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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107화 (108/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107화

타르토스에서 처음으로 눈을 떴을 때, 나는 깊은 숲속에서 깨어났다.

시스템 메시지가 빛나는 걸 보고 이게 꿈인가…… 생각했고, 제대로 싸우는 법도 알지 못한 상태에서 몬스터와 조우했다.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천운이었다.

처음에는 내가 도대체 왜 이런 곳에 오게 되었는지 궁금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은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었고, 하루하루 살아남는 것에 바쁘다 보니 어느샌가 밀어 두었던 의문이었다.

한국에 돌아온 다음에도 시스템이 타르토스가 멸망했네, 어쩌네 하는 소리에 정신이 팔려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았기도 했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하지 않는다 해도 같은 사례가 쌓이면 자연스럽게 결론이 도출되기 마련이다.

내가 겪었던 타르토스에서의 10년은…… 던전을 클리어하는 데 소비한 시간이라는 것.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갑작스럽게 한국으로 돌아온 것도 말이 된다.

타르토스의 ‘옵타티오’는 그 던전의 최종 보스였던 거고, 나는 고룡 옵타티오를 클리어함으로써 해당 던전을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또 현실과 던전 안의 시간의 흐름이 달랐던 것도 유령의 성에서 겪었던 일과 같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가설로…… 시스템이 운운하는 멸망한 세계라는 것이 설명된다.

분명 최종 보스인 옵타티오를 쓰러트렸으니, 본래라면 그걸로 끝일 터였다.

하지만 애초에 타르토스라는 곳이 던전이었고, 내 클리어 여부와 관계없이 이미 멸망한 곳이었다면?

‘……젠장.’

이미 몇 번이고 검토한 가능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릎 위에 올려놓은 내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주먹을 꾹 쥐었다.

처음 이 가능성을 떠올렸을 때는 솔직히 회피하고 싶을 정도로 절망적이었다만, 도망치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스템이 이야기했다.

메인 퀘스트인 ‘운명의 씨앗’을 발아하면, 멸망한 세계를 복구할 수 있다고.

설령 타르토스가 던전 속의 세계였다고 해도 상관없다.

백록담 던전에서 겪었듯이 타르토스 또한 어딘가에 분명히 실재하는 세계일 것이다.

정소현의 경우처럼, 내가 겪은 타르토스 또한 재구성된 무대가 아니라 던전을 통해 정말로 그 세계에 갔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미 운명의 씨앗이…… 어떤 사람이, 자신의 결정으로 운명을 바꾸는 것을 보았다.

그렇다면 나도 바꿀 수 있다.

그러니까 괜찮다.

내가 노력하면 어떻게든…….

김숙자 교수가 내 말을 듣고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곧 표정을 차분하게 정돈하는 것이 보였다.

“……그랬군. 확실히, 그런 경우가 있을 수 있겠어.”

나도 잠긴 목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솔직히,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였지만, 굳이 김숙자 교수님에게 이걸 말씀드리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그게 뭐지?”

“저는 그 던전…… 아니, 그 세계 속에서 10년을 보냈습니다.”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스무 살짜리 애였던 나는 그저 죽는 게 싫고 무서워서 버텼다. 그러다 보니 어느샌가 검을 잡고 타인을 해하는 것도 거리끼지 않게 되었다. 그런 내가 끔찍하게 느껴지는 것조차 삶의 힘듦에 무뎌졌다.

“제게 소중한 건 모두 거기에 있어요. 이 한국이 아니라.”

그러나 내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던, 그저 죽지 못해 살아 내기만 했던, 겹겹이 쌓인 그 고통이, 내가 딛고 선 지반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 지반을 되찾기 위해서 나는 최선을 다해야 했다.

“물론 여기에 머무르는 동안 할 수 있는 건 하겠습니다. 하지만 제 최우선은 이쪽이 아니라는 점은 명확하게 해 둘게요. 정부 소속도, 어느 길드에 가입할 생각도 전혀 없습니다.”

김숙자 교수에게 내 사정을 털어놓는다는 것은 결국, 한국 정부 측에 내 이야기가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부 측에서 슬금슬금 내 거취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간을 보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최민혁과 가끔 업무적으로 연락할 때마다 은근히 정부 소속이 될 의사는 없는지 물었으니까.

한국에서는 헌터가 돈을 벌 생각이 있으면 대개 길드에 들어가는 풍조가 있는 모양인데, 랭킹 1위쯤 되는 헌터가 길드에도 가입하지 않고 정부에서 요구하는 의무에는 부응하고 있으니 그런 제의가 올 법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지금 내가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은 시스템이 내건 메인 퀘스트였고, 그 우선순위를 바꿀 생각은 없었다.

그 점을 확실히 해 두기 위해서라도 정부 측 고위 인사와 한 번쯤은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김숙자 교수는 내 말을 듣고 오랫동안 침묵하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뜻은 이해했네. 이력에 대한 것도 납득했고.”

“…….”

“그렇지만 약간의 상의는 필요할 것 같군. 이를테면…… 방금 강예나 헌터가 말한 정보에 대한 공개 범위라든가.”

“공개 범위요?”

“그래, 강예나 헌터가 솔직하게 자기 사정을 털어놓았으니 나도 가감 없이 답변하겠네.”

그렇게 말하는 김숙자 교수의 눈이 언뜻 번뜩이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정보는 정부 측에 알릴 필요 없어.”

“……네?”

나는 뜻밖의 말에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정부 측에 알릴 필요가 없다고? 아니, 김숙자 헌터야말로 정부 측 인사가 아니던가?

“자네야 굳이 숨길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서 내게 털어놓은 거겠지. 그게 진실이고, 그걸 공개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든 다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정확했다.

딱히 내가 타르토스라는 곳에 다녀왔다는 것도, 그래서 랭킹 1위가 될 만큼의 업적을 쌓았다는 것도, 내가 내 몸을 보호할 만한 능력을 갖추었다면 굳이 감출 필요가 없었다.

그에 대해 사람들이 무슨 반응을 보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했었고.

“하지만 그렇게 남들을 적으로 돌릴 필요는 없어.”

“……!”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방면의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만약 이 이야기를 정부에 흘린다고 해 보지. 지금 정부 측이 강예나 헌터에게 하는 배려는 사실상 랭킹 1위에게 보내는 예우라기보다는, 아직 소속이 없는 헌터를 영입하려고 공을 들이는 것에 가까워. 정말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거야.”

“네, 알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강예나 헌터가 정부 소속이 될 의사가 없다는 걸 밝히면 어떻게 나올 것 같나?”

“그야…….”

이제까지 내게 의문이었던 점들을 모두 파헤칠 테고, 알게 모르게 주어지던 혜택이 사라지긴 할 것이다.

가령 내가 초반에 곧바로 헌터 등록을 하지 않았던 거라든가, 능력치 부분을 제대로 기재하지 않았던 점에 대해서.

물론 이거야 나도 할 말은 있지만, 이게 나와 정부 간의 알력 싸움이 된다면 진실이 중요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개인 신상을 보호해 달라는 요청도 어쩌면 거부당할 수도 있다. 알음알음 정보가 새어 나가겠지.

충분히 예상하고 있는 바였다.

다만 내게 그런 불이익은 모두 무의미하게 여겨졌을 뿐이다.

“그렇다고 길드에 소속될 것도 아니니 길드 협회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도 않을 테고…… 아, 그래. 물론 자네도 충분히 예상했겠지. 자네가 그걸 몰랐다는 뜻이 아니야.”

김숙자 교수가 내 표정을 보고 잠시 웃은 다음 말을 이었다.

“다만 자네가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면, 지금처럼 어중간한 상태로 여기저기 간을 보면서 모든 혜택을 빼먹는 게 가장 합리적이라는 지적을 하고 싶을 뿐이지.”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멍하니 김숙자를 바라보자 교수는 금방 납득하지 못하는 내가 답답한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딱히 진실을 숨기란 소리가 아니야. 다만 자네도 생각을 해 보게. 지금 강예나 헌터의 주가는 최고야. 정부에서든 길드에서든 신원 미상의 랭킹 1위를 영입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는 말일세.”

“……인터넷 보면 영입이 아니라 그냥 죽일 놈이 되어 있는 것 같던데요?”

“답답하긴.”

김숙자 교수가 혀를 찼다.

“SNS에 갈기는 99퍼센트 정도는 헛소리에 불과해. 그렇게 헛소리를 하는 놈들도 자네가 본인 길드에 와 준다면 SNS 본사를 폭파시켜서라도 참회할걸.”

“아니, 그렇지만…… 저는 딱히 어디에도 소속될 생각이 없습니다.”

“누가 정말 가라고 했나? 이용만 하라는 거지.”

교수의 지도를 알아듣지 못하는 멍청한 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아니, 알아듣기는 알아들었다. 저렇게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는데 못 알아들을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채로 여지만 주면서 내가 원하는 것만 빼먹으라는 건데…….

“저는 이미 교수님께 제 의사를 말씀드렸는데요.”

애초에 이건 내가 김숙자 교수에게 정보를 오픈한 시점에서 할 수 없는 이야기 아닌가? 내가 의문스럽게 바라보자 김숙자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못 들은 걸로 할 셈이야.”

“네? 왜요?”

“그쪽이 자네에게 더 도움이 될 테니까.”

놀라울 정도로 호의가 어린 발언이었다.

그게 더 의문이었다.

아까 던전과 관련돼 내 자문을 구할 때야 다소 공적인 이유와 김숙자 교수 본인의 의도가 섞여 있었지만, 이건 정말로 교수 본인이 내게 보내는 개인적인 호의였다.

정부 측 인사인 김숙자 교수가 내 개인적인 편의를 봐주려고 이미 들은 정보를 묵살하겠다는 거니까.

“제가 교수님에게 그런 무조건적인 호의를 받을 만한 행동을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그런가?”

김숙자 교수가 입가에 약간의 미소를 띠었다. 신경질적이고 날카로운 인상이 아주 약간 온화해졌다.

“강예나 헌터는 신촌 던전 브레이크 때 곧바로 달려와 줬었지. 게다가 곧장 던전에 입장하겠다고 나서도 줬고.”

“그건…….”

“오해하지 말게. 나는 아주 개인적인 감사를 하고 싶을 뿐이야.”

“개인적인 감사요?”

“그래, 선이는…… 이선 헌터는 학부 시절부터 박사 과정 도중까지 내 제자였거든.”

어디 어두운 뒷골목이 배경인 영화에 출연할 것 같은 여자의 눈에 온기가 서리는 것이 보였다. 나에게 보인 호의와도 완전히 다른 시선이었다.

“도중에 던전이 터지는 바람에 아직도 졸업 논문은 못 쓰고 있지만.”

이선 헌터와 그런 관계가 있었나. 저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굉장히 친밀한 사이인 듯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김숙자 교수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한 말도 그저 충고일 뿐이야. 자네가 양심에 걸린다면 내 말을 모두 수용할 필요는 없어.”

“그럼 정부 측에는 어떻게 보고할 생각이시죠?”

“던전에 관련된 이야기는 굳이 숨길 필요 없다고 봐. 랭킹 1위라는 이력에 굳이 흠집을 낼 필요는 없으니까. 다만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당분간 어딘가에 소속될 생각은 없어 보인다. 그 정도로 정리하면 될 일이야.”

거의 다 진실이고, 그저 내가 어딘가에 소속될 생각은 없다고 말한 점만 보고하지 않겠다는 건가.

확실히 그 정도의 거짓말이라면 김숙자에게도 부담이 될 요소가 적었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다시 시야가 열렸을 때는 이미 마음을 정한 상태였다.

“……충고 감사합니다. 그렇게 하는 걸로 하죠.”

양심은 무슨.

김숙자 말이 옳았다.

현재 서브 퀘스트로 나온 ‘미공략 던전’을 공략하려면 다른 헌터들의 협력을 구할 일이 분명히 생길 것이다.

그러려면 김숙자 교수의 말대로 행동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다.

어떤 단체든 나를 영입할 생각이 있다면 손을 빌려줄 테니까.

그때 김숙자 교수가 작게 웃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 표정 지을 필요 없어.”

“예?”

“너무 양심에 찔린다는 표정을 짓고 있길래. 이 정도는 사회생활을 윤활하게 만드는 스킬의 일환이지. 어떻게 이 정도의 융통성도 없어?”

“아니…… 이게 융통성입니까?”

“당연하지. 사람이 너무 올곧게 살아도 손해만 보기 마련이야. 무슨 소설 속 용사도 아니고.”

내 항변은 가벼운 코웃음 한 번으로 무시당했다.

아무래도 김숙자 교수의 머릿속에서 나는 아주 도덕적인 인물이 되어 있는 모양이다.

클래스가 용사라는 걸 들켰다간 세기의 도덕 교과서라도 되는 줄 알 판이다.

“그리고 이왕 충고 한 김에 하나만 더 하지.”

이제 이야기가 다 끝났다 싶어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김숙자 교수가 지나가는 어투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나한테 이런 소리 듣기 전에 이우연 군에게 물어봤다면 같은 이야기를 했을 거야. 서로 좀 더 터놓고 지내보면 어떤가? 빈말로라도 성격이 좋다고는 할 순 없지만, 제가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나쁘게 대하는 놈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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