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104화
당장 차 문짝이라도 한번 시원하게 발로 차고 택시나 잡으러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이우연이 곧바로 차에 올라탔기에 나도 그냥 옆 좌석에 올라탔다.
물론 좌석에 타자마자 옆구리를 쥐어박았다.
“억!”
“미쳤냐?”
제대로 얻어터진 이우연이 시동 거는 손을 티 나게 부들거렸다.
웃기고 자빠졌군.
“관종 짓을 할 거면 혼자 해. 뭐 하는 짓이야?”
“관종이라니, 섭섭한 말을 하네. 당신 생각해서 한 거잖아.”
“뭐?”
“이왕 사람 많은 곳에서 만나는 거, 아이템 효과를 좀 더 확실히 실험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이우연이 과장되게 부들대는 것을 그만두고 이어 말했다.
“당신의 근접 거리에 선 사람이 엄청난 주목을 끌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 아이템이 효과가 있을지 궁금하잖아. 효율적으로 쓰려면 여러 상황에서 먼저 시험해 보는 게 낫지 않아?”
“그러니까, 나를 도와주려는 의도였다고?”
“응, 고맙지?”
“퍽도 고맙겠다.”
나는 대충 대꾸하며 이우연의 옆얼굴을 훑었다.
본래부터 그리 믿음직한 남자는 아니었다만, 몇 시간 전부터 한 가지의 의문이 추가되니 더 의심쩍게 보였다.
솔방울의 말대로라면, 이우연도 나를 알아보아야 정상이었다.
설마 저 이우연이 그렇게 특수한 상황에 있었던 나를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그렇지만 모르는 척을 할 이유도 굳이 떠오르지 않는다.
‘……어떻게 할까.’
당장 대놓고 왜 날 모르는 척하는 거냐, 그렇게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 그래 봤자 얻을 게 없다.
만에 하나, 정말로 모르는 거라면 말해 봤자 무용지물이고, 만일 정말로 모르는 척하는 이유가 있는 거라면 묻는다고 한들 대답해 주지 않을 것이다.
필요도 없는 질문을 해서 혹시라도 이우연과의 관계가 틀어지면 정보를 얻을 구석이 적은 내 손해였다…… 아직까지는.
즉 지금 마음 가는 대로 말을 쏟아 내 보았자 해결되는 것은 약간의 서운함과 섭섭함, 별것 아닌 배신감을 토로하는 것뿐이다.
곧 판단을 끝낸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우연과 함께 사선을 넘으며 약간의 동지 의식이 생긴 건 사실이다만 역시 아주 신뢰하기는 어렵다, 그런 결론이었다.
아무래도 정보를 교차 검증할 수 있는 라인을 얻는 게 급하겠군.
“왜 이렇게 조용해? 어디 가는지 안 물어봐?”
그렇게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긴 했다만 깐족거리는 이우연이 얄밉기는 매한가지였다.
나는 코웃음을 쳤다.
“말 많은 네가 어련히 설명하겠거니, 했지. 그래서 어디 가는데?”
“일단, 누가 대화를 엿듣거나 새어 나갈 염려가 없는 곳.”
“……진짜 감시라도 붙었어?”
“그런 셈이지. 그래서 전화로 긴 이야기를 하기가 좀 그랬어. 아무리 그래도 도청까지는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
설마설마했는데 진짜였냐.
이우연이 설명을 덧붙였다.
“헌터 협회에서 영원 길드를 비롯해 당신 정체를 알 만한 사람들을 쪼아 대느라 혈안이 됐거든. 대표적으로는 나, 김숙자 교수님, 그리고 이선 헌터.”
“너나 이선이나 누가 쪼아 댄다고 입을 열 사람들은 아니잖아. 김숙자 교수는…… 잘 모르겠다만.”
“그거야 그렇지. 첨언하자면 교수님도 당신이 밝히지 않겠다는 일에 굳이 입을 열 사람은 아니야.”
“그래서 내 정체가 새어 나갈 구석은 없다?”
“안타깝게도 이미 새고 있긴 해. 헌터가 아니라 정부 측에서.”
이우연이 그렇게 말하며 슬쩍 룸 미러를 눈짓했다. 덕분에 나도 이우연이 말하는 게 무엇인지 금방 알아차렸다.
검은색의 승용차 하나가 따라붙어 있었다.
나는 잠시 감탄했다.
“와, 이런 건 드라마에서나 보던 건데.”
타르토스에서는 겪어 본 일이었지만 한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오히려 현실감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우연이 소리 내서 웃었다.
“던전에 몬스터에, 드라마보다 더한 게 현실인데 그게 무슨 소리야. 그나저나 이제 슬슬 따돌려야겠다.”
“어떻게 따돌릴 건데?”
“그야 내 환상적인 드라이브 테크닉으로. 꽉 잡아!”
진짜로 드라마 대사 같은 말을 하면서 이우연이 엑셀을 밟았다.
그렇지 않아도 마력이 센 스포츠카에 엑셀을 밟기까지 하니 순간적으로 몸이 뒤로 쏠리는 게 느껴졌다.
“야, 이……!”
미친놈아. 아직 시내야!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이우연은 정말 요령 좋게 이리저리 도로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부아아아앙!
커다란 배기음에 나는 귀를 막았다. 옆에서 이우연이 신나 하고 있었다.
“이런 거, 한 번쯤은 해 보고 싶었어!”
속력을 내 차선을 아슬아슬하게 바꾸는 아찔한 경주가 이어졌다. 앞선 차를 이용해 거리를 벌리더니, 신호등이 주황색 불빛일 때 사거리를 질주하고, 그러기를 몇 번.
머리가 어질했다.
내가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더니 이우연히 한 번 더 환호를 올렸다.
“봐봐. 따돌렸다! 참 쉽지?”
참 쉽기도 하겠다.
하지만 사이드 미러를 보니 정말로 뒤에 따라붙었던 차량이 사라져 있었다.
아주 효과적인 레이스였다.
“……미친놈이야?”
다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솔직히 말해서 약간 감명받았다.
님페의 바람을 이용해 질주하는 것과는 또 다른 스피드의 매력이 있었다.
나도 운전 연수나 다시 받을까. 아니면 오토바이를 사든가.
그나저나 차에 달린 내비게이션을 슬쩍 보니 슬슬 서울을 벗어나고 있었다.
아무래도 어디 교외로 나갈 생각인가 보다.
미친 운전의 여운을 마저 즐긴 이우연이 아까 전 화제를 다시 꺼냈다.
“그나저나 정보가 샌다는데 생각보다 태연하네. 난 엄청 화낼 줄 알았는데.”
“어차피 길게 못 갈 거란 생각은 했어. 아무도 모른다면 모를까, 이미 정부에 내 정보가 까인 마당에.”
누군가가 알게 된 비밀이 영원히 지켜질 것이라 믿는 게 오히려 순진한 것이다.
게다가 그 누군가에게 내가 무언가 이득을 주거나 상대방의 약점이라도 잡은 게 아닌 이상에야.
오히려 한국 정부는 내가 아니라 헌터 협회와 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니 정보가 새는 게 당연했다.
이우연이 내 말을 듣고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딱히 밝혀져도 상관은 없었나 봐? 나는 또 꼭 숨겨야 하는 비밀이라도 있나, 했는데.”
“아직도 굳이 밝히고 싶지는 않아. 신상이 다 까이면 귀찮잖아.”
능력치를 어느 정도 끌어올린 지금에서야 할 수 있는 말이긴 했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할 말이 뭔데? 설마 겨우 내 정체가 새어 나가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말을 해 주려고 만나자고 한 건가?”
설마 내게 그 정도 눈치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의심하는 눈초리로 이우연의 옆얼굴을 노려보자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그 말도 하려고 했던 건 맞지만…… 당신의 도움을 받을 일이 좀 있어서.”
“내 도움?”
“혹시 내가 저번에 여의도 쪽에서 길드 간의 충돌이 있었다고 말한 거, 기억나?”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일산 호수 공원에서 갑자기 던전 브레이크가 터졌을 때 헌터들의 파견이 늦어졌다고 하지 않았던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우연이 말을 이어 나갔다.
“그 충돌이란 게 사실 던전을 놓고 길드 간에 일어나는 경쟁이거든. 국회 의사당 근처에 있는 던전 하나가 발단이야.”
그쯤 이야기하면 그 경쟁이란 게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헌터들이 던전 하나를 놓고 경쟁한다면 그 이유는 너무나 뻔했다.
나는 혀를 찼다.
“던전 안에 무슨 희귀한 재료라도 있나 보지?”
“맞아. 그냥 희귀 재료도 아니고 상급 마석을 채굴할 수 있는 던전이거든.”
상급의 마석이라…….
마석이라 함은 마법사 계열의 클래스가 착용하는 장비에는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재료였다. 보통 보스 몬스터를 잡으면 확률적으로 드랍되곤 한다.
아니, 그런데 잠시만.
나는 생각을 이어 나가다가 문득 놀랐다.
“방금 채굴이라고 했어? 드랍이 아니라?”
“그래, 채굴. 마석 광산이 있다고 하면 믿을래?”
“못 믿어!”
빅뉴스였다. 마석 광산이라고?
“그러니까 곡괭이로 광산을 파면 마석이 나온다는 말이야? 보스 몹을 잡아서 얻는 게 아니고?”
“응, 정확히 이해했네. 그냥 던전 입장해서 마석을 채굴하면 돼.”
“클리어 조건이 뭔데? 드래곤 열 마리랑 싸우기라도 하는 건가?”
“그 점이 제일 놀라운데, 던전에 클리어 조건이 없어. 입장과 동시에 언제든 탈출 가능하지.”
“뭐!”
물음이 아니라 거의 고함이었다. 차 안을 울리는 내 목소리 때문에 내 귀가 아파졌다.
클리어 조건이 존재하지 않고 마석만 채굴할 수 있는 던전이라니. 그건 던전이 아니라 그냥 보너스 아닌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우연이 말한 길드 간의 충돌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갔다.
그 정도로 개꿀인 던전이 있다면 누구라도 독차지하고 싶을 테니 충돌이 일어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마석은 많을수록 좋으니까.
하지만 한편으로 영 찝찝했다.
“말도 안 돼. 그런 던전이 어떻게 존재해? 던전 포화도는 어떻게 되는데?”
“클리어 조건이 없으니 포화도도 올라간 적이 없지.”
“……그거 진짜 이상한데.”
인간의 심연을 시험하는 것 같은 이 시스템에서 그렇게 이득만 보는 던전이 정말 실존할 수 있는 건가? 나는 회의적이었다.
“그래, 당신이 생각해도 그렇지?”
아무래도 이우연 역시 같은 생각인 모양이었다. 핸들을 잡은 이우연이 눈살을 찌푸리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영 찜찜해.”
“그런데 이제까진 괜찮았다며. 그렇게 느낀 무슨 계기라도 있었어?”
“아, 얼마 전 당신이 백사현에 대해서 물어봤을 때 말이야. 내가 그 던전에 들어갈 차례였거든. 그때 묘한 살기가 느껴졌어.”
그렇다고 딱히 몬스터가 출현한 것도 아니지만, 이우연이 덧붙였다.
나도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네가 그렇게 느꼈으면 그게 맞을 것 같은데.”
헌터가 던전 안에서 느끼는 직감이란 쉬이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머릿속에 수많은 불길한 가능성들이 스쳐 지나갔다.
이우연은 내 반응이 흡족스러운 듯했다.
“그래, 그런 자문이 좀 필요해서 만나자고 한 거야. 나만 이렇게 말해 봤자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기가 힘들 것 같아서.”
“누굴 설득하는데?”
“지금부터 만나러 갈 사람. 어차피 당신도 나한테 무언가 도움을 청할 일이 있어서 만나자고 한 거 맞지? 상부상조하자고.”
“상부상조라…….”
나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인 뒤, 짧게 동의를 표시했다.
미공략 가능성이 있는 던전이라.
내가 딱히 손해 볼 것 없는 이야기였다.
“그래, 좋아. 내 용건은 끝나고 이야기하지.”
그 후로 몇십 분 정도를 더 달려 이우연의 차는 한적한 곳에 있는 웬 한옥집에 멈추었다. 낮은 담벼락에는 겨울의 담쟁이 넝쿨이 앙상한 가지를 드리우고 있었다.
나는 차에서 내린 후 담벼락을 응시했다. 이우연이 주차한 후 그런 나를 보고 웃었다.
“그렇게 노려보지 않아도 돼. 마법진이 그려져 있지만 단순한 환각 마법이야.”
이우연의 말대로 담벼락 전체에서 마력의 기운이 느껴졌다.
내가 경계하며 문 안으로 들어서려 하지 않자 이우연이 먼저 한 발 안으로 디뎠다.
“벽 안에 들어서면 서로의 얼굴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환시야. 자, 안전하지?”
“……그래.”
이런 식으로 상대방의 얼굴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정도의 암시가 걸린 공간은 타르토스에도 존재했기에 낯설지는 않았다. 여기까지 와서 들어가지 않는 것도 꼴이 웃길 것이다.
이제 필요 없어진 ‘은의 장막’ 착용을 해지하고 담벼락 안으로 들어서자 잠시 시야가 희뿌옇게 흐려지는 느낌이 들더니 곧 다시 맑아졌다.
“별거 없지?”
이우연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웅웅거렸다. 아무래도 목소리를 변조하는 수준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모양이었다.
다만 경계를 넘어서자 이우연의 얼굴이 마치 블러 처리를 한 것처럼 뿌옇게 흐려져서 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환시가 걸려 있는 곳은 그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낮은 담벼락 너머로 보였던 것은 휑한 한옥 한 채뿐이었는데, 문을 넘어서니 꽤 거대한 규모의 전각이 늘어선 것이 보였다.
모두 다 독채로 구성되어 있는 데다가 중앙에는 커다란 연못에 조그마한 누각까지 있었다. 완전히 한국 전통식 정원이었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 문 앞에 선 나와 이우연에게 달려오는 직원이 보였다. 개량된 한복 차림의 직원은 특이하게도 연지 곤지를 찍은 전통 탈을 쓰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고객님. 예약 바우처를 보여 주시겠습니까?”
이우연이 단청 무늬로 장식된 바우처를 꺼내어 건넸다.
직원이 핸드폰을 꺼내 바우처를 확인하더니 곧 길을 안내했다. 누각 근처의 독채였다.
장지문 앞에 서서 직원이 간단히 안내를 해 주었다.
“한 시간 후부터 저녁 수라상이 차려질 예정입니다. 필요하시면 안쪽에 직원 호출 종이 있으니 연락하시면 됩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그리고 전통 탈을 쓴 직원이 종종대는 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아무리 콘셉트라도 이건…… 아주 대단했다.
나는 솔직한 마음으로 감탄했다.
“예쁘긴 하네.”
“그렇지? 마음에 들어 할 줄 알았어.”
이우연이 웃으며 동그란 문고리를 들어 문을 열었다.
안쪽 공간도 한국 전통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다만 좌식이 아니라 의자가 놓인 입식이었는데, 대신 검고 윤기 나는 테이블에는 섬세한 자개 장식이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그 테이블 위에는 찻잔 세 개가 놓여져 있었다. 그중 하나에는 벌써 따뜻한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이미 방 안에서 책을 읽고 있던 사람이 문이 열린 것을 보고 고개를 들었다.
뭉개진 환시 때문에 얼굴이 인식되진 않았지만, 곧 들려오는 목소리로 상대가 누군지 파악할 수 있었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었군.”
익숙한 목소리였다.
이우연의 쾌활한 답변이 뒤를 이었다.
“안녕하십니까, 김숙자 교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