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106화
“그럼 구체적인 스케줄을 잡아서 다시 연락하도록 하지.”
세부적인 논의를 끝낸 후 시간을 보니 어느덧 저녁 7시가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중간에 당이 떨어진 탓에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하느라 더 늦어진 것도 있었다.
참고로 식사는 아주 맛있었다.
오래된 논의 끝에 안색이 한층 더 시꺼메진 김숙자 교수가 관자놀이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일정을 아무리 빨리 잡아도 조사단을 꾸리려면 최소 일주일은 걸려. 내가 정부 인사들을 설득하는 시간도 필요하고.”
“영원 길드 쪽은 제가 말해 두겠습니다.”
“그래, 그쪽은 맡기지. 연락 주게.”
슬슬 파장하는 분위기였다.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 김숙자가 나를 제지했다.
“아, 강예나 헌터. 잠시만 기다려. 우리 둘은 이야기 좀 하지.”
“저랑 둘이요?”
“그래, 우연 군. 먼저 돌아가도록 해.”
“그건 안 될 말씀인데요.”
이우연이 어깨를 으쓱했다.
김숙자 교수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지려고 하기 직전에 말이 이어졌다.
“제가 차를 몰고 와서 먼저 돌아갈 수는 없어요. 이야기가 긴 게 아니라면 제가 차 안에서 기다리도록 하죠.”
나는 김숙자 교수와 눈이 마주쳤다. 아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말을 꺼낸 건 대외상 동갑인 나였다.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말을 하든가.”
“왜 나만 못된 것처럼 말해? 이제까지 셋이 잘만 이야기하다가 나만 쏙 뺀다는데 질투 나잖아.”
“귀여운 척하지 말고 잠깐 나가서 기다리고 있어.”
“네, 네. 알겠습니다아~.”
이우연이 삐진 티를 팍팍 내며 방을 나섰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김숙자가 미간을 꾹꾹 눌렀다.
“……아주 친한가 보군. 이우연 헌터가 누구한테 저렇게 치대는 건 처음 보는데.”
“그렇게 친한 건 아니에요.”
알고 지낸 기간도 짧고, 서로 말하지 않은 사실도 많다. 피차 얻어 낼 게 있어서 호의적으로 굴고 있지만 그걸 친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얻어 낼 게 없어지면 언제든 끊어질 수 있는 관계라는 건.
“그래도 오래 기다리게 하는 건 미안하긴 하네요. 하실 말씀이 뭐죠?”
“일단 사과부터 하지. 자네에 대해 조사를 좀 했어.”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도덕적이지는 않지만 합리적이네요.”
내가 김숙자 교수의 입장이었더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갑작스럽게 매겨진 헌터들의 랭킹도 놀랍지만, 심지어 랭킹 1위를 정부에서 전혀 모르던 인물이 차지했다.
자기 영역에 폭탄이 떨어진 셈이니 불이 붙은 것인지 아닌지 정도는 살펴보아야겠지.
“놀라운 결과였어. 여러모로. 강예나 헌터가 지난 5년간 강원도의 요양 병원에 장기 입원해 있었다는 것도 그렇고.”
김숙자의 날카로운 눈길이 나를 훑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김숙자가 추측을 이어 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병원에 입원했다는 기록 자체가 조작되었을 가능성이었네. 하지만 그건 힘들어. 자네 가정이 부유한 편이기는 했지만…… 의사가 기록을 조작하게 만들 정도라면 재력보다는 권력이 필요하거든.”
“…….”
“그러니 병원 기록은 진실이고, 자네는 정말로 5년간 병실에 누워 있었던 거지. 그런데 퇴원하자마자 얼마 있지 않아 시스템 공지로 1위에 랭크되었어. 랭킹 기준이 던전을 클리어한 업적치로 매겨진다는 걸 생각하면 시간상 말이 되지 않아.”
“흠.”
나는 팔짱을 낀 채 김숙자의 말을 경청하다 웃었다.
“전반적으로 말이 안 되긴 하네요. 누가 들어도 불가능해 보이는데.”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실제로 일어난 현실을 부정할 생각은 없네. 가능성은 결국 확률의 문제야. 실제로 일어난 현상 앞에서는 무용하지. 다만 그 현상을 증명할 수 있는 가설로는…… 크게 두 가지가 있겠군.”
“두 가지요?”
“그래, 첫 번째는 강예나 헌터에게 특이한 스킬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김숙자의 말은 상당히 담담하게 들렸다. 본인이 확신을 가지고 의견을 말한다기보다는 그냥 서적의 내용을 설명하듯 무미건조했다.
“현재 대다수의 헌터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도 하지. 자네가 시스템의 랭킹 자체에 관여하는 스킬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라는…….”
나는 솔직하게 감탄했다.
그 논리 자체가 놀랍다기보다는, 이 며칠간 인터넷에서 여러 헌터들이 실제로 저런 말을 하고 있었다는 걸 김숙자 교수도 알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SNS 같은 건 안 할 것 같은 이미지인데.
“굉장한 창의력이라고 생각하긴 했어요.”
“자네에게 불리한 여론을 조성하는 몇몇 헌터들의 행태가 만족스럽지는 않다는 점은 말해 두겠네만, 딱히 그 가설을 비웃는 건 아니야. 던전 클리어 기록에 자네 플레이어명이 전혀 남아 있지 않으니 발상 자체는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겠지. 그 어떤 헌터도 실제로 자네를 던전에서 만난 적이 없으니까 말이야.”
“제가 듣기엔 그런 스킬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쪽이 좀 더 도시 괴담처럼 들리는데요…… 그래요, 뭐. 두 번째는요?”
하기야 별별 스킬이 다 나오는데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두 번째는 강예나 헌터가 실제로 한국에서 가장 많은 수의 던전을 클리어했다는 가설이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직전에 말했으면서도, 김숙자의 표정에는 어떤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려면 제 병원 기록이 조작되지 않았다는 전제가 틀린 게 될 텐데요.”
“병원 기록이 조작되지 않았고, 던전도 클리어했을 수도 있겠지.”
“그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물론 확률은 희박해 보이지만 현실적으로 이미 일어난 일이니 가능성을 논하는 건 헛된 일이고.”
“그럼 즉, 제가 병원에 의식을 잃은 상태로 5년간 누워 있으면서 던전을 클리어했다는 말인데요.”
“그게 정답에 가까울 거라고 생각하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설령 그렇더라도 한국 헌터들이 아무도 저를 못 봤다는 건 어떻게 뒤집죠? 제가 아무리 날고 긴다 하더라도 그게 가능할까요? 정부에서 던전 입장을 하나하나 제한하는 판국에.”
“그럼 같은 논리로, 정부가 파악하지 못한 던전이 한국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겠지.”
김숙자가 설명을 덧붙였다.
“또 현재 세계 각국에 던전이 존재하지만, 시스템상 자신이 소속된 나라에서만 던전 공략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자네도 알고 있다고 믿네.”
……몰랐는데.
그렇다면 해외 던전을 공략할 수도 있지 않느냐는 물음까지도 이대로 봉쇄되었다.
긴 문답을 끝낸 김숙자가 다 식은 차를 자신의 잔에 따라 한 모금 들이켰다.
“이상의 질문이, 아마 자네가 정체를 밝히기로 한다면 받게 될 수많은 의문 중 일부가 될 거야. 그리고 아주 민감한 개인 사정을 파고들려는 사람이 많을 거고. 모두가 호의적이지도 않겠지.”
무뚝뚝한 말투였지만 잔가시 같은 걱정이 박혀 있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런 김숙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 나눈 대화는 김숙자 교수가 나를 배려해 이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사람들에게 해야 할 해명을 김숙자가 대신 가르쳐 준 것이다.
그런데도 교수가 늘어놓은 가설은 앞으로 숱하게 나올 의문의 일부에 불과했다.
그리고 김숙자가 무덤덤하게 말하는 것과 달리 사람들의 입에서 나올 말은 때로는 흥미 위주라 나라는 개인에 대한 존중은 없을 테고, 혹은 아주 악의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사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사람들의 입이 많아지면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가 오르내릴 것은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
‘오히려 이상한 건 김숙자 교수 쪽이지.’
분명히 내 이력을 조사하면서 더 민감한 사항을 여러 개 발견했을 것이다.
내 약점이 될 만한 사실도 발견했을 테고.
그런데 딱히 나를 다그치거나 거래하듯 진실을 묻는 게 아니라, 이렇게 문답을 빙자한 충고를 건네는 게 의외였다.
뭐랄까, 굉장히 어른스럽게 느껴지는 대응이었다.
사감을 모두 빼 버리고 한참 나이가 어린 후배에게 해 줄 법한 충고라고 해야 하나.
솔직히 시스템이 순위를 매겨 버린 판국에 나를 싫어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
그래, 인정하자.
솔직히 말해서 조금 감명을 받았다.
이 며칠간 다른 헌터들이 나를 배척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김숙자가 저렇게 호의적으로 나와 주니 정신적으로 위안이 된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었다.
내가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자 김숙자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래서, 가설 두 가지 중 어느 쪽이 정답이었는지 말해 줄 수 있겠나?”
이건 아마도 개인적인 의문을 해결한다기보다는 정부를 대표해서 묻는 것이리라.
그 심문이 부드러운 청유형인 것은 개인적인 호의의 발로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두 번째가 정답이에요.”
내가 답했어야 할 수많은 얘기들을 교수님이 먼저 부정해 주었기에,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매우 심플했다.
그저 김숙자 교수가 풀지 못한 희박한 확률의, 현실에서 내게 실제로 일어나 버린 기적인지 악몽인지 모를 일을 알려 줄 뿐이다.
“저는 5년간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던전을 공략했던 겁니다.”
한국에서는 5년이었고, 내가 기억하는 시간으로는 10년이었다.
나는 그 세월을 타르토스라는 이름의 다른 세계에서 보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물론 실제로 일어난 일이기야 하겠지.
시스템의 랭킹이 이제껏 내가 타르토스에서 해 왔던 일을 증명하고 있었다.
한 번도 달갑게 여긴 적 없던 랭킹 1위였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이런 증거라도 없었다면 정말 미쳐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김숙자는 내가 뜸을 들이는 것을 재촉하지 않고 충분한 시간을 기다린 후에야 말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난 거지?”
나는 숨을 한 번 몰아쉬고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나도 추측의 영역에 들어서게 된다.
“5년 전, 제가 일산 호수 공원 던전에서 정신을 잃은 채로 발견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구체적인 장소와 시기는 나도 오늘 알았지만 대강 짐작하고 있던 상황이기는 했다.
김숙자가 그 말에 눈썹을 꿈틀했다.
교수의 시선이 의아하게 나를 훑는가 싶더니, 곧 납득하는 기색으로 바뀌었다.
“……어쩐지, 어디서 보았던 얼굴이라고 생각했지. 그때 의식 불명이었던 사람 중 한 명이었나.”
“그 점에 대해서 묻고 싶은 말이 몇 가지 있는데, 일단은 넘어가고.”
대체 어떻게 초보들이 의식 불명인 나를 데리고 SS급 던전의 히든 클리어 조건을 달성했는지, 던전 내의 상황은 어땠는지 무척 궁금했지만 이야기가 복잡해질 것이다.
나중에 듣기는 들어 봐야겠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얼마 전 신촌에서 발생한 던전을 기억하십니까?”
“그야 기억하네만.”
원혼이 들끓던 유령의 성.
맨 처음 유령의 성에 입장했을 때의 광경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선 헌터 혼자서, 바닥에 생기를 잃고 누워 있던 헌터들을 간호하던 모습.
얼핏 느껴지던 위화감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아리아드네를 통해 내가 익히 알고 있던 ‘저주’와 ‘해주’.
그건 결국에는 던전과 클리어의 문제였다.
“모두 던전 안에서 또 다른 던전으로 영혼만 이동한 상태였죠.”
유령의 성 같은 경우는 정확히 말하자면, 시스템에 의해 영혼이 육체에서 빠져나가 다른 육체에 덧입혀졌던 상황이었다.
만일 그때 내가 유령의 성 안의 또 다른 던전을 발견하지 못하고, 대신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 해당 던전에서 탈출했다고 치자.
그렇게 되더라도 이미 저주에 걸린 헌터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영혼은 여전히 던전을 클리어하고 있었을 테니까.
“그리고 며칠 전 백록담 던전에서도 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백록의 시험이라는 명목하에 들어간 던전.
나는 거기서 일주일 정도를 보냈는데, 실제로 현실에서는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으며, 그때도 내 몸은 여전히 현실의 한국에 존재하고 있었다.
이때도 결국 내 영혼만이 던전 안으로 이동한 것이다.
“그런 일이 5년 전에도 일어났다면요?”
처음에는 나도 내가 덤프트럭에라도 치여서 차원이라도 넘어간 게 아닌가, 그렇게 추측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5년 전, 제 몸은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탈출했지만…….”
환생 트럭보다 더 비현실적이고, 그러나 내게는 현실인 수단이 있다.
“실제로 제 영혼은 던전을 클리어하고 있었던 거겠죠.”
그게 현시점에서 내가 내놓을 수 있는 가장 가능성 있는 가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