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115화
“응?”
양태원의 말을 듣고 나는 동굴 속을 빤히 노려보았다.
해안 절벽에 나 있는 동굴 안으로 한참 동안 기감을 퍼트려 보았지만 양태원의 말과는 달리 내게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잘 모르겠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양태원의 말을 무시할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의 몸을 철옹성처럼 두르고 있는 청룡만 보아도 양태원의 감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확실했다.
“아, 너도 느껴져?”
그때 겨우 김성연과의 대화에서 탈출한 이우연이 돌아왔다. 나는 이우연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우연과 양태원도 구면이었지. 다만 사이가 별로 좋아 보이지는 않았고.
이쯤 되면 이우연과 사이가 좋은 녀석을 꼽는 게 빠를 것 같기는 하다만.
양태원도 이우연을 힐끗 눈짓하더니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우연 헌터한테 말한 건 아닌데요. 어쨌든 뭔가 확실히 악의가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악의?”
“쉽게 말하면 원귀한테 느껴지는 종류요.”
“원귀라고?”
뒤에 가만히 서 있던 백사현이 중얼거렸다.
뒤를 돌아보자 자기도 모르게 나온 말인지 백사현이 제 입을 헙, 하고 막았다. 쟤는 또 왜 저렇게 오버하는 거지? 누가 보면 내가 정말 죽도록 팬 줄 알겠다.
양태원도 그런 백사현이 이상한지 잠시 힐끔 보았지만 구애받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네, 일종의 증오 같은 게 느껴져요. 약간 모골이 송연한데요. 다들 못 느끼나요?”
“나도 비슷해.”
이우연이 끼어들었다.
“저번에 들어왔을 때보다 살기가 한층 짙어진 것 같아. 그쪽은 어때?”
“……난 모르겠는데.”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이우연과 양태원의 말을 듣고 나서 동굴 쪽을 내내 주시해 보았지만 내게는 별달리 느껴지는 게 없었다.
대체 왜지?
두 사람이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다. 나만 살기를 느끼지 못하는 이유가 있기는 할 터였다.
“이거 이상하긴 하네. 당신은 당연히 이 살기를 감지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우연도 같은 점을 지적했다.
나는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위화감이 느껴지는 상황이다. 지금 상태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하나.
“이거, 너희 둘만 선행 조건을 만족시킨 거 아니야?”
현재 이 미공략 던전이 아예 클리어 조건조차 떠오르지 않은 상태라는 점을 감안하면 유추할 수 있는 답은 하나였다.
이우연과 양태원은 나와 달리 던전 입장 후 어떠한 조건을 이미 만족시켰고, 그래서 보스 몬스터의 살기를 느낄 수 있다는 것.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좀 이상하지 않아?”
하지만 곧바로 이우연이 의문을 표시했다.
“던전에 입장한 후로 딱히 따로 특별한 행동을 취한 건 없잖아. 모두 다 같이 있었는걸.”
이우연의 의문도 당연한 이야기였다.
이우연도 양태원도 진입 지점에서 어떤 단독 행동도 취하지 않았으니까. 두 사람만 선행 조건을 만족시킬 만한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
“이렇게 두 사람만 가지고는 결론이 안 나겠네. 두 사람 외에도 무언가 느낀 사람이 있는지 모아 봐야겠는데. 이선 헌터에게 이야기해 볼까?”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면 조를 나눠 탐사를 시작하기 전에 미리 취합하는 것이 옳았다.
행동에 제약이 없는 이우연이 빠르게 이선에게 다가가 이 위화감에 대해 알렸다. 이선도 막 흩어지려던 헌터들을 급하게 불러 모았다.
그런데 그 결과가 다소 충격적이었다.
“나랑 류세연 헌터 외의 모든 사람이 살기를 느끼고 있다고?”
물론 다들 양태원이나 이미 경험이 있던 이우연만큼 즉각적으로 기운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시간을 들여 주시하자 모두 같은 결론을 내렸다.
이 뜻밖의 상황에 헌터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면 굳이 조를 나눌 필요 없이 바로 공략대를 파견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러게요. 동굴 안에서 몬스터의 기척이 느껴지는 걸 보면 수색이 필요 없을 것 같은데.”
“그건 아닐 것 같군요.”
이우연이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다.
“저번에도 이런 기운을 느끼고 동굴 안을 탐사해 봤는데 몬스터는 출현하지 않았어요. 여전히 선행 조건은 충족되지 않은 상태란 거죠.”
“잠깐만.”
김성연 길드장이 손을 들고 나섰다.
“그럼 랭킹 1위 헌터와 류세연 헌터의 공통점을 찾아내면 되는 것 아닌가?”
나는 혀를 찼다.
상황이 이렇게 굴러가다니.
그렇지만 김성연 길드장의 지적은 마음에는 들지 않아도 타당했다.
이렇게 되면 나와 류세연 헌터만이 해당 선행 조건을 채우지 못했다는 말이 되니까, 해당 조건을 찾으려면 공통점부터 시작하는 게 빠르다.
하지만 지금 그 공통점을 찾아내려면 필연적으로 내 정보를 공개해야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니나 다를까, 류세연 헌터가 불만에 찬 얼굴로 투덜거렸다.
“본인의 신원도 안 밝히는데 공통점을 어떻게 알아냅니까? 나이도, 국적도 뭣도 모르는데! 클래스가 뭔지 등록은 했나?”
“…….”
“자, 그만. 류세연 헌터, 진정하라고 했죠. 신원 이야기도 그만하고요.”
또다시 격화되려는 분위기를 이선이 중재했다.
그러자 류세연이 인상을 쓰며 완드가 사라져 버린 빈손으로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내가 지금 진정이 될 것 같아? 아오, 내 완드 어떻게 할 거냐고!”
“찬 건 내가 찼는데 왜 애먼 데 화풀이야!”
이선이 결국 공적인 입장을 내버리고 류세연 헌터에게 화를 낸 후, 내가 있을 법한 곳으로 고개를 돌린 뒤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 ‘방랑하는 구도자’ 헌터. 혹시 무언가 짚이는 점이 있으면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저렇게 묻는 이선의 입장도 이해가 갔다. 내 정보를 오픈하지 않는 만큼 내가 답을 내줘야 하는 상황이니까.
그렇지만…… 류세연 헌터와 나의 공통점?
쉽게 생각하면 클래스가 같다거나, 혹은 둘 다 이 던전 진입이 처음이거나…… 그런 점인데 우리 둘의 클래스는 겹치지 않을뿐더러 류세연 헌터는 이미 이 던전에 진입한 적이 있고, 나는 처음이었다.
도통 같은 게 없지 않은가.
나도 결국 고개를 저었다.
“저도 잘 모르겠네요. 그렇게 단순한 조건은 아닐 듯싶습니다만.”
“……그런가요.”
내 대답에 기대를 걸고 있었던 이선이 약간 침울한 얼굴을 했다.
“와, 끝까지 아무 말도 안 하는 거 봐.”
“이야기를 좀 하지…….”
예상대로 헌터들의 시선에 노골적으로 책망이 어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에 딱히 감흥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나도 답답하긴 했다.
‘시스템이 공략 여부만이 아니라 공략 조건도 알려 주면 좋을 텐데.’
망할 시스템 자식 같으니. 힌트를 줄 거면 제대로 달라고.
“일단 결론이 나지 않으니 탐사를 진행하도록 합시다. 다들 조금이라도 수상한 낌새가 있으면 곧바로 연락하도록 하죠.”
시간이 지나도 영 결론이 나오지 않아서, 결국 별다른 수확 없이 이선의 지시 아래 탐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아 씨. 쉬운 길을 이렇게 돌아가야 해?”
“자, 자. 류세연 헌터, 진정하게.”
여전히 흥분하고 있는 류세연 헌터를 김성연 길드장이 진정시키며 1조와 함께 절벽 밑 해변으로 내려갔다.
그제야 동굴 앞이 한결 조용해졌다.
“너무 신경 쓰지 마. 원래 저런 사람이야.”
그때 이우연이 슬쩍 내 옆으로 다가오며 속삭였다. 나는 이우연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며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던전 안에서는 모르는 척하기로 하지 않았나?”
그가 곁으로 다가오니 다시금 헌터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몰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우연의 낯빛은 태연했다.
“어차피 당신이랑 내가 아는 사이라는 것 정도는 다 아는데 뭐, 지들이 어쩔 거야?”
“……그렇게 나오면 우리가 합의한 건 어떻게 된 건데?”
“하여튼, 그런 건 신경 쓰지 마. 그보다 정말 짚이는 게 없어?”
뻔뻔하기 짝이 없는 작태였지만 이우연이 왜 저러는지는 알겠다. 혹시 내가 공개적으로 말할 수 없는 상황일까 봐 조용히 물어본 모양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말로 짚이는 게 없었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진짜로 짚이는 게 없어. 거짓말 아니야.”
“으음, 이렇게 되면 정말 미궁으로 빠지는데…….”
“말씀 중에 죄송한데, 다른 시점으로 생각해 봐도 될 것 같아요.”
가까이 서 있던 양태원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던전 속의 풍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형광 분홍 머리를 한 청소년이 사납게 동굴 속을 노려보고 있었다.
……쟤는 또 왜 저렇게 화가 났어?
“제가 원귀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류세연 헌터와 누나 빼고 다른 사람들이 다 저 귀…… 아니, 몬스터에게 원한을 샀다는 게 아닐까요?”
확실히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신선한 관점이었다.
이우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몬스터에게 원한을 산다고? 이 던전에서 몬스터를 처치했다면 모르겠지만 애초에 여기서는 몬스터와 조우한 적이 없는데.”
“원한을 사는 거야 그런 직접적인 인과 관계가 없어도 상관없어요. 몬스터가 싫어하는 무언가를 몸에 지니고만 있어도 원한을 갖게 되기도 하고…….”
무언가를 몸에 지닌다, 라.
“아, 잠깐만.”
양태원의 말을 듣자 번쩍하고 뇌리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이우연과 양태원이 동시에 나를 돌아보았다.
“뭔데? 떠오른 게 있어?”
“이거 혹시…….”
아무리 생각해도 그거 같은데.
나는 말을 잇기 전에 잠시 두 사람을 관찰했다.
이우연은 평소처럼 검을 찬 채 가벼운 가죽으로 된 갑옷을 착용하고 있었고, 양태원의 차림도 비슷했다. 다른 점이라고는 거울과 부채가 손에 들려 있다는 정도다.
“그 거울, 헌터 스토어에서 산 거 맞아?”
“네, 맞아요.”
역시나.
양태원의 대답에 나는 확신을 가지고 이우연에게 추가로 질문했다.
“이우연 헌터, 한국에서 쓰이는 마석의 대부분이 여기에서 난다고 하던데.”
“응, 그건 왜…… 설마?”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던 이우연이 내 질문에서 무언가를 감지했는지 눈살을 찌푸리고 자신의 갑옷을 내려다보았다.
곧 나와 같은 것을 알아차린 이우연이 가라앉은 눈길로 동굴 안을 바라보았다.
“……그래, 확실히 가능성 있어.”
“그렇지? 근데 한 가지 문제가, 아까 그 헌터가 장비한 거…….”
“저기요, 형 누나들. 저한테도 좀 알려 주시고 진행하시죠.”
양태원이 부루퉁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이우연은 귀찮다는 듯 양태원을 한 번 흘깃 바라본 후 대답해 주었다.
“다들 이 던전에서 채취한 마석으로 만든 아이템을 착용하고 있다는 거야.”
바로 그랬다.
시스템상에서 아이템은 제작계 클래스의 플레이어가 만든 것과 던전에서 드랍한 것, 두 종류로 나뉜다.
그리고 제작계 클래스의 플레이어가 아이템을 만들 때는 던전 부산물이 재료로 필요한데, 한국에서 유통되는 마석의 대부분이 이 던전에서 나온다고 한다면 그럴 가능성이 충분했다.
“그리고 류세연 헌터는 아까 이선 헌터가 완드를 차 버렸잖아.”
류세연이 이게 얼마짜리인데, 하고 소리를 지른 걸 보면 플레이어가 제작한 완드를 구매했을 가능성이 컸다.
“다만 장비가 문제인데…….”
“류세연 헌터가 장비한 마법사 로브는 외국 던전에서 드랍된 걸 낙찰받은 거라고 들었어.”
이우연이 말을 척척 이었다. 그 정보 덕분에 마지막 남은 의문점도 해결됐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이게 맞는 거 같은데. 나는 포션 외 다른 아이템을 한국에서 구한 적이 없어.”
즉, 나와 류세연 헌터 두 사람만이 이 던전에서 나온 마석으로 만든 아이템을 갖고 있지 않았다.
양태원이 박수를 쳤다.
“아, 그렇게 생각하면 제가 원귀라고 생각한 것도 들어맞네요. 이 던전에 사는 몬스터가 제 영역을 침범하고 마석을 가져간 헌터들에게 적개심을 가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잖아요.”
양태원의 말이 옳았다. 나와 류세연만 살기를 느끼지 못했던 것은 이게 원인일 가능성이 컸다.
나는 다른 조의 헌터들과 아직 상의를 하느라 이 대화에서 제외된 이선을 보며 감탄했다.
“이거, 태원이는 물론이지만 이선 헌터에게 감사해야겠는데.”
이선 헌터가 류세연의 완드를 절벽 밑으로 차 버리지 않았더라면 결코 이 차이점을 알아차릴 수 없었을 것이다.
설마 그 코미디 같던 해프닝이 이렇게 연결될 줄은.
“그럼 결국 마석을 제 소유물이라고 생각하는 몬스터가 보스 몹일 가능성이 높네. 그런 몬스터가 있던가?”
“……너무 많은데.”
동굴 같은 필드에 서식하는 몬스터가 워낙 많아야지.
이우연이 추측을 이어 나갔다.
“어쨌든 아이템 착용 여부 자체가 선행 조건은 아니겠네. 이제껏 여기 들어온 헌터들 대부분이 이 던전의 마석을 사용한 제작 아이템을 착용했을 텐데, 그럴 거면 진작 클리어 조건이 나왔어야지.”
“그건 그래. 결국 선행 조건은 탐사를 하면서 찾아봐야 하는 건가…….”
의견 교환이 길어지면서 이쪽의 대화를 아닌 척 집중해 듣고 있던 다른 헌터들의 관심이 슬그머니 흩어질 무렵이었다.
그때 양태원이 목소리를 높여서 말했다.
“그건 그렇지만, 어쨌거나 누나가 잘못한 건 없다는 말씀!”
그 말에 깜짝 놀라 양태원을 바라보자 불량 청소년다운 의기양양한 미소가 얼굴에 자리하고 있었다.
다시 다른 헌터들의 시선이 쏠리자 태원이가 크게 코웃음을 쳤다.
“아까 다들 1위가 신원을 밝히지 않은 탓에 선행 조건을 못 찾는 거라고 했잖아요. 그게 아니라는 건 확실하게 하고 넘어가야죠.”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었는데 그 내용에 놀라 내가 눈만 깜박이는 사이, 양태원이 더욱 목소리를 높여 주변 헌터들을 향해 들으란 식으로 떠들기 시작했다.
“말이 나온 김에 하는 말이지만 진짜 다들 너무한 거 아니냐고요. 다들 던전을 어떻게 공략할지 의논하기는커녕 날이나 세우고 있고, 이게 뭐 하는 짓이래요? 유치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깟 랭킹이 뭐라고!”
확실히 이 던전에 진입한 이후로 다들 내 정체에만 집중하느라 공략은 지지부진하기 짝이 없었다.
양태원이 크게 씩씩대며, 목에는 핏대까지 세운 채 손가락으로 주변을 가리키며 열변을 토했다.
“지금도 뻔히 듣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이나 하고!”
“아, 아니…… 누가 알았나.”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그 말에 찔끔한 헌터들이 제각기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미성년을 갓 벗어난 애가 저러니 부끄럽기는 한 모양이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이우연이 옆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내가 졌다. 양태원이 한 건 했네.”
잠시 뜻밖의 상황에 놀라 할 말을 잃었던 나도 결국은 피식 웃었다.
‘사실 난 아무렇지도 않기는 했는데.’
딱히 다른 헌터들의 행동에 분노한 건 아니었다.
류세연은 할 말을 했고, 그 외의 사람들은 제 이득을 따라 분위기에 편승한 것뿐이다. 굳이 내 감정을 소모할 필요도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한없이 어리게만 봤던 꼬맹이가 달리 보이기는 했다.
“뭐 하나 틀린 말이 없네.”
정말 기특하기 짝이 없는 꼬맹이었다.
제 엄마를 꼭 빼닮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