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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93화 (94/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93화

발을 박차자 몸이 허공으로 높이 떠올랐다. 내 이름을 외치는 목소리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정소현을 보호하는 성벽을 떠나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지독한 마기가 공기 중을 표류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곳은 인간의 세상인데 건방지기 짝이 없지.

체공하는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발밑의 상황을 관조했다.

“으, 끔찍하네.”

허세는 거기까지.

벨리알 앞에서 허세를 부리다가 도망친 대가가 이렇게 돌아오는 건가.

얼마 전에 겪었던 상황이 그대로 돌아오니 정말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래서 할 일은 미루지 말라는 격언이 있는 건가. 망할.

마주한 상황은 영 참혹했다.

숱한 몬스터들이 한데 뭉쳐 있으니 그저 검은 점처럼 보였다. 악마들이 릴리스의 부름에 응하여 대지에 속속들이 내려앉을 때마다 공기에 감도는 마기가 한층 짙어졌다.

펑!

퍼펑!

용케도 아직 남아 있던 성수 폭탄이 몇 개 터지며 몇십 마리의 몬스터가 군데군데 날아갔으나 그보다 더 많은 숫자가 빈 곳을 채웠다.

오랫동안 방치한 책에 먼지가 내려앉은 것 같은 광경이었다.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마계의 악마야 거기서 거기지만, 릴리스가 부리는 것은 대개 짐승의 형태를 한 마수다.

거대한 코끼리를 닮은 형상의 마수가 흥분해 뿔피리 소리를 내며 근처의 마수를 짓밟는 것이 보였다.

그 지옥 같은 광경 속에서 홀로 요요히 빛을 발하는 악마가 허공에 떠오른 나를 올려다보았다.

가느다랗게 반개한 눈이 즐거움에 희번덕거리고 있었다.

나도 웃었다.

“내가 준 선택지는 고려도 하지 않는구나. 사랑스럽기 짝이 없게도.”

“농담은 무슨.”

그렇게 대꾸는 했다만 머리는 차분히 릴리스를 바로 쳤을 때 이길 가능성을 계산하고 있었다.

지금 릴리스가 소환한 군단은 어림잡아도 천은 넘었다.

등급 자체는 높아 봤자 A급이었으나 숫자가 문제였다. 저걸 당장 뚫고 릴리스의 곁으로 갈 수는 없다.

릴리스는 생각보다 신중한 타입이다.

현재 내 능력치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떨어졌다는 것쯤은 이미 파악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주변에 수많은 마수들을 소환했다는 것은, 내게 비장의 한 수가 숨겨져 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실제로도 내게는 ‘용사를 기리는 망토’가 있다.

그러나 이 아이템의 사용 시간인 10분 동안 릴리스를 죽일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릴리스가 저렇게 철통처럼 경계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더더욱.

쾅!

나는 마수의 대가리 하나를 부수며 바닥에 착지했다.

대지에 내려앉은 나를 향해 수많은 몬스터들이 밀려들었다.

- 에이펙스의 성검이 악(惡) 속성의 몬스터에게 절대적인 효과를 발휘합니다.

- ‘악의 처단’이 발휘됩니다.

하지만 태생부터 악마를 베는 검인 성검은 악마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길어진 검신의 길이 내에 있던 모든 악마의 몸이 잘려 나갔다.

인간이었다면 기세 하나로 압도했을 법했지만.

악마는 인간이 아니었다.

검이 지나간 빈 공간 사이로 미친 듯이 몰려드는 마수들에게는 생명이 아니라 욕망과 증오만이 깃들어 있었다.

그중 검을 회수하기 전 빈틈을 노린 손바닥만 한 박쥐들이 달려들었다.

검을 든 오른팔로 떼를 지어 날아드는 박쥐들의 작고 흉측한 이빨이 보였다.

시스템 메시지를 보지 않아도 익숙한 놈들이었다. 피에 미쳐 달려드는 흡혈박쥐들.

“쳇.”

차라리 덩치 큰 와이번이 낫지. 귀찮게 구는군.

달라붙는 몸통을 잡아 패대기를 쳐도 숫자가 많으니 작은 이빨들은 포기를 몰랐다.

흡혈박쥐 하나하나를 상대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빨리 숨통을 끊지 않으면 다른 마수의 피를 빨아 제 몸을 회복하기 때문에 지금 처리해 두는 게 낫다.

그렇지 않으면 이후에 체력이 떨어졌을 때 곤란할 거다.

- 님페의 바람을 사용합니다.

발을 튕겨 허공으로 날아오르자 그 뒤를 박쥐들이 미친 듯이 따라붙었다.

허공에서 따라붙는 박쥐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빛나는 검신이 닿는 곳에 자리한 박쥐들은 그대로 정화당해 먼지처럼 사라졌으나, 용케도 검의 자취를 피해 따라붙은 박쥐들이 이빨을 드러내며 종아리로 달라붙었다.

케에엑!

끼아악!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흡혈박쥐들이 피를 빨기 위해 이빨을 드러냈다.

투툭.

수십 마리 박쥐들의 이빨이 무언가를 뚫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아픔은 없었다.

후두둑.

왼쪽 종아리에 달라붙었던 몇 마리의 박쥐들이 소리도 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박쥐와 함께 종아리에 차고 있던 것이 바닥에 떨어졌다.

텅, 소리를 내며 물이 사방으로 퍼졌다.

“너희도 그만 가라!”

오른쪽 다리를 털어 내자 이쪽에 붙어 있던 박쥐들도 바닥에 툭, 툭 떨어졌다.

옅은 검은색을 띤 박쥐들의 몸이 순식간에 보랏빛으로 물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당연했다.

미리 양다리에 착용했던 물주머니 형태의 보호대에 ‘페탈의 죽음’을 채워 놓았으니까.

저번에 마계 갔을 때 사지에 다 들러붙었던 악마 놈들에게 당했던 기억을 되살려 미리 착용했던 것인데 아주 잘 써먹었다.

효과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쿠어엉!

마수들이 하나씩 울부짖으며 쓰러지기 시작했다.

넣어 둔 독의 양이 적어서 즉사하지 않은 흡혈박쥐들이, 살기 위해 옆의 마수들에게 이빨을 박아 넣었기 때문이다.

그 이빨에 묻은 페탈의 죽음이 순식간에 다른 마수에게로 전염되었다.

당장 즉사하지 않더라도 몬스터에게 치명적인 독이다.

흡혈박쥐에게 물린 몬스터들은 온몸에 퍼진 고통 때문에 피아 식별을 하지 못하고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나는 그 틈을 노려 빈 공간으로 내려앉아 검을 휘둘렀다.

길어진 검신이 몬스터 사이를 훑을 때마다 악마들은 먼지처럼 화해 갔다.

그리고 마수들에게 둘러싸인 릴리스의 얼굴이 멀리 보였다.

대악마는 내가 분투하는 꼴을 무대를 보는 관객처럼 즐기고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래, 즐길 수 있을 때 즐겨 둬.’

어차피 지금은 릴리스의 수작에 놀아나는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방심해라.’

릴리스의 말대로, 누가 다 녹여 먹은 사탕처럼 흐물흐물해진 내가 겨우 이깟 것들에게 고전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은 저렇게 관전하고 있지만 릴리스는 본인이 노린 사냥감은 절대로 남에게 양보하지 않는다.

내 힘을 빼놓을 대로 빼놓은 후 직접 목숨을 끊으려 할 것이다.

그러니, 정말로 내게는 그 어떤 숨겨 놓은 비장의 수도 없다고.

그렇게 릴리스가 확신했을 때가 내 기회였다.

내가 완전히 무력화되었다고 릴리스가 믿게 되면 그때, ‘용사를 기리는 망토’를 사용한다.

그게 지금은 최선이자 유일한 방법이다.

그리고 그 유일한 기회를 위해서라면 최대한 이렇게 악을 쓰며 버텨야 했다.

릴리스가 방심하도록.

- 3차 몬스터 웨이브 활성화 시간 00:36:29

사실 그건 쉬운 일이었다.

나는 정말로 이깟 악마들 정도에 고전하고 있는 중이니까.

몬스터들의 등급 자체는 2차 몬스터 웨이브와 크게 다를 바 없었으나, 숫자가 훨씬 많은 데다 보스 몬스터인 릴리스의 영향을 받아 움직임이 훨씬 기민했다.

게다가 당장 내 근력이 달리는 게 가장 문제였다.

아슬아슬하게 휘둘러지는 괴수의 손톱을 피하며 땅을 굴렀다. 그리고 땅을 구르던 낮은 자세 그대로, 화가 나 날뛰는 외눈박이 괴물의 다리를 베었다.

깡!

검이 무슨 철에라도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성검의 버프를 받았는데도 거대한 외눈박이 괴물의 다리를 완전히 베어 내지는 못했다.

검로가 막힌 그 짧은 사이. 그러나 그것이 곧 틈이 된다.

곧 괴물이 든 망치가 땅에 구르고 있던 내 배를 세게 가격했다.

간신히 몸을 굴렸지만 결국 옆구리에 빗맞았다.

“컥!”

머리에 작열하는 것 같은 고통이 달렸다.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혀를 깨물었다.

“망할 몸뚱어리!”

성질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내 본래 능력치라면 이깟 것들, 검 한 번 휘두르면 다 날아갈 것들이었는데!

손에 들린 파트너 또한 같은 생각인지 분노에 차 비명을 지르는 것이 느껴졌다.

- 에이펙스의 성검이 당신의 투지를 격려합니다!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환한 빛이 악마들 사이로 뿌려졌다.

하지만 그렇게 성질을 부려도 악마는 계속해서 몰려들었다.

그나마 이런 허접한 능력치에 비해 이렇게 버티고 있는 것도 성검과 앙겔루스의 가호 덕분이었다.

다만 이만한 파트너들을 내 몸뚱어리가 제대로 받쳐 주지 못하는 게 문제였다.

지금이야 아직 괜찮지만, 벌써 몬스터의 딱딱한 피부를 뚫지 못하는 일이 늘어나고 있었다.

게다가 휘두른 성검을 회수하기 전에 수십 마리의 악마가 검과 내 몸 사이로 달려들었다.

그나마 흡혈박쥐를 초반에 쳐 낸지라 땅을 박차고 허공에 떠올랐을 때는 숨을 돌릴 수 있었지만, 인간인 이상 하늘을 계속해서 날 수도 없는 일.

남은 시간은 아직도 대략 30분.

나는 흘끗 정소현 쪽을 바라보았다.

투명한 성벽 근처로 마수들이 몰려 있는 것이 보였지만, 그 안에 침입한 악마는 없었다.

릴리스를 처치할 때 처치하더라도, 성벽이 해제되기 전까지 최대한 많은 마수를 처리하는 것도 중요했다.

하지만 이래서야 결판이 나지 않는다. 체력도 동날 판이고.

무슨 수든 내야 하는데.

바람 방향을 바꾸고 페탈의 독이라도 뿌려 볼까? 하지만 페탈의 독은 기본적으로 액체형인 데다 양도 얼마 남지 않았다.

성수 폭탄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고.

소지창에 아이템이야 많지만 지금 상황에서 아주 유효한 건 떠오르지 않았다.

루카스 말대로 진작 소지창 정리나 할 걸.

‘대체 뭘 해야…….’

그때였다.

반전의 기회를 찾고 있던 내 시야에 무언가가 걸렸다.

그건 거대한 코끼리였다.

*   *   *

성벽 주위로 악귀들이 몰려드는 것을 보며 정소현은 생각했다.

아니, 빌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하게.

‘청룡 님, 듣고 있어?’

영혼으로 연결된, 정소현이 모시는 신.

청룡이 보내 주는 힘이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이대로는 본래의 목적이었던 제사조차 지낼 수 없었다.

이대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정소현은 간절하게 빌었다. 아직 아주 가늘게 연결되어 있는 자신의 신에게.

‘제발 도와줘.’

도와주지 않아도 홀로 가겠다고 한 주제에 염치없지만.

‘이건 안 돼.’

말리는 청룡에게 자신이 죽으러 가는 모습을 지켜만 보도록 했으면서.

‘나 때문에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어.’

죽겠다고 다짐한 주제에, 내 사명을 다하겠다고 맹세한 주제에.

하지만 응답은 없었다.

당연한 것처럼 정소현에게 답해 주던 신의 목소리는 사라졌다.

정소현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이치를 알 수 없는 투명한 성벽이 사방에서 뻗쳐 오는 악귀들에게서 자신을 보호하고 있었다.

지옥을 그렇게 숱하게 다녀왔지만 이렇게 많은 악귀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지상을 집어삼킬 것처럼 짙게 내려앉은 어둠.

절대로 걷히지 않을 것처럼 절망적인 그림자는 재앙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 어둠을 밝히는 것이 있었다.

번개처럼 흰빛이 대지를 내리쳤다.

그렇게 순식간에 사방을 밝히는 빛이 검로라는 것을, 정소현은 몇 번 본 후에야 겨우 깨달았다.

콰앙!

환상처럼 길어진 검신이 악귀들 사이를 누빌 때마다 악귀들이 두른 사악한 기운이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어떻게 저런 게 가능한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이 백록담을 뒤덮은 어둠 사이를 가르는 한 줄기의 빛.

그것은 기적에 가까운 광경이었다.

기적.

정소현은 투명한 벽 너머로 그 광경을 아연하게 바라보았다.

내가 이런 기적을 바랐던가?

나 대신 누군가가 이 상황을 해결해 주기를.

그래, 어쩌면 그랬는지도 모른다.

이 한라산으로 달려오는 모든 순간에…… 아니, 청룡이 눈에 보였던 때부터 정소현은 사실 누군가의 도움을 바랐다.

이런 기적을 바랐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런 게 아니야.’

정소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기적을 바라는 동시에 알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도, 그저 바라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건 결코 기적 따위가 아니라고.

이것은 누군가가 목숨을 깎아 가며 내밀어 준 손길이다.

“후우.”

정소현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차분히 생각해야 했다.

아무리 청룡이 대답하지 않고 있든, 남은 도력이 바닥을 보이고 있든,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대체 뭘?

어떻게?

정소현은 사방에서 달려드는 악귀들을 관찰하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생각해 보니 사방이 아니었다. 등 뒤는 막혀 있었으니까.

‘저 결계.’

강예나가 둘러 주고 간 이 보호막이 아니라, 그 너머의 결계.

악귀들은 이상하게도 그 결계에는 달라붙지 않았다.

마치 자신들에게 허락된 공간이 아니라는 듯이.

정소현은 홀린 듯 결계 근처로 다가갔다.

악귀들을 가두고, 자신들도 가둔 결계 너머의 풍경은 안과 완전히 달랐다.

평온한 산의 밤이 펼쳐져 있었다.

보호하는 성벽 너머, 현실과 비현실을 가르는 결계는 굳건하게 대지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어떤 예감이 스쳤다.

근거는 없었다. 논리도 없었다.

그저 감이었다.

그러나 정소현은 언제나 자신의 감을 믿었다.

주저하지 않고 땅에 엎드렸다. 타인이 보기에는 마치 신에게 비는 것처럼 보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정소현이 택한 것은 다른 길이었다.

두 손을 이마에 모으고 절을 올리는 대신 땅을 파기 시작했다.

퍽, 퍽.

비에 젖은 땅은 부드러웠지만, 사방이 딱딱한 돌 천지였다.

“제발, 제발.”

작게나마 남은 도력을 부채 자루의 끝에 집중하고, 그게 부러질 때까지 땅을 팠다.

부채가 부러진 다음에는 손톱이었다.

손톱이 사정없이 깨져 나가고 피가 맺혔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더 이상 기적은 필요하지 않았다.

강예나를 구하기 위해서는 더욱 확실한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정소현은 땅을 파고 또 팠다.

제발.

제발, 닿아라.

늦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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