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94화
내가 왜 진작 이 생각을 못 했지?
혹시 능력치 하락만이 아니라 머리가 돌아가는 것도 늦어진 거 아닌가?
스스로의 지능을 약간 의심하며 나는 님페의 바람과 함께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떠올랐다.
“윽!”
하지만 그것도 슬슬 만만하지는 않았다.
적들이 몰려올 때마다 허공으로 도망치는 내 패턴이 읽혔다. 그 때문에 뛰어오르는 내 다리를 외눈박이 괴물이 커다란 손으로 잡아챈 것이다.
압력만으로도 뼈가 부스러지는 기분이었다.
외눈박이 괴물이 내 발목을 잡은 그대로 땅에 패대기쳤다.
“컥!”
충격이 대단했다.
땅으로 패대기쳐지는 순간 간신히 몸을 틀어서 척추가 부러지는 건 피했지만, 아무래도 갈비뼈는 확실히 몇 대 나갔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괴물의 망치로 얻어맞은 그 부위였다.
목에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지는 걸 보니 아무래도 부러진 갈비뼈가 폐를 찔러 피가 역류하고 있는 듯싶었다만, 포션을 마실 여유도 없었다.
뒤틀리는 속을 억누르며 내 발목을 잡고 흔들려 드는 괴물의 손목에 칼을 꽂았다.
인간 형태를 하고 있는 이상 이놈의 몸 구조도 인간과 그리 다를 것이 없을 터.
손목만큼 혈관이 피부와 가까운 곳도 잘 없지!
아니나 다를까, 검이 자른 곳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아픔에 거인이 반사적으로 손을 놓은 사이 나는 몸을 빼냈다.
하지만 물론 겨우 그 정도의 상처로는 거대한 괴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괴물은 오히려 제 피를 보고 흥분했는지, 발을 쾅쾅 구르며 날뛰기 시작했다.
― 먹이…… 피……!
강렬한 사념이 머리를 파고들었다. 나는 울리는 땅을 필사적으로 기었다. 거인이 땅을 손으로 더듬으며 나를 잡아채려 했다.
하지만, 그때.
크어어엉!
괴물이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울부짖었다.
주변에 들끓던 온갖 마수들이 괴물의 피에 흥분해 거대한 몸뚱이에 달라붙기 시작한 것이다.
악마 수십, 수백 마리가 한꺼번에 거인에게 달려들었다.
피가 흐르는 곳에 다른 마수들이 거머리처럼 들러붙기 시작하자, 거인은 덮쳐 오는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쿵!
하마터면 괴물의 몸에 깔릴 뻔했다.
그 와중에 곁눈으로 나를 본 괴물이 다시 나를 잡아채기 위해 손을 뻗어 왔다.
“정말 끈질기네!”
손을 간신히 피하고 누운 거인의 안구 주위를 검기로 한 번 더 갈겼다.
연약한 부위에서 다시 피가 뿜어져 나오자 아직까지 평정을 유지하고 있던 마수들까지도 더 날뛰기 시작했다.
마수들이 피아 식별을 하지 못하고 저들끼리 물고 뜯는 사이, 나는 쓰라린 옆구리를 잡고 최대한 위로 날아 튀었다.
마력을 동원하는 순간 바닥으로 피가 흩뿌려졌다.
이번엔 내 피였다. 피를 토한 목구멍이 불타오르는 것처럼 아팠다.
게다가 날아오르기는 했지만 내 피 냄새를 맡은 악마들이 흥분하는 게 또렷하게 보였다.
틈이 날 때마다 요령껏 포션을 한 모금씩 머금고 있기는 했지만 그 정도로는 턱도 없을뿐더러, 이미 회복 속도가 따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망할 허접 깡통 같으니라고.
겨우 이 정도 능력치를 회복한 것 가지고 좋아했었다니. 스스로가 한심해 죽을 것 같다.
‘이런 X발…….’
욕설을 내뱉고 싶어도 피를 더 토할 것 같아서 삼켰다.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어.’
나름대로 준비를 한다고 했지만 결국 이렇게 발목을 잡혔다. 혼자서 3차 몬스터 웨이브까지 어떻게든 개길 수 있다고 판단한 건 패착이었다.
몬스터의 등급 자체야 2차 몬스터 웨이브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지만 숫자가 배로 늘어난 데다 사방에서 적이 몰려드니 여유가 없었다.
물론 성검의 힘으로 정화할 수는 있겠지만 숫자가 너무 많아 내 마력이 먼저 소진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2차 때는 A급 판정된 마몬이 몬스터 떼를 이끌었으나, 지금은 S급인 릴리스가 중심에 떡 버티고 서 있었다.
자신들의 왕을 뒤에 둔 악마들의 기세는 훨씬 더 흉폭했다.
“망할 새끼들!”
콰직!
벌레 한 마리의 몸통을 짓밟으며 나는 한 번 더 허공으로 높이 떠올랐다.
그때, 릴리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 찰나의 순간, 릴리스가 팔짱을 낀 채 웃는 게 보였다. 나직한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지금이라도 내기에 응해 포기하면 편해질 것을.”
통렬한 비웃음이었다.
으득, 절로 이가 악물렸다.
“개소리!”
그래, 지금은 마음껏 비웃어라!
용케도 내 기척을 알아채고 지상에서 쫓아오는 몇몇 마수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며, 나는 드디어 목표물 위에 발을 올렸다.
“으악!”
하마터면 미끄러질 뻔했지만 다행히 안착했다.
내가 올라탄 것은 거대한 코끼리 형태를 한 마수의 등 위였다.
등 위에 오르자마자 악취가 코를 찔렀다. 생긴 것만 코끼리와 비슷하다 뿐이지, 거무튀튀한 검은색 피부에는 장창처럼 뾰족한 털이 듬성듬성 솟아 있었다.
그리고 털도, 피부의 구멍 사이에서도 독이 퐁퐁 솟아오르고 있었다. 균형을 잡으려고 괴물의 몸통에 매달리자 금세 드러난 피부가 저릿해졌다.
보아하니 손바닥이 보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 앙겔루스의 가호가 독기를 정화합니다.
앙겔루스의 가호가 막아 주는 것은 일시적인 현상일 뿐, 독에 완전히 중독되기 전에 끝내야 한다.
나는 아직도 내가 올라탄 것을 눈치채지 못한 둔한 마수 위에서 두 다리로 단단히 몸을 고정한 후,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 3차 몬스터 웨이브 활성화 시간 00:26:19
아직도 26분이, 혹은 이제 26분밖에 없다.
정소현에게 넘긴 ‘배척하는 성벽’ 활성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릴리스를 처치하는 데 성공하려면 앞으로 26분.
슬슬 승부를 봐야 할 때였다.
“나는 여기 있다, 이 새끼들아!”
내 외침에 피에 미쳐 서로 물어뜯던 마수들이 일제히 이쪽을 바라보았다.
백록담에 빼곡히 차 있던 악마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천 마리에 달하는 악마의 시선은 매우 끔찍했다.
갑자기 전장의 모든 시선을 받은 거대 코끼리는 당황하며 제 등을 바라보려 애썼지만, 그건 신체 구조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한 번 더 주먹을 치켜올리며 외쳤다.
“용사가 여기에 있다고!”
미친 어그로였다.
“아하하하! 레나, 미쳤어?”
전장 한복판에서 정신 나간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 어느 이름 없는 활이 당신의 의지에 반응합니다.
몰려드는 시선을 받아 내며 나는 이름 없는 활을 꺼내 들었다.
잠시 거인의 피에 미쳐 있던 마수들은 이제 하나같이 이쪽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많기도 하지.
나는 악마들을 향해 활을 겨누었다.
팔은 떨리고 있었고 슬슬 마비되기 시작한 다리는 감각이 사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해야만 했다. 허공에서 화살을 쏴 대는 것보다는 독에 좀 당하더라도 몸을 고정한 상태에서 활을 쏘는 게 나으니까.
‘할 수 있어.’
육체의 고통에 자꾸 약해지려는 정신을 다독이며 나는 활시위를 당겼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활시위를 당기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머리로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순간이었으나 영원 같은 감각이었다.
아프다, 포기하고 싶다, 실패할 것 같아, 여기서 그만두고 싶어.
그냥 편해지고 싶다.
하지만 그 감각은 언제나 활시위를 팽팽히 당기고, 적을 시야 안에 놓는 순간 사라진다.
언제나 그랬다.
아무리 불리하더라도,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더라도.
그럼에도 할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를 구해 온 사람을 알고 있어서.
나도 그렇게 되고 싶어서.
그러니 아무리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도, 다리가 움직이지 않아도 상관없다.
내 마력만큼은, 내 영혼은 달라지지 않았다.
적이 눈앞에 있고, 그것을 해치워야 내가 쟁취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아무리 강대한 적이더라도 나는 기꺼이 싸우겠노라고.
“잘 봐 둬라, 릴리스!”
이게 네가 보고 싶었던 거라면!
- 무명의 활에게 당신의 영혼이 사명을 부여합니다.
- 당신의 마력이 화살을 대체합니다.
무명의 활은 한 치의 떨림도 없이 나의 의지를 대행했다.
수십 개의 빛이 몰려드는 악마들에게로 쇄도했다.
몇 개의 화살이 악마들의 몸통에 명중했고, 또 몇 개는 대가리를 박살 냈고.
하지만 대부분은 땅에 박혔다.
“뭐 하는 거야, 레나?”
날카로운 비웃음이 귀에 박혔지만 나는 활을 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 전장에서 가장 덩치가 큰 코끼리가 당황해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 화살도 사방으로 쏟아졌다.
워낙에 이리저리 움직이는 물체 위에서 쏘다 보니 명중률은 반도 되지 않았다.
뿌우우우!
제 몸으로 올라오려는 다른 마수들을 짓밟고, 한편으로는 긴 코로 등 위의 나를 쫓으려던 코끼리가 비통한 울음을 내질렀다.
‘이제 슬슬!’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악마들이 땅에 박힌 화살을 그저 지나치려던 때.
콰쾅!
마력으로 된 화살이 산산조각 나며 비산했다.
화살의 형태를 잃고 그저 마력의 덩어리가 된 그것이 사방에서 마수들에게 쏟아졌다.
아무런 컨트롤도 없이 폭발한 마력은 오히려 그렇기에 위력적이었다.
순식간에 수십, 수백의 악마가 공격당했다. 공격당한 몬스터들이 고통과 분노에 하나같이 괴성을 질러 댔다.
그럼에도 한꺼번에 소멸하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당연했다. 내가 아무리 용사라고 해도 에이펙스의 성검을 매개체로 활용하지 않는다면 ‘정화’의 힘은 쓸 수 없다. 방금 저것은 단순한 마력 덩어리일 뿐.
하지만 그렇기에 상황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키엑!
상처를 입었음에도 굴하지 않고 코끼리 마수의 다리를 오르려던 코카트리스가, 뒤에서 기어 오던 다른 놈의 손톱에 찔려 단말마를 질렀다.
그리고, 다른 악마들도 비슷했다.
뱀의 머리를 한 악마가 작은 마수들을 게걸스레 삼키고, 그 뱀의 입속에서 살아남으려 발톱을 세운 악마들의 비명이 전장에 흥분을 가져왔다.
서로의 피 냄새에 미쳐 앞뒤 분간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순식간에 지옥도가 펼쳐졌다.
사방에서 피에 눈이 먼 악마들이 서로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악마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어차피 욕망이다.
한 번 피 냄새를 맡은 것들은 눈이 뒤집혀 서로를 짓밟기 시작했다.
내가 탄 코끼리조차 주변에서 풍기는 혈향 때문에 흥분해 미친 듯이 날뛰며 주위 악마들을 짓밟고 다니기 시작했다.
“윽!”
그 기세가 얼마나 사나운지 떨어지지 않기 위해 나는 단검을 피부 위에 콱 박았다.
제한된 마력으로 최대한의 효율을 뽑아낸 건 좋았지만 지금 이대로 낙하하면 끝장이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
조금만 더…….
“가엾고 멍청한 것들아.”
나는 고개를 들었다.
미친 듯이 주위를 짓밟던 마수가 순식간에 얌전해졌다.
“너희의 왕에게 복종하라.”
비명으로 가득 차 있던 전장은 그 한마디로 삽시간에 침묵했다.
소름 끼치는 광경이었다.
잘 짜인 연극 무대 같기도 했다.
피에 미쳐 날뛰던 악마들은 비통한 울음과 함께 하나같이 땅에 머리를 조아려, 제 주인에게 경배를 올렸다.
내가 타고 있던 코끼리 마수도 덩치에 걸맞지 않게 무릎을 꿇고 거대한 머리를 처박으며 벌벌 떨고 있길래, 등에서 내려와 땅에 섰다.
저 멀리서, 제가 만든 수많은 악마들의 성벽을 제 손으로 열어젖힌 여자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나올 줄 알았지.
아무리 네가 신중하다고 한들, 그래 보았자 저것은 인간을 증오하는 악마였다.
나라는 인간을 제 손으로 괴롭힐 기회가 왔는데 이대로 관망할 리 없었다.
“재롱은 잘 봤어. 그러니 이제 나랑도 놀아 줘야지, 용사님.”
드디어 대악마의 등판이었다.
- 3차 몬스터 웨이브 활성화 시간 00:1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