의 운명과 관련되었을 경우.
정소현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태어난 순간부터 정소현 곁에는 청룡이 존재했다.
청룡이 대부분의 인간들은 볼 수 없는,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정소현의 말문이 트였을 때였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엄마에게 청룡을 가리키며 저건 뭐라고 부르냐고 물었을 때의 표정이.
청룡쯤 되는 존재의 가호를 받기에 어릴 때의 정소현은 몸이 약했다. 열이 펄펄 끓을 때마다 청룡을 원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왜 나한테 붙어서 그러는 거야? 난 그런 거 원한 적 한 번도 없는데.”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원망해 보아도 청룡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주 나중에서야, 당시의 청룡은 정소현의 어린 몸에 더한 해를 끼칠까 두려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것이 신내림을 받지 않아 앓아야 했던 신병의 일종이었다는 것도.
몇 년 후, 신내림을 받은 후에야 몸이 안정되었고, 정소현은 이것이 자신의 운명이라는 것을 겨우 납득했다.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천명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마련이니.
그리고 정소현은 청룡이 속삭이는 말 덕분에 천명이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 남들보다 조금 더 일찍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또, 이 세상이 얼마나 연약한지도.
- 네게는 이 세상을 지킬 힘이 있단다.
지금보다 어렸을 때는 그 말에 철없이 설레기도 했던 것 같다.
남들이 모르는 비밀을 알고 있고, 남들 모르게 지옥의 악귀들과 싸워 이 세상을 지킨다.
허울뿐인 말이지만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런 자긍심도 잠시였다.
불의의 사고로 부모님을 잃었을 때, 그리고 처음으로 사랑하게 된 사람이 죽었을 때도 정소현은 그것을 막지 못했다.
천명이란 하늘의 조화이나, 결국에는 인간의 복잡한 세상사가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키어 엮어 가는 흐름이다.
‘아는 것’만으로는 그것을 뒤집을 수 없다.
중도 제 머리는 깎지 못한다더니…… 주위 사람들은 혀를 찼다.
정소현 본인도 몇 번이고 분노했다.
이런 것 하나 막을 수 없다면 나는 대체 왜 이런 힘을 가지게 된 것이냐고 원망도 했다. 내 소중한 사람들을 다 잃었는데 세상 따위를 지켜서 무엇 하겠느냐고 파업 선언도 해 보았다.
하지만 결국 정소현은 제 옆에 있는 청룡을 무시할 수도, 제게 주어진 사명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현세에 벌어진 균열 사이로 기어 들어오는 악마를 발견할 때마다 울면서 제 발로 다시 걸어 들어갔다.
울고, 화내고, 아무리 그래 봤자 변하는 건 없었다.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고, 정소현은 또 세상을 지키러 지옥에 갔다.
이거야말로 병이지, 병이야.
그렇지만 모른다면 모를까, 어떻게 알고도 가만히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악마 새끼들은 인간의 가장 약한 부분을, 가장 추악한 욕망을 파고든다. 그 꼬락서니를 보고 있자면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신을 모시는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겨우 그깟 사명감이 모든 것을 잃은 정소현을 이제껏 살게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것조차 이제 슬슬 끝이 난 모양이다.
“어제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청룡 님이 나나 태원이 말고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는 건 드문 일이니까.”
- 소현아.
“길손이 내 횡액을 막아 준다고 했었지?”
어제 지옥에서 마주쳤던 여자.
기묘할 정도로 맑은 기운을 두른 여자였다. 아마 지옥이 아니라 길거리에서 스쳐 지나가듯 봤어도 고개가 돌아갔을 것이다. 그 정도로 그 영혼이 두른 빛은 강렬했다.
궁금한 것은 많았다.
어찌하여 그런 곳에 있었는지, 무슨 일을 겪었기에 그런 영혼의 격을 쌓아 올린 것인지, 묘한 옷차림과 물건들은 대체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
그러나 그것을 구태여 묻지 않은 것은 정소현이 어떤 예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청룡처럼 강한 신을 모시는 무당에게 예감이란 곧 정해진 미래와 같은 것.
“아무래도 정말 내게 죽을 운이라도 들어왔나 보네.”
그렇다. 그 여자를 본 순간 정소현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
예감에 논리나 인과 따위는 없었다.
그저 그렇게 생각했다.
내 사명이 다할 때가 왔노라고.
정소현은 피식 웃었다.
“어쩐지 처음 봤을 때부터 재수가 없더라니.”
정소현에게 삶이란 언제나 체념과 닮아 있었다.
그렇게 부분 부분이 닳아 버린 정소현이 아직 붙잡고 있었던 것은 고작 알량한 사명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 마지막 하나조차 잃을 때가 온 모양이다.
청룡은 정소현의 말에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 한동안 비가 올 것이다.
“난 앞으로 일주일은 화창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대답한 자신의 입에서 흰 입김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보다가, 정소현은 문득 입을 열었다.
“나 아직은 죽기 싫어, 청룡 님.”
- ……누가 죽는다더냐?
“일단 나, 할 일이 좀 있잖아. 빨래도 쌓였고, 세탁기 옆에 곰팡이가 펴서 그것도 청소해야 하고…… 태원이가 쓰는 유아용 젓가락, 슬슬 다시 사야 할 것 같더라고. 쇼핑하러 시내도 나가야지. 그리고 또…….”
할 일을 세어 보다가 정소현은 쓰게 웃었다.
아무리 사소한 일까지 꼽아 보려고 해도 차마 두 손을 넘기지 못했다.
그거야 그렇겠지.
어느 순간부터 정소현은 자신의 사명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 때문일까.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는 시시한 삶이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허탈함에 말이 주절주절 절로 터져 나왔다.
“내가 죽고 나면 태원이는 어떻게 하나. 친척한테 연락이 가려나? 연락 안 한 지 오래됐는데.”
- 너답지도 않게 청승이로구나.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청룡 님이야말로 이미 뻔히 아는 사실 숨기려 들지 말고. 그래서 그 여자는 뭔데? 나 대신 지옥을 정화할 다음 타자?”
- 그런 게 아니다.
그러나 지금의 정소현에게는 청룡의 말이 들리지도, 그와 눈조차 마주치지도 않았다.
높디높은 산의 정상으로 몰려가던 먹구름이 떨어트린 비가 한 방울, 기어코 정소현의 얼굴로 떨어졌다.
빗방울이 턱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정소현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아, 정말 비 온다.”
청룡은 그 말에는 답하지 않았다.
잠시 나갔다 오겠다고 말했던 정체 모를 길손은 그날 밤이 깊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청룡에게 물으면 행방을 알려 줄 수도 있었겠지만 정소현은 굳이 묻지 않았다.
대신, 집에 돌아온 아이와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을 보냈다.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일상은 고됐지만, 그래도 보람찬 면이 없잖아 있었다.
아이를 재운 다음 조용히 서랍 한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통장을 꺼냈다. 그리고 무심코 달력을 보았다가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혀를 찼다.
‘내일…… 토요일이네.’
이렇게 멍청할 데가.
하필이면 주말이다. 오늘 하루 종일 멀쩡한 척했지만 실은 정신을 죄다 빼놓은 모양이었다.
공공 기관이 문을 닫으니 무슨 준비를 하려고 해도 여의치 않다.
정소현은 통장과 집문서를 꺼내 놓고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곤히 자는 아이의 이마에는 땀이 배어 있었다. 보일러를 너무 세게 틀었나.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며 정소현은 한숨을 쉬었다.
“이 애가 나보다 더 강하지.”
하늘이 무심하게도 양태원 또한 정소현처럼 강력한 신력을 타고난 인간이었다.
갓난아이 때부터 청룡을 본 것은 물론이요, 부적을 쓰는 법을 배우기 전에 손 하나 스치는 것만으로 잡귀를 정화해 버릴 정도의 강한 힘을 타고난 아이.
가끔은 그런 생각도 했다.
자신은 지옥과 현세를 오가며 그 경계를 보수하는 도구이자, 어쩌면 이 아이를 낳기 위해 세상이 내놓은 존재일지도 모르겠다고.
그것은 어머니로서의 애정과는 궤를 달리하는, 생 전체를 사명 따위에 바쳐 버린 기구한 인생을 산 인간으로서의 예감이었다.
그리고 결국, 이 아이 또한 자신과 같은 길을 걷게 되리라.
그 예감이 어찌나 끔찍한지 몰랐다.
정소현은 눈을 감았다.
나한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더 있을까?
별로 많은 걸 바라지는 않는다.
가족들을 잃은 후로 그런 걸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지금 바라는 것은 그저, 내가 월요일까지만 살아 있으면 좋겠다.
이 아이가 때가 올 때까지 조금이라도 편히 살 수 있게 대비라도 할 수 있도록.
그것뿐이었다.
그런 모자의 모습을 청룡이 뜻 모를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 * *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비가 억수로 내리는 겨울날에 정소현은 뜻밖의 손님을 맞이했다.
그 흔한 우산 하나 없이 비를 그대로 맞고 있던 여자는 정소현이 대문을 열고 나서자 무표정하던 얼굴에 놀람을 띄웠다.
“얼굴이 왜 그래요? 한숨도 못 잔 얼굴이네.”
“……강예나 씨.”
그렇다. 그런 이름이었다.
정소현은 어제 하루 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강예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뭘 하고 왔는지는 모르겠는데 꼴이 만신창이었다. 눈에 띄게 예쁘장한 얼굴에도 생채기가 많아졌다.
그 시선을 알아차린 강예나가 그제야 제 모습을 돌아보더니 떨떠름하게 옷에 묻은 흙을 털어 냈다. 털어 내는 동작에 산뜻한 풀의 향이 번졌다.
“약초라도 캐다 오셨어요?”
“에이, 설마요. 그냥 산길에 좀 넘어져서.”
강예나가 대답을 뭉그러트렸다. 정소현은 수상함에 얼굴을 찌푸렸으나 결국 현관문 앞에서 몸을 비켰다.
“하여간 일단 들어오세요. 새 옷이라도 드릴 테니까…….”
어쨌든 빗속에 사람을 세워 놓는 것도 할 짓은 아니었다. 정소현은 문을 열고 손짓했다.
“아, 괜찮아요. 그냥 할 말이 있어서 들른 것뿐이니까.”
그런데 강예나는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도 굳이 사양했다. 정소현이 어리둥절해하자 이렇게 한마디 덧붙였다.
“옷이 이렇게 젖었는데 들어가면 민폐잖아요.”
“바닥이야 닦으면 되고, 그러다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요.”
“그렇게 연약한 몸은 아니거든요.”
그러고 씨익 웃는다.
볼우물이 패였다. 그 미소가 가히 찬란하여 정소현은 저도 모르게 눈을 깜박였다.
“그래도 잠깐 안에 들어왔다가 가세요. 할 말 있다면서요?”
“괜찮아요. 바빠서 바로 가 봐야 하거든요.”
“아…….”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비가 바닥을 쉼 없이 때리는 소리만이 울릴 뿐이었다.
정소현은 할 말을 찾기 힘들었다.
이 여자를 처음 본 순간 자신의 사명이 끝났음을, 그리고 죽음이 다가왔음을 예감했다.
그러니 강예나가 반가울 리 없었다.
그런데도.
‘……눈을 떼기가 힘드네.’
무당이란 본래 기감이 뛰어난 존재.
특히 정소현처럼 태어나면서부터 예민한 이들은 더욱 그랬다. 흔히 열 길 물속은 보여도 사람 속은 모른다고들 하지만 정소현에게는 사람의 영혼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강예나의 영혼에서는…… 흙 속에 파묻혔다고 진주가 그 빛을 잃는 것은 아니듯, 도저히 몰라볼 수 없는 빛이 감돌고 있었다.
얼마나 침묵이 흘렀을까, 강예나가 젖은 흙바닥을 발로 차더니 이렇게 내뱉었다.
“제 할 말은, 그러니까…… 내일 말인데요.”
“내일?”
“네, 내일. 집에 좀 계세요.”
“왜요?”
“이유 같은 게 중요한가요? 아닐 것 같은데.”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도저히 현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옆구리에 찬 검을 툭 건드렸다.
“그냥 내일은 무슨 일이 벌어지든 집에 있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