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95화
숨이 가쁘다.
시야 한구석이 부옇게 가물거리고 있었고, 입가를 손등으로 닦자 피가 묻어나왔다.
‘그래도 아직 해볼 만해.’
수가 많은 게 문제였지, 대부분이 A에서 B급에 불과했다.
겨우 저 정도를 상대한 것으로 여기서 기절할 정도면 지난 세월이 운다.
릴리스의 눈길이 바닥을 지탱하고 선 내 다리부터 머리까지 훑고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첨예하게 재단하는 시선에 신체가 조각조각 나는 것 같았다.
하나의 인격체로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사냥감을 보는 것 같은 열기 어린 시선.
악마와 대적할 때는 그래서 항상 불쾌했다.
나는 목숨을 걸고 싸움에 임하고 있는데, 저 녀석들에게는 그저 유희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
누군가의 생명이 그저 저들에겐 한때의 유희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에 화가 난다.
태생이 그런 악마들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한다면 그뿐이겠으나.
우웅.
손에 든 검이 흰 검신을 떠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내 생각에 동의한다고 말하듯이.
그 광경을 본 릴리스의 눈길이 휘어졌다.
“지금의 너라는 인간을 나만 볼 수 있다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로 용사다운 모습이야. 아주 마음에 들어.”
“웃기고 자빠졌군.”
“되도록 오래 놀고 싶은데 안타깝네. 너와 놀 시간이 앞으로 얼마 없어서.”
“그래, 네 목숨이 15분밖에 남지 않아서 나도 참 안타깝다.”
“정말 입을 귀엽게 놀린다니까…… 죽이고 싶지 않은데 어쩐담?”
“그럼 내 수고라도 덜게 알아서 죽든가.”
“여전히 내기에는 응하지 않을 생각이고?”
릴리스는 손가락으로 머리맡에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를 정확히 가리켰다.
아까 전 분명히 거절했음에도 릴리스의 내기에 응하겠냐는 메시지는 사라지지 않은 채였다.
나는 코웃음을 쳤다.
“엿이나 먹으라고 했지.”
“고민조차 하지 않는 걸 보면 네게 상당히 소중한 인간인가 봐.”
소중하고 나발이고 만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사이다만, 릴리스에게 그걸 말해 줄 필요는 없었다.
그나저나 릴리스가 저렇게 말하는 건 의외였다.
당연히 이 던전의 클리어 조건 메시지도 보았기에 저런 내기를 건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내 클리어 조건이 ‘정소현의 생존’인 것을 모르는 걸 보아하니, 아무래도 소 뒷걸음질로 개구리를 잡은 모양이다.
그렇다면 악마인 릴리스조차도 본인과 관련된 시스템 메시지밖에 볼 수 없는 건가?
‘그쪽이 타당하긴 하군.’
시스템이 밸런스 조정에 집착하는 걸 보면, 릴리스가 플레이어의 조건 메시지까지 볼 수 있게 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랬다간 릴리스가 너무 유리해지니까.
릴리스가 대답하지 않는 나를 보며 픽 웃었다.
“날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하다니 여유가 있네. 그렇지만 그 여유가 언제까지 갈까?”
“뭐?”
“저길 보렴.”
릴리스가 손을 뻗어 내 등 뒤를 가리켰다. 아무리 악마라고는 해도 릴리스가 주의를 돌리고 기습을 하는 유치한 짓을 할 성격은 아니었으므로, 나는 그 손가락을 따라 뒤를 돌아보았다.
긴 손톱이 향한 곳은 투명한 성벽이 자리한 곳이었다.
내가 정소현을 ‘배척하는 성벽’으로 보호한 곳.
릴리스의 명으로 악마들은 현재 모두 땅에 엎드려 있었다. 그 덕분에 시야는 훤히 트여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정소현의 모습이 보여야 했다.
“어?”
그런데, 아니었다.
내가 뜻밖의 상황에 눈을 깜박이는 동안, 기다렸다는 듯이 릴리스의 찢어지는 것 같은 폭소가 울려 퍼졌다.
“하하하.! 너는 저 인간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는데 이게 뭐람! 보렴. 아무도 없잖니!”
“……아니, 대체 어떻게?”
릴리스가 여전히 깔깔대며 필요도 없는 설명을 늘어뜨렸다.
“뻔한 것을 묻는구나. 불쾌한 기운을 보니 그 인간 또한 인간이 아닌 존재의 힘을 빌리는 자겠지. 우리의 눈을 피해 숨는 잔재주를 부린 거야. 네가 죽든 말든 제 살기 바빠서 말이지.”
아니,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나는 정말로 릴리스가 나타났을 때보다 더 당황했다.
릴리스의 말 자체는 사실이었다. 있어야 할 정소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배척하는 성벽’의 모습도 없었다.
설마.
나는 빠르게 머리 위에 띄워 둔 클리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 돌발성 던전 브레이크가 완전히 종료될 때까지 ‘정소현’이 생존해야 합니다.
“하…….”
안도의 한숨이 퍼졌다.
만약 정소현이 죽어서 보이지 않는 거라면 진작 실패 메시지가 떠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클리어 실패 메시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현시점에도 정소현은 아직 살아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안도한 것과는 별개로 여전히 의구심은 남았다.
‘그러니까, 도대체 어떻게?’
그도 그럴 것이, 돌발성 던전 브레이크는 한 번 시작되면 종료될 때까지 이 결계 밖으로 나갈 수 없다.
그러니 정소현이 이 결계 안에 있다는 건 분명했다.
즉, 릴리스의 말대로 악마의 눈을 피해 이 결계 안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정소현에게 마계에서 사용했던 것처럼 악마의 눈을 피할 재주를 부릴 도력은 남아 있지 않았을 터.
마찬가지로 ‘배척하는 성벽’ 또한 한 번 활성화되면 설령 소유자가 바라더라도 활성화를 도중에 멈출 수 없다. 그걸 도중에 멈추려면 아이템을 파괴할 정도의 힘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니 상식적으로 생각하자면 정소현이 지금 내 시야에서 보이지 않는 게 설명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잠시 올려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저 두 가지가 불가능한 건 나 같은 인간에게나 해당하는 말이고.
혹시, 어쩌면.
‘청룡이 개입했나?’
남은 답은 그것뿐이었다.
제약이 있다고는 해도 청룡의 힘이 인간보다 대단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니 배척하는 성벽에서 정소현을 꺼내어 시스템의 구속조차 벗어던지고 저 멀리로 달아났을지도 모른다.
내가 입을 다물고 그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릴리스의 시선은 여전히 나를 찬찬히 뜯어보고 있었다. 환희가 담긴 눈길과 조롱이 달린 입가가 하고자 하는 말은 명확했다.
“그러게 진작 내게 그 인간을 바쳤으면 될 일을. 어때, 하나뿐인 목숨을 헛되이 바친 소감이?”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나는 천천히 검을 뽑아 릴리스에게로 겨누었다. 자신에게로 겨누어진 검을 보며 릴리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너는 그 인간이 원망스럽지도 않아? 너는 저를 구하겠다고 발버둥 치고 있는데 너를 버리고 혼자만 도망갔잖아.”
“아니, 오히려 고마울 지경인데.”
그렇지 않아도 릴리스와 대치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 ‘배척하는 성벽’의 활성화 시간이 끝나면 정소현을 어떻게 보호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알아서 도망쳐 줬다면 나로서야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정소현에게는 이런 지옥에 떨어지지 않을 자격이 있다.
애초에 오지 않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말이야.
“그리고 나는 누구를 구하기 위해 너와 싸우는 게 아니야.”
“그럼?”
“그냥 네가 X같아서 싸우는 거지.”
잠시 릴리스의 얼굴이 멍해지는 것이 보였다.
쟤는 산전수전 다 겪은 것처럼 굴면서, 이렇게 면전에다 상스러운 욕을 퍼부으면 꼭 저렇게 욕설을 처음 듣는 사람처럼 행동하더라.
“내, 내가 뭐 같다고?”
“한 번 더 말해 줘?”
어차피 아리아드네도 없는 마당에 못 할 것도 없었다. 나는 피 섞인 침을 한 번 땅에 뱉고 몇 마디 더 지껄였다.
곧이어 릴리스가 귀를 두 손으로 막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욕설도 인간의 죄업 중 하나이거늘…….”
“악마에게 들으니 그것 참 설득력 있는 소리구나.”
“그렇지만 그게 네 본심이 아니라는 건 알아, 레나.”
“무슨 헛소리야?”
순도 120퍼센트 진심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욕설을 한 바가지 더 퍼부으려는데, 릴리스가 매우 기묘한 것을 바라보듯 나를 아래위로 훑었다.
“계속 생각했지만…… 레나, 너 정말 정상이 아니구나?”
“뭐가 어째?”
“참으로 기묘하단 말이지. 너를 두고 도망친 인간을 미워하지도 않고, 이 상황에 절망하지도 않고, 심지어 실망조차 하지 않는구나. 인간이라면 응당 가져야 할 감정이거늘.”
악마가 간사한 속삭임처럼 물었다.
“너는 죽음이 두렵지 않니?”
“누가 안 무섭대?”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이번에도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그야 나도 죽는 건 무섭다.
내게 남은 기회는 이 한 번뿐인데, 그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죽어 버릴까 봐.
해내지 못하게 될까 봐. 정말로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될까 봐.
“너는 나를, 인간을 몰라, 릴리스.”
한 번뿐이기에 더욱 간절한 이 마음을.
“그러니 너는 이번에도 내게 질 거야.”
말은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나는 검을 들고 릴리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챙!
검을 내려치자 들리는 금속성의 마찰음.
저절로 이가 악물렸다.
“후후.”
웃는 눈동자가 가까이 보였다. 검신만큼 길어진 손톱은 인간의 검으로는 자르지 못할 만큼 견고했다.
“참으로 가엾구나.”
겨우 손가락 하나인데도 부딪쳐 오는 힘이 만만치 않았다. 도저히 받아칠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허리를 크게 틀고, 하체를 단단히 고정한 채 검을 한 번 더 내리그었다. 보통 인간이라면 대응할 수 없을 빠른 속도였다.
하지만 릴리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손톱을 들어 내리쳐지는 검을 밑에서 막았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내리쳐지는 힘과 올려치는 힘을 비교한다면 당연히 전자가 유리한데도, 검은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심지어 릴리스의 손톱은 겨우 검지 하나.
그런데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
“젠장!”
청명한 금속성의 마찰음이 몇 번이고 울려 퍼졌다.
릴리스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튕겨 나온 검을 더욱 빠르게 휘둘렀지만 공격은 단 한 번도 먹히지 않았다.
캉!
손톱에 튕겨 나오는 성검을, 나는 약간 경악하며 응시했다.
자타공인, 나는 검에 대한 재능이 상당히 뛰어난 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검으로 누군가를 죽이는 재능이.
검술을 누군가에게 정식으로 사사(師事)했다기보다는 실전에서 익힌 게 크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임기응변에 능해질 수 있었다.
상대방의 검이 아무리 빨리 휘둘러진들 몸을 굴려서라도 피하며 발을 걸어 넘어트리면 장땡이고, 압도적인 힘으로 검을 휘두른다면 그보다 더 빠르게 상대방의 심장에 검을 꽂으면 이기는 것.
악마가 상대라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릴리스에게 빈틈이 보일 때마다 찔러 넣고, 베려 했고, 내려쳤다.
하지만 릴리스는 하품을 하는 것처럼 태연하게 그 모든 공격을 막아 냈다.
검과 손톱이 부딪힐 때마다 소모하는 힘이 커지고 있었다.
캉!
릴리스가 쳐 낸 힘의 반발을 버티지 못하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망할!”
알고는 있었다.
현재의 내 능력치로는 마몬쯤은 경험을 살려 어떻게든 처리한다 해도 릴리스를 상대하는 건 무리라는 걸. 나도 바로 릴리스의 목을 따기를 기대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성검의 힘을 빌렸는데도 이렇게 릴리스의 살갗 하나 스치지 못할 정도라고?
이거 진짜 빨리 능력치를 복구하지 않으면…….
“슬슬 놀아 주는 것도 질리네.”
릴리스는 아주 약간 힘을 주는 것만으로도 내 검을 튕겨 냈다.
그리고.
퍽!
“컥!”
순식간에 릴리스의 주먹이 내 배에 박혔다.
한 번 주먹을 허용한 대가는 컸다.
땅에서 발이 떨어지지는 않았으되 한 대 맞은 것만으로도 발이 한참 뒤까지 밀려났다. 압도적인 힘이었다.
“그러니까 다른 생각할 여유가 없을 거라고 했지.”
다음으로, 내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릴리스는 겨우 한 발짝 떼어 내는 것으로 거리를 훅 좁혀 왔다. 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릴리스가 주먹을 쥔 손을 당기는 모습뿐이었다.
“커헉!”
곧이어 배에 한 번 더 충격이 가해졌다.
이번에는 버티지 못했다. 끝내 발이 바닥에서 떨어져,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대로 뒤로 날아갔다.
쿵!
어딘가에 부딪혀 주르륵 땅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등에 뜨끈하고 딱딱한 것이 닿았다.
갑옷이 덮지 않은 부분을 찔러 들어오는 가시 같은 털 때문에, 부딪힌 것이 아까 내가 올라탔던 코끼리 마수라는 것을 깨달았다.
멀리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가물가물한 시야 속에서 릴리스가 가공할 속도로 달려드는 것이 보였다.
정말이지, 그 존재다운 미소를 띠고서.
애써 검을 쥔 팔을 뻗으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우드득.
마치 북이 찢어지는 것 같은 끔찍한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찢어진 것은 물론 북 따위가 아니라 내 살가죽이었다.
오른쪽 어깨를 관통한 릴리스의 손톱. 작열하는 것 같은 고통이 덮쳤다.
“크어어엉!”
내가 아니라, 내 어깨와 함께 릴리스의 손톱에 관통되어 버린 코끼리가 비통한 울음을 내질렀다.
그 고통은 제 알 바 아니라는 듯 릴리스가 어깨에 손톱을 더 찔러 넣었다.
“둘, 셋, 넷, 다섯.”
즐거운 콧노래와 함께 부른 숫자에 따라 손톱이 하나씩 더 박혀 들었다.
아주 신났군.
어깨에 박히는 손톱이 하나 늘어날 때마다 눈앞이 하얗게 물들었다.
“아…….”
릴리스의 옆구리에 박아 넣으려던, 성검을 든 손에는 이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내 어깨에 다섯 손톱을 모두 박아 넣은 채 그 광경을 바라보던 릴리스는, 내가 손을 떨구자 환하게 미소 지었다.
“이대로는 시시하지만…… 어쩔 수 없지. 최대한 손상 없이 죽이고 내 성에 데려가 주마.”
쿨럭.
이번에야말로 정말 내장 조각이 목구멍으로 올라온 것 같은 기분이다.
삼키지 못한 피가 이빨 사이로 줄줄 새고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릴리스의 눈빛에서 서서히 흥미가 꺼져 가는 것이 보였다.
“시스템의 가호를 받은 존재라 좀 더 기대했는데 여기가 끝인가.”
어깨에 꽂힌 릴리스의 손톱 주변으로 독이 퍼져 가는 게 느껴졌다. 심장 박동이 점점 기묘한 박자로 뛰기 시작했다.
확실하게, 내 생명은 사그라지고 있었다.
결국 릴리스가 완전히 흥미를 잃고 내 어깨에서 손톱을 빼내려던 그때.
“말했지, 릴리스.”
빠져나가던 손이 멈추었다.
내게 손목을 잡힌 릴리스의 눈이 크게 떠졌다. 뱀 같은 동공이 크게 확장되고 있었다.
- ‘용사를 기리는 망토’를 장비합니다.
“이번에도 네가 질 거라고.”
우두둑!
피부를 관통하고, 피가 샘솟고, 뼈가 채 보호하지 못하는 장기를 꿰뚫는 감각.
너무 가까이 접근한 탓에 피할 수 없는 거리에서.
릴리스의 심장에 성검이 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