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96화
처음으로 살아 있는 생명체의 목숨을 빼앗았을 때를 기억한다.
후회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당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했고, 그때로 다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끔찍했던 경험임에는 변함이 없다.
그 이후로 몇 번이고, 몇천 번이고 같은 일을 했음에도 무뎌지지는 않았다. 이 감각은 여전히 끔찍했다.
검이 피부를 뚫고 들어가 마침내 육체를 관통할 때 울리는 감각.
인간과 같은 형태의 육체를 가지고 있는 릴리스도 마찬가지였다.
불의의 일격에 심장을 단번에 꿰뚫린 릴리스가 눈을 크게 떴다. 악마가 무언가 말을 하기 위해 입을 벌렸지만 나오는 것은 말이 아니라 피였다.
“쿨럭!”
그리고 나 또한 릴리스가 말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릴리스의 몸이 바르작거리는 것을 보며 악마의 가슴에 꽂힌 성검을 뒤틀었다.
동시에 경계를 놓지 않으며 떠오른 메시지를 확인했다.
- 용사를 기리는 망토 활성화 시간 00:09:52
- 3차 몬스터 웨이브 활성화 시간 00:10:29
시간 차이는 대략 37초.
즉 이 망토의 활성화 시간이 끝나더라도 3차 몬스터 웨이브 활성화 시간이 약간 남는다.
솔직히 시간을 보고 경악했다.
‘어지간히 버텼다고 생각했는데 겨우 5분이었나.’
진작 아이템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은 방심을 유도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활성화 시간이 겨우 10분인 만큼 최후의 최후까지 아껴 두려고 했던 것이었는데 결국 이 모양이었다.
심지어 아이템을 사용한 타이밍마저 아슬아슬했다.
머리 위에 시스템 메시지가 빛나고 있었으니까.
- ‘기사회생’ 스킬의 발동 조건을 충족시켰습니다!
릴리스의 손톱에는 극독이 묻어 있다. 내 어깨에 꽂힌 손톱의 독이 단번에 전신으로 돌아 나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것이다.
즉, 나는 릴리스를 상대한 지 겨우 5분 만에 죽었다.
완전한 내 패배였다.
물론 릴리스와 마지막으로 겨뤘을 때의 내 능력과 현재 내 능력을 비교해 보자면 그리 놀랄 것도 아니기는 하다만…….
‘그래도 자존심은 상한단 말이지.’
망할 시스템 새끼.
“커헉! 대체, 어떻게…….”
릴리스가 입에서 시꺼먼 피를 토하는 것이 보였다. 다만 인간이라면 이미 즉사했어도 이상하지 않은 치명상인데도 릴리스는 고통에 눈을 까뒤집을 뿐, 죽지는 않았다.
망할 악마 새끼. 이가 절로 갈렸다.
무엇보다 지겹다.
“피차 다 아는 사이에 슬슬 연극은 그만두지 그래.”
그렇게 내뱉자 괴로워하던 릴리스의 안색이 완전히 일변했다.
“이래서 구면인 사이는 불편하다니까.”
콰득.
눈을 까뒤집었던 릴리스가 손을 뻗는 것이 보였다. 떨림 하나 없는 흰 물고기 같은 손이 성검을 잡았다.
치이익.
검이 꽂힌 자리는 마치 불꽃이 피부를 녹이는 것처럼 시꺼먼 연기와 고약한 냄새가 맴돌았다.
제 가슴이 타들어 가고 있는데도 그 광경을 바라보는 릴리스의 눈동자에는 일종의 찬탄이 깃들어 있었다.
“좀 더 즐기고 싶었는데 안타깝네. 용사에게 맞는 일격은 언제나 경이롭거든.”
우드득.
검에 찔린 부분의 피부가 녹고 뼈와 근육이 죄다 드러나는데도, 릴리스는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고 검을 잡고 힘을 주어 제 가슴에서 빼냈다.
성검에 녹아내려 훤히 보이는 악마의 가슴속에는 아무것도 자리한 것 없이 비어 있었다.
텅 비어 있는 심장.
나는 감흥 없이 그 빈자리를 바라보았다. 릴리스가 텅 빈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씩 웃어 보였다.
“심장을 잃어버렸는데, 찾아 주겠니?”
“그걸 농담이라고 하냐?”
그렇게 무심히 대꾸하기는 했지만 내심 평온하지는 않았다. 릴리스가 낄낄대며 웃었다.
“예측이 빗나가서 어쩌니? 내 ‘핵’이 심장에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지?”
나는 대꾸하지 않고 릴리스의 손에 잡힌 검에 힘을 주고 휘둘렀다.
릴리스가 검을 놓으며 뒤로 물러났다. 꼴은 엉망이었지만 악마의 얼굴은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었다.
반대로 나는 약간 낭패한 심정이 되었다.
‘릴리스 성격상 당연히 심장 위치에 숨겼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족은 근본적으로 인간과 몸의 구조가 다르다. 그들은 생명 따위 없는, 어떠한 개념이 뭉쳐져 만들어진 존재였다.
악의로 뭉쳐진 릴리스는 인간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되 인간처럼 심장이 뚫리거나 목을 날린다고 해도 죽지 않는다.
그렇기에 악마의 목숨을 일시적으로나마 빼앗으려면 심장을 꿰뚫거나 목을 날리는 게 아니라, 저 악마를 세상에 고정시키고 있는 ‘마력 핵’을 부숴야만 한다.
그리고 릴리스는 인간의 모습에 집착하는 터라 대체로 심장 위치에 마력 핵을 고정시켜 놓곤 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번에는 달랐던 모양이다.
“내가 너를 모를까. 네가 내게 당하고만 있을 리 없잖니. 분명 숨겨 둔 최후의 한 수가 있을 거라 생각했지.”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아하하. 이 세계에서 용사란 존재를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악마란다. 꺾어도, 짓밟아도 결코 굴하지 않는 것들이니…….”
거의 다 날아간 손가락으로 제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릴리스가 노래처럼 흥얼거리며 말했다.
“그래서 내 심장은 진작 다른 곳으로 옮겼지. 과연 네가 남은 시간 내에 내 목숨을 찾을 수 있을까?”
나는 더 이상 릴리스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리를 박차고 앞으로 쇄도하며 검을 내질렀다.
릴리스가 바닥을 구르며 검을 피했다.
그 모습을 보며,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솔직히 이렇게 생각했다.
‘망했네, 망했어.’
릴리스에게 내 수작을 완전히 간파당했다.
릴리스의 말대로, 릴리스를 상대하는 게 까다로운 이유에는 본인의 목숨 줄인 ‘핵’을 이동시킬 수 있다는 점도 포함된다.
그리고 나 또한 릴리스가 마력 핵을 이동시킬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기에 일부러 죽기 직전까지 ‘용사를 기리는 망토’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래야 릴리스에게 마력 핵을 이동시킬 여유를 주지 않고 한 번에 목숨 줄을 끊어 놓을 수 있을 테니.
그런데 완전히 망했다.
솔직히 정말로 한 번 뒈지기까지 했는데, 릴리스가 아니었다면 누구라도 속았을 것이다.
내가 죽어도 포기하지 않을 걸 알고 있는 상대라니, 가장 중요한 패를 까뒤집은 거나 다름없잖아.
빠각!
“윽!”
검을 들지 않은 주먹에 뺨을 맞은 릴리스가 균형을 잃었다. 광대뼈가 나가는 감촉이 산뜻하게 느껴졌다.
그래, 릴리스가 내 얄팍한 수작을 간파했기에 한 번에 저 녀석의 목숨 줄을 끊는 데 실패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릴리스의 가슴을 뚫은 타격이 전혀 유효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 증거로, 완전히 성검에서 몸을 빼낸 릴리스가 발을 박차고 살짝 뒤로 물러서는 동작은 이전보다 약간 둔해져 있었다.
게다가 망토를 착용한 내 컨디션은 최상이었다.
나는 릴리스가 쉴 틈을 주지 않고 검을 쥔 오른팔을 힘껏 휘둘렀다. 주먹에 맞고 비틀거리며 균형을 잃은 릴리스를 향해 검이 쇄도했다.
숨 한 번, 눈 한 번 깜박일 시간도 주지 않았다.
순식간에 수십 번의 검격이 내려쳐졌다.
릴리스가 손톱을 들어 검을 막아 내려 했지만, 수십 번씩 가해지는 검격에 강력한 경도를 자랑하는 손톱에도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검을 막지 못한 몸 모든 곳에도.
릴리스의 상처에서 튄 피를 피하며, 나는 릴리스의 행동을 주시했다.
가슴에 받은 충격을 채 회복하지 못한 릴리스가 한발 늦게 손톱을 들어 검을 막았지만, 그럼에도 느려진 다리는 내 검이 닿는 범위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어디에 숨겼지?’
시간이 있다면 온몸을 난도질해서라도 죽일 수 있겠지만 지금의 내게는 시간이 부족했다.
내게 남은 시간은 기껏해야, 구체적으로는 약 7분.
수많은 시도가 허락될 만한 시간은 아니었다.
이번에야말로 마력 핵의 위치를 제대로 추측해 내야만 한다.
‘일단 심장은 아니고.’
릴리스의 손가락 하나를 베면서도 계속해서 생각을 거듭했다.
릴리스가 핵을 움직일 수 있는 건 사실이지만 제한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한 번 마력 핵을 옮기는 것에는 상당한 에너지가 필요했다.
그 증거로 내가 릴리스의 가슴에 낸 구멍은 쉽사리 아물지 않았다.
저걸 봐도 그렇고, 지금 내 검을 피하는 꼴을 보아도 움직임이 확연히 둔해진 것이 눈에 보였다.
그렇다면 이미 한 번 마력 핵을 옮겼다는 말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았고, 또다시 마력 핵을 옮길 여력이 없는 건 분명해 보였다.
그러니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릴리스의 핵을 찾아 부수면 된다.
그러면, 이길 수 있다.
“아아악!”
기어코 허벅지 절반을 내게 베인 릴리스가 비명을 질렀다. 백록담에 절규하는 소리가 가득 찼다.
나는 그걸 바라보며 눈가를 좁혔다.
“다리는 아닌 모양인데.”
핵을 숨긴 곳 근처에 내 검이 닿았다면 저렇게 과장되게 행동하지는 못할 테니까 말이지.
검면으로 릴리스의 몸통을 후려치자 릴리스가 그대로 땅으로 나가떨어져 몇 번 튕겨 가다 멈추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몸으로 일어서려다 마는 모습이 보였다.
절로 동정심이 생길 정도로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아까라면 모를까, S급으로 너프를 먹고 한 번 타격을 입은 릴리스가 ‘용사를 기리는 망토’를 장비한 데다 성검을 든 나와 정면으로 맞서기는 어려웠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이미 승부가 난 상황인데도 내가 릴리스를 괴롭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릴리스의 본질을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아직 여유가 있군.”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이래서 구면인 사이가 지긋지긋한 거다.
릴리스의 비명에 즐거움이 섞여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할 내가 아니었다.
“네 여유의 근거가 뭐야.”
그 가장 큰 증거가 여전히 혼자서 나를 상대하고 있는 저 악마다.
아직도 백록담을 가득 메우고 있는 마물들은, 고개를 들지 말라는 릴리스의 명에 따라 여전히 땅에 머리를 박고 왕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용사를 기리는 망토’의 활성화 시간 내에 내가 질 거란 생각은 들지 않지만 숫자의 차이는 절대적이다.
악마들이 한꺼번에 달려든다면 릴리스를 향한 공세에 빈틈이 생길 것은 자명했다.
그런데 릴리스는 왜 아직도 저런 여유를 보이는 건지.
“뭘 숨기고 있는 거지?”
저 교활한 악마가 아직도 무언가 드러내지 않은 패를 손안에 감추고 있는 것이다.
“후, 후후후…….”
바닥에 널브러진 릴리스가 꺄르륵 웃어 댔다.
“이런, 이런. 용사여, 너는 아직도 악마가 무엇을 미혹하는지 알아내지 못했구나.”
“뭐?”
“너는 기적을 믿니?”
뜬금없는 말에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기적?
“인간에게 기적이 깃드는 것은 무척이나 드문 일이지. 그것도 악마가 곁에 있을 때 말이야.”
반짝이는 눈에 깃든 것은 기대감이었다. 불길한 붉은빛이 번질번질하게 감돌고 있었다.
그 빛을 본 순간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쉽게 일어나지 않기에 기적이며, 그래서 쉽사리 믿은 희망이 가져오는 절망은 배가 되지.”
기대감에 텅 빈 가슴을 부풀리며 악마는 손뼉을 쳤다.
무대 위의 배우를 격려하기라도 하듯이.
그리고 그 소리와 함께 알게 되었다.
시야에서 ‘안개가 걷혔다.’
실은 내 시야를 속이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도 그제야 깨달았다.
뇌를 속이고 있던 환몽이 사라지고, 나는 그제야 보았다.
마물들 사이, 높이 솟아 있는 나무에 묶여 있는 인간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마물들이 달라붙어 이미 사지를 난도질해 놓은 상처가 가장 먼저 보였다.
피에 젖어 길게 늘어진 머리칼과, 피로 물들어 색깔을 알아볼 수 없게 된 복장을.
발치에는 주인이 놓친 청동 방울과 부채가 놓여 있었다.
악마가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정말로 기적이 일어나 저 인간이 악마의 시야를 속이고 달아났다고 생각했느냐?”
그래, 그랬다.
멍청하게도.
묶여 있던 정소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고통이 역치를 넘은 것인지 입술은 벌벌 떨리고 있었으되 비명은 지르지 않았다.
그러나 눈동자에서는 빛이랄 것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저 눈빛을 안다.
너무도 많이 보았던 눈이다.
“차라리…….”
정소현의 떨리는 입술이 달싹이며 다음 말을 이었다.
분명 내게 전하고 싶은 말인데도 차마 그다음 말을 들어 줄 수가 없었다.
가슴속에서 무언가 치밀어 올랐다.
다음 순간, 고함을 지른 것은 정소현이 아니라 나였다.
“포기하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