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87화
고개를 드니 붉은 하늘을 배경으로 떠오른 글씨가 보였다.
- 경고! 돌발성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합니다.
메시지가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하늘 저편부터 산 능선을 덮는 돔형의 흰 구가 만들어졌다.
돌발성 던전 브레이크 특유의 경계였다.
- 해당 던전 클리어 조건이 갱신됩니다.
- 돌발성 던전 브레이크가 완전히 종료될 때까지 ‘정소현’이 생존해야 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완벽한 클리어 조건이 생성되었다.
이미 확신하고 있기는 했지만 이걸로 확정이로군. 이 던전의 조건은 이번 돌발성 던브의 클리어다.
나는 거슬리는 글씨를 시야에서 치워 버렸다.
사라진 글씨 덕에 명료해진 시야에 비치는 광경이 가히 가관이었다.
이 세상에 멸망이라는 것이 찾아온다면 이런 꼴이 아닐까.
하늘에 불거진 균열 사이로 몇백…… 아니, 몇천 개의 붉은 눈동자가 세상을 탐하고 있었다.
아직 몬스터 웨이브는 제대로 시작되지 않았는데도 저 틈 사이로 하나둘씩 악마 새끼들이 이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시스템의 알림창을 볼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하급인 것들이지만.
“뭐, 뭐…….”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정소현이 입을 뻐끔대고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 앞으로 달려들던 몬스터를 베어 버려서 놀란 모양이다.
하긴, 정소현은 그동안 지옥을 동네 산책하듯 다니기는 했지만 나와 달리 도력으로 악마를 정화하는 타입이다. 이렇게 검으로 무언가를 베는 모습은 처음 보았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게 아니더라도 생살을 가르고 피가 튀는 광경에 익숙해지기가 어렵기는 하지.
그나저나, 그렇다면 더더욱 미안하게 되었다. 여기에 온 이상 앞으로 몇 시간 내내 주야장천 볼 텐데 말이야.
“그건 그렇고, 정소현 씨.”
“……네?”
정소현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저거 보입니까?”
시험 삼아 내게 보이는 흰 결계, 돌발성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남에 따라 생긴 돔을 가리켰다.
하지만 정소현은 고개를 흔들었다.
“뭘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어요.”
“그럼 뭐, 갑자기 허공에 무슨 글씨가 보인다거나.”
“……환각을 볼 정도로 정신을 놓은 건 아닌데요.”
정소현이 내 시야에 비치는 모든 시스템적 요소를 보지 못한다는 걸 확인한 후 나는 짧은 생각에 잠겼다.
계획에 약간의 수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내가 좀 안일했나?’
사실 내 계획대로라면 정소현은 여기에 오지 않았어야 했다.
클리어 조건이 이 던전 브레이크가 끝나기 전까지 정소현의 생존을 지키는 것이니만큼, 최대한 이곳에서 떨어트려 놓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만일 정소현이 내가 벌이는 일에 대해서 묻는다면 그걸 시스템 빼고 설명할 자신도 딱히 없었고.
그래서 겸사겸사 이틀은 가뿐하게 사람을 재울 수 있는 아이템인 혼연향을 사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소현은 결국 백록담에 도착했다.
하필이면 돌발성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난 시점에.
설마 혼연향이 제대로 듣지 않은 것은 아닐 테고, 그저 정소현의 의지로만 이루어진 일도 아닐 것이다.
이를테면 필연.
시스템상 정소현이 이 사건의 중심 밖에 존재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혼연향을 썼는데도 일찍 정신을 차리고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즉, 일종의 강제성이다.
아리아드네는 이걸 두고 운명이라고 불렀다.
아무리 회피하려 해도 결국에는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 물론 다 개소리지.’
나는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떨쳐 냈다.
이건 결국 내 준비가 미흡했다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는다. 강제성이고 뭐고, 혼연향 정도가 아니라 어디에 묶어 놓고 오기라도 했으면 됐을 것 아닌가.
아무래도 나 혼자 이틀간 해야 할 일이 많다 보니 정소현의 거취에 대한 준비가 좀 미흡했다.
사실 정소현 곁에 있는 청룡이나 양태원이 이곳에 오는 것을 막는 방패가 되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조금 했지만 이쪽도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모양이고.
뭐, 반성은 이 정도로만 하도록 하자.
지금 중요한 건 이 몬스터 웨이브를 클리어하면서 정소현을 죽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청룡은 어디로 간 거죠?”
문제는 그러려면 청룡의 협조가 가장 중요한데 아무리 봐도 지금 정소현의 곁에는 청룡이 없다는 점이다.
심지어 돌아오는 대답이 영 시원치 않았다.
“그, 글쎄요.”
“글쎄요, 라니. 무슨 일이라도…….”
나는 그렇게 물으려다가 말을 흐렸다. 정소현의 얼굴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음, 듣지 않아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만했다.
하기야 청룡 입장에서도 정소현이 백록담에 오는 것이 그리 반길 만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심지어 나라는 존재가 나타나서 던브를 막아 줄 것 같으니 더더욱 말리고 싶었겠지.
그런데도 정소현은 이곳에 있다.
두 사람, 아니, 한 사람과 한 존재의 사이에 갈등이 발생한 것은 놀랄 것도 아니었다.
“청룡과 떨어지면 정소현 씨가 도력을 발휘하는 데 지장이 있습니까?”
하지만 이건 중요하지.
만일 정소현이 지금 도력을 전혀 쓰지 못한다면 내 계획은 약간이 아니라 전면적으로 수정되어야 했다.
몬스터 웨이브를 클리어하는 게 아니라 정소현의 보호가 일 순위가 되어야 하니까.
“아뇨, 일정 거리 내에만 있으면 제 도력을 발휘하는 건 상관없어요. 지금도 가까이에 있는 것 같고요.”
“그래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긍정적이었다.
그렇다면 상황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악마 놈들을 처리하는 데 청룡의 도움을 받을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정소현은 나를 마계에서 도와준 만큼 대(對)악마전에서는 강한 무당이다.
클리어 조건만 잘 지킨다면 쓸 만한 전력이었다.
“좋아요, 그럼 같이 해 보죠.”
“같이 한다고요? 뭘요?”
“그거야 당연히…….”
악마 퇴치지.
그렇게 대답하려고 할 때였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황금빛의 글씨가 폭죽처럼 허공에 수놓아졌다.
- 경고! 1차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됩니다. 몬스터 등급 제한이 있습니다. (D, F급 한정 출현)
- 1차 몬스터 웨이브 활성화 시간 00 : 20 : 00
- 몬스터 웨이브 활성화 시간 동안 해당 구역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시작됐다.”
폭우가 내리는 산의 정상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그리고 그 암흑 속, 균열이 서서히 벌어졌다.
아까 전까지는 잠근 수도꼭지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듯 똑똑 하늘에서 떨어지던 악마 새끼들이, 한꺼번에 틈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우웩.”
솔직한 감상이 삐져나왔다. 옆에서 정소현도 자신의 입을 틀어막는 것이 보였다. 마계를 오가며 지독한 꼴을 많이 봤을 텐데도 구역질을 참는 게 역력한 얼굴이었다.
하기야 지금의 저 광경은 아무리 경험을 쌓은 용병이라도 기가 질릴 게 틀림없었다.
그도 그럴 게, 우리가 맞이해야 할 몬스터는 인간이 대개 생리적으로 혐오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으니까.
사람 주먹 두 개를 합친 것 같은 크기의 벌레 무리들이 균열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수많은 벌레의 다리들이 하늘의 균열 사이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나는 허공에서 다리를 휘젓던 악마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쳤다.
어둠 속에서 붉게 빛나는 유리알 같은 눈동자.
시스템 알람이 떴다.
- 시스템 알람 : 몬스터의 등급과 종류를 조회할 수 있습니다.
D급 몬스터 : 무지의 악
이름 한번 거창하군.
“아무래도 더 늦기 전에 제사를 올려야겠어요.”
그 말에 나는 여자를 힐끗 돌아보았다.
정소현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끔찍한 광경이 반지르르한 눈동자에 비치고 있었다.
“미처 말하지 못했지만 제게 막을 방법이 있어요. 이미 현세로 넘어온 마귀는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아뇨, 그럴 필요 없습니다.”
나는 정소현의 말을 가로챘다. 정소현이 굳은 표정으로 나를 마주 보았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요? 제 말 제대로 들은 거 맞아요? 지금 상황이 어떤지 알고 있냐고요, 강예나 씨.”
“잘 알고 있죠. 그리고 제사를 지내서 저 틈새를 막을 수 있다는 것도 청룡이 말해 줘서 진작 알고 있었고.”
정소현의 어깨가 깜짝 놀라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청룡이 내게 정소현을 도와 달라 말했던 그날.
청룡은 정소현이 제사를 올림으로써 현세와 마계의 틈을 일시적으로 틀어막을 수 있다고 했다.
즉, 던전 브레이크를 유보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
“그걸 아는데 대체 왜 막는 거예요?”
“그 제사 올렸다간 그쪽이 죽는다길래.”
다만, 현재 정소현의 힘으로는 희생 없이 그런 제사를 올리기가 불가능하다고도 했다.
그래서 내 계획에 제사라는 단어는 바로 배제되었다.
당연한 일이다. 나는 정소현이 죽으면 이 던전 클리어에 실패하니까.
정소현이 내 말을 듣고 이를 악무는 것이 보였다.
“지금 그런 거 따질 때예요? 저 악마 놈들이 다 현세로 내려오면 나 하나 죽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이 세상이 다 망할 거라고요.”
옳은 말이었다.
하지만, 틀린 말이기도 했다.
“정말 그렇게 하고 싶은 거라면 제 의사는 상관없이 그냥 시작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뭐라고요?”
나는 이제 시퍼렇다 못해 새하얗게 질려 버린 정소현의 얼굴을 보며 아차, 싶었다.
이 자리에 아리아드네, 아니, 하다못해 일리아스라도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 둘은 말솜씨가 좋으니까,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좀 더 정확하게 전달해 주었을 것이다.
약간의 후회와 함께 나는 내 말을 정정했다.
“아니, 오해하지 마세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정소현 씨가 망설이는 건 당연하다는 거니까.”
그 말에 정소현이 퍼뜩, 작살에 꽂힌 물고기처럼 몸을 떨었다.
어두운 광경 속에서도 붉어지는 얼굴이 보였다.
“저, 저는…… 망설이거나, 그런 게 아니라.”
“네, 알아요.”
말만으로 그러는 게 아니라, 정말로.
제 몸을 희생하는 것에 거부감이 있는 것도, 아픈 것을 싫어하는 것도…… 목숨을 거는 게 무서운 것도, 당연한 일이다.
심지어 정소현은 키우는 아이까지 있다.
아니, 설령 아이가 없더라도 인간인 이상 본인의 목숨을 아낄 이유는 수도 없이 많았다.
사실 인간이라면 당연한 일이 아닌가.
누구나 자신이 손해 볼 짓은 하기 싫어하는 법이다. 그게 인간이다. 내가 죽으면 세상이고 뭐고, 알 게 뭐냐고.
그런데도 ‘원래 세계’의 정소현은 그 짓을 했다.
제 목숨을 희생해 세상이 악마에게 침범당하는 것을 막았다.
자신 외의 다른 사람에게는 그게 불가능하다는 이유만으로.
“두려운 건…… 사실이에요.”
심지어 지금도, 정소현이 창백한 얼굴로 부채를 펼쳐 드는 것이 보였다.
“그래도 제 의무는 다할 생각입니다.”
오색 창연한 빛이 정소현의 발치부터 시작해 주변을 맴돌았다. 청량한 공기가 일순간 코끝을 간질였다.
아무래도 내 말은 귓등으로 들으시고, 정말로 힘을 사용하려는 모양이다.
“에휴.”
절로 한숨이 나왔다.
진짜 말 안 들어먹네. 아니, 내가 설득을 못 하는 건가.
신념을 위해 목숨을 내던지려는 인간들은 정말이지 하나같이 고집이 세다.
내 옆에 몇 년간 있었던 친구들 덕분에 이미 익히 알 만한 사례이기도 했다.
또 내가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 저런 인간을 설득할 만한 재주도 없고.
“그러니까, 필요 없다고.”
그렇다면 나는 행동으로 보여 줄 수밖에.
키에에에엑!
괴성과 함께 하늘에서 유성우처럼 악마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정소현이 부채를 든 손을 뻗으려 했다.
“급급여……!”
펑!
정소현의 입이 열리고, 수백 마리의 벌레가 최초로 대지에 발을 디딘 그 순간에.
쾅!
퍼퍼펑!
고막을 찢는 폭음이 터졌다.
“윽!”
정소현이 갑작스러운 소리와 땅이 흔들리는 진동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댔다.
나는 그런 정소현의 팔을 잡고 넘어지지 않도록 지탱했다.
당황한 정소현이 내 팔을 붙잡고 고개를 들어 상황을 확인하고는, 입을 떡 벌리며 굳어 버렸다.
“지진?!”
“설마.”
겨우 지진 정도이려고.
한라산의 정상, 백록담.
연일 이어진 폭우로 호수가 차지하는 비중이 비약적으로 늘어난 산의 정상.
그 정상을 침범한 벌레의 무리를 중심으로 거대한 폭발이 연쇄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폭우가 쏟아지는 와중에 돌과 흙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하하하.”
그 폭발을 지켜보며, 나는 웃었다.
내가 이 이틀간 했던 일이 결실을 맺고 있었다.
대지에 악마의 발길이 닿을 때마다 땅이 폭발했으며.
동시에 사방으로 뿌려진 물방울이 악마들의 몸으로 튀었다.
자세히 보면, 그 물방울은 지금 내리고 있는 비와는 확연하게 다른 빛을 내뿜고 있었다. 은빛의 기운에 휩싸인 물방울이 허공에 떠오른 순간 눈앞에 수십, 수백 개의 창이 떠올랐다.
- 아이템, ‘성수(聖水)를 담은 병’의 내구력이 다하였습니다.
- 아이템, ‘성수(聖水)’를 사용하시겠습니까?
대답은 한마디로 충분했다.
곳곳에서 끔찍한 비명이 터졌다.
“악!”
귀를 찢을 것 같은 소리를 이기지 못한 정소현이 제 귀를 막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폭발은 그 후로도 한참이나 지속되었다.
몬스터 웨이브가 이어지며 악마들이 계속해 땅에 발을 디뎠고, 인간의 세상을 침범한 악마들의 몸에 성수가 닿는 순간 모두가 무력화되었다.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하기 힘든 소리들이 메아리가 되어 몇 번이고 되감듯이 산 전체로 울려 퍼졌다.
그러기를 얼마나 흘렀을까.
- 1차 몬스터 웨이브가 종료됩니다.
최대 업적자 : 방랑하는 구도자
에이펙스의 광검이 당신의 의지를 노래합니다.
균열에서 끊임없이 기어 나오던 몬스터들의 흐름이 끊겼다.
계속해서 이어지던 폭발 때문에 자욱하게 흐려졌던 시야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숱한 먼지처럼 땅에 내려앉은 수많은 악마는, 지금 단 한 마리도 하늘을 우러러보지 못했다.
그저 땅에 대가리를 처박고 몸을 움찔거리고 있을 뿐.
처절하기까지 한 광경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정소현이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나는 차분하게 대답해 주었다.
“성수(聖水)로 악마에게 세례를 끼얹어 준 거죠.”
악마들의 몸체에서는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로 지옥불에 타오르는 악마처럼도 보였다.
아니, 저들의 입장에서는 내가 증오스러운 악(惡)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러면 뭐 어떻단 말인가.
나는 내가 용사건, 악마건, 상관없다.
너희들을 구하러 갈 수만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