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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89화 (90/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89화

갑작스러운 메시지에 내 두 눈을 의심했다.

여기서 메인 퀘스트 메시지가 떠오르다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시스템이 내게 준 메인 퀘스트는 ‘운명의 씨앗을 수집해 운명을 바꾸는 것’이었다.

어딜 보나 선문답 같은 퀘스트라, 앞으로 어떻게 그 의미를 탐색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나는 정소현을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정소현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이 메시지대로라면…… 정소현이 그 ‘운명의 씨앗’이라는 건가?

그러니까 내가 수집해야 하는 운명의 씨앗이라는 게 정소현이라고?

‘아니, 잠깐만.’

그때, 갑자기 떠오른 것이 있었다.

언제나 저 정소현 곁에서 떠나지 않았던 청룡의 눈동자가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

내가 청룡에게 ‘운명의 씨앗’을 물어보았을 때, 청룡은 이렇게 답했다.

- 나의 친우 또한 그 갈림길 앞에 선 적이 있었지.

“친우?”

- 그래, 운명의 씨앗이란 갈림길 앞에서 발아하는 것이다.

그때는 무심히 넘겼던 말이었다. 그것도 그럴 게, 청룡의 친우가 누구인지 대체 내가 어떻게 알겠냐고.

그런데, 지금 내 눈앞에 있지 않은가.

정소현이라는, 청룡의 친우가.

……잠시만.

그러고 보니 이 던전에 진입할 때 헛소리도 좀 들렸던 것 같은데…… 눈을 떠 보니 바로 마계에 있었던 터라 곰곰이 생각해 볼 여력이 없어서 잠시 머리 한편으로 치워 두었던 기억이 주르륵 떠올랐다.

백록담의 수호령이 나를 이동시킬 때 청룡은 “때가 왔다.”라고도 말했었지.

나는 점점 생각에 가닥이 잡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청룡의 말에 짚이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 그런 것을 왜 궁금해하느냐?

그 대답에 무언가 위화감이 들었더랬다.

청룡의 말은 마치, 내가 당연히 운명의 씨앗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또 양태원의 곁에 있던 청룡을 만났을 때 그의 태도와, 정소현 옆에 있는 청룡을 마주했을 때의 태도가 너무 다른 것도 신경 쓰이기는 했다.

‘말이, 안 되기는 한데.’

그렇지만 머리에 한 가지 가설이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아니, 가설 수준의 이야기도 아니었다.

이건 그냥 희망이었다.

논리는 빈약하고, 비약도 많고, 어쩌면 그저 내 희망 때문에 사고가 좁아져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도.

- 메인 퀘스트 : 운명의 씨앗을 수집하여 운명을 변화시키십시오.

저 퀘스트가 혹시, 이미 지나간 과거로 돌아가 정해진 결과를 바꾸라는 뜻이었다면?

‘혹시, 이어져 있을 수도…… 있는 건가?’

이곳이 던전 내에 만들어진 가상 공간이 아니라, 내가 혹시 정말로 과거에 온 것은 아닐까.

“……워어.”

그 가능성을 생각하니 팔뚝에 살짝 소름이 돋았다. 나는 내 팔뚝을 마구 문질렀다.

“아니, 대체 왜 그래요?”

툭, 시야에 얼굴이 들이밀어졌다.

정소현이 내가 이상해 보였는지 이쪽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눈동자에 의구심이 가득했다.

“설마 바로 눈앞에서 잡귀 놈이 이상한 춤을 추는 것 정도로 겁먹은 건 아니죠?”

“그 쓸데없이 구체적인 예시는 뭐야?”

“어라, 청룡 님이 보이길래 귀신도 보이는 줄 알았는데. 안 보여요?”

이번에야말로 정말 소름이 돋았다.

내 표정을 보던 정소현이 비죽 웃었다.

“아, 농담이에요.”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까 진짜인가 본데.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허공을 잠시 쳐다보다가 찝찝한 감각을 털어 버렸다.

보이지도 않는 것에 시선을 빼앗길 여유는 없다.

흘깃 곁눈질을 하니 태평한 동작으로 비에 젖은 부적을 털어 내고 있는 정소현이 보였다.

그래, 정소현.

-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역사, 그 자체가 아니더냐?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청룡의 눈동자가 생각났다. 정소현이 아니라 양태원 곁에 머무르고 있었던 청룡이.

‘일단…… 이게 진짜 과거일지도 모른다는 가정은 배제하지 말자.’

시스템이 나타나고, 던전과 몬스터가 나타나는 세상인데, 과거로 가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못을 박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심지어 나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도 다녀오지 않았나.

아니, 아니다.

실은 그저 내가 희망을 가지고 싶은 것뿐이었다.

청룡은 운명의 씨앗이라는 것이 갈림길 앞에서 발아하는 것이라고 했었다.

그리고 운명의 씨앗은 운명을 바꿀 수도 있다.

이걸 해석해 보면 하나의 답이 도출된다.

그러니까 시스템이 내게 바라는 것은.

“이미 정해진 운명을 나더러 뒤집으란 거지.”

어떠한 인간이 갈림길 앞에 선 순간, 어느 길을 택할 것인지에 따라 운명이 바뀐다.

방금 전, 정소현이 제 목숨을 바치지 않기로 결정한 것처럼.

정소현은 본래 시점에서 제 목숨을 바쳐 재앙을 막았다.

하지만 본래라면 없었을 나를 만났고, 그래서 본인의 선택을 뒤집었다.

내가 희생 없이도 이 재앙을 막을 수 있다고 했으니까.

- 돌발성 던전 브레이크가 완전히 종료될 때까지 ‘정소현’이 생존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정말로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운명을 뒤집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소현뿐만 아니라, 타르토스의 운명도.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 대기 시간이 종료됩니다.

다만, 더 이상 생각을 가다듬을 이유는 없었다.

“어, 뭐가 쏟아지려고 한다.”

정소현 또한 달라진 분위기를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나는 검집에서 검을 빼 들었다. 에이펙스의 광검이 예리한 빛을 뿜었다.

“그래, 또 시작이야.”

그렇게 말하며 옆에 선 정소현의 얼굴을 흘깃 보니 결연한 의지로 가득 차 있었다.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희망만 있을 뿐, 내게도 확신은 없다.

그리고 무슨 가정을 하든 간에, 이 모든 건 내가 이 던전 브레이크를 제대로 클리어해야만 이루어지는 이야기다.

- 경고! 2차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됩니다. 몬스터 등급 제한이 있습니다. (A급에서 F급 랜덤 출현)

- 2차 몬스터 웨이브 활성화 시간 00 : 30 : 00

- 몬스터 웨이브 활성화 시간 동안 해당 구역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잡생각은 일단 털어 버릴 시간이었다.

그나저나 2차 웨이브치고 몬스터 출현 등급이 높다.

‘집중하자.’

나는 다시금 균열이 열리려 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상대가 악마인 만큼 내가 유리한 건 사실이다.

내 클래스는 여전히 용사고, 내 성검은 악을 처단하는 것에 특화되어 있으니까.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었다.

2차 몬스터 웨이브는 1차 때처럼 성수 폭탄만으로 넘기기는 힘들 것이다.

백록담에 묻어 놓은 폭탄이 아직도 제법 남아 있기는 했지만, 악마의 급수가 높아질수록 성수의 효과는 떨어진다.

벨리알쯤 되는 급이라면 설령 성수를 얼굴에 냅다 뿌린다고 해도 좀 매운 소스라도 뿌렸나? 하는 수준일 테고.

즉, 2차 몬스터 웨이브부터 보스급 몬스터는 내가 직접 상대해야 한다.

- 에이펙스의 광검이 투지를 빛내고 있습니다!

난 생각만 해도 피곤한데 내 파트너께서는 신이 났다. 악(惡)을 처단하는 성검 출신이라 그런가.

하긴, 요새 악마를 상대로 활약한 적이 없긴 했지. 심지어 마계에서는 굴욕 아닌 굴욕을 당했으니까.

“이번엔 저도 제대로 움직일 겁니다.”

옆에서 정소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모르게 픽 웃었다.

“그러든가.”

뭐, 그래도 얼마 전 강남에서 맞이했던 돌발성 던전 브레이크 때보다는 상황이 훨씬 나아졌다.

그때와 달리 내 능력치가 어느 정도 복구된 데다, 내가 지켜야 할 것은 다수의 일반인이 아니라 어느 정도 능력을 갖춘 정소현 하나뿐이니까.

이 정도면 해 볼 만한 조건이었다.

게다가 오랜만에 악마를 팰 기회라 그런지 내 파트너도 신이 났고.

“그런데 왜 아까부터 반말이에요? 은근히 말 놓으려는 것 같은데.”

“그래도 돼?”

약간의 기대를 가지고 되물었으나 돌아오는 시선은 차가웠다.

“몇 살인데요, 강예나 씨.”

이 나라는 진짜, 어딜 가나 나이부터 따지네.

나는 혀를 찬 후 진실을 말했다.

“서른.”

정소현이 감탄사를 입에 올렸다.

“와,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하네요.”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다. 청룡이 보증할 테니 물어봐라.

“그럼, 그냥 나이 따지지 말고 피차 말 놓자. 이걸로 쌤쌤이다?”

쌤쌤?

나는 약간 당황했다.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였다. 폴더 폰에 이어 이런 식으로 시대를 상기시키는군.

검을 뽑은 내 옆에서 정소현이 자신만만하게 부채를 펼쳐 들었다. 부채를 들지 않은 손에는 노란색의 부적이 들려 있다. 나름대로 믿음직스러운 모습이었다.

정소현이 부적을 든 채 입을 열었다.

“아, 하나 더 고백할 게 있어.”

“슬슬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무서운데.”

“갑자기 청룡 님의 거리가 좀 멀어진 것 같아. 이렇게 되면 내 활약 범위가 엄청나게 줄어드는데?”

이번에는 이쪽에 갑작스러운 폭탄이 떨어졌다. 나는 깜짝 놀라 정소현을 돌아보았다.

“그걸 왜 이제 말하는 거야?!”

“그야 방금 일어난 일이니까. 음, 나도 상황은 잘 모르겠는데.”

태연한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정소현 또한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눈살을 찌푸린 채 산기슭 너머를 바라보는 눈에 걱정이 들어차 있었다.

“청룡 님이 자의로 내게서 멀리 떨어질 리가 없어. 내가 위험한 걸 아니까. 저쪽에서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가?”

젠장, 나는 혀를 찼다.

어쩐지 일이 좀 잘 풀리려나 싶었다.

따로 시스템 메시지는 떠오르지 않았지만, 다년간 시스템의 장난에 굴렀던 내 뇌리에 짜릿한 예감이 스쳤다.

“망할 밸패 같으니.”

정소현의 도력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그야 지옥을 오가며 홀로 악마를 정화해 왔을 정도로 강력한 무당이니까.

그런 정소현이 죽은 것은 말 그대로 제 목숨을 정말 희생했기 때문이다. 만일 본인이 죽지 않고 이 난장판에서 홀로라도 살아남으려 했다면 얼마든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정소현의 도력의 원천인 청룡의 힘을 차단한다.

이대로라면 내가 이 던전을 쉽게 클리어할 것 같으니, 시스템이 자체적으로 내게 페널티를 부여한 것이다.

“진짜 X같네 이거.”

“와, 예나 씨 생각보다 입이 험하다.”

내가 욕설을 내뱉자 정소현이 옆에서 깜짝 놀랐다.

네가 내 입장이 되어 봐라. 욕이 안 나오나.

“그럼 현재 상태는 어떤데? 도력은 아예 못 쓰는 거야?”

“에이, 설마. 나도 꽤 강해. 청룡 님이 없어도 아까 전에 나온 악귀들 수준이라면 가볍게 퇴치할 수 있어.”

“그보다 센 놈들이면?”

“그건…… 숫자와 질에 따라 다를 것 같은데.”

정소현이 슬슬 열리고 있는 균열을 올려다보며 대꾸했다.

대답 여하에 따라서 2차 웨이브가 진행되는 30분 내내 정소현을 들고 다닐까, 하는 생각까지 했는데 그래도 훨씬 양호했다.

청룡의 비호 없이도 정소현 혼자 하급 악마를 상대로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다는 이야기지. 상급 악마는 힘들 테고.

그 정도면 됐다.

시스템 메시지대로라면 2차 몬스터 웨이브에서는 A급 몬스터까지 출현한다.

그리고 지금의 내게 악마 계열 A급 몬스터는 방심할 수는 없어도 어려운 상대인 건 아니었다.

다만 정소현을 지키며 싸우기에는 어렵고.

그러니 내가 A급 몬스터를 처리하는 30분 정도만 정소현이 홀로 버텨 준다면 어떻게든 될 것이다.

다만 이렇게 되면…… 그 A급 몬스터가 어느 정도 수준이냐에 따라 상황이 크게 갈릴 것이다.

약간의 불안한 예감과 함께 다시금 하늘이 열리기 시작했다.

폭우가 멈추자 스산해진 밤공기가 피부를 스쳤다. 괴상한 붉은 달빛 사이로 넓어진 균열이 보였다.

그리고 그 균열을 찢고, 다시 악마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시스템 메시지도 미친 듯이 떠올랐다.

- 시스템 알람 : 몬스터의 등급과 종류를 조회할 수 있습니다.

조회할 필요 없어. 어차피 다 베어야 하는데 뭐 하러.

“진짜 많다.”

정소현도 기가 질려 대꾸했다.

아까 전처럼 인간의 것이 아닌 괴성과 함께, 이번에는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들이 하늘 위에서 울려 퍼졌다.

[인간, 인간, 인간, 인간!]

[죽인다죽인다죽인다!]

인간에게 의사를 전달할 머리가 있다는 것 자체가 하급 악마보다는 한 수 위라는 증거였으나,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이게 무슨 웹소설도 아니고.”

고루하기 짝이 없는 대사들이었다.

하기야, 악마란 것도 고전적인 악당이기는 하지.

나는 곧 안력을 돋워 숱한 악마들의 무리 사이를 살피기 시작했다.

지금은 A등급 이상의 악마를 빠르게 찾아내어 처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니까.

분명히 저 무리 속 어딘가에 A급 몬스터가 섞여 있을 텐데…….

“어, 저거 저번에 봤던 놈 아닌가?”

그때, 정소현이 부채로 하늘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푸른 술이 달린 부채를 따라 내 시선도 돌아갔다.

시스템 알람은 내가 그것을 인지함과 동시에 울렸다.

- A급 몬스터, 황금의 부역자

하늘의 균열 속에서 익숙한 형체의 악마가 나타났다.

이지러진 붉은 달을 뒤로한 악마가 삼지창을 들고서 신나게 소리를 질렀다.

“황금, 약탈, 노예―!!”

익숙하다 못해 징그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관통했다. 정소현이 내 옆구리를 찌르며 속삭였다.

“그때 봤던 놈 맞죠?”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맞다.

“저거, 마몬이잖아.”

균열을 뚫고 쏜살같이 이쪽으로 날아 내려오는 마몬의 얼굴이 섬광처럼 내 뇌리에 박혔다.

검은 부리를 가진 새의 얼굴을 한 악마.

물론 그 재수 없는 얼굴 이상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시스템 메시지의 내용에 감사했다.

“하하하.”

시스템 새끼야, 밸런스 패치나 한다고 욕해서 미안하다.

이런 패치라면 얼마든지 환영이었다.

마계에서는 S급이었지만 A급으로 등장한 마몬이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두리번대고 있었다.

내가 마계에 가면 클래스 역보정을 받는 것과 같은 이치로 저 새끼도 등급 역보정을 받은 모양이다.

기분 탓인지 저 파리 날개가 한껏 작아 보인다. 삼지창조차 초라해 보인다.

“으하하하! 여기가 인간 세상이구나! 내 보물은 어디에 있지?”

이건 정말이지 절호의 기회였다.

“A급, A급이란 말이지.”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 파리 새끼.

그렇지 않아도 마음에 안 들었는데 잘됐다.

“정소현 씨, 잡놈들은 맡겨도 되겠지?”

“물론!”

“죽지 마.”

나는 주먹을 뚜둑, 꺾었다.

마계는 악마들의 홈그라운드라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지만, 인간의 세상은 다르다.

이번에는 이쪽이 홈 어드밴티지를 받을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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