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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92화 (93/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92화

“엿이나 먹어.”

“엿이 뭔데?”

“혹?”

다소 웃긴 문답 사이에 정소현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이 들렸다. 정소현의 목소리를 들은 릴리스의 입이 쭉 찢어졌다.

릴리스가 무언가를 말하기 전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말려들지 마. 저게 쓸데없는 수작 부리는 거니까.”

이제까지 의도적으로 정소현을 릴리스의 시선에서 배제하고 대화에 끌어들이지 않으려 했지만, 아무래도 별 소용이 없었던 모양이다.

릴리스는 이미 내가 이 던전에서 가장 최우선으로 지켜야 할 목표를 알아차렸다.

쳇. 나는 혀를 찼다.

진짜로 망했다. 물론 릴리스가 나타난 순간부터 순조롭게 망해 가고 있었다만.

뒤를 돌아보자 곧바로 정소현과 눈이 마주쳤다. 시선의 스침은 찰나였으나 나는 정소현이 이 상황을 완전히 파악했음을 알았다.

그 증거로 정소현은 묻지도 않았는데 곧바로 내가 가장 알고 싶은 정보를 말했다.

“청룡 님의 기척은 아직도 멀어. 보내 주는 힘이 미약해.”

즉, 아직도 밸런스 패치가 진행 중이라는 건가.

이게 말이 되냐. 릴리스가 나타났는데 이쪽에도 청룡이 우군으로 붙어야 하는 거 아니냐? 그렇더라도 이쪽이 불리한 것 같은데.

그렇게 한탄하고 싶긴 하지만 현실은 차가웠다.

그럼 이 시점에서 냉정하게 평가해 정소현이 대응 가능한 몬스터는 높게 잡아도 B급에서 C급이다.

3차 웨이브에서 몬스터의 숫자가 늘어나는 데다, 무엇보다도 보스 몬스터가 릴리스인 이상 정소현이 홀로 버티는 건 불가능하다.

심지어 정소현은 2차 웨이브에서 어느 정도 힘을 소모한 상황.

또 릴리스를 상대로 싸우게 된다면 나도 정소현을 도울 만한 틈이 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결론은 금세 나왔다.

릴리스가 내 목적을 알게 된 이상 이대로 전투를 시작할 수는 없었다.

결론이 나온 이상 행동은 빨랐다.

- 님페의 바람을 사용합니다.

“으악!”

정소현의 짧은 비명이 귀를 울렸다.

더 볼 것 없이, 나는 정소현을 들고 뛰기 시작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릴리스의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멀어져 갔다.

“그래, 숨바꼭질도 재미있겠지!”

재미있을 것도 많다.

땅을 박찰 때마다 릴리스에게서 멀어지고 있었으나 릴리스는 굳이 나를 제지하지 않았다.

‘잘난 척하기는.’

이것도 예상 범위 안이었다.

기분이 더럽기는 하지만 릴리스는 쾌락주의자고, 최고의 장난감인 나를 발견한 이상 최대한 오래, 길게, 최악의 방법으로 놀리고 싶을 것이다.

릴리스가 좋아하는 것은 인간에게 어려운 선택지를 강요하며 흔들리는 모습을 보는 것.

물론 나야 단번에 그딴 선택지 따위는 걷어찼다만 저 여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뻔했다.

시스템에 간섭까지 할 수 있는 악마이니, 이 던전 브레이크의 활성화 시간 동안 내가 결계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도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돌발성 던전 브레이크의 결계는 백록담을 포함해 제법 넓게 형성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산 위의 평지인 데다 숨을 만한 곳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도망쳐 보았자 자신의 손바닥 안이니, 지금 내가 정소현을 데리고 도망치는 것도 용인하는 것이다.

그 편이 더 재미있을 테니까.

악마의 오만함이 몸서리나게 싫었다.

퍽!

비에 젖은 흙을 밟을 때마다 질퍽한 진흙이 튀어 올랐다. 어깨에 쌀자루처럼 메인 정소현이 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그 혹인 거지?”

“미리 말해 두겠는데 헛소리할 거면 집어치워!”

“둘 다 죽는 것보단 하나라도 사는 게 낫잖아!”

“집어치우라고 했지!”

누구 하나라도 죽을 작정이었다면 애초에 이런 곳에 오지도 않았다.

등에 메고 있는지라 정소현의 심장 소리가 빠르게 뛰는 것이 곧바로 느껴졌다.

“그런 말도 뒤를 한 번 돌아보면 못 하게 될걸.”

그것 또한 정소현이 굳이 알려 주지 않더라도 느껴졌다.

두둥.

하늘 저 너머에서 북소리가 울렸다.

그와 동시에 릴리스의 명랑한 목소리도.

“나의 수족, 마몬 휘하의 군단을 이쪽으로 소환한다.”

“장난하냐?!”

밸런스 어디 갔는데!

돌아보지 않아도 상황이 파악되었다. 릴리스가 제 휘하의 마족 군단을 소환하고 있는 것이다.

잠시 곁눈질을 했더니 한쪽으로 밀어 둔 몬스터 조회 알람이 미친 듯이 떠올랐다.

- A급 몬스터, 뱀과 닭의 혼종이 출현하였습니다.

- B급 몬스터, 전염하는 갈망이 출현하였습니다.

- A급 몬스터, 진흙의 발자취가 출현하였습니다.

저거 차례대로 바실리스크, 흡혈박쥐, 코카트리스잖아. 익숙한 라인업이었다.

“아까보다 훨씬 많은 숫자야.”

정소현이 시스템보다 친절하게 등 뒤의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나는 뒤돌아보는 대신 한 번 더 땅바닥을 박찼다. 님페의 바람은 충실하게 내 몸이 앞으로 나아가도록 도와주었다.

“내려.”

둥그렇고 희뿌연 결계의 끝.

결계에 부딪치기 직전에 나는 어깨에 메고 있던 정소현을 땅에 내려놓았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땅에 내려선 정소현이 애매한 얼굴로 눈앞의 결계를 바라보며 눈을 찌푸렸다. 손을 뻗어 만지는 걸 보니 결계가 확실하게 보이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여기에 뭐가 있네. 대체 뭐지? 이런 건 처음 보는데. 수호부의 일종 같기도 하고.”

“악마가 불러낸 결계겠지. 여기서 더 도망칠 순 없을 것 같아.”

사실대로 말할 수 없으니 대충 헛소리를 주워섬겼지만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내 말을 들은 정소현의 표정에 얼핏 절망이 스쳐 지나갔다.

“그럼 어차피 도망칠 수도 없는 거네. 어떡하지?”

“어떻게 하긴.”

이 결계는 인간뿐 아니라 몬스터도 넘지 못한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이걸로 등 뒤에서 습격해 올 일은 없는 거지.

알리시아라면 내 생각에 동의해 줬을 거다. 물론 우리 둘 다 루카스한테 말도 안 되는 헛소리하지 말라고 혼났을 거고.

……현실 도피는 이 정도로 할까.

- 3차 몬스터 웨이브 활성화 시간 00:52:59

릴리스가 노가리를 까 준 덕분에 8분이나 그냥 흘러갔다. 저 말 많은 악마가 유용할 때도 있군.

하여간 내가 버텨야 하는 시간은 52분.

릴리스 쪽을 흘깃 보니 결계의 중앙에 선 말 많은 악마는 여유롭게 이쪽을 관망하고 있었다.

상황이 돌아가는 꼴이 이래저래 만만치 않았다.

나는 정소현 몰래 내 시스템창을 바라보았다.

- 돌발성 던전 브레이크가 완전히 종료될 때까지 ‘정소현’이 생존해야 합니다.

최악의 상황까지 고려해야 하나.

사실 정확히 따지자면 나는 돌발성 던브를 클리어하는 것이 아니라 종료 시까지 정소현의 목숨을 지키기만 하면 된다.

돌발성 던브의 경우 활성화 시간이 제한되어 있으니 52분 후면 저놈은 사라진다, 이 말이다.

남은 시간 동안 릴리스를 처치하는 것이 아니라 정소현의 생존에 주력한다면 조금쯤은 가능성이 생길지도 모른다.

다만, 돌발성 던브의 클리어가 실패로 끝난다면…… 살아남은 몬스터들이 결계 밖으로 기어나가게 된다.

“젠장.”

머리가 아팠다.

솔직히 말해 릴리스가 뜬 이상 정소현을 지켜 내는 것만으로도 지금의 내게는 벅찬 일이었다.

그러니 우선순위를 따지자면 나는 지금부터 이 돌발성 던브 클리어는 포기하고 정소현의 목숨을 부지하는 것에만 전력을 다하는 게 옳았다.

정소현만 살아남는다면 나는 이 던전을 클리어할 수 있고, 내 현실로 돌아가 백록담의 수호령을 때릴 수 있겠지.

“고민할 게 뭐가 있어?”

머리를 감싸 안고 고민하는 나를 정소현이 또랑또랑한 눈동자로 주시하고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는 맑았지만 얼굴은 죽상이었다.

“이제까지 노력해 준 것만도 고마운 일인데. 괜찮아요, 나는.”

저쪽은 또 무슨 착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완전히 다른 고민 중이거든, 나는.

짙은 먹물 같은 눈동자가 약간 투명해지더니 이제 메마른 얼굴에 수분을 더했다.

“나는 죽어도 진짜 미련, 흡.”

“……그런 말할 때는 웃으면서 해야 멋있는 건데.”

“아, 나도 안다고!”

정소현이 콧물을 추스르며 바락 화를 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 뭘 고민하고 있나.

짝!

“왜, 왜 그래?”

나는 내 두 뺨을 손바닥으로 한 번 쳤다. 비릿한 맛이 혀에 감돌았다. 정신이 바짝 들었다.

아무래도 릴리스라는 존재 때문에 나도 잠시 멘탈이 나갔던 모양이다.

‘포기?’

그딴 단어는 내 사전에 없다.

나는 정소현에게서 ‘메인 퀘스트’의 가능성을 보았다. 정소현이 살기로 결정한 순간 떠올랐던 글씨.

설령 살아남는다고 한들 몬스터들이 이 결계 밖으로 기어나간다면 결국 정소현이 최초로 하고자 한 일은 무너지는 셈이다.

그러면 운명을 바꾼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겠지.

게다가 내 예상대로 이곳이 만일…… 그저 시스템이 구성한 연극 무대가 아니라, 정말 현실과 이어진 과거라면…….

나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국에 돌아온 후로 던전 난도가 왜 다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난 나름대로 착하게 살아온 것 같은데 말이지.

더 한탄하려면 몇 시간이 있어도 모자라겠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나는 빠르게 소지창을 소환해 아이템 목록을 쭉 훑었다.

그리고 곧 필요한 것을 찾았다.

잠시 정소현을 흘끗 건너본 뒤 그녀가 고개를 돌렸을 때 아이템을 소환했다.

“이거.”

열두 가지의 보석이 박힌 은색의 팔찌가 허공에서 나타났다. 갖가지의 돌이 박혀 있는데도 호화롭다기보다는 어쩐지 투박한 인상을 주는 팔찌였다.

팔찌를 손에 드니 하마터면 상황도 잊고 약간의 감회에 젖을 뻔했다.

그것도 그럴 게, 이 팔찌의 원주인은 아리아드네였으니.

팔찌를 쥔 나는 훌쩍이는 정소현에게 손짓했다.

“그만 울고 여기 손 좀 줘 봐.”

“어, 어?”

눈물을 그치려고 애쓰던 정소현이 얼떨떨한 틈을 타 손목에 팔찌를 채워 줬다. 어느 정도 확신은 있었지만, 나는 시스템창이 떠오를 때까지 약간 긴장했다.

- ‘정소현’은 해당 아이템을 착용할 수 있습니다.

- ‘배척하는 성벽’이 활성화됩니다.

됐다!

활성화 메시지가 떠오르는 동시에 웅, 하는 진동과 함께 정소현을 중심으로 반투명한 성벽이 생성되며 공간을 확보했다.

- 보호 공간이 생성됩니다. 악(惡), 마(魔) 속성의 몬스터로부터 착용자를 보호합니다.

- 활성화 시간은 착용자에 따라 달라집니다.

- ‘배척하는 성벽’이 착용자의 상태를 측정합니다……

- ‘배척하는 성벽’의 활성화 시간 00:45:00

- 활성화 시간 동안 해당 공간 내에서 나갈 수 없습니다.

- 활성화 시간 동안 살생을 저지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눈 뜨고 코 베인 셈인 정소현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이게 뭐야?!”

순식간에 반투명한 성벽 안에 갇혀 버린 정소현이 성벽을 더듬더듬 만지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투명한 벽에는 아무런 흠도 나지 않았다.

“다행이네. 가능성은 반반이었는데.”

“그러니까 이게 대체 뭐냐고요!”

뭐긴 뭐야, 아이템이지.

이 아이템은 ‘배척하는 성벽’이라는 이름의 팔찌.

아리아드네가 본인은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겠다며 버린 것을 내가 주워 두었더랬다. 성직자 계열만 착용 가능한 팔찌라 내가 써 본 적은 없지만.

무당인 정소현도 따지자면 비슷한 계열이니 착용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서 실험해 본 건데 먹혀서 다행이었다.

“그나저나 45분이라니, 생각보다 길게 나왔네.”

30분 정도면 감지덕지라고 생각했는데. 괜히 영험한 무당이 아니었다.

어쨌든 이걸로 정소현의 생존이 약 45분 정도 보장되었다.

“강예나 씨!”

“착각하지 마. 어차피 계속 버틸 수는 없으니까.”

내가 차갑게 말하자 성벽 너머로 보이는 정소현의 표정이 굳었다.

“그러니까 이 아이템, 아니, 벽이 버티고 있을 때 어떻게든 청룡과 접촉할 방법을 찾아봐 줘.”

“……!”

정소현의 눈이 홉떠졌다.

내가 한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청룡의 개입이 막힌 것은 현재 상태에서 플레이어 쪽이 유리하다는 시스템의 판단 때문이다.

하지만 릴리스가 등장한 순간 이 밸런스의 저울은 이미 악마 쪽으로 기울었다.

그렇다면 청룡의 개입도 다시 가능해질 확률이 없지는 않다.

“마계에서도 악마들의 눈을 가려 줬으니 청룡이 오면 어떻게든 되겠지.”

다만, 정말로 청룡이 와서 릴리스를 처리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저 대악마를 감당할 수 있는 존재는 몇 안 되니까.

그러나 이 ‘배척하는 성벽’ 아이템의 활성화 시간이 끝난 후 청룡이 정소현을 보호해 주는 정도는 가능할지도 몰랐다.

청룡은 정소현을 살리고 싶어 하니 접촉만 할 수 있다면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 정도의 기적쯤은 이 여자에게 일어나길 바랐다.

투명한 성벽 안에서 정소현이 주먹을 세게 휘둘렀다. 내가 움찔할 정도로 굉장한 기세였다.

“……예나 씨, 이건 진짜 아니야. 나가게 해 줘. 저 악귀가 원하는 건 나잖아.”

“그러니까 착각하지 말라고 했지. 저게 원하는 건 그쪽이 아니라 내가 고민하고 절망하는 모습이야. 나는 저게 원하는 걸 줄 생각이 없어.”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상황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 건지 정소현이 얼굴을 엉망진창으로 일그러트렸다. 이미 울 대로 울어서 붉어진 눈가가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그 눈빛에서는 안도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염치없이 도와 달라고 했다지만…… 본인 목숨까지 걸라는 건 아니었어. 당신을 희생해서 날 구해 달라고 한 게 아니었다고!”

“내가 뭘 희생하고 누굴 구해. 그런 생각한 적 없어.”

“그렇게 말하면 속이 좀 나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

나는 등을 돌렸다. 릴리스가 내 선택을 기다리며 유유자적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정말이야. 내가 뭘 희생해?”

날 희생해 누군가를 구한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도 않았다.

그저 내 앞에 정소현을 지켜야 하는 많은 이유가 놓여 있었을 뿐.

내게는 파마의 검이 필요했고, 게다가 메인 퀘스트의 가능성도 보았다.

여기서 던전 클리어를 포기할 수는 없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뿐이야.”

백록담의 수호령은 내 마음을 잘못 읽었다. 내가 행동하는 모든 이유는 온전히 나였다.

나는 누군가를 구하러 가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저 내게는 다시 한번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을 뿐이었다.

내가 너희들을 다시 한번 보고 싶으니까.

그렇기에 이 생을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나의 몫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악마 따위에게 굴복할 생각도 없고.”

그랬다간 용사의 클래스가 아깝지. 안 그러냐.

내 물음에 대답한 것은 언제나 그렇듯, 든든한 나의 파트너였다.

- 에이펙스의 광검이 용사 클래스 보정을 받아 성검으로 진화합니다.

붉은 달빛을 삼키고, 흰 검날이 눈부시게 어둠을 밝혔다.

나는 웃으며 검을 들었다.

어려운 거야 여느 때의 일이지.

그럼, 가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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