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114화
나는 팔짱을 끼고 류세연 헌터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던전에 들어오기 전에 헌터들의 대략적인 정보는 이미 확인했다.
류세연 헌터의 경우 헌협 소속이 아닌 중소 길드 소속으로 이 조사단에 참여하게 된 케이스였다.
즉, 헌협 소속의 헌터들처럼 내 정체가 궁금하다는 이유로 낚여서 이곳에 온 게 아니라, 정말로 조사를 목적으로 왔다가 공략에 참여하게 된 케이스란 말이다.
그런 관점에서 류세연의 발언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만 해도 정체 모를 상대와 함께 목숨을 걸어야 하는 던전에 들어간다는 것은 마땅찮은 일이니까.
내 뒤를 노릴지 어떻게 알겠는가.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봐도 나 역시 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다.
다만 그런 배려를 할 정도로 내가 여유가 넘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게 문제지.
‘여기서 얼굴을 드러내면 귀찮아져.’
저 말에 넘어가 가면을 벗고, 김성연 헌터가 내 얼굴을 인지하게 되면 내 뒷조사를 할 게 뻔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설령 얼굴이 알려진다고 한들 상관없다, 그렇게 판단했지만 김성연을 직접 만나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김성연은 예상보다 훨씬 더 귀찮게 물고 늘어질 것 같은 타입이었던 것이다.
이런 류의 인간은 타르토스에서도 겪어 봤지만 엮이는 쪽이 손해고, 처음부터 상대하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하지만 그런 내 사정과는 별개로 지금 눈앞에 있는 불씨는 점점 몸집을 불려 가고 있었다.
내가 반응하지 않자 류세연의 표정이 점점 더 감정적으로 변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 내 말을 무시하는 거야? 정말 최소한의 예의를 지킬 생각도 없는 건가?”
파직, 파지직.
마력의 스파크가 류세연 헌터 근처에서 이리저리 튀고 있었다. 마치 전류가 흐르는 것 같은 광경에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이 당황해 근처에서 물러섰다.
아니, 말의 내용은 그렇다 치고 저거…… 나는 유심히 류세연의 근처에서 튀고 있는 마력의 흐름을 바라보았다.
“대답할 생각도 없어? 완전히 날 무시하는 거야?! 네가 뭔데!”
내 침묵이 길어지자 류세연의 감정은 점점 분노로 치달아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과 마찬가지로, 주변에 튀고 있는 마력이 백열하며 빛나고 있었다.
주인의 감정에 따라 마력이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감탄이 입에서 새어 나왔다.
“와, 감응력이 대단한데.”
작게 말했는데도 그게 들렸던 모양인지, 류세연이 용케도 내 목소리의 방향을 찾아 고개를 홱 돌렸다.
“뭐라고? 지금 뭐라고 했어?”
“류세연 헌터, 진정하세요. 너무 흥분했습니다.”
모두가 치열하게 튀는 마력 때문에 물러선 와중에 이선 헌터가 나서서 류세연을 제지했다.
이런 상황이 익숙한지 이선의 얼굴에는 당혹보다는 과로에 지친 직장인 같은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감정을 가라앉히세요. 이러다가 저번처럼 폭발 사고가 일어나면 책임지실 수 있어요?”
“뭐라고?”
“류세연 헌터, 저번 사고 때문에 아직도 배상할 금액이 남아 있는 걸로 아는데요. 여기서 더 배상금이 늘어나면 개인 파산만으로는 안 끝납니다. 본인이 소속되신 길드 차원의 문제가 된다고요.”
그게 직격타였던 것 같다.
류세연이 이선의 말을 듣고 찔끔하더니 몇 번 심호흡을 했다. 그러자 허공으로 떠올랐던 로브 자락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나는 솔직하게 감탄했다.
방금 류세연의 감정에 따라 주변의 마력이 널을 뛰었는데, 이런 건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었다.
저건 마법사의 마력을 느끼는 힘인 감응력이 뛰어날 때만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마법사의 위력은 진언을 개방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갈리지만 기본적인 마법을 구현할 때의 위력은 마력 감응력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감응력이 뛰어난 마법사일수록 자신의 신체 상태와 마력이 동화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흔한 경우도 아니고, 제대로 통제되지 않으면 폭주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만…… 어쨌든 류세연 헌터가 강력한 마법사인 것은 확실했다.
겨우 감정을 가라앉힌 류세연 헌터가 여전히 매섭게 주위를 무작위로 노려보며 말했다.
“어쨌든, 제 의견은 같아요. 신원 모를 헌터와 미공략 던전을 공략할 의사는 없습니다.”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다른 헌터들도 류세연과 이선을 번갈아 보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양태원은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이 입을 뻐끔거리고 있었지만 대부분은 이 상황을 재미있어하고 있었다.
시선만 보아도 기대감이 엿보인다.
혹시나 내가 이 도발에 응해서 가면이라도 벗어 던질까, 싶은 거겠지.
특히나 김성연은 이 상황이 아주 흥미로운 모양이었다.
“류세연 헌터의 의견이 옳긴 하지.”
그렇게 김성연이 한마디 거들자 다른 헌터들 사이에서도 한 마디씩 동의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맞아. 일리가 있어요. 우리들은 다 얼굴 까고 있잖아요?”
“솔직히 내 등을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어떻게 맡깁니까.”
김성연도 그렇고 한마디씩 거드는 헌터들을 살펴보니 대부분 헌터 협회의 소속이었다.
왜 저러는지 알 만했다. 이게 웬 떡이냐, 싶겠지.
대놓고 나서기에는 이미 한 짓이 많아 애매한 상태였는데, 이렇게 헌협 소속이 아닌 헌터가 정당하게 나를 압박하고 있으니까.
“그게 문제가 됩니까?”
그렇지만 그 대치 상황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딱히 내가 나설 필요도 없이.
“저는 아무 문제도 없어 보이는데요.”
이우연이 류세연 헌터 앞으로 다가갔다. 호응하던 헌터들이 이우연의 말에 하나같이 순식간에 입을 다물었다.
그 흐름에 김성연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이우연 헌터,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죠?”
그리고 정면으로 반박을 당한 류세연의 완드를 쥔 손에 하얗게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모든 헌터들의 시선이 모였는데도 이우연은 여전히 유들유들하게 웃고 있었다.
눈부신 햇살을 받아 한층 더 희게 보이는 얼굴에는 어떤 긴장도 엿보이지 않았다.
“류세연 헌터가 신원을 밝히지 않는 헌터와는 공략을 진행하지 않겠다는 말씀, 그게 무슨 문제가 되는 거냐고 물었습니다만.”
다시 한번 파지직, 하고 마력이 튀는 것이 보였다.
이번에는 류세연의 마력만이 아니었다. 이우연의 주위에서도 푸른빛의 마력이 튀었다.
그 기 싸움에 류세연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러니까, 나더러 불만이 있으면 그냥 공략에서 빠져라, 이 소리인가?”
“그렇게 들렸습니까?”
“……그쪽이 이렇게까지 나오면 나도 진짜 1위 님의 정체가 궁금해지는걸. 이선에 이우연까지 나선다, 라. 왜 이렇게 감싸고돌지?”
“제 말을 좀 오해하신 것 같네요.”
이우연이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어 잔뜩 경직되어 있던 둘 사이의 마력 흐름을 흐트러트렸다.
“어차피 인원이 스물여섯이니 일단은 조를 나누어서 행동해야겠죠. 그러니 류세연 헌터가 불편하다면 방랑하는 구도…….”
잠시 이우연이 헛기침을 했다. 노골적으로 웃음을 참고 있는 표정이었다.
죽일까?
“……자 님과 조를 떨어트리면 될 문제고요. 동의하시죠, 이선 헌터.”
“이우연 헌터의 말이 맞아요. 공략도 하기 전에 헌터들끼리 감정 소모하지 말죠.”
이선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 것이 보였다.
김숙자 교수를 연상하게 하는 행태였다. 혹은 지친 공무원들에게 흔하게 나타나는 행동 양식인가.
“그리고 방랑하는 구도자…… 너무 기네. 하여튼, 신원을 밝히게 되면 특정 헌터에 대한 이런저런 테러가 예상되므로 정부 차원에서 배려하고 있을 뿐입니다. 악의적인 추측은 사양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이선이 한마디 덧붙였다.
“만일 받아들이지 못하시는 헌터들은 이번 공략에서 빠지셔도 좋습니다. 단, 국가 안보에 필수적인 공략을 특별한 사유 없이 거부할 경우 처벌될 수 있다는 점은 다들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선의 시선이 의도적으로 김성연 길드장의 얼굴 위에 조금 더 머물렀다.
두 사람 사이에서 시선으로 치열한 공방이 오갔다.
그러나 막상 반응은 다른 쪽에서 왔다.
“……망할, 야! 알겠으니까 그놈의 협박 좀 그만할 수 없어? 이제 귀에 딱지 앉겠다!”
흰 흉터와 괴리된 류세연의 낯빛이 완전히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물론 이선 헌터도 만만치 않았다.
“제대로 헌터라고 불러 주시길 바랍니다, 류세연 헌터. 저희 공략 중이거든요? 던전 공략 중에 개인적인 친분 내세우지 말죠.”
“아아악!”
류세연이 손에 쥔 완드를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그러자 이선이 자연스럽게 팽개쳐진 완드를 발로 걷어찼다.
휘리릭.
이선의 발에 맞고 공중으로 떠올라 회전한 완드가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슬로우 모션처럼 느릿하게 떨어지는 완드를 보며 류세연이 달려 나갔지만 이미 한발 늦었다.
류세연이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곧 상황을 알아차리고 비명을 질렀다.
“악, 내 지팡이! 야, 뭐 하는 짓이야! 저게 얼마짜린데!”
“딱 좋네요. 절벽 아래로 갈 팀과 동굴 안을 탐사할 팀으로 나눌게요. 인원은 제가 호명하겠습니다.”
“야아아아악!”
류세연이 지르는 소리에 귀가 아팠다.
어쨌거나, 이렇게 두 사람이 적극적으로 여론 진압을 한 덕분에 내가 나설 필요도 없이 최초로 일어난 소동은 곧바로 소강되었다.
* * *
그 후로도 약간의 소란과 이견들이 오갔지만, 이미 한번 이야기가 정리된지라 큰 문제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클리어 조건을 찾아내면 텔레파시 스킬로 연락해서 바로 합류합시다. 각 조의 마법사들은 서로의 위치를 시간마다 보고하는 것, 잊지 말고요.”
그 정리에 지대한 공을 세운 이선이 피곤한 낯빛을 하고서도 능숙하게 헌터들 사이에서 조를 나누고 지시를 하고 있었다.
“이 던전의 필드는 이제까지 보고된 바에 따르면 절벽 아래 해변가, 그리고 동굴 안이에요. 1조는 해변 탐색, 2조와 3조는 동굴 안에서 나눠집시다.”
그렇다. 상의 끝에 우리는 세 개 조로 나누어 던전 안을 탐사하기로 했다.
최대한 던전 안의 많은 곳을 빠르게 탐사하는 게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려면 인원이 조금 적어지더라도 수색 범위를 넓히는 게 나았다.
그렇게 이선이 임의로 나눈 3개의 조 중 내가 속한 조는 6명으로 이루어졌다.
나, 이우연, 양태원, 백사현, 이선. 그리고 김하현이라는 이름의 헌터로 우리가 맡은 필드는 동굴 안쪽 길 중 하나였다.
“1위에 2위까지 있으니 여긴 인원을 좀 줄일게요.”
“그러는 이선 헌터도 4위잖아요.”
그렇게 말한 김하현은 이선과 엇비슷한 나이 또래로, 이선과 마찬가지로 정부 소속 헌터라고 했다. 만두처럼 둥그렇게 머리를 묶어 올린 인상 좋은 여자였다. 조가 편성되자 넉살 좋은 소리까지 곁들였다.
“이거, 랭킹 극상위권 멤버들하고 같이 가려니 민망하네요. 잘 좀 봐주십쇼.”
다만 거기에 대답할 만한 놈이 없어서 문제였다.
백사현은 캡 모자만 눌러썼고, 양태원은 던전에 들어온 순간부터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입을 꾹 닫고 있었다. 나는 최대한 말을 아끼는 중이었고.
그리고 이우연은 지금 김하현과 대화를 나눌 여유가 없었다.
“여기서 갈라지니 아쉽군. 나는 해변 탐사를 맡게 되었으니 말이야.”
“그러네요.”
이우연이 김성연 길드장의 말에 성의 없이 대꾸했다.
일단은 나름대로 저쪽이 상사인 것 아닌가? 이렇게 보면 상사가 아니라 옆집 아저씨 대하는 것 같은데.
“모쪼록 조심하게. 자네는 우리 길드의 간판이니까 말이야.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바로 연락하고.”
“아, 그럼요. 당연하죠.”
“너무 귀찮게 듣지 말고 명심하게나. 쯧쯔, 자네는 너무 몸 사리지 않고 던전 공략에 몰두해서 탈이야, 원.”
“네, 네.”
명절에만 가끔 마주하는 먼 친척의 잔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모습 같았다.
대외적으로 사이좋은 모습을 보여 주려고 하는 건가.
참고로 아까 가장 강하게 항의했던 류세연 헌터는 1조로 배정되었는데, 완드를 잃은 빈손으로 계속해서 자기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주변 헌터들이 시한폭탄을 보는 것처럼 불안하게 류세연을 지켜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저러다 말 거예요. 원래 저러는 애라서.”
지시를 내리며 주변을 지나치던 이선이 조용히 내게 속삭였다. 애초에 류세연에게 별 신경을 쓰지 않았던 나는 그냥 어깨만 으쓱였다.
“던전 클리어에 도움이 되면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전.”
“우연이 같은 소리를 하시네.”
그런 끔찍한 소리를 하다니.
내 표정을 볼 수 없었는데도 능히 상상이 갔던 건지 이선이 낄낄대며 다시 멀어져 갔다.
나는 이선 헌터의 뒷모습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선 헌터의 헛소리는 제쳐 두고, 약간의 불안 요소가 있는 건 사실이었다.
가장 불안한 것은 클리어 조건을 끌어낼 수 있는 선행 조건이 무엇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것.
‘이거 진짜 감이 안 잡히는데.’
시스템은 잔혹하지만 이런 던전에서는 플레이어가 조건을 알아차릴 수 있는 힌트를 깔아 놓기 마련이다.
유령의 성 던전의 경우 성안에서 유령의 기억이 담긴 물건, 일종의 매개를 만짐으로써 진짜 던전 속에 입장할 수 있었다.
백록담 던전의 경우 내가 정소현을 만나는 것이 선행 조건이었고.
하지만 지금은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그럴듯한 몬스터나 지형물 같은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지간히 경험이 쌓인 내 눈에도 이러니 다른 헌터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생각보다 장기전을 각오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찰나, 같은 조에 편성된 양태원이 내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누나, 저 동굴 안에서 뭔가 느껴지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