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119화
약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 히든 루트 : ‘숨겨진 요람’ 진입 조건을 충족하여 히든 루트가 활성화됩니다.
맨 처음 히든 루트 메시지가 떠올랐을 때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둘 다 기쁨이나 감격 따위는 없는, 그저 의혹만이 가득한 눈길이었다.
이우연이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서 히든 메시지?”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실속은 없을 것 같다만.”
히든 루트라고는 해도 결국 진입 조건이 얼마나 까다로운가에 따라 특전이 갈린다.
그리고 지금은 정황상 나와 이우연이 진입한 것 자체만으로 저 조건을 충족시킨 것 같은데, 이런 경우 그냥 별 쓸모없는 정보나 아이템 획득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흠, 그래도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
이우연이 메시지를 보고 미묘하게 웃었다. 그의 눈길이 찬찬히 메시지의 내용을 훑었다.
“숨겨진 요람이라잖아. 와,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는데.”
“……뭐, 그건 그러네.”
나는 마지못해 동의했다.
이우연이 말한 내용에 반대해서가 아니라, 그와 내 사고방식이 너무 비슷하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나도 저 메시지를 읽자마자 같은 생각을 했으니까.
숨겨진 요람
어딜 보나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몬스터들이 새끼를 기르는 구역이라도 되는 걸까?
내가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이우연은 다시 날개를 펼치고 날아올라 우리가 떨어져 내린 구멍 위로 올라가려는 시도를 해 보았으나, 당연하게도 막혔다.
밖에서 진입하는 것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래도 텔레파시는 먹혀서 다행이군.”
텔레파시 스킬로 바깥에 있는 이선과 연락을 마친 이우연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그나마 이우연 덕분에 다른 헌터들과 연락이 끊기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이쪽은 걱정하지 말고 그쪽에서 할 수 있는 탐사가 있으면 진행하라고 해. 무엇보다 무리하지 말라고 좀 전해 줘.”
그 혈기 넘치는 꼬맹이가 청룡을 등에 업고 무슨 짓을 하지는 않을지, 그게 가장 걱정이었다.
그러자 이우연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그거, 양태원 때문에 하는 소리지? 엄청 챙기네, 진짜. 섭섭하다, 강예나. 둘이 언제 그렇게 친해졌어?”
……내가 태원이를 챙기는 게 그렇게 티가 났나.
약간 민망해진 나는 딴청을 피우기로 했다.
“어디 보자. 도대체 이곳은 왜 숨겨진 요람인 걸까?”
“거짓말 못 하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말 돌리는 것도 못 하는구나아.”
“시끄러워. 잡담할 시간에 던전 탐사나 해.”
“네, 네. 알겠습니다, 1위님.”
자꾸 짜증 나게 구는 녀석을 걷어차려 했지만 그 전에 이우연이 휙 피해 버렸다.
눈치 빠른 녀석 같으니.
나와 이우연이 진입한 새로운 동굴은 무척 넓었다. 이우연이 마법으로 만든 작은 불 하나 가지고는 도저히 어둠을 다 밝힐 수 없을 정도였다.
떨어질 때의 체공 시간이 제법 길다 싶더니, 높이만 족히 30미터는 넘을 듯했다.
불을 몇 개 더 만들어 내 동굴 벽면을 살피던 이우연이 인상을 찌푸렸다.
“덩치가 엄청나게 커다란 몬스터인 것 같아.”
“응?”
“이걸 봐. 벽면 전체에 난 자국이 모두 일정하잖아.”
이우연이 불빛을 좀 더 크게 피워 올려 동굴 천장부터 바닥까지 전체를 비췄다.
이우연의 말대로였다. 미세한 실오라기처럼 보이는 숱한 자국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자연적으로는 절대 생기지 않을 흔적이다.
나도 이우연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네 말대로 몬스터 개체 수는 적은 것 같고…… 이건 아무래도 비늘이 스친 자국 같다.”
일정한 패턴처럼 정교하게 아로새겨진 무늬를 가졌고, 그게 돌에 스치는 것만으로도 새겨질 만큼 강도가 있을 것.
“예전에도 이런 거, 본 적 있어. 바실리스크의 굴에 들어갔을 때도 벽에 이런 자국이 있었거든.”
딱히 추억하고 싶을 정도로 즐거운 기억은 아니다만, 어쨌거나 뇌리에 생생히 새겨져 있는 장면이었다.
이우연이 질렸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런 곳에 들어갔대?”
“나도 들어가고 싶어서 들어간 건 아니야.”
“그거야 그렇겠지. 흠, 당신 말이 맞는 것 같네.”
이우연이 동굴 바닥을 손으로 더듬거리더니 곧이어 무언가를 주워 들었다.
비늘이었다.
어두운 바닥에 떨어져 있을 때는 몰랐는데, 불빛에 비추자 무지개처럼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엄청 크다.”
이우연은 성인 남자답게 손이 제법 큰 편이었는데, 그런 이우연의 손바닥 두 개만큼을 합친 것 같은 크기였다.
몬스터의 크기가 능히 예상이 갈 정도다.
크기만 봐도, 그리고 별 실속이 없다 한들 히든 루트까지 등장하는 걸 보면 적어도 A급 이상인 건 확정이다.
심지어 해안가에, 비늘이 달린 몬스터라니.
“그럼 수중에 사는 몬스터인가? 뭐, 다리 달린 물고기라도 되나?”
“다리가 달렸을지는 모르겠다만 그럴 가능성이 크겠다. 이보다 더 밑을 탐사해 보면 바다와 연결된 통로도 있을 수 있고.”
그렇게 추측한 나와 이우연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힘들겠다.”
“왜 항상 이런 시련이 닥쳐오는 건지…….”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불공평했다. 나는 시스템 메시지를 노려보았다.
‘이런 X새끼.’
- 서브 퀘스트 : 대한민국에 남아 있는 미공략 던전을 모두 클리어하십시오.(0/5)
미공략 던전이니 뭐니 하더니, 진짜 이번에도 S급 몬스터가 있는 던전이었냐?
‘개나 소나 S급이야?’
설마 저 서브 퀘스트가 말하는 ‘미공략 던전’이라는 게 모두 S급 몬스터가 출현하는 던전은 아니겠지…….
……왜 아니겠냐. 이건 합리적 의심이었다.
시스템이 무려 ‘멸망한 세계의 복구’를 보상으로 걸었다. 그런 보상이 걸려 있다면 당연히 저 정도 수준의 퀘스트겠지.
“아악!”
“뭐, 뭐야. 왜 그래?”
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야 쉬울 거라고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본래 S급 몬스터란 그리 흔한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타르토스에서는 S급 몬스터쯤 되면 지역 단위에서 가장 센 보스 몬스터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한국 기준으로도 S급 몬스터가 보스 몹인 고정형 던전은 서울역에 있는 던전, 하나뿐이다.
그런데 이제까지 내가 만난 몬스터들은 죄다 S급. 심지어 SS급도 있었다. 물론 릴리스는 S급으로 너프를 먹었다지만 내 정신상의 피해를 감안하자면 SS+급 정도로는 매겨 줘야 한다.
그런데 그런 몬스터를 처리할 때 저런 서브 퀘스트는 주지도 않다가, 이제 와서 S급 몬스터가 보스 몹으로 있는 던전을 5개나 더 처리하라고?
심지어 5개로 끝날지 안 끝날지도 클리어하면서 파악해야 하고. 갈수록 산 넘어 산이었다.
“괜찮아?”
갑자기 바닥에 홀로 엎어진 내 어깨를 이우연이 조심스레 흔들었다.
나는 머리를 쥐어뜯은 채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하나도 안 괜찮아. 진짜 살기 싫다.”
이우연이 그런 나를 보고 깜짝 놀란 듯 숨을 들이켜더니, 곧 머리 위에서 웃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약한 소리도 할 줄 알아?”
“나도 사람이거든.”
한숨이 절로 나온다.
에라이, X발.
욕이나 시원하게 하면 속이라도 풀릴까 싶었는데 겨우 이런 걸로 풀릴 게 아니었다.
이우연이 한참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나를 보다 못 해 내 팔을 잡고 일으켜 세우더니 마구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무슨 복싱 감독 같았다.
“괜찮아, 괜찮아. 여기 나도 같이 있잖아. 한국의 화력이란 화력은 죄다 모아 왔다고.”
“확실해? 그 화력이란 게 죄다 오합지졸 같던데.”
“으음, 그야 당신에 비하자면 그렇지.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 뼈아프군.”
이우연은 웃으면서 말했지만 나는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웃을 일이 아닌 것 같은데. 검사 클래스가 왜 이렇게 적어?”
그래, 정말 이 던전의 보스 몬스터가 S급이라면 이것도 문제였다.
내가 한국의 순위권 헌터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제대로 관찰한 것은 처음이었는데, 여러모로 기대 이하였다.
수준이 생각보다 낮은 건 둘째치고,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클래스가 편향되어 있었다는 것.
공략조 거의 대부분이 마법사 클래스였던 것이다.
‘그야 마법사 클래스가 좋긴 하다만.’
따로 스킬 없이도 마법으로 광역기를 시전할 수 있다는 것은 마법사 클래스의 가장 큰 장점이다.
또 중급 던전까지만 해도 클리어 조건으로 해당 던전에 서식하는 몬스터 일정 수를 처치하라는 경우가 많다. 이런 던전에서는 당연히 광역기가 있는 마법사가 가장 유리하고, 파티원을 짤 때도 필수적인 클래스인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초반까지의 이야기.
상위 던전으로 갈수록 몬스터가 다양해지고, 마법 공격이 먹히지 않는 경우도 많아진다. 심지어 보스 몬스터가 마법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고.
이렇게 되면 마법사 클래스는 파티원 중에서도 보조적인 역할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그래서 장기적으로 보자면 물리적 공격이 가능한 클래스는 공략에 반드시 필요했다.
그런데 보아하니 스물 몇 명의 헌터 중 검을 차고 있는 자는 기껏해야 다섯이었다.
그것도 백사현을 포함한 숫자다.
“그것도 쓸 만한 검사는 김성연 헌터 한 사람뿐이고.”
물론 그들 대부분이 내게 적대적이라 곱게 보이지 않는 것도 있지만, 그런 사적인 감정을 제외하고, 또 시스템이 5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검사들의 수준은 생각보다 높지 않았다.
내가 겪었던 한국의 던전이 제법 높은 난도라는 것을 감안하자면 의아할 정도였다.
이 점은 이우연이 설명했다.
“음, 아무래도 다들 검사 클래스를 선호하는 편은 아니니까. 몸으로 부딪혀야 하는, 부상이 잦은 클래스다 보니 연약한 현대인의 물몸으로는 말이지…….”
무척이나 설득력 있는 말이었다.
그야 현대인의 가장 큰 고질적인 문제 중 하나가 운동 부족이긴 하지…… 나만 해도 내내 책상에 앉아서 공부만 하다가 갑자기 타르토스에 날려 가서 검을 드느라 얼마나 고생했던가.
“그래, 누가 강요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긴 한데…….”
적성이라는 것도 엄연히 존재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검사 클래스가 부족할 일인가? 영 납득이 가지 않았다. 도대체 한국은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그런데 그때, 이우연이 망설이는 듯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이건 사실…… 나랑 김숙자 교수님 탓도 있어.”
“응?”
드물게도 이우연이 민망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가 손가락으로 제 볼을 긁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둘 다 초반부터 언론에 노출되었는데…… 아무래도 압도적이었지.”
“뭐가 압도적이었는데?”
“……마법으로 몬스터를 처치하는 모습이?”
이우연의 말을 들은 나는 눈을 깜박였다.
그러니까…… 이우연이 하고 싶은 말은.
“너랑 김숙자 교수님이 마법을 사용하는 모습이 너무 멋있어서 전 국민의 장래 희망이 마법사가 되었다는 거야? 그래서 검사 클래스가 상대적으로 적어졌다는 뜻?”
“…….”
이우연이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이건 정말, 정말 드문 일이었다.
내가 빤히 바라보는 동안 이우연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나는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남의 체면은 한껏 추켜올려 주더니, 본인의 업적을 본인 입으로 이야기하는 건 아무래도 민망한 모양이었다.
“풉.”
엄청 웃겼다. 이우연이 부끄럼을 타고 있었다!
“푸흡, 그, 그래. 너도 명색이 랭킹 2위지. 인기 많네, 이우연. 범국가적이네. 응.”
명백하게 비웃는 표정을 지어 보이자 이우연이 불퉁한,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웃지 마.”
“안 웃었는데?”
“거짓말만 못 하는 줄 알았더니 시치미 떼는 것도 못 하네.”
“응, 너는 칭찬 듣는 걸 못 하고.”
다시 한번 이우연의 말문이 막혔다.
이 녀석 말문이 막히는 거, 만난 후 처음 있는 일 아닌가? 이우연을 처음 만났을 때의 말싸움이 생각났다.
이번엔 내가 이겼다!
“흠, 흠. 어쨌든 간에…….”
이우연은 몇 번 헛기침을 하더니, 애써 화제를 돌렸다.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어중이떠중이들은 아니니까.”
“……그러냐?”
그래도 영 떨떠름한 내 반응에 이우연이 피식 웃었다.
“뭐, 정말로 S급 몬스터가 나타나더라도 이번에는 나도 있고, 무엇보다 강예나가 있으니…… 이번 경험을 통해 배우는 게 있겠지.”
“뭘 배워?”
그렇게 묻자 이우연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진짜 강하다는 게 어떤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