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86화
괴이한 밤이었고.
불길한 달이었다.
폭우가 내리는 와중에 달은 한 점 구름도 없는 하늘에서 붉게 타오르고 있었으며, 천둥과 번개가 사정없이 내리치고 있었다.
미신과는 거리가 먼 현대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하늘을 올려다보더라도 약간은 두려워할 만한 광경을, 정소현은 현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 꽉 잡고 있거라.
청룡의 말에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실체화한 청룡의 등에 올라탄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단시간 내에 한라산을 등반하려면 이게 최선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역시 비행기를 맨몸으로 타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도력을 끌어올려 몸을 보호하고 있다고는 해도 이 힘은 신체를 강화해 주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궤를 달리했다.
그러나 지금 몇 번 까무러치더라도 여기서 멈출 수는 없는 법.
정소현은 몇 번이나 이를 악물고 제 손과 청룡의 등을 동여맨 천을 붙들며 버텼다.
그러기를 얼마나 갔을까.
하늘을 가로지르던 청룡의 속도가 천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청룡의 등 위에서 얼어붙어 있던 정소현은 서서히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콰르릉
“악!”
순간적으로 놀라 비명을 지른 것도 어쩔 수 없었다.
흰 번개가 치면서 어둡던 사위가 삽시간에 밝아져 균열의 틈이 보였다.
지옥과 현세를 넘나드는 균열을 본 것이 처음도 아닌데 소리를 지른 것은, 지금의 광경이 한층 더 끔찍했기 때문이다.
그 균열 사이로 보이는 숱한 검은색의 다리들과 붉게 빛나는 눈.
그것들이 수천 쌍 모여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징그럽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정소현은 그 광경에 약간의 아연함을 느꼈다.
이제까지 쭉 지옥에 가서 정화 작업을 해 왔지만 그래도 이렇게 많은 악마들을 한꺼번에 대면한 적은 없었다. 게다가 언제나 청룡이 옆에 있어 주었고.
그런데 이렇게 보니 과연 자신이 이 상황을 정말로 막을 수 있기는 한 건지, 두려움이 앞섰다.
물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정소현의 힘은 기본적으로 사특한 것을 멸하는 것.
그리고 무당이기에 그 힘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사용하는지도 잘 알고 있다.
이제까지 정소현은 청동 방울과 무선(巫扇)을 통해 도력을 발휘했다.
본래 도력이란 인간의 그릇에 이미 채워져 있는 힘이 아니라, 모시는 신이 정소현에게 빌려주는 것.
그렇기에 정소현의 그릇이 감당할 만큼의 힘만 가질 수 있고, 한정된 힘을 효율적으로 발휘하려면 저러한 무속인의 도구가 꼭 필요했다.
그러나 무속인으로서 가장 커다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수단은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제(祭)를 올리는 것.
무당이 지내는 제사야말로 무당이 가진 모든 신력을 발휘할 수 있는 수단이다.
그래서 정소현은 이번에 뚫린 지옥과 현세와의 균열을 제사를 올리는 것으로 막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막상 이 광경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정말로 가능하긴 한 걸까?
- 소현아.
문득 생각에 잠겨 있다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지상이 가까워져 있었다.
그런데 청룡이 몸을 내린 장소는 백록담이 아니었다.
정소현은 곧장 청룡에게 따져 물었다.
“왜 백록담까지 가지 않는 거야?”
지금도 꽤 높이 올라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정소현의 발로 직접 올라가려면 족히 30분은 넘게 걸릴 터였다.
- 떨고 있지 않느냐.
그 말에 정소현은 푸르게 질린 자신의 입술에 청룡의 시선이 닿아 있는 것을 알고 입술을 깨물었다.
“추워서 그래요, 추워서. 인간이니 어쩔 수 없잖아.”
- 그래, 그러니 다시 생각해 보거라.
평소 반투명한 상태로, 실체 없이 지내던 청룡의 몸은 실체화하자 이런 폭우 속에서도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 정말로 결정한 것이냐?
“결심하지 않았으면 이런 곳까지 오지도 않았어.”
우르릉
다시 한번 천둥을 품은 구름이 내는 소리가 울렸다.
불길한 기운이 사방을 잠식하고 있었다.
정소현은 그 광경을 올려다보며 약간의 무력감에 잠겼다.
“그래, 사실은 진작 이랬어야 했어.”
정소현이라고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강예나에게는 근본적으로 균열을 차단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지만, 그건 반쯤 거짓말이었다.
지옥과 현세와의 균열을 차단하기 위한 제사를 올리는 것.
물론 그것만으로는 균열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다.
인간이 인간이고, 삶을 살아가는 이상 악이 존재함은 당연한 일.
다만, 그 제(祭)로서 ‘당분간’ 모든 균열을 차단하는 것.
그게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제사를 올린다면 족히 몇 년간은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로 대규모의 제사를 치르려면 평소 정소현의 그릇이 감당하는 신력만으로는 불가능했다.
균열을 당분간이라도 막으려면 무당의 그릇이 깨질 정도로 강력한 신력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물이 필요했다.
즉, 정소현 본인이다.
희생이야말로 최고의 제물이 되는 법이니까.
“그런데 무서워서 못 했지. 내가 죽으면 태원이는 어쩌나 싶고…… 그렇게 미루다가 이 사달이 벌어진 거잖아.”
사실 최근 들어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지옥과 연결된 균열의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무당으로서의 일을 줄이기까지 하며 지옥을 정화하러 돌아다녔던 것인데, 아무래도 그것으로는 불충분했던 모양이다.
청룡의 눈동자가 아픔을 담고 가늘어졌다.
- 네 탓이 아니다. 이것은 천명이 점지한 것.
“하지만 그 천명을 읽어 내는 것이 내 일이지. 그래서, 백록담까지 데려다주지는 않을 거야?”
제를 올림에는 장소의 부정함 또한 관련이 되어 있었다.
한라산의 백록담.
예로부터 탐라에서 가장 신비한 곳이라고 일컬어졌던 곳이다.
게다가 가장 균열이 크게 벌어지고 있는 곳은 한라산의 백록담 바로 위.
제사를 올리려면 그곳까지 당도해야만 했다.
그러나 지금의 청룡은 정소현을 거기까지 데려다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청룡의 시선이 정소현을 내려다보았다.
얼마나 그렇게 대치하고 있었을까, 결국 정소현은 청룡에게서 몸을 돌렸다.
“됐어, 나 혼자 갈 수 있어.”
그래도 가까이 접근했으니 여기부터는 제 발로 오르면 될 터.
- 내가…… 힘을 빌려주지 않겠다면 어찌하겠느냐?
그런데 등 뒤에서 그런 말이 들렸다.
그 말에 정소현은 움찔했다.
저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무당인 정소현이 신을 모시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이라 열병을 앓아야만 했듯이, 청룡처럼 생사를 초월한 존재에게도 따라야만 하는 운명이 있었다.
특히나 청룡은 무당이 모시는 신 중에서도 특별한 존재였다.
보통의 무당이 모시는 것은 자리를 잡지 못한 조상신. 좀 더 큰 신이라면 이름을 남긴 위인도 있으나, 대부분은 인간의 미련이 성불하지 못하고 현세에 남긴 존재들이다.
하지만 청룡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인간의 선의가 낳은 존재.
그리하여 인간의 바람이 선에 닿아 있는 한 그 바람에 답해야만 하는 존재였다.
그리고 지금 정소현이 하려는 일은 분명 선(善)에 맞닿아 있었다.
그러니 청룡은 정소현의 바람에 응하여 마땅히 힘을 빌려주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왜 청룡이 저런 말을 하는지 안다.
저것은 선에서 비롯된 말이 아니다.
정소현은 눈을 꾹 감았다.
“정이지, 정이야.”
정소현이 스물 몇 해를 사는 동안 청룡이 유일한 친구였듯이, 청룡에게 정소현 또한 특별한 존재였다.
처음에는 그저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었고 끔찍한 사명이었으나…… 정소현은 비가 쏟아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괴이한 붉은 하늘은 앞으로의 운명을 말하는 듯했다.
“그래서 내가 가야 하는 거야.”
그 마음을 이해하는 것과 별개로 청룡이 만일 자신의 운명을 거스른다면…… 청룡의 존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정소현조차 알 수 없었다.
친구를 위험에 처하게 할 수는 없으니까.
“그럼, 나는 갑니다.”
정소현은 비로 질퍽해진 길 위로 발을 디뎠다.
청룡이 저렇게 나오는 이상 이제 정상까지 데려다 달라고 부탁할 수는 없다.
청룡의 의지도 의지였지만…… 그에게, 친구에게 죽음을 도와 달라 하는 건 너무 잔인할 테니.
등 뒤에서 청룡의 간절한 시선이 느껴졌으나 정소현은 애써 무시했다.
청룡은 정소현의 바람을 끝까지 거부할 수는 없다.
한번 제사를 치르기 시작하면 어차피 모든 도력을 소진하게 된다.
그때 청룡이 정소현에게 힘을 빌려주지 않는다면 그냥 개죽음이 될 테니, 저 다정한 신이 그것을 두고 볼 리가 없다.
그러니 내가 가야만 한다.
인간의 운명은 결국 인간이 결정해야만 하니까.
등에 꽂혀 오는 시선을 무시하며 막 걸음을 재촉하려던 그때였다.
투콰쾅!
찢어지는 것 같은 폭음이 울렸다.
깜짝 놀란 정소현은 고개를 들었다.
“망할!”
절로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정소현은 비가 쏟아지는 산길을 냅다 올라가기 시작했다.
소리가 들려온 것은 분명히 여기보다 더 높은 곳이었다.
여기서는 나무가 우거져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어쩌면 이미 백록담 부근의 하늘의 경계가 무너져 악마들이 쏟아져 내린 건지도 몰랐다.
만일 악마들이 벌써 현세로 침입했다면 제를 올린다고 한들 이미 넘어온 악마들은 처리할 수 없었다.
정소현은 정신없이 산길을 올랐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몇 번을 넘어졌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어느새 언제나 곁에 있던 청룡의 기척이 멀어졌지만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이게 맞는 거지.
어두운 숲길을 오르며, 정소현은 이미 떠난 부모님과 남편을 떠올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들의 생각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 생각만 떠오르면 자꾸 발걸음이 멈출 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모든 잡념을 벗어던질 수 있다면 인간이 아닐 터였다.
정소현의 머리에 끊임없이 아이의 얼굴이 맴돌았다.
부모로서 이렇게 최악일 수가 있을까.
따라가지도 못하고 남겨진 이의 심정을 정소현은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겨우 이 하잘것없는 사명 때문에.
아이는 자라는 동안 얼마나 정소현을 원망할까.
아니, 어쩌면 원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양태원 또한 천명을 타고난 무속인이다. 아이도 자신처럼 결국 운명이라는 것의 무게를 받아들이고, 정소현이 걸어간 길 또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래서 더욱 사무치고, 분했다.
이것이 선인가.
나를 희생할 가치가 있는 건가.
그런 잡념이 끊임없이 사고를 방해했다.
하지만 정소현의 발은 거침없이 산길을 올랐다.
숨이 턱에 차도록, 때로는 빗물에 미끄러워진 길에 넘어지더라도 발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왜냐하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원망한들 운명은 거부할 수 없다.
저 악마들이 현세에 쏟아져, 현세가 지옥의 재림이 되는 것을 그저 팔짱만 끼고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그저 지켜볼 수 있었다면, 진작 그랬을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나의 운명이다.
정소현은 녹초가 된 채 백록담으로 오르는 마지막 계단으로 발걸음을 디뎠다.
“빨리 제사를……!”
그러나 정소현의 눈에 비친 풍경은 절망적이었다.
“아, 악마가 벌써 내려왔다고?”
이미 균열 속에서 빠져나온 악마들이 하나둘씩 지상에 내려오고 있었다.
커다란 균열 사이로 수십, 수백의 악마들이 저마다 현세로 통하기 위해 제 몸을 욱여넣고 있었다.
그 징그럽고도 절망스러운 광경에 정소현은 일순 얼어붙었다.
그리고 그 순간.
가까운 곳에 내려선 첫 번째 악마가 정소현을 발견했다.
정상까지 오르느라 이미 무릎이 후들거리고 있었던 데다 밤이어서 시야가 어두워져 있던 정소현을.
평소라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정소현의 시야를 하늘에서 별처럼 쏟아지는 악마들이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 문제였다.
정소현의 반응이 다소 늦어진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부채를 들기도 전에, 악마가 자신이 발견한 먹잇감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키에아아악!”
‘느, 늦었……!’
정소현이 부채를 쥔 손을 내뻗은 그 순간.
서걱.
악마의 몸뚱어리가 깔끔하게 잘려 나갔다.
후두둑.
뜨거운 피가 김을 내며 바닥에 흩뿌려진다. 갈라진 괴물의 몸 사이로 한 여자가 보였다.
“왜 왔어요?”
습격을 받은 것으로도 모자라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란 정소현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그런 정소현의 팔을 잡아 부축하는 손이 있었다.
정소현은 자신을 부축하는 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보이는 것은 비에 푹 젖은 생쥐 꼴을 한 여자였다.
어두운 밤, 달만이 비추는 백록담의 정상.
그럼에도 그 눈동자만큼은 확연히 눈에 띄었다.
젖은 긴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여자가, 강예나가 불타오르는 눈으로 으득, 하고 이를 갈았다.
“정말 뭐 하나 쉽게 가는 법이 없네. 왜 위험을 자처하는 건지 모르겠어. 집에 있으라면 좀 있으라고.”
차라리 폭언에 가까운 말투였다. 정소현은 황당함에 입을 벌렸다.
“뭐, 뭐라고요?”
“여기 있으면 위험하다고 했잖아. 모르겠어요? 저기 악마 새끼들이 몰려오고 있는데 어딜 기어 오는 거야.”
저 여자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래서 온 것이 아닌가.
하지만 마음속과 다르게 강예나의 기에 눌려 버린 정소현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 러니까, 나는 저걸 막으려고…….”
“그러니까 당신이 저걸 왜 혼자 막아.”
그러고 보니 어느샌가 강예나의 말이 짧아져 있었다. 물론 그런 것을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정소현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나 아니면 할 사람이 없으니까……?”
그렇지 않은가. 내가 아니면 대체 누가…… 이런 일을.
언제나 되뇌어 왔던 그 말은 뚝 잘라 내던져졌다.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게, 쉬운 것처럼.
“여기에 있잖아.”
씩 웃는 입가가 보였다.
정소현은 그 얼굴을 홀린 것처럼 바라보았다.
그 순간만큼은 청룡도, 사명도 잊어버렸다.
몰아치는 폭우 속에서 한 여자가 빛이 나는 검을 들고 우뚝 서 있었다.
뻔뻔할 정도로 환하게 웃으면서.
“내가.”
어쩌면, 그 순간에.
운명이 뒤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