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91화
릴리스.
마계에서, 아니, 아마 모든 세계를 통틀어 가장 강할 마왕.
과거에 나는 이미 릴리스와 한 번 부딪혔던 적이 있었다.
그건 아주 끔찍한 기억이었다.
나는 잠시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젠장, 밸패 해 줬다고 좋아할 게 아니었다. 어쩐지 2차 몬스터 웨이브까지 좀 쉽게 잡았다 했는데.
사실 마몬이 나왔을 때부터 약간 감이 쎄하기는 했었다. 마몬의 주인은 릴리스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설마 이 던전에서 릴리스가 보스 몬스터로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눈앞에 사슴 새끼가 있다면 멱살을 잡고 탈탈 털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렇게 날 엿 먹여?
“이렇게 즐거울 수가.”
붉은 기를 띤 아마 빛의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릴리스가 요요하게 웃었다.
어쩌면 겉보기에는 평범한 인간처럼도 보였으나, 그 지나친 아름다움은 확실히 이질적이었다. 어둠을 그대로 녹인 듯한, 몸을 타고 흘러내리는 부드러운 옷은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 모습은 인간을 홀리는 악마다웠다.
“저건 대체…….”
옆에서 정소현의 몸이 굳은 것이 느껴졌다. 그만큼 릴리스의 존재감은 장난이 아니었다.
- S급 몬스터 : 욕망하는 화염
- 보스 몬스터가 해당 구역을 벗어나기 전까지 플레이어는 해당 구역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 클리어 조건 : 제한 시간 내에 보스 몬스터를 처치하십시오.
시스템창의 글씨가 이렇게 허망해 보인 적이 있던가.
“S급은 개뿔이.”
욕설이 절로 튀어나왔다.
마왕은 본래 시스템상 처치가 불가능한 존재지만, 인간 세상에 나올 때는 시스템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몬스터가 되는 작자들이다.
그래서 몬스터로 등장한 것 자체는 놀랍지 않았으나…… S급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사실 급만 놓고 보자면 강남 던브에서 공략했던 리치와 같다.
그때 나는 ‘용사를 기리는 망토’를 사용했고, 제한된 10분 내에 리치를 끝장냈다.
물론 이우연의 도움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내 본신의 능력치를 두고 보자면 혼자서도 처리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와, X됐다.’
나는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검을 쥔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릴리스라는 존재의 위압감에 눌린 것이다.
본래의 1/3 수준인 내 능력치 문제를 제외하고도, 위압감만으로 따지자면 유령의 성 던전에서 만났던 SS급 보스 몬스터와 비견할 만했다.
S급이라는 것 자체가 사기 매물이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릴리스는 본신의 능력 외에도…… 상대하기가 무척이나 까다로운 악마였다.
릴리스는 흥미로운 눈으로 주위를 훑어보더니 다시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전신을 훑는 끈적한 눈길에 소름이 돋았다.
영원처럼 길게 느껴지는 찰나가 지나가고, 곧 릴리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라, 왜 이렇게 약해졌어?”
“………….”
“누가 다 녹여 먹고 껍데기만 남긴 사탕 같구나, 레나.”
그 말에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정소현이 경악하는 눈으로 나와 릴리스를 번갈아 보았다.
“저 악귀와 아는 사이에요?”
“악귀? 그것 참 신선한 칭호로군. 마음에 들어.”
릴리스는 저를 비하하는 단어에도 명랑하게 웃고 있었다. 개소리도 정도껏 해야지.
나는 이를 악물고 릴리스에게 물었다.
“너, 나를 어떻게 알아?”
현 시점은 2005년의, 그것도 대한민국이다.
아무리 마계가 타르토스와 한국, 양 세계와 이어져 있는 공간이라고 한들 이 시점의 릴리스는 나를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릴리스는 나를 레나라고 불렀다.
그 이름을 알고 있다는 건.
그러자 릴리스는 한 점의 고민도 없이 맑은 웃음소리를 터트렸다. 축축한 공기와 어울리지 않는 소리였다.
“어머나,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릴리스가 굽이치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코웃음을 쳤다.
“시간의 흐름은 순리지. 악이 순리를 따르는 걸 봤니? 내게는 과거도 미래도 없어. 현재만이 존재할 뿐이지.”
“네가 정말 릴리스라면 내가 그딴 선문답을 싫어하는 것도 알 텐데.”
“그래서 이렇게 답해 준 거잖니? 내가 너 좋을 짓을 일부러 하는 건 내 존재 의의와 어긋나니까.”
확실하다.
저건 내가 아는 릴리스였다.
나는 한 번 더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릴리스 덕에 알게 된 정보는 있었으되, 당장에는 그따위 정보보다 이 눈앞의 릴리스가 정말로 나를 아는 릴리스라는 점에 느끼는 절망이 컸다.
차라리 나를 알지 못하는 릴리스라면 조금이라도 희망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릴리스는, 이미 과거에 서로 모든 패를 까 보여 주며 싸웠던 전적이 있는 여자였다.
그런데 지금 나는 내용물을 약간 채운 허접 깡통 상태고.
“X됐다, 진짜…….”
“너도 입 험한 건 여전하네, 내 호박파이야. 음, 번역이 제대로 되고 있는 거겠지?”
릴리스가 윙크하는 꼴을 보니 구역질이 올라왔다.
번역이고 뭐고, 릴리스가 내뱉는 말의 대부분은 헛소리이므로 제대로 귀담아들은 적은 드물다.
릴리스는 내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것조차 재미있는 듯 홀로 주절대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이렇게 약해진 용사 앞에 날 내보낼 수가 있담? 신에게 어지간히 밉보였구나.”
“용사?”
옆에서 정소현이 의아한 듯 되물었으나 릴리스의 시야에는 정소현이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나란히 서 있던 정소현보다 한 발자국 더 릴리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헛소리하는 건 변함없군, 릴리스.”
그 거리를 기꺼워하듯 나를 끈끈하게 훑는 눈길이 느껴졌다. 즐거워하는 악마의 입술 사이로 붉은 혀가 언뜻 내비쳤다.
“아니면, 매우 사랑받고 있는 건가?”
“무슨 개소리를…….”
“그거야, 그거. 신께서는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시련만을 예비하시니.”
언뜻 벨리알의 말이 떠올라 한층 더 불쾌해졌다. 나는 굳이 그 불쾌함을 숨기지 않았다.
“악마 새끼들이 신을 왜 찾아. 그냥 죽어.”
벨리알도 그렇고, 악마 새끼들은 답지도 않게 자꾸 저따위 소리를 해댄다. 그럴 거면 악마답게 지옥에 처박혀 회개의 기도나 올렸으면 좋겠다.
릴리스는 내 말에 코웃음을 쳤다.
“흥, 죽을 수 있다면 진작에 죽었지. 죽음 또한 축복이 아니겠어? 인간이야 모르겠지만.”
웃기고 있군. 저 새끼들의 말을 빌리자면 한계는 축복이고, 내려진 시련은 사랑이다.
“그렇게 따지자면 지옥에 내몰린 악마야말로 사랑받는 자식들이겠군.”
“뭐어? 아하하하!”
마주친 릴리스의 눈길에는 강렬한 욕망이 그득했다. 그 욕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정말이지 불쾌한 일이었다.
“아아, 보면 볼수록 내 성에 데려가서 표본으로 박제해 두고 싶어. 그리고 영원히…….”
“그놈의 표본을 아직도 갖고 있나?”
나는 릴리스의 말을 끊었다.
표본.
그건 릴리스가 제 성에 전시해 놓은 각종…… 생명체를 뜻하는 것이었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역겨움을 끌어모은 것 같은 광경이었으므로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다. 어지간히 비위가 좋더라도 그 모습을 보면 구토하게 될 거다.
“분명히 내가 다 불태워 버렸는데.”
그래서 예전에 릴리스의 성에서 고약한 ‘컬렉션’을 발견했을 때 내가 모두 화장시켰더랬다.
릴리스가 약간 고민하는 얼굴로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더니 곧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어머, 나중에 그런 일이 일어나? 완전 재미있겠다.”
“……너, 아까 전엔 기억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으음, 인간 세상에 나왔을 때만 잠시 동기화된다고나 해야 할까~ 신께서 허락하신 부분만 알게 된다고 해야겠지.”
“…….”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지, 릴리스와와 대화를 통해 정보를 더 캐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지금 내 뒤에는 정소현이 있었다.
내가 우선순위를 떠올리는 동안에도 릴리스는 혼자서 나불나불 떠들어 대고 있었다.
“뭐, 수만 년간 모아 온 컬렉션을 잃은 건 뼈아프겠지만 그만큼 너는 귀중한 애장품이 될 거야.”
“꿈도 꾸지 마.”
웃기고 있군. 저 사이코패스의 노리개가 되느니 당장 칼로 목을 찌르겠어.
내 뒤에 선 정소현이 목소리를 낮추어 내게 물었다.
“정말 아는 사이인가 보네. 악귀 맞지?”
나는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릴리스의 헛소리를 흘려듣는 동안에도 머리는 한창 돌아가고 있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넘길 수 있을지.
청룡에게서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날 거란 정보를 들은 뒤로 나도 제법 준비를 단단히 했다.
하지만 이틀의 시간이란 어쩔 수 없이 짧았고, 모든 역량을 발휘했다고 하기엔 부족했다.
또 아무리 3차 몬스터 웨이브에서 S급의 보스 몬스터가 나올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지만, 설마 릴리스 정도 되는 놈이 보스 몬스터로 나올 줄은 몰랐고.
그야말로 이건 내 예상을 한참 웃도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하지?’
머릿속에 수천 가지의 가능성이 떠오르고, 꼭 그만큼의 부정적인 생각이 뇌리를 잠식했다가 함께 사라져 갔다.
손에 들린 에이펙스의 광검이 답답함을 토로하듯 가볍게 울었다.
하지만 쉽게 달려들 수가 없었다.
릴리스는 마법은 물론이고 근접 전투까지 소화 가능한 괴물이다. 릴리스의 손톱은 어지간한 중병기를 그대로 잘라 낼 정도의 강도를 자랑하며, 근력도 내 본래 능력치와 맞먹을 정도였다.
지금 S급인 걸 보면 어느 정도 너프를 먹기야 했겠지만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다.
게다가 나 혼자 싸우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뒤에 있는 정소현을 지켜 가며 릴리스와 싸워야 한다면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너무 좁았다.
그렇게 내가 고민에 빠진 동안에, 릴리스가 먼저 움직였다.
“그나저나 내가 겨우 S급이라니, 너무한 거 아니니? 제한도 참.”
악마는 손을 뻗어 제 눈앞을 툭, 툭 건드렸다.
그건 마치 플레이어가 상태창을 건드리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악마의 손길에 닿은 것은.
- S급 몬스터 : 욕망하는 화염
- 클리어 조건 : 제한 시간 내에 보스 몬스터를 처치하십시오.
현재 시점에서는 나만 볼 수 있는, 황금색의 전체 공지.
나는 이를 악물었다.
악마의 손길에 닿은 글자가 물에 닿은 달빛처럼 이지러졌다. 주변 공기에 누군가 돌을 던진 것처럼 거대한 파문이 일었다.
“신에게 놀아나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으나…… 어차피 놀 거라면 제대로 놀아 볼까? 그게 재미있겠지.”
릴리스의 손길에 일그러진 글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곧 다시 제대로 된 모양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다만, 이번에는 다른 형태로.
- ‘욕망하는 화염’의 욕망이 시스템의 눈을 가립니다.
그와 동시에 흰 스파크가 공중에서 튀었다.
아무것도 없는 공중에서 일어난 마찰이 릴리스의 얼굴에 쏟아져 얼굴 거죽을 녹였다.
순식간에 아름다운 얼굴이 부분 부분 녹아 붉은 살점과 뼈를 드러내어 괴이한 몰골이 되었다.
그러나, 릴리스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웃었다.
- S급 몬스터 : 욕망하는 화염
- 클리어 조건이 추가됩니다.
- 클리어 조건 : 보스 몬스터와의 내기에서 이기는 경우 클리어 판정됩니다.
나왔다.
릴리스의 전매특허.
시스템의 개변(改變).
인류 최초의 악마, 릴리스에게는 시스템을 건드릴 수 있는 능력이 존재한다.
물론 예전에 싸웠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릴리스의 능력에 제한이 없는 건 아니었다.
지금처럼 시스템이 이미 제시한 클리어 조건을 완전히 바꾸지도 못한다. 자신에게 시스템이 매긴 등급을 변경할 수도 없다.
다만, 지금처럼 제 입맛에 맞게 클리어 조건을 추가할 수는 있다.
저런 ‘빈틈’이 허용되는 것은 아마도 시스템상 플레이어 측에 유리하다고 판정되기 때문인 듯했다.
물론 실제로는 유리하고말고. 저것 자체가 그냥 인간을 농락하려는 수단만 아니었다면 말이지.
개 같은 사기캐.
“뭐지? 방금 뭔가 흐름이…….”
나와 달리 변경된 시스템의 글자를 읽지 못하는 정소현이 그렇게 물었다가 무엇을 느낀 것인지 입을 다물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즐거워 죽을 것 같은 표정의 릴리스가 양손을 제 볼에 대고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었다.
저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예상이 갔다.
“레나, 선택을 하렴.”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군. 너무 정확한 나머지 내게 예언 스킬이라도 생긴 줄 알았다.
“선택은 개뿔.”
“어머나, 선택지가 늘어난 건 너에게는 오히려 유리한 기회 아니니? 지금의 너는 나를 이기지 못하니까.”
저 말을 그냥 듣고 있어야 하는 작금의 상황이 뼈아팠다.
심지어 저게 사실이라는 점이 더더욱.
그렇지만, 릴리스의 말이 옳았다. 현재로서는 클리어 조건이 릴리스를 ‘처치’하는 것이라면 가망이 없다시피 했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 덧없이 떨어지는 건 내 미학과는 어긋나. 악은 선이 있기에 의미가 있는 법이거든.”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종족이었다. 겨우 그런 이유로 시스템의 클리어 조건에까지 손을 대다니.
나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떨림은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으나, 그걸 릴리스가 보는 것은 죽어도 싫었다.
“유혹적인 선택지일 거야. 한 가지만 포기하면 되니까.”
인간을 사랑하는 악마는 붉은 달과 갈라진 균열이 떠오른 하늘을 황홀하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그곳에 여기를 내려다보는 관중이라도 있는 것처럼.
“네 등 뒤의 그 ‘혹’을 내게 바친다면 너는 살려 주마. 어때?”
- 욕망하는 화염이 플레이어, ‘방랑하는 구도자’에게 내기를 제시하였습니다.
- 내기에 응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