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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102화 (103/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102화

Chapter 11. 왕관의 무게

아침부터 핸드폰 진동이 울리는 소리에 힘겹게 눈을 뜨고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겨우 9시였다.

어젯밤 잠을 설쳐서 늦게 잠들었더니 눈꺼풀이 무거웠다.

화면을 확인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인물의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이불에 고개를 묻은 채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자다 일어났어? 목소리가 잠겼다?”

“용건이나 말해.”

“오늘 오후에 시간 괜찮아? 이게 점심 약속 정도라면 참 좋겠지만, 내키지 않게도 공적인 용건이야.”

나는 이우연의 목소리를 듣고 혀를 찼다. 천천히 눈꺼풀의 무게가 가벼워졌다.

“그렇지 않아도 나도 한번 이야기해야겠다 싶었어. 오후 3시쯤 볼까?”

“그러자. 같이 점심 먹고 싶긴 한데 밥이 얹힐 것 같은 이야기라.”

“정말 집에서 나가기 싫어지게 하네. 그럼 어디서 봐?”

“어디든 상관없어. 어차피 조용한 장소로 이동해야 할 테니까, 편한 곳에 있으면 내가 픽업하러 갈게.”

“그럼 강남 헌터 스토어 앞에서 보자. 나 오늘 볼일이 있어서.”

“그래, 그럼. 아, 그리고.”

이우연이 평탄한 어조로 붙여 말했다.

“자주 쓰는 그거, 오늘도 쓰고 오는 게 좋겠어. 그럼 조금 이따 보자, 자기야.”

그리고 전화가 끊겼다.

일어나자마자 뜬금없이 정신 공격을 당한 나는 어두워진 핸드폰 화면을 노려보았다. 먹은 것도 없는데 속이 느끼하게 만들다니…… 아침을 먹지 못하게 하려는 수작임에 틀림없었다.

그나저나…… 그걸 쓰고 오라는 건, 즉 ‘은의 장막’을 말하는 거겠지.

대강 돌아가는 사정이 짐작이 되었다.

“감시라도 붙었나?”

혹은 감시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를 지켜보는 눈이 있다는 걸 간접적으로 전달한 게 확실했다.

나는 베개에 머리를 파묻었다.

수리산 던전을 봉인한 지 3일째.

정확히 말하자면 천부인 중 하나인 청동검을 손에 넣었다는 사실이 전체적으로 공지된 지 3일이 지났다는 말이다.

언론과 여론이 들끓고 있었다.

언론은 시시각각 ‘헌터 협회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침묵을 지키는 랭킹 1위의 플레이어…… 그 의도는?’ 하는 식의 기사를 냈으며, 사람들은 언제 랭킹 1위가 정체를 밝힐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호기심 위주의 여론은 둘째치고, 언론이 굳이 랭킹 1위의 정체에 대해 새삼 공격적으로 나오는 이유는 하나였다.

헌터 협회가 도의적 어쩌고 하는 입장 발표문을 낸 뒤, 여러 유명 헌터들이 은근슬쩍 개인 SNS를 활용해 이런 말을 흘리며 장작을 넣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모두 헌터 협회에 가입된 길드 소속의 헌터들이었다.

- 랭킹을 던전 클리어 업적순으로 매긴다면, 이렇게까지 랭킹 1위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을 이유가 없다.

- 그렇게 업적치를 쌓으려면 S급 던전을 숱하게 클리어했어야 하는데 이제껏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게 이상하다.

- 정부는 왜 랭킹 1위의 소재를 비밀로 하는가?

- 이상한 걸 넘어서, 수상하다.

- 무슨 치트키를 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주장을 요약해 보자면 대략 이랬다.

랭킹을 공지한 지 이제 2달 즈음. 슬슬 나올 법한 반응이었다.

게다가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얼마 전에 한 번 더 랭킹 공지가 있었다.

한 달마다 갱신되는 만큼, 그간 순위 변동을 기대한 사람도 있었던 모양이다.

업적치라고 해 봤자 구체적인 숫자로 기록되는 것도 아니니, 간발의 차로 내가 1위가 되었으리라 예상하는 사람도 많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내 순위는 변하지 않았다. 겨우 한 달 간의 격차로 벌어질 정도의 차이도 아니니 앞으로도 한동안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대로라면 주위의 반발심이 더 커질 일만 남았다, 이건데.

“슬슬 밝힐 때가 됐나.”

나는 어제 사 둔 커피를 냉장고에서 꺼내며 상태창을 소환했다.

플레이어명 : 방랑하는 구도자

LV.79

특성 : 관철하는 아귀

클래스 : 용사

체력 : 890

근력 : 785

민첩 : 565

마력 : 850

스킬 : 멸혼의 불꽃 Lv.6, 기사회생 Lv.5, 불굴의 의지-on

이번 한라산 던전을 클리어하면서 능력치가 제법 올랐다. 심지어 스킬 레벨도.

물론 아직 본래 능력치의 절반 수준도 안 되지만 두 달 만에 여기까지 잘도 회복했다, 싶다.

이우연이나 이선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이 정도면 한국 랭커들 사이에서는 제법 순위권이었다.

어떤 적을 만나든 조커인 ‘용사를 기리는 망토’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그럭저럭 비등하게 대치 가능할 것이다.

즉, 이제는 처음 랭킹이 발표되었을 때와는 상황이 달라졌다.

물론 아직 그래 봤자 본 능력치 회복은 한참 멀었고, 내 아이템 장비는 대부분 몬스터에게 맞춰져 있기 때문에 인간 대상으로는 성검이나 앙겔루스의 가호가 별 쓸모가 없다는 점은 감안해야 하겠지만.

“그래도 이제 질 것 같진 않은데.”

어제부터 발광하듯 허옇게 빛나는 시스템 메시지를 무시하며 나는 커피를 빨대로 쪽 빨아들였다.

차가운 아이스 바닐라 라떼가 머리를 쨍하고 울렸다.

그렇게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씻고, 대강 옷을 챙겨 입은 후 현관문을 나서니 이미 11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이우연을 만나기 전에 볼일을 끝내려면 시간이 빠듯할 듯싶었다.

볼일이라고 해 봤자 얼마 전에 모두 소진한 포션 재고를 채워 넣는 것과 입을 만한 옷을 사는 것 정도기는 했지만.

처음 요양 병원에서 퇴원한 후 옷을 마트에서 대강 아무거나 샀더니 마음에 드는 게 없었던 것이다.

나는 지하철을 타고 강남까지 이동하기로 했다.

새삼스러운 이야기지만, 지하철을 타고 가다 보니 던전이 생겨난 후 사람들의 복장이 달라졌다는 것이 실감되었다.

옷의 유행이 바뀐 거야 당연하지만, 사람들이 하나씩 갖고 있는 물건들이 눈에 띄었다.

묘한 광택이 도는 팔찌라든가, 혹은 옷 위에 껴입는 갑옷 형태의 조끼라든가.

아마 던전에서 얻은 재료를 활용해 일상적으로도 착용할 수 있는 아이템을 만든 것 같았다.

상태창을 열 수 있는 각성 자체는 어떤 사람이든 던전에 들어가기만 하면 가능하지만, 누구나 제 몸을 지킬 만큼의 재능을 발현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어디서 던전 브레이크에 휘말릴지 모르는 일이니 다들 보호 용품 하나 정도는 착용하는 게 일반적인 일이 된 모양이었다.

‘디자인을 예쁘게 뽑았네.’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남자가 입은 가죽 재킷을 보며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마력이 느껴지는 것을 보니 보호 장비인 것 같은데, 보기에는 그냥 잘빠진 가죽 재킷이었다.

던전 재료로 아이템을 만드는 거야 제작 관련 클래스에 스킬이 있으면 가능한 일이지만, 저렇게 예쁘고 세련되게 뽑는 건 확실히 재주였다.

자연스럽게 저번에 헌터 스토어에서 대기하다 만났던 헌터가 생각났다.

‘조한율이었지?’

포션을 싼 가격에 대량 공급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든 데다 내게 자신이 만든 핸드폰까지 자랑했던 사람.

제작자 클래스의 경우 레벨 업에 필요한 업적치가 아이템 제작 성공 여부에 따라 갈린다는 걸 생각해 보면 조한율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아무래도 직접적인 던전 클리어보다는 얻을 수 있는 업적치가 낮은데도 랭킹 10위권 안이니까.

이 정도면 대체 어떤 식으로 아이템을 제작하는지 순수하게 궁금할 정도였다.

특히나 포션 대량 생산에 어떻게 성공한 건지 궁금했다. 물론 핸드폰 번호처럼 쉽게 알려 줄 문제는 아니겠지만…….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다 보니 곧 강남역에 도착했다.

지하철역에 내린 후 사람들을 따라 걸음을 옮기자 아직도 공사 중인 지하철 내부가 보였다.

저번 돌발성 던브 이후 파괴된 곳을 수리하는 모양이었다.

그나마 빠르게 진압한 덕에 중요한 시설이 훼손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역사 안은 공사 때문에 더 복잡했지만 저번처럼 누가 봐도 나 헌터요, 하고 우쭐대는 태도의 몇몇 인간을 따라가자 길을 잃을 것도 없이 헌터 스토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번과 달리 판매가 아니라 포션 구입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딱히 대기할 필요도 없었다.

상급 포션 수십 개를 비롯해 중급, 하급 포션을 소지창에 적당히 채워 넣자 순식간에 억에 가까운 돈이 날아갔다.

그래도 딱히 아낄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 전투 스타일 상 포션은 생명값에 가까운 데다, 저번 리치 관련 아이템을 정산한 잔고가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또 이번 백록담 던전에서도 ‘청동검’ 외의 부수입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클리어 판정 후 보상을 살펴보니 소지창에 내가 처리한 악마들이 드랍한 손톱이니 가죽이니 하는 것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다음에 시간이 날 때 처분하면 물약값으로 스트레스 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파티 짜서 어디 고위 던전 레이드라도 가시나 봐요?”

그래도 이런 대량 구매는 그리 흔치 않은지 점원이 결제를 도와주며 묻기에 그냥 그렇다고만 대답해 주었다.

뭐, 실제로도 그리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렇게 포션을 구입하고 스토어 앞으로 나와 보니 시간은 12시 반.

햇살이 쨍쨍했다. 슬슬 더운 것을 보니 봄이 머지않은 느낌이었다.

그럼 여기 근처에서 대충 밥을 먹고 근처 백화점으로 가 볼까.

“응?”

그때였다. 주머니 속 핸드폰이 울렸다.

이우연인가? 갑자기 약속 시간이 바뀌었나?

그런데 화면에 뜬 이름이 뜻밖이었다.

나는 잠시 기억을 더듬다가 아, 하고 탄성을 질렀다.

이 사람이 나한테 무슨 일이지?

호기심에 전화를 받자 핸드폰 너머에서 희미한 웃음기가 담긴 목소리가 들렸다.

“아, 예나 씨! 안녕하세요.”

“네, 솔방울 씨.”

내가 입원했던 요양 병원에서 만난 간호사였다.

그 후 강남 던브를 클리어하고 입원했던 병원에서도 우연히 만나 전화번호를 교환했더랬다.

그러고 나서도 몇 번 문자가 오기는 했다만 요새 바쁘다 보니 거의 답장을 하지 않았기에 또 연락이 올 줄은 몰랐다.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

“혹시 지금 강남 헌터 스토어 앞에 계세요?”

그 말을 듣고 주위를 돌아보니 과연, 강남의 넓은 도로 너머 반대쪽 인도에 솔방울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솔방울은 나를 보고 손을 흔들다가 눈이 마주치자 손을 거두었다.

부드럽게 웃는 표정이 보였다.

“길 가다가 예나 씨 같은 사람을 봐서 전화드렸는데 맞았네요. 혹시 지금 바쁘세요?”

경험상 저렇게 물으면 꼭 식사라도 같이하자는 말이 따라오던데. 나는 선선히 대답했다.

“바쁘진 않은데.”

“그럼 이렇게 만난 것도 우연인데 같이 식사나 하실래요? 마침 밥 먹으러 가려고 했거든요.”

예상에서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 반응이었다.

“저 이 근처 맛집 잘 알거든요. 뭐 먹고 싶으세요?”

그렇지만 뭐, 나쁠 것도 없지. 옷 쇼핑이야 급한 일은 아니니까.

나는 계획을 수정했다.

“맛있는 거라면 뭐든 상관없어요. 맛집 리스트 업 좀 해 주세요.”

*   *   *

솔방울이 뽑은 맛집 리스트 중에 내가 선택한 것은 한정식집이었다.

“한식 좋아하시나 봐요.”

“네, 요새 거의 한식만 먹어요.”

10년 넘게 타국 음식만 먹었더니 한식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른다.

그러자 솔방울이 LA갈비가 담긴 접시를 내 쪽으로 밀어 주며 사람 좋게 웃었다.

“많이 드세요. 연락이 안 돼서 걱정했는데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이네요. 퇴원하고 몸은 좀 괜찮으셨어요?”

그 말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

“……네에, 뭐.”

어쨌거나 지금 목숨이 붙어 있으니 괜찮은 걸로 치자.

밥을 먹으면서 솔방울이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몇 마디 더 하고, 나는 15첩 반상을 만끽하며 솔방울의 눈물겨운 병원 근무 생활을 들었다.

헌터 전용 병원에서 일하는 것도 제법 힘든 것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솔방울의 얼굴이 저번에 봤던 때보다 조금 홀쭉해 보였다.

“그래도 보람이 있기는 해요. 아무래도 최전선에 나가는 헌터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좋긴 하죠.”

“이것도 다 예나 씨 덕분이에요.”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말에 사레가 들렸다. 켈록거리는 내게 솔방울이 놀라 물컵을 내밀었다.

“괘, 괜찮으세요?”

“……네에.”

“다행이네요.”

나를 바라보는 둥그렇고 순한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나는 물을 한 번 더 들이켜며 그 시선을 피했다. 연한 갈색의 눈동자라 그런지 송아지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솔직히 별말 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나오는 걸 보니 정말 부담스럽다.

나야 내가 생각한 대로 한두 마디 적당히 지껄인 것뿐이고, 그걸 듣고 서울까지 와 큰 병원에서 일하기로 한 건 솔방울의 선택인데 내가 저런 말을 들을 이유는 없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 말해 봤자 솔방울에게서 나오는 거라곤 더한 공치사밖에 없을 것 같다는 감이 왔다. 낯간지러운 건 사양이었다.

차라리 그냥 화제를 돌리는 게 속이 편할 듯싶어서, 나는 솔방울에게 대놓고 화두를 꺼냈다.

“그건 그렇고, 저한테 무슨 할 말 있으신 거 아니에요?”

그 말에 솔방울이 눈을 크게 떴다. 내 말이 엄청나게 의아하다는 표정이었다.

“네? 제가요?”

“……아니었어요?”

내가 더 의외였다.

사실 아무리 병원에서 인연이 있었다고 해도 그렇지, 그리 친근한 사이도 아닌데 길에서 우연히 마주쳤다고 느닷없이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하기에 당연히 용건이 있는 줄 알았다.

물론 내게 이성적으로 호감이 있다고 읽는 게 더 자연스럽겠지만, 친절하게 구는 것치고 솔방울의 태도가 워낙 담백해서 그런 쪽은 아닌 것 같아 말을 꺼내 본 건데, 아니었나 보다.

솔방울이 하하하,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음, 죄송해요. 제가 예나 씨를 부담스럽게 했나 봐요. 딱히 용건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그냥 얼굴 뵈니까 반가워서.”

“딱히 부담스러웠던 건 아니지만…….”

일단 반사적으로 부정은 했다만, 사실 의문스럽기는 했다.

단순히 5년간 병상에 누워 있던 환자가 멀쩡하게 일어나서 그런 건가?

그렇지만 직업 정신의 발로라고만 보기엔 솔방울의 호의에는 과한 구석이 없잖아 있었다.

설마 자신이 맡은 모든 환자에게 저렇게 구는 건 아닐 테니까.

그래서 나는 그냥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의문스럽기는 하네요. 제가 솔방울 씨가 맡았던 환자 중에서 좀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었던 건가?”

“하하하. 물론 그것도 그렇지만, 아무래도 예나 씨는 저한테 특별하기는 하죠.”

“제가요? 왜?”

그렇게 묻자 솔방울이 무언가를 회상하듯, 눈을 가늘게 떴다.

“저 사실 5년 전, 처음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났을 때 예나 씨를 봤거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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