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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121화 (122/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121화

“제가 먼저 갈게요. 다들 제가 하는 거 보고 천천히 따라오세요. 발 내딛는 거 조심하시고요!”

그 말과 함께 이선이 절벽 위 말뚝에 로프를 감은 후 줄을 손에 쥐고 절벽 밑으로 뛰었다.

김하현이 그걸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부자가 더하다더니, 마력 아끼겠답시고 그냥 내려가는 것 좀 봐.”

그렇게 말하면서도 김하현도 결국 부유 마법을 쓰는 대신 로프를 붙잡고 곧장 절벽 밑으로 내려갔다.

백사현은 절벽을 한달음에 내려가는 이선과 김하현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아무리 헌터들의 기초 체력이 일반인과는 비교할 수 없이 좋다고는 해도 둘 다 마법사 클래스로 알고 있는데,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타고 내려가는 배짱 자체가 대단했다.

“…….”

그리고 둘만 남겨진 백사현과 양태원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양태원 쪽이었다.

“형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네가 내려가자며.”

애초에 이 상황 자체가 양태원의 말 한마디로 발발했기에, 백사현은 발끈했다.

양태원은 머리를 긁적였다. 정말로 청룡이 그렇게 말한 것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건 그렇긴 하지만…… 형은 여기 있어도 될 것 같은데.”

그 말에 백사현은 또 발끈했다.

“난 필요 없단 소리냐?”

“뭘 또 그렇게까지.”

양태원이 심드렁하게 중얼거렸고, 백사현은 이를 갈았다.

둘은 파주의 한 던전에서 함께 정기 공략을 진행하고 있기에 아는 사이이기는 했지만, 나이와 성격 차로 인해 전혀 친하지 않았다.

특히나, 백사현은 양태원이 저렇게 가끔씩 예언 같은 소리를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 또 저렇게 모든 걸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지.

사실 이선의 판단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양태원이 용한 무당이라고 해도 그렇지, 저 어린놈 말만 듣고 공략대의 방향이 정해진다는 게 말이 되나? 물론 그렇다고 차마 이야기를 꺼내지는 못했지만…….

“뭐, 그럼 형은 알아서 하시고요. 일단 저는 내려갈게요.”

얼마 있지 않아 양태원 또한 별 망설임 없이 이선이 박아 둔 로프에 의지해 절벽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물론 이선이나 김하현만큼 배짱 좋은 모습은 아니었지만.

밑을 내려다보니 아득한 경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한 발 한 발 내디딘다.

젠장, 다들 왜 이렇게 강심장인 거야?

꿀꺽.

밑을 내려다보니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해지는 높이었다. 어지간히 신체 스펙을 올린 헌터라도 맨몸으로 떨어진다면 즉사할 것이 분명했다.

본래대로라면 그냥 이쯤에서 컨디션 난조를 핑계로 공략을 빠지겠지만, 백사현은 결국 그들을 따라 절벽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평소와는 다른 행동이었다. 매니저가 보았다면 아주 놀랐을 것이다.

‘망할, 이러려고 온 게 아닌데.’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한 발 한 발 절벽을 내려가면서도 불만은 끊이지 않았다.

백사현이 이 귀찮을 게 뻔한 조사단에 합류한 이유는 단 하나.

랭킹 1위, ‘방랑하는 구도자’와 한 번 더 만나기 위해서였다.

- ‘용사’ 클래스에 대한 이해도가 올라 새로운 배역이 생성됩니다.

- 일정 이해도에 다다를 때까지 스킬은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저번에 백사현이 일산 호수 공원에서 랭킹 1위인 여자와 마주쳤을 때 생성된 시스템 메시지.

‘무려 용사라고, 용사.’

백사현은 로프를 잡고 내려가는 발에 힘을 주었다.

‘이번에 꼭 이해도를 올리고 말겠어.’

백사현의 클래스는 ‘배우’로, 새로운 누군가와 마주친 후 어느 정도 이상의 접촉이 이루어지면 저런 메시지가 뜬다. 그리고 그 ‘배역 연구’가 이루어지게 되면 상대방의 클래스를 연기 가능한 배역 목록에 등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려면 상대방에 대한 이해도를 올리는 게 필수였다.

이해도를 올리는 것에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인간적으로 친해지는 것인데, 지금도 얼굴을 가리는 아이템을 쓰고 있는 걸 보면 그건 어려울 것 같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런 정도로 포기하기에는 용사라는 클래스가 너무 매력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그 뒷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수없이 몰려들던 몬스터 떼들 앞에서 당당히 서 있던 그 모습과, 단 일 검으로 모든 적을 일소(一掃)시키던 장면이.

그리고……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네가 이제껏 쌓아 온 업적치는 진짜야.”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는 그 장면에 백사현은 이를 꾹 악물었다. 자신이 그 오만불손한 랭킹 1위에게 경도되었다는 것을 차마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도 용사 클래스를 등록하기만 하면!’

이번에야말로 진정한 ‘구국의 헌터’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아무리 위험하더라도 이번엔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용사 클래스를 얻어 내고야 말겠다!

백사현이 그렇게 새로이 다짐하며 열심히 절벽을 타고 내려가던 때.

“헉, 저게 뭐지?”

한참 밑을 내려가고 있던 양태원이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백사현이 아래를 쳐다보기도 전에 양태원이 로프를 놓고 밑으로 떨어졌다.

“야, 너 미쳤……!”

탁.

양태원이 위에서는 이리저리 튀어나온 돌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동굴을 발견하고 그 안으로 뛰어 굴러들어 간 것이었다.

“아니, 다들 진짜 미친 거 아냐!”

혹시 몰라 준비한 로프라 절벽의 높이에 비해 길이도 충분하지 않았다. 조금만 힘 조절을 하지 못해도 당장 아래로 굴러 떨어지게 될 텐데, 다들 어떻게 저렇게 손을 팍 놓고 뛰어든 거지?

그렇지만 백사현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다시 올라갈 수도 없는 일 아니겠는가. 한번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어야 하는 법. 백사현은 결국 눈을 딱 감고 손을 놓은 후 밑의 동굴을 향해 몸을 던졌다.

‘나도 30위권이라고!’

된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어, 어?”

로프를 놓는 순간, 너무 긴장해서인지 돌을 딛고 있던 발이 미끄러졌다.

백사현은 그대로 주르륵 절벽 밑으로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모든 풍경이 순식간에 멀어져 갔다.

“으아아악!”

모든 게 아찔하게만 느껴졌던 순간, 동굴 안에서 고개를 쏙 내민 양태원의 얼굴이 언뜻 보인 듯도 싶었다.

그리고.

“아, 저런…….”

붕, 하고 몸이 떠올랐다.

부유 마법이 몸 전체에 걸린 것이다. 백사현은 허공에 뜬 채 순식간에 동굴 안으로 끌려들어 왔다.

동굴 바닥에 안착한 후에야 백사현은 자신의 이마에 식은땀이 흥건해졌다는 것을 알았다.

저, 정말로 죽을 뻔한 것이다!

“괜찮으세요?”

그리고 그런 백사현의 앞에는 완드를 쥔 김하현이 있었다. 랭킹 순위권에서 이름을 본 적이 없던지라 완전히 의식 밖에 밀어 두었던 헌터였는데, 이렇게 도움을 받을 줄이야.

김하현은 백사현을 일으키려는 것인지 손을 내밀었지만 자존심이 도저히 허락하지 않아 고개를 저었다.

“됐습니다. 혼자 일어설 수 있…….”

“이게 뭐 하는 짓이죠, 김성연 헌터.”

물론 백사현의 그런 소소한 자존심과는 상관없이, 동굴 안의 분위기는 상당히 험악했다.

손을 거절당한 김하현은 그런 것엔 신경도 쓰지 않고, 묘하게 장난스러운 태도로 휘파람을 불었다.

“아주 개판이구만.”

심지어 양태원조차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청룡 님이 내려가 보라고 하시더라고요. 진~ 짜 한심하다.”

백사현 또한 느리게 상황을 파악했다.

이선과 대치하는 김성연의 얼굴에도 당혹스러움이 존재했다.

그도 그럴 게 1조의 모든 헌터들이 동굴 안에 몰려 있었는데, 다들 곡괭이를 들고 있거나 발치에는 캐낸 마석들이 떨어져 있었다.

누가 봐도 탐사가 아니라 마석 채굴을 하려다가 딱 걸린 상황이 아닌가.

‘하긴, 나라도 그랬겠다.’

상황이 빠르게 이해되었다. 백사현 또한 1조로 편성되었다면 영양가 없는 해안가 탐사를 하느니, 아예 이 던전을 이용하지 못하게 되기 전에 마석이나 챙기자는 계산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유독 그 이기심에 이해가 깊은 백사현과는 달리, 그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도 김성연 헌터에게는 최소한의 도덕성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물론 이선이었다.

시스템상 랭킹 4위인 헌터.

아직도 정체불명인 1위는 그렇다 치더라도 2, 3위가 그 이우연과 김숙자라는 걸 감안해 보면 정말 뜻밖이라고 생각했던 인물이었다.

업적치로 4위에 올랐던 만큼 던전 공략에 혁혁한 공을 세웠을 텐데, 이 격동의 5년간 이름을 알린 숱한 헌터들 중 이선의 이름은 없었다.

한국의 그 누구도 시스템의 전체 공지 전까지는 이선을 알지 못했고 사실 지금도 비슷했다. 이선 자신이 그저 일반 공무원이라며 전면에 나서는 것을 사양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평소 겸손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이선은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분노의 화신처럼 보였다.

“다들 부끄러운 줄 아십시오!”

평소 이선은 김성연 헌터를 좋아하지는 않아도 한국 헌터계에 세운 공과 입지를 인정하는 의미에서 어느 정도 존중하고는 있었다. 입장 차이가 있다는 것도 인정하고.

“던전 공략이 장난이에요? 정부 조사차 들어온 상황에서 마석을 빼돌릴 생각이 듭니까?”

그러나 지금은 소위 말하는 ‘눈깔이 뒤집힌’ 상태였다. 그리고 무엇 하나 틀린 말이 없었다.

동굴 안에 이선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대체 모두들 던전 공략을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이러다가 갑자기 몬스터가 튀어나오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요? 밖으로 나가면 반드시 책임을……!”

“어,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잠시만요.”

김하현이 끼어들었다.

이선이 열 받은 얼굴로 김하현을 돌아보았다.

“뭡니까?”

“류세연 헌터가 보이지 않는데요.”

이선의 얼굴이 대번에 심각해졌다. 그러고 보니 정말로 류세연이 보이지 않았다.

“어, 저기…….”

심지어, 류세연의 거취에 대한 대답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가는 상황을 대강 짐작한 이선이 헛웃음을 뱉었다.

“하, 어쩐지…….”

류세연이 아무리 날뛴다고 한들 선은 지킬 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1조에 섞어 놓은 것이었는데, 설마 아예 떨어트려 놓았을 줄이야!

뻔했다. 분명 김성연의 주동한 일이겠지.

‘대체 언제 이렇게까지 영향력을 넓힌 건지.’

김성연이 적극적으로 다른 길드를 포섭하려고 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게 성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설마 무소속 헌터들까지 이미 입김이 닿았을 줄은.

‘뻔뻔한 인간.’

이선은 김성연을 노려보다가 그 뒤의 헌터들에게도 시선을 옮겼다.

그야 바람을 넣은 사람이 있겠지. 하지만 결국 저들도 모두 동의해 저지른 일이었다.

“지금 본인들이 얼마나 중대한 일을 저지른 건지 압니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던전 내에서 사람을 고립시킨 거라고요.”

“아, 아닙니다. 류세연 헌터는 그냥 해안가에 남아 있겠다고…….”

“맞아요. 솔직히 류세연 헌터가 성격이 좀…….”

“이선 헌터, 잠시만.”

당황한 헌터들이 중언부언 변명을 늘어놓으려던 그때, 김성연 헌터가 나섰다.

갑자기 말이 끊긴 이선의 눈길이 더욱 사나워졌지만, 김성연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뒤에 서 있던 다른 헌터들이 조용히 곡괭이를 내려놓으며 이선의 눈치를 보았다.

김성연이 동굴 안을 가리켰다.

“하려는 말은 알겠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 저길 보게.”

“말 돌리려는 수작은 그만하시죠.”

“수작이라니, 아무리 그래도 말이 심하지 않나. 이 상황에 대한 해명과 책임은 내가 나중에 지도록 할 테니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지. 보는 눈이 많지 않나, 상황도 그렇고.”

그 말에 김성연 뒤에 서 있던 헌터들이 눈을 반짝이는 게 보였다.

백사현의 눈에도 그것은 퍽 징그러워 보였다.

그래, 켕기는 게 있는 상황에서 어떤 사람이 책임을 지겠다고 나서면 숨구멍이 트인 것처럼 느껴지긴 하겠지.

누구의 눈에나 뻔한 상황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더 물고 늘어질 수도 없었다.

이선은 이를 갈면서도 김성연이 가리킨 동굴 안쪽으로 주의를 돌렸다.

그리고, 발견했다.

“저건……!”

빛이 전혀 들지 않는 동굴 한편.

그곳에는 커다란 뱀이 벗은 듯한 허물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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