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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88화 (89/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88화

“저런 건 처음 봐요.”

김을 뿜어내며 바닥에 뻗어 버린 악마들을 관찰하던 정소현이 탄성을 질렀다.

그런 소리가 나오는 것도 당연한 광경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좀 대단한 사람한테 받은 거라.”

내가 친구 덕을 좀 봤다.

성수(聖水).

흔한 아이템은 아니다.

던전 공략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던 타르토스 대륙에서조차 성수는 상당히 희귀한 아이템으로 취급받았다.

사실 성수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재료 자체는 평범한 편이다.

순은을 넣어 48시간 정제한 물을 며칠간 달빛을 받게 둔 뒤 소금을 넣고…… 그런 식의 유사 과학 같은 과정을 거치는데, 시간이 조금 걸릴 뿐 딱히 구하기 어려운 재료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성수를 제조하는 데 가장 중요한 건 신관이 성력을 담아 하는 축성이다.

그렇지 않아도 희귀한 클래스인 신관만이 만들 수 있는 아이템.

저렇게 공을 들여 제련한 물에 신관의 성력을 담아야만 성수가 완성된다.

심지어 이것만이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신관의 성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마법사의 경우 마법을 사용함으로서 마력을 소진하지만, 마력은 일정 기간 쉬면 회복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성력은 달랐다.

성력은 한 번 바닥을 보이면 다시는 회복되지 않는 힘이었고, 그래서 성력을 성수 따위에 낭비하고자 하는 신관은 많지 않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신관 클래스로 발현한 플레이어들의 주 수입원은 치료를 대가로 돈을 받는 것이었다.

대상자의 신체 능력에 따라 효과가 천차만별인 치료 마법보다 훨씬 안정적이기에, 대개 엄청나게 비싼 편이고 한정된 자원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누군가.

대륙 최고의 신관이 내 베프였다고.

게다가 아리아드네는 내가 마계에서 돌아온 후부터 혹시 성수의 소지량이 줄지는 않았는지 신경을 쓰곤 했다.

그것도 좀 과하게.

사실 아무리 성수를 가지고 있어 봤자 내 존재 자체가 완전히 부정당하는 악마의 홈그라운드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그런데도 아리아드네는 틈만 나면 성수를 만들곤 했다. 내가 괜찮다고 말해도 받지 않으면 바닥에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데, 나라고 별다른 수는 없었다.

그러다 보니 대(對)악마전 최강의 무기인 성수가 내 소지창에 가득하게 된 것이다.

뭐, 결과적으로 상황이 잘 맞아떨어졌다고 할 수밖에.

언제나 고마운 내 친구.

키에에에!

악마들이 내는 끔찍한 비명은 메아리가 되어 널리 울려 퍼졌다.

성수를 직격으로 처맞은 벌레들은 여전히 땅을 기고 있었다.

마계만 아니라면 성수를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하급 악마들에게는 굉장한 대미지를 입힐 수 있다.

덕분에 봐라. 지금 나는 검 한 번 휘두르지 않고 1차 몬스터 웨이브를 넘겼다.

사실상 날로 먹은 셈이다.

루카스, 보고 있냐? 역시 뭐든 창고에 넣고 볼 일이라고. 그러니까 나더러 정리 못한다고 잔소리 좀 그만해라.

“어, 균열이 벌어지는 게 멈춘 것 같아요. 악귀들이 더 이상 내려오지 않네요.”

시스템 메시지를 보지 못하는 정소현이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 2차 몬스터 웨이브까지 대기 시간이 주어집니다. 00 : 20 : 00

2차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되기 전 주어지는 대기 시간이다. 시스템이 보장하는 휴식인 만큼 벌어진 균열 사이로 악마들이 내려오는 것은 잠시 멈출 것이다.

물론, 빛나는 눈들이 균열 사이로 이쪽을 내려다보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만.

저게 2차 몬스터 웨이브에 나올 놈들이겠지.

하여튼, 1차 몬스터 웨이브는 여러모로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나는 체력을 완전히 남겨 두었고, 정소현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무사했으며, 땅에 널브러진 악마들은 하나같이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 2차 몬스터 웨이브도 무난하게 넘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이건 운에 맡겨 보는 수밖에.

일단은 나도 한숨 돌려야겠다. 잠시 포션이라도…….

“잘됐네요. 잠깐 틈이 생겨서.”

……그래, 이렇게 쉽게 넘어가 줄 리가 없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리자 정소현이 팔짱을 낀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눈빛이 뭐랄까, 아주 살벌했다. 항상 붙어 있던 비현실적인 신의 모습이 사라져서 그런지 그 살벌함이 한층 더 생생해졌다.

더불어, 이렇게 보니 스무 살인 양태원의 모습과 더욱 닮아 보인다. 양태원도 인상이 순한 편은 아니라서.

심기 사나운 무당이 아래위로 나를 훑었다.

“그야 지옥에서 만났으니 범상치 않은 사람이겠구나, 하기는 했어요. 그래도 그냥 그러려니 했죠.”

사실 정소현이 나에 대해 이제껏 아무것도 묻지 않았던 게 이상한 일이기는 했다.

갑자기 악마들이 있는 지옥 한복판에서 발견된, 현재의 상식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차림을 한 인간.

갑옷이야 괴상한 취향의 코스튬 플레이라고 쳐도 진검까지 차고 있었다.

게다가 방금 출처도, 정체도 알 수 없는 폭탄으로 수백 마리의 악마를 날려 버리기까지 했다.

이렇게 의심스러운 점이 많은데도 정소현이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던 것은 청룡의 보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방금 내가 한 일은 분명히 그 역치를 훨씬 넘어섰다.

정소현의 눈동자에는 의구심이 가득했다.

“당신, 대체 정체가 뭐예요? 뭘 어떻게 했길래 저렇게 손쉽게 악마를 처리한 거죠?”

“손쉬웠던 건 아닌데.”

나도 나름대로 이 이틀간 매우 바빴다.

돌발형 던전 브레이크라 몬스터가 집중될 장소를 알고 있기는 했지만, 백록담 자체가 워낙에 넓은 크기였다.

또 사람들을 물리려고 폭우를 내린 탓에 나까지 움직임에 제한을 받아야 했다.

덕분에 이 이틀간 먹고 자는 것도 적당히 포션으로 때웠을 정도다.

나는 내 눈 밑을 쭉 늘려 보여 주었다.

“여기 다크서클 안 보여요? 나 지금 너무 피곤해서.”

“말 돌릴 생각은 하지 마시고요.”

이거 안 먹히네. 결국 나는 곤란함을 한껏 드러낸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혹시 예상하는 대답이라도 있습니까?”

허어, 내 말을 들은 정소현이 기가 찬 듯 웃었다.

“왜, 그런 게 있으면 따라 말하기라도 하게요?”

속셈을 들켰다. 이것 참, 곤란하네.

나는 정소현의 시선을 피해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내가 딴청을 피우며 한참 대답을 하지 않자 정소현이 한숨을 푹 쉬었다.

“대답할 생각은 없다, 그거네요.”

“그냥 넘어가면 안 될까요? 솔직히 설명할 자신이 없어서.”

“그쪽 같으면 그냥 넘어갈 수 있겠어요?”

물론 아니지.

만일 내가 정소현의 입장이었다면, 거꾸로 매달아 놓고 제대로 된 정보를 토해 낼 때까지 탈탈 털었을 것이다.

정소현은 내 정체를 따져 물을 권리가 충분했다. 3일 전 나를 마계에서 구해 주었고, 하루는 집을 내주기까지 했으니까.

솔직히 성격 같아선 그냥 내 정체는 미래에서 온 평범한 용사다, 그렇게 말하고 싶지만 이건 시스템상 허락되지 않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진실 외의 어떤 적절한 변명이 있을지도 모르겠고.

심지어 나는 거짓말을 잘하는 타입도 아니었다. 알리시아가 말하길, 내가 거짓말을 하면 다 티가 난다고 했거든.

한참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아하하. 이거 진짜 이상하네요.”

내가 얼마나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을까.

문득 정소현이 웃음을 흘렸다.

“비밀을 가지고 있는 건 항상 제 쪽이었거든요.”

고개를 돌리자 웃음소리와는 달리 미소가 사라진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달을 올려다보는 여자는 사정없이 내리는 비를 그대로, 고스란히 얼굴에 맞고 있었다.

받은 우산, 챙겨 올 걸 그랬다.

“어릴 때부터 그랬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이 내가 귀신을 보고 있으면 대체 뭘 보는 거냐, 하고. 그러고 나서 누가 다치면 내가 저주한 거라고 말하지를 않나, 지옥에서 다쳐서 오면 이상한 소문이 돌고…… 하루는 다들 와서 따져 묻더라고요. 너 정말 귀신 같은 거 보냐고.”

“…….”

“그때 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어요. 설명해 봤자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리고 그게 맞죠.”

정소현이 하늘을 향해 팔을 벌렸다.

“누가 이해하겠어요? 이런 세상이 있다는 걸.”

이런 세상이라…….

나는 묵묵히 정소현이 바라보는 곳을 보았다.

지금 남들이 보기에 정소현은 폭우 속에서 홀로 웃는 미친 여자로밖에 보이지 않겠지.

내 눈에는 성수에 맞아 타 죽어 가고 있는 수백 마리 악마들의 모습이 보였지만,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건지 정소현이 설핏 미소했다.

“그런데, 당신이 나타났네.”

정소현의 지금 심정이 어떨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짐작해 볼 수는 있었다.

정소현은 그 어떤 이와도 같은 시야를 공유하지 못하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어떤 이들과도 다른 삶을 살아온 여자였다.

그래서 타인의 이해를 구하지 않으며, 타인을 납득시키려는 노력도 포기한 사람.

그렇게 무엇도 바라지 않고 살았으니 세상의 위험 같은 허무맹랑한 것은 모른 척해도 되었을 텐데, 결국에는 제 목숨을 던진 여자이기도 했다.

그런 여자가 내게 말했다.

“좋아요, 말하기 싫다면 하지 않아도 돼요.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무슨 조건?”

“조건이라기보다는 부탁이죠.”

정소현이 젖은 머리를 무심하게 털어 내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강예나 씨 말이 맞아요. 솔직하게 인정할게요. 의무를 다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살 수 있다면 살고 싶어요.”

우습게도 그 말을 듣는 순간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나 스스로도 정소현이 살기를 바라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했으면서도, 막상 그 당사자가 저 말을 입에 담았다는 것이.

“내 목숨을 희생하지 않더라도 이 사태를 막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염치가 없지만…… 도움을 받고 싶어요.”

“염치라니…….”

“저, 아이가 있어요.”

알고 있다.

집에서 하염없이 엄마를 기다릴 꼬맹이의 얼굴도, 다 커서 형광 분홍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불량한 꼬맹이의 얼굴도 안다.

“그 애한테 돌아가고 싶어요.”

그래서 여자의 얼굴에 떠오른 그 간절함이 더욱 눈에 밟혔다.

젠장.

나는 눈을 꾹 감았다.

자칫하면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 잊어버릴 것만 같았다.

백록담의 수호령은 내게 파마검을 손에 넣을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하기 위해 이 던전에 나를 들여보냈다.

이곳은 그저 시스템의 필요에 맞추어 구성된 던전일 뿐이다.

내 앞에 서 있는 정소현도, 사실은 이미 죽은 사람이다.

……이건 결국, 유령의 성에서 망자들의 한을 풀어 주었던 때와 별다를 바 없는 상황이지 않은가.

그들은 과거 지키지 못했던 것을, 시스템의 힘을 빌려서라도 한 번 더 지켜 내고 싶어 했다.

반대로 정소현은…… 목숨을 바쳐 무언가를 지켰고, 그리하여 무언가를 잃었다. 그래서 이 여자는 살기를 바란다.

그렇게 생겨난 던전이다.

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건,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나를 향해 정소현이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그러니 저를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이 상황을 해결하는 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내 감정을 떼 놓고 생각하자면, 지금의 상황은 나쁘지는 않아도 마냥 낙관적으로 볼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얼마 있지 않아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매끄러운 목소리가 목을 타고 흘러나왔다.

“물론.”

상황이 좋지 않은 게 뭐 어떻다고.

나는 이 던전을 클리어해 낼 것이다.

“돌아갈 수 있게 해 줄게.”

그것이 이 여자를 구하는 것인지는, 여전히 모르겠으나.

거짓을 토로한 입이 쓰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심정과는 별개로 정소현이 처음으로 환하게 웃었다.

“약속한 거예요.”

이변이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정소현의 머리 위에 빛나는 글자가 떠올랐다.

- 메인 퀘스트 : ‘운명의 씨앗’이 발아할 가능성을 입수하였습니다.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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