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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111화 (112/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111화

릴리스와의 전투에서 한 가지 뼈저리게 느낀 것이 있었다.

지금의 나로서는 S급 몬스터로 판정된 릴리스조차 혼자 이길 수 없었다. 릴리스도 본래 능력치보다는 너프를 먹은 상태인데도 그랬다.

그러니까 겨우 이 정도 능력치를 회복했다고 좋아할 때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백록담 던전 클리어 후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에 따르면, 나는 앞으로 5개의 미공략 던전을 더 공략해야만 한다.

애초에 미공략 던전이 다섯 개나 있는데 이제껏 던브가 터져 몬스터 자생지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도 이상하지만, 그건 일단 제쳐 두고.

혹시 그 던전들이 이번에 겪은 백록담 던전 정도의 난도라면 어떻게 될까?

‘아니, 이건 사실상 확정이지. 그냥 비슷한 난도라고 봐야 해.’

그렇지 않다면 애초에 ‘안정화’를 추구하는 시스템이 나에게 저런 서브 퀘스트를 내걸 리가 없으니 말이다.

결국 현재 한국 플레이어들이 감당하지 못하는 짐을 메인 퀘스트를 빙자해 내게 떠맡긴 것 아닌가.

이건 제법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그리고 만일 이 의심이 사실이라면 냉정하게 말해 지금의 나로서는 승산이 없다.

내가 릴리스에게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정소현이 제 몸을 던져 기적 같은 찰나의 틈을 만들어 준 덕이다.

다음에도 그런 요행을 바랄 수는 없고, 그런 게 일어난다는 가정을 하는 것 자체가 끔찍했다.

그러니 어떻게든 한시라도 빨리 내 능력치를 더 끌어올려야만 했다.

하지만 당장 내 본 능력치를 회복할 방법은 없다. 저번 유령의 성 던전처럼 때마침 운 좋게 능력치가 보상으로 나오지 않는 한에는.

그러니까 결국 남은 건, 정공법밖에 없다는 소리였다.

“아오, 얼마나 남은 건지 모르겠네!”

퍽!

크어어엉!

북 치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악어가 서글픈 소리를 내며 하늘로 떠올랐다가 늪지대 한가운데로 철퍽 가라앉았다.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 클리어 조건 : 해당 던전에 서식하는 몬스터 30마리 처치 (17/30)

이놈의 악마 같은 시스템 체계에서 체근민 수치를 큰 폭으로 올리는 단 한 가지 방법.

바로 레벨 업이다.

세운 업적치가 일정 정도를 넘어서면 레벨이 오르고, 그에 따라 체근민 수치가 올라간다.

다만 체근민 수치는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주제에 쌓인 업적치는 보여 주지 않는 웃기는 시스템이라, 다음 레벨 업에 필요한 구체적인 수치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래도 경험적으로 세울 만한 통계는 있었다.

가령 레벨 1의 초보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 통상적으로 레벨 10까지는 F급 수준의 던전을 10개 정도 최대 업적자로 클리어하면 레벨이 올랐다.

물론 그렇다고 수치가 정량인 것도 아니다.

같은 F급으로 분류된 던전이라도 결국 그건 인간의 기준이다. 보스 몬스터나 클리어 던전 난도에 따라 시스템에서는 업적치를 다르게 산정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레벨 10단위로 쌓아야 하는 업적 수치가 훅훅 많아지기 때문에, 레벨 50대에 들어서면 A급 던전을 10개 클리어한다고 쳐도 최대 업적자가 아니라면 레벨 1 올리기도 쉽지 않다.

그리고 그쯤 되면 고레벨 플레이어들은 서로의 레벨을 숨기고 정보 공유도 잘 하지 않기 때문에 통계적인 수치 가늠도 어려워진다.

S급 던전에서 최대 업적자를 몇 번 달성하면 레벨 1업, 하는 식의 계량조차 어려워지는 것이다.

일리아스나 아리아드네의 경우 일정 레벨 이상만 이루면 체근민 수치는 딱히 필요가 없는 클래스였기에 이런 고민을 하는 건 물리적 강화가 필요한 나, 알리시아, 루카스뿐이었다.

셋이서 자주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곤 했지만, 사실 딱히 답은 나오지 않았다. 시스템 자체의 문제이니까.

일리아스는 고민하는 우리를 두고 원래 세상만사가 그렇다, 세운 성과 같은 건 당장 눈에 보이지 않기 마련이다, 그렇게 이야기하곤 했지만.

‘아니, 또 옆길로 샜네.’

추억에 마냥 잠기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도망가는 악어의 꼬리를 잡고 패대기치는 사이, 늪지대 속에서 빈틈을 노리고 있던 악어가 튀어나와 내 다리를 물려고 들었다.

쿠왕!

아가리를 벌렸던 악어의 입 위를 밟고 허공으로 떠올랐다.

사람 몸 하나 정도는 우습게 띄워 올리는 님페의 바람에 얻어맞은 악어가 늪지대 안으로 처박혔다.

공중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소지창에서 활을 소환했다. 무명의 활에 마력으로 된 화살이 깃들었다.

피슝!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화살이 아래로 쏘아지며 악어의 몸통에 가시처럼 박혔다. 그러나 관통하기에는 가죽이 너무 두꺼웠던 모양인지 처치 메시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역시 체근민 수치가 아직 한참 부족하단 말이지.

사실 지금 이 악어들을 상대로 고전하고 있는 것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용사 클래스인 나는 마(魔), 악(惡) 속성의 몬스터의 경우 클래스 보정을 받지만 이 악어의 경우 속성이 없는, 그저 살아 있는 생물이다.

이런 경우 내 광검과 앙겔루스의 가호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건 본래부터 내 클래스의 고질적인 약점이었다. 체근민 수치가 완전히 떨어진 지금 더 티가 날 뿐.

지금까지는 경험과 요령을 살려서 어떻게든 해 왔지만, 릴리스 정도로 절대적인 격차가 나는 상대와 마주치면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지금 상태로는 어떤 잔재주를 부리든 간에 릴리스 앞에서는 5분 컷이다.

심지어 릴리스는 악마라서 용사 클래스 보정이라도 있었지, 다음 던전에서도 악마 속성의 보스 몬스터가 나올 거라고 장담할 수도 없다.

“진짜 진퇴양난이네.”

쯧, 나는 혀를 차며 한 번 더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나마 지금 내가 믿는 구석은 하나였다.

‘원래 슬슬 레벨 업을 할 때가 됐었단 말이지.’

타르토스에서의 업적치를 그대로 이어받았다면 내 계산상 레벨 업까지 필요한 잔여 업적치가 얼마 남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한국에 온 뒤로도 돌발성 던전 브레이크와 유령의 성 던전, 그리고 마계와 이어진 수리산 도립 공원 던전, 마지막으로 백록담 던전까지 클리어했다.

그러니까 정말 얼마 남지 않았을 텐데.

“더럽게 안 오르네, 진짜.”

또다시 덮쳐 오는 악어의 주둥이를 주먹으로 갈기면서 초조하게 시스템 메시지를 보았지만 딱히 축하 메시지가 떠오르는 일은 없었다.

김숙자 교수의 말로는 여의도 던전 조사대가 발족하는 것은 적어도 일주일 내.

대외적으로는 미공략 던전인지 아닌지 확인하려는 조사대이긴 하지만 사실상 미공략 던전, 노 데이터베이스 상태의 던전을 공략할 공략대였다.

김숙자 또한 그걸 염두에 두고 공략대를 짜고 있는 것이고.

그러니 그 전까지 최대한, 할 수 있는 만큼 능력치를 올린다.

나는 한 번 더 눈앞의 악어가 벌린 입속으로 화살을 쏘아 냈다.

*   *   *

그리고 정확히 일주일 후.

나는 여의도 한강 공원에서 적당히 비어 있고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 벤치에 늘어져 있었다.

아침 햇살이 따가웠다.

과정은 떼 놓고 결론만 말하자면, 레벨을 올리는 것에 실패하고 말았다.

‘망할.’

시스템 개새끼. A급 수준의 던전 따위는 업적치로도 안 쳐준다, 이거냐?

하루에 적어도 세 개에서 네 개의 던전을 공략했고, 그나마도 던전 수가 부족해서 최민혁에게 부탁해 잠까지 줄여 가며 수도권의 던전이란 던전은 다 돌았는데 결국 실패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죽이 되든 밥이 되든 S급 던전 하나만 공략해 볼 걸.

S급 던전은 필연적으로 공략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고, 그래서 혹시 내가 던전에 들어간 사이 조사대가 발족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A급으로 물량 공세를 해야겠다는 판단을 한 건데…… 아무래도 쓰레기 같은 판단이었던 것 같다. 죽자, 그냥.

이럴 줄 알았으면 적어도 20살짜리 애는 조사대에서 빼자고 할 걸. 망할, 왜 김숙자 교수한테 인선을 전적으로 맡긴다는 소리를 해 가지고…….

“엥?”

얼굴 위로 불쑥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눈부신 햇살 아래 반투명한 푸른 용이 창공을 메웠다. 하늘과 바다를 구분하는 경계선처럼 양태원이 얼굴을 내비쳤다.

“누나, 여기서 뭐 해요?”

내가 한강 공원에 있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날 찾아내는 걸 보면 정말 감이 좋았다.

뭐, 그렇지 않아도 슬슬 연락하려고 했는데 잘됐다.

나는 양태원의 얼굴을 밀어내고 허리를 일으키며 대꾸했다.

“광합성 중이었어. 우울한 생각을 날리는 데는 햇빛이 좋다고 해서.”

별로 도움이 된 것 같지는 않지만.

양태원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갑자기요? 무슨 일 있었어요?”

“별일 없었어. 네가 신경 쓸 일 아니야.”

“헐, 완전 서운하다. 말하고 싶으면 말하세요. 상담비, 복채 안 받을게요. 누나한테는 언제나 공짜로 점 봐 드립니다!”

“오늘 하루 운세 좀 봐줘. 아마 대흉일 것 같은데.”

“대흉 같은 게 어디 있어요? 설령 운세가 나쁜들 뭐든지 사람 하기 나름이라고요. 위기는 곧 기회다!”

씨익, 웃는 입가에 덧니가 엿보였다.

그 웃음을 보는 동시에 나는 물결처럼 반짝이는 몸체를 지닌 청룡과 눈이 마주쳤다.

손에 잡히지 않는 구름처럼 청명한 눈동자가 웃음으로 휘어졌다.

그래, 나 하기 나름이라…….

맞아. 나는 이미 운명조차 바꾸어 버린 여자를 알고 있다. 그런데 겨우 이깟 일로 처져 있을 수는 없지.

나는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됐고, 아직 시간 남았으니까 밥이나 먹으러 가자. 뭐 먹고 싶어?”

“대박. 햄버거나 먹으려고 했는데 그럼 비싼 거…… 아니, 잠시만. 그럼 누나도 설마 여의도 던전 조사단 멤버예요? 왜 이야기 안 했어요?!”

양태원이 뜻밖의 사실에 경악했다.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네가 안 물어봤잖아.”

양태원이 끝까지 기밀 사항이라면서 어딜 가는지 이야기를 하지 않길래 나도 말할 타이밍을 놓쳤다.

물론 놀리려는 마음이 절반은 넘었던 것 같지만.

“으, 으아아아아! 누나가 그러면 기밀 사항 운운했던 제가 뭐가 되는 건데요!”

“뭐긴 뭐야. X팔린 거지.”

“으아아아아!”

양태원이 제 머리를 감싼 채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것을 보니 아마 정말로 수치스러운 모양이다.

“조용히 좀 해. 공공장소에서 너무 시끄럽잖아.”

“누나가 놀려 놓고 그게 무슨 소리예여?!”

왁왁대는 양태원의 뒤로 청룡이 눈을 느리게 끔벅이는 것이 보였다.

나는 양태원의 머리를 마구 문질러 준 후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참고로 양태원은 국회 의사당역이 던전과 더 가까운데도 맛있다는 콩국수집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여의나루역에 내렸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지하철을 타고 와 보니 이미 식당 대기 줄이 너무 길어서 포기하고 산책이나 하러 온 거라나. 그래서 대충 햄버거로 점심을 때우려고 했다고.

점심부터 여는 한우 음식점을 찾아 한우를 굽기 시작하며 양태원이 만세를 불렀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운이 나빴지만 결국 좋게 바뀐 거죠. 콩국수가 한우로 바뀌었다!”

“콩국수가 더 맛있었을지도 모르잖아.”

“콩국수는 다음에 먹으면 되죠. 역시 던전 공략 전에는 든든하게 먹어야 하는 법.”

물론 그렇기야 했다.

사실 적당히 양태원과 만나 밥이라도 먹이고 던전에 들어갈 생각으로 이선 헌터의 점심 식사 제의도 거절한 판이었으니까.

양태원 식성에 콩국수로 배를 채우려면 열 그릇도 모자랄 것 같은데 말이지.

‘그나저나 어쩐다.’

나는 한우를 신나게 구워 먹고 있는 양태원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김숙자 교수가 양태원을 조사단의 일원으로 선택한 이유는 알겠다. 충분히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다만 지금처럼 내가 레벨을 올리는 것에 실패한 상황에서는 이 꼬맹이가 미공략 던전에 들어간다는 게 거부감이 느껴졌다.

솔직히 스무 살 넘은 녀석을 이렇게 걱정하는 것도 웃긴 일이었지만…… 웃는 얼굴이 정소현과 너무 닮아 있는 게 문제였다.

딱히 잘 알지도, 정을 붙였다기에도 민망할 만큼 짧은 시간을 공유했던 여자.

그렇지만 그 여자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리고 마지막을 어떻게 마감했는지, 가장 소중한 것을 놔두고 어떤 결정을 했는지는 충분할 만큼 알았다.

그리고 양태원은 정소현의 가장 ‘소중한 것’이다.

그래서 도저히 정소현과 분리해서 생각하기가 힘들었다.

지금은 형광 핑크로 물들어 있는 머리카락도, 다 자란 얼굴도 다섯 살짜리 꼬맹이로 보였다.

“저, 아이가 있어요. 그 애한테 돌아가고 싶어요.”

망할, 자연스레 떠오르는 목소리를 털어 버리는 것에 실패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대로 기절이라도 시켜?’

뒷덜미라도 쳐서 기절시켜 두고 김숙자 교수에게 무어라 둘러대면 될 일이다.

뭔지 모를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테이블 밑에서 손을 들어 올린 순간이었다.

- 아니 된다.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 앉은 의자에서 튀어 오를 뻔했다. 양태원도 젓가락으로 집어 들던 양파절임을 떨어트렸다.

“뭐, 뭐가요? 설마 이 양파절임을 먹는 게 안 된다고요? 싹이라도 난 건가?”

양태원이 심각하게 양파를 들여다보는 동안 나는 청룡을 빤히 바라보았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를 투명한 눈동자가 반짝였다.

- 이 아이의 선택은 네가 대신 짊어질 수 있는 게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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