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113화
“그럼 오늘 잘 부탁하지.”
일방적인 대화가 한참 오가긴 했지만 던전 입장 시간이 가까워지자 김성연은 깔끔하게 물러났다.
‘……어차피 저쪽도 무슨 짓을 하려면 던전 안이겠지.’
던전 밖은 아무리 교통 통제를 한 상태라고는 해도 현대 한국 사회에는 감시할 수단이 워낙 많으니까, 저쪽도 섣불리 움직이지는 않았다.
아마 지금 무슨 말을 해 봤자 내가 가면을 벗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알아서인 것 같았다.
김성연 길드장이 돌아서는 것을 보고 나는 손을 탁탁 털었다. 그와 악수를 한 손마디에 약간의 뻐근함이 느껴졌다.
이우연 말대로였다.
사람 좋은 척을 하면서 은근히 신경을 긁는다고 하더니.
솔직히 내가 가장 취약한 타입의 인간이었다.
물론 유교적인 사회를 떠나서 산 지가 10년이라 장유유서 개념은 이미 털어 버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주먹을 휘둘러 해결할 일도 아니지 않은가.
음, 아닌가? 해결할 수 있나?
하여튼 지금 당장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일단 저런 뻔히 보이는 서열 잡기는 내버려 두고…….
김성연 길드장이 내 곁에서 떠나자마자 내게 모이던 시선이 완전히 흩어졌다.
‘은의 장막’은 존재감도 흐리게 해 주기 때문에 시선의 구심점이 된 김성연이 멀어졌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지금 어떻게 된 거지? 나만 안 보여?”
“저기에 있었던 거 아니야?”
“은신 스킬 맞네. 와, 저렇게까지 얼굴을 숨긴다고?”
제각기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딱히 호의적일 거라는 기대를 한 건 아니지만 생각보다도 훨씬 공격적인 어조가 느껴졌다.
그 가운데 헌터 하나가 큰 목소리로 대놓고 비아냥거렸다.
“도대체 뭐가 무서워서 같은 헌터끼리 얼굴을 숨긴대? 누가 잡아먹나?”
“역시 1위는 스킬빨이 맞나 본데.”
“저런 스킬 쓰는 S급 헌터는 본 적도 없는데 누가 던전 클리어 목록을 잘못 봤다는 거야?”
“사람 농락하는 것도 유분수지. 떳떳하면 못 밝힐 게 뭐가 있다고?”
내가 한 인터뷰가 직설적이었던 만큼 이 정도 반응은 예상했다.
실제로 내 이름이 한국의 고정형 던전 클리어 목록에 없으니 저들의 반발심도 예상했던 바였다. 더군다나 여기에 온 헌터들은 다들 제법 업적치도, 능력도 출중한 놈들이니까.
‘그런 것치고 다들 날 못 알아보는데?’
한국의 헌터 풀이 대부분 마법사에 치중돼 있다고 하던데 그래서 그런가.
물론 그 와중에도 내게로 집중한 시선이 있기는 했다.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번쩍번쩍 빛나고 있는 백금발이 푹 눌러쓴 캡 모자 사이로 언뜻 비치고 있었다.
지난번 일산 호수 공원에서 마주쳤던 백사현이었다.
“……윽!”
그런데 우습게도 백사현은 시선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서 모자로 얼굴을 가렸다.
‘쟤는 또 왜 저래?’
배우 클래스는 본인이 이해 가능한 모든 클래스의 스킬을 구현할 수 있다. 그러니 백사현이 ‘은의 장막’을 쓴 날 알아차리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왜 저렇게 덜덜 떨고 있는지는 도통 모를 일이었다.
물론 결국 한 대 얻어맞기는 했지만 그렇게 센 일격도 아니었는데.
혹시 너무 분해서 몸을 떨고 있는 건 아니겠지? 시선이 너무 뜨겁다 보니 조심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저 캡 모자를 쓰고 던전에 들어갈 생각은 아니겠지.
“자, 자. 이제 던전 입장할 테니 헌터분들은 모두 이 앞으로 모여 주세요.”
이선이 마름모꼴 모양의 던전 입구 앞에 서서 박수를 치며 시선을 모았다. 유치원 선생님 같은 모양이었지만 다들 별 불만 없이 이선의 앞에 모여들었다.
이선이 헌터들의 얼굴을 확인하면서 명단을 확인했다.
“음, 한 분은 제 시야에 안 잡히지만 있으시리라 생각하고요.”
이선은 마법사 클래스다 보니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기가 어려운 듯했다.
나는 약간 떨어진 곳에서 모여든 면면들을 한 번 더 확인했다.
헌터들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이우연이었다.
과연 사실상 한국의 랭킹 1위라고 할 만했다.
이우연 근처로 슬금슬금 모여들어 눈인사 한 번, 말 한마디라도 건네 보려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이우연은 그런 사람들을 적당히 상대해 주고 있었다.
‘이쪽은 합의한 대로 보지도 않고 있고.’
우리는 이미 던전 안에서 되도록 아는 척을 하지 말자는 합의를 한 상태였다.
이우연에게 감시까지 붙은 이상, 괜히 친한 척을 해서 좋을 것 없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은커녕 시선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리고 이우연 외, 누가 자신을 쳐다볼세라 얼굴을 숨기려 애쓰는 백사현과 그런 백사현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양태원, 그리고 김성연 길드장까지.
그냥 보기에도 꽤 만만찮아 보이는 사람들이 여럿 보였다.
“자, 그럼 차례대로 입장할게요.”
이번 조사단의 인솔자는 정부 소속의 이선이 맡기로 했다.
참고로 김숙자 교수는 조사단에서 빠졌다. 만약에라도 공략에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정부 소속 헌터들과 바깥에서 대기할 예정이다.
실패할 생각은 없다만, 뒤에서 누군가가 받쳐 주고 있다는 사실이 확실히 부담감을 덜어 주기는 했다.
나는 머리를 흔들어 다른 잡념을 흩어 버렸다.
- 서버 : 대한민국에 남아 있는 미공략 던전을 모두 클리어하십시오.(0/5)
지금 내가 집중해야 할 것은 저 서브 퀘스트였다.
‘일단 진실 여부부터 확인해야지.’
당장의 목표가 정해진 것과는 별개로 저 서브 퀘스트에 대한 의문점은 아직 남아 있었다.
서브 퀘스트가 뜬 목적 자체는 이해했다. 시스템이 나를 통해 노리는 것이 한국의 안정화라면 이 서브 퀘스트는 타당했다.
도대체 인간의 심연을 테스트하는 것 같은 시스템이 왜 안정화를 추구하는지도 의문이긴 하다만, 그보다 더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한국에 남아 있는 미공략 던전이 겨우 5개밖에 안 될 리가 없어.’
당장 내가 강원도 원주에서 처음으로 들어갔던 던전만 해도 공략된 적이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겨우 그 정도 난도의 미공략 던전을 공략하는 걸로 시스템이 메인 퀘스트를 진행시켜 줄 것 같지는 않단 말이지.
그리고 아무리 대한민국 국토가 그리 넓지 않은 편이라고 해도 겨우 5년 만에 던전을 모두 공략해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지금 상태에서 세울 수 있는 가설은 이거였다.
대한민국에는 여전히 많은 숫자의 미공략 던전이 존재하지만, 시스템이 공략을 원하는 던전은 정해져 있다는 것.
- 지정한 던전은 ‘미공략’ 상태입니다.
이번에 시스템이 새롭게 알려 주기 시작한 던전 공략 여부가 너무 내 편의를 맞춰 준다는 것도 의심 요소 중 하나였다.
이제까지 시스템이 리스크 없는 조건을 던져 준 적이 없었다는 걸 고려하면 더더욱.
그런 점에서 생각할 때, 이 여의도 던전을 공략하더라도 서브 퀘스트의 클리어 숫자가 올라갈 확률은 반반이다.
‘기대는 하지 말자.’
그동안 제법 어려운 던전을 클리어했음에도 따라오는 보상이 적었던지라 떠오르는 가능성도 죄다 부정적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나는 하나둘씩 던전 입구 안으로 사라지는 헌터들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내가 언제 승률 높은 게임만 한 적이 있던가?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어쨌거나 미공략 던전을 클리어할 때마다 타르토스를 복구할 방법을 제시해 준다는 것 아닌가.
처음에 그 어떤 방법도 찾아내지 못했을 때를 생각해 보면 이렇게 구체적인 목표가 생겼다는 것 자체가 다행이었다.
미공략 던전을 공략해서 목표를 이룰 수 있다면 열 개든 백 개든 클리어하면 그만이다.
이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짝!
나는 내 두 뺨을 소리 나게 때렸다.
뺨이 얼얼했다.
정신 차리자, 정신.
그리고 갑자기 난 소리에 던전 입구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선 헌터가 두리번거리는 것이 보였다.
이제 모든 헌터들이 던전에 입장한 터라 밖에 있는 건 이선뿐이었다.
이선이 주위를 살피더니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예, 예나 씨? 박수친 거예요?”
“음, 신경 쓰지 마세요.”
“악!”
바로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이선이 기겁하며 진저리쳤다. 팔을 잡자 그제야 나를 인식한 이선이 더듬더듬 손을 뻗었다.
“와, 이거 스킬이에요? 신기하다. 앞에 있는 건 알겠는데 조금만 방심하면 또 잊어버리겠는데요? 오퍼시티 30퍼센트 정도로 보여요.”
“스킬은 아니고 아이템. 오랜만이에요, 이선 헌터.”
“그러니까요. 밥이라도 같이 먹고 싶었는데. 아, 김성연 완전 재수 없지 않아요?”
아까 마주쳤던 시선을 떠올리고 나는 약간 웃었다.
역시 통했군.
“정말 재수 없던데요. 원래 저래요?”
“어휴, 말도 못하죠. 나이만 헛먹어서…… 클리어하고 나오면 진짜 술이라도 마시러 가요.”
“좋죠.”
“일단 너무 시간을 지체하면 안 되니까 저 먼저 갈게요. 안에서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말씀하세요. 알았죠?”
이선은 마지막까지 위험한 일을 나서서 하지는 말라며 신신당부를 한 후 먼저 던전에 입장했다.
나도 입구를 바라보며 한 번 숨을 가다듬었다.
- 던전에 입장하시겠습니까?
익숙하다 못해 토할 지경인 문구에 답하자, 흰빛이 몸을 감쌌다.
다음 순간, 발밑을 받치는 토양의 질감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코끝에 소금기가 느껴지는 짠 공기가 스쳤다. 거센 바람이 머리카락을 사정없이 휘날리도록 만들었다.
국회 의사당과 한강이 보이던 풍경은 온데간데없이, 눈앞에는 비현실적인 환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바다네.”
에메랄드 빛깔의 푸른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햇빛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반사되는 물결이 잔잔하게 요동쳤다.
흰 구름이 떠다니는 하늘에 바다까지, 어디 휴양지에라도 온 것 같은 환상적인 풍경이었다.
다만 그런 풍경에 경도되기에는 이제 너무 익숙한지라, 나는 먼저 시스템 메시지부터 확인했다.
“공략 여부 확인해.”
- 해당 던전은 ‘미공략’ 상태입니다.
시스템 메시지는 여전히 ‘미공략’ 상태임을 알리고 있었다.
물론 이미 확인한 상태이기는 했지만 혹시 던전 밖과 안에 있을 때 결과가 달라지는 건 아닐까, 해서 확인을 한 번 더 해 보았다.
“오, 스킬 사용하신 건가요?”
더불어 이렇게 남들에게 보여 주는 용도이기도 했고.
뻔뻔하게도 존댓말을 사용한 이우연이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김성연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내 위치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는 이우연의 발언에 다른 헌터들의 이목도 자연스럽게 쏠렸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필요한 과정이기는 했다. 조사단에 속한 명목상 한 번은 스킬을 쓰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하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킬을 사용해 보니 미공략 던전으로 뜨네요. 공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 맙소사.”
내 말과 함께 산발적인 탄성이 터졌다.
이미 미공략 던전임을 알고 있었던 몇몇과는 달리 이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헌터들이었다.
“그럼 이제 어떡하죠? 이대로 정말 공략 진행하나요?”
“와, 그럼 공략하는 동안 마석 채취는 못 하게 되는 거네. 우리 길드 큰일 났다.”
“그런데 저 말이 진실인지는 어떻게 확인하죠?”
“자, 자. 다들 진정하시고요.”
이선이 상황 정리를 위해 앞으로 나섰다.
“방랑하는 구도자 님의 스킬 진위 여부는 이미 확인했습니다. 저분이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하실 이유도 없고요. 미공략 던전임이 확정된 만큼 지금부터 조사단은 공략대로 전환합니다.”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는 건 모르는 일 아닌가요? 도대체 뭘 믿으라는 거죠?”
아까 전 던전 밖에서 가장 큰 목소리로 비아냥거리던 헌터가 다시 나섰다.
얼굴 한쪽에서 목까지 길게 이어지는 상처가 깊게 남아 있는 여자로, 마법사 클래스가 착용할 법한 로브를 두르고 있었다.
귀밑까지 똑 떨어지는 칼 단발이 인상적이었다.
여자를 바라보는 이선 헌터의 눈길이 덩달아 사나워졌다.
“류세연 헌터, 너무 사감이 담긴 발언 같은데요.”
“저야말로 이선 헌터의 사감이 느껴지는데요. 정부가 이렇게 랭킹 1위를 보호하는 이유가 뭔데요? 솔직히 아주 불쾌합니다. 우리는 다 같은 헌터가 아닌가요?”
류세연이라고 불린 헌터가 고개를 돌려 사납게 등 뒤에 선 다른 헌터들을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가면을 쓴 나를 찾지 못해 무작위로 노려보고 있는 듯했다.
“이제부터 정말로 이 던전을 공략한다면 더더욱 그래. 내가 뭘 믿고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헌터와 함께 공략을 해야 하지?”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땅을 스칠 정도로 긴 로브 자락에 마력의 기운이 감도는 것이 느껴졌다.
우연인지 순간적으로 류세연과 시선이 마주쳤다. 여자가 사나운 눈매로 단호하게 선언했다.
“공략에 들어가기 전에 본인 신원을 밝혀요. 그게 최소한의 예의라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