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105화
이우연이 그렇게 말한 순간 시야를 뿌옇게 가리던 환시가 사라지고 김숙자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아마 이름이 환시를 깨는 키워드인 모양이었다.
이미 김숙자 교수가 와 있을 거라고 미리 이우연에게 들었던 터라 놀라지는 않았다.
“앉지.”
김숙자 교수는 오늘도 기다란 가죽 코트를 입고 왔는지 코트는 의자 뒤에 걸쳐 놓고 검은색 셔츠에 슬랙스를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전통적인 공간과 상반되어 묘한 인상을 주었다.
저번에 보았을 때는 던전 브레이크가 터질 일이 코앞이라 사실 제대로 관찰할 일은 없었지만,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더 나이가 있어 보였다.
책을 오래 본 건지 안경을 낀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김숙자가 맞은편에 앉은 나와 이우연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우연 군, 그리고…… 강예나 양.”
환시를 풀기 위한 이름일 것이다. 곧 또렷해진 김숙자 교수의 눈길이 내 얼굴에 와 닿았다.
김숙자가 한층 더 피로해진 얼굴을 했다.
뭐야, 왜 그러는 거지?
“저번에 신촌 던전에서 보고 처음이로군, 강예나 양. 잘 지냈냐고 묻고 싶지만…… 이미 근황도 알고 있고. 한라산 백록담 던전 클리어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의외인 인사라 절로 말꼬리가 올라갔다.
솔직히 저런 인사말보다는 내 정체가 랭킹 1위라는 걸 알고 있으니 그 언급을 먼저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심지어 김숙자는 일체의 추가 언급 없이 테이블 위에 놓인 메뉴판을 가리켰다.
“일단 주문부터 하지.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지 시켜.”
“그래,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여기 구운 떡이랑 약과가 진짜 맛있어. 전부 수제로 만들거든.”
밥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괜찮다고 사양하려다가 이우연이 말하는 라인업을 듣고 마음을 바꿨다. 가격이 표시되어 있지 않은 메뉴판에는 하나같이 맛있어 보이는 전통 다과들이 주르륵 늘어서 있었다.
이우연의 추천대로 구운 떡과 꿀 세트, 약과와 보성 녹차를 새로 주문하자 곧바로 호출을 받은 직원이 소담한 쟁반에 음식을 가져왔다.
내가 포크로 들기름에 구운 떡 하나를 꿀에 찍어 먹는 걸 보고 나서야 김숙자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우연 군. 굳이 이렇게 비밀스럽게 만남을 요청한 이유가 뭐지? 전화로 충분하지 않았나?”
“에이, 교수님도 참. 제가 전화로 백날 떠들어 봐야 고려해 보지, 하고 끊으실 거잖아요.”
“실제로 오래 고려해 보아야 할 문제를 가지고 오니까 그런 게지.”
“빠른 결단이 필요한 문제를 오래 고려해 봤자 상황이 악화될 뿐인데도 말인가요?”
“여의도 마석 광산이 빠른 결단이 필요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되는군. 24시간 내내 한국의 모든 길드가 시간을 준수해 가며 마석을 채굴하고 있는 상황이지 않나.”
미리 차 안에서 이우연에게 이야기를 들어 사정을 알고 있었기에 오가는 대화가 이해가 되었다.
본래도 한국은 정부가 던전 내에서 헌터들 간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위험 등급에 따라 던전에 입장하는 인원수를 제한하는데, 여의도 던전의 경우 워낙에 인기가 많다 보니 24시간 내내 사람이 끊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김숙자가 피곤한 낯으로 말을 이었다.
“마석 광산은 일 년 전부터 정해진 스케줄대로 최대한 많은 길드가 입장할 수 있도록 고려했는데, 조사단을 파견하려면 특정 몇몇 길드가 입장을 포기해야 해. 이건 형평성 문제가 될 수 있어. 누가 흔쾌히 입장을 미루겠다고 하겠나? 심지어 그 근거가 단순히 자네의 감일 경우에는 더더욱.”
“하지만 제 감이 잘 맞는 거 아시잖아요. 이번에 여의도 던전에 들어갔을 때 확연한 살기가 느껴졌어요. 지금처럼 아무렇게나 입장시키다가 혹시 여의도에서 던브가 터지기라도 한다면요?”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영원 길드가 입장했을 때 조사를 해 보지 그랬나. 그랬더라면 형평성이 거론될 일은 없었을 텐데.”
“이미 들어간 다음에 느낀 걸 어떡합니까. 제가 예언자예요? 영원 길드에서 다시 조사단을 꾸리고 싶어도 우리 차례는 이제 반년 후라고요, 교수님.”
“그럼 반년 후에 조사하도록 하지. 조사단에 영원 길드가 협력하는 걸로 알고 있으면 되나?”
이우연의 표정을 본 김숙자 교수가 미간을 흐리며 눈두덩을 짚었다.
“그런 표정 지을 거 없어. 자네 입김이 김성연 길드장보다 세지 않다는 건 나도 알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자네 소속인 영원 길드조차 조사단 파견을 위해 입장을 양보하지는 않을 거란 말일세. 그런데 다른 길드를 어떻게 설득하겠나?”
“……적어도 몇 시간만이라도 확보할 수는 없겠습니까? 입장을 굳이 포기할 것 없이 입장 시간을 조금씩만 미루면 되잖아요.”
“안 된다는 건 자네도 잘 알고 있겠지. 다들 아이템 제작을 의뢰하려고 마석을 캐려는 건데,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마석 수량을 납품하는 게 전제야. 스케줄 조율을 하려면 제작 공방부터 조정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쪽도 정해진 기한이 있으니 난감해할 거고.”
“그러니까 그건 정부 행정 명령으로 조정 가능한 사안이 아니냐는 거죠.”
“그것도 맞는 말이야. 다만 그렇게 하려면 근거가 이우연 헌터의 단순한 ‘감’이어서는 안 된다는 거지…… 그걸 알고 있으니 자네도 강예나 헌터를 데려온 거 아닌가?”
한참 대화를 나누던 김숙자의 시선이 갑자기 나에게로 꽂혔다.
약과를 포크로 부숴 먹고 있던 나는 반사적으로 그 시선을 맞받았다.
김숙자 교수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따닥, 두드렸다.
“강예나 헌터는 어떻게 생각하지?”
꽤 오랜 설전이 오갔음에도 감정이 섞이지 않은, 사무적으로 들리는 질문이었다.
나는 입안에 달짝지근한 약과의 단맛이 감도는 것을 살짝 식은 녹차로 씻어 낸 후 입을 열었다.
“저도 이우연 헌터의 말에 동의합니다. 근거가 단순히 감이라 설득하기 어렵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하긴 하지만…… 클리어 조건도, 몬스터도 없이 마석을 채굴할 수 있다는 건 이상합니다. 시스템이 그렇게 호락호락할 리가 없어요.”
가장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은 해당 던전의 클리어 조건이 존재하지만, 아직 클리어 조건을 출현시키는 선행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한 상태라는 것이다.
운이 좋다면야 앞으로도 선행 조건이 충족되지 않아서 현 상황이 유지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요행을 바라는 건 사실상 폭탄 돌리기에 가까워 보였다.
만일 십만 개째의 마석을 파내는 게 선행 조건이었다면, 운 나쁘게 그때 던전에 들어간 길드가 그걸 고스란히 뒤집어쓰게 된다.
마석 채굴을 하러 들어간 길드가 그런 상황에 대응하기는 어려울 테고.
“그렇지만 자네도 딱히 근거가 있는 건 아니잖나.”
“저는 그 던전에 들어가 본 적이 없으니까요.”
“……그럼 역시 어렵겠는데.”
내 말을 신중하게 듣던 김숙자가 씁쓸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본인이 시킨 대추차는 달짝지근할 텐데 사약이라도 넘기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옆에서 이우연이 내 손등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곧게 뻗어 있는 눈썹이 팔자로 잔뜩 내려가 있었다.
“강예나, 이러기야? 나 도와주기로 했잖아?”
“네가 제대로 된 근거를 가져오지 않은 건 사실이잖아.”
이우연이 배신당해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지만 그냥 무시했다.
그도 그럴 게, 김숙자의 말에는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내가 한국 사정에 그리 통달하지는 않았지만 던전에서 획득할 수 있는 아이템 때문에라도 길드 입장을 통제하는 건 정부 측에서도 상당히 부담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었다.
루카스가 비슷한 주제로 가끔 골머리를 앓는 것을 보았기에 충분히 예측은 가능했다.
심지어 그 근거라는 게 영원 길드의 이우연 말 한마디라는 것도 문제일 테고.
다만, 나는 김숙자를 보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렇지만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근거만 확실하면 정부에서도 잠시 던전 입장을 중단할 의지가 있다는 것 같은데, 제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습니까?”
그렇게 말하자 안경 너머로 교수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나는 그 빛깔을 놓치지 않았다.
역시.
김숙자 교수도 굳이 이런 자리까지 나왔다는 건, 내심 이우연의 말에 동의하고 있다는 뜻이라고 생각했다.
김숙자 교수의 성격이야 저번 신촌 던브 때도 그렇고, 고려해야 할 사항이 많아서 그렇지 인명을 최우선으로 하는 것은 확실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우연이 내세운 근거가 ‘감’ 따위의 빈약한 것이라 그렇지, 솔직히 여의도에서 던전 브레이크가 터지는 위험을 감수하느니 욕을 좀 먹더라도 조사단을 파견해 제대로 실태를 조사하는 게 백 번 나은 선택이다.
즉, 김숙자는 제대로 된 근거만 발견한다면 해당 던전의 조사단 파견을 도울 것이다.
그걸 확인했으니 이야기는 쉽다.
근거는 만들면 그만이지.
나는 한 번 헛기침을 한 뒤 두 사람의 시선을 모았다.
“아시다시피 저는 현재 시스템상 랭킹 1위입니다만.”
“……그렇지.”
“갑자기?”
“저한테 사실 특별한 스킬이 있어서요.”
두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
“……강예나, 거짓말 되게 못하는구나.”
“거짓말 아니거든?”
저게 도와줘도 X랄이네.
나는 테이블 밑으로 이우연의 다리를 한 대 까 준 후, 민망함을 참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스킬로 던전을 감정…… 아니, 스캔하면 숨겨진 클리어 조건은 없는지 볼 수 있어요. 그러면 그게 정말로 보너스 던전인지, 아니면 숨겨진 함정이 있는지 파악할 수 있겠죠.”
김숙자가 내 말을 들으며 안경을 벗고 이번에는 콧대를 지그시 누르는 게 보였다. 드러난 눈가에 피곤함이 한 겹 더해진 것 같았다.
옆에서 이우연이 조그만 목소리로 감정보다는 스캔이 낫다고 속살거렸다.
“……그래, 하기야 자네는 이제껏 밝혀진 이력이 없으니 그런 스킬이 있다고 해도 이상하게 들리진 않을 거야.”
김숙자가 듣기에도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건 확정인 모양이었다.
내가 그렇게 연기를 못하나?
“뭐, 그래도 자네의 말이라면 어느 정도 근거가 되긴 하겠군.”
오랜 침묵 후에 김숙자가 마지못해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뻔뻔한 얼굴로 무표정을 유지했다.
“저는 반대예요.”
이우연이 옆에서 고개를 젓고 있는 게 보였다. 도와 달라더니 왜 어깃장을 놓는 건지 모를 일이다.
“너는 또 왜?”
“솔직히 날 도와 달라고 데리고 온 건 맞는데, 당신이 숨기고 싶은 걸 굳이 드러내면서까지 도와 달라는 건 아니었어.”
“그래, 강예나 헌터. 그런 임기응변으로는 한계가 있어.”
김숙자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렇게 나서면 자네의 신원이 필수적으로 밝혀지게 돼. 게다가 거짓으로 그런 스킬이 있다고 말했다가 혹시 여의도 던전이 정말 ‘보너스 스테이지’라도 된다면 어쩔 셈인가? 신뢰도를 회복하기 어려울 거야.”
“아, 제 걱정을 해 주시는 거군요.”
사실 이우연을 도우려고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픽 웃었다.
“그런데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거긴 정말로 미공략 던전이니까.”
그러니까, 이우연의 목적은 내 목적과도 일치한다는 소리다.
시야 한구석에서는 어젯밤부터 떠올랐던 시스템 메시지가 희게 빛나고 있었다.
- 서브 퀘스트를 진행중입니다.
- 서버 : 대한민국에 남아 있는 미공략 던전을 모두 클리어하십시오.(0/5)
- 클리어 수행도에 따라 메인 퀘스트가 진행됩니다.
- 플레이어, ‘방랑하는 구도자’는 시스템이 지정한 특별 관리 대상으로서 지정하는 던전의 미공략 여부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 플레이어가 지정한 던전은 ‘미공략’ 상태입니다.
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씩 웃었다.
“그리고 저는 이제 세상에 드러날 준비가 됐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