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122화
물론 일반 뱀의 크기는 아니었다. 굵기는 사람 하나만 했고, 길이는 족히 5미터는 되어 보였다.
김성연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래, 몬스터의 흔적을 발견했네. 이제껏 아무런 성과도 없었는데 참으로 다행인 일이지 뭔가.”
웃기고 자빠졌군,
이선은 목구멍 위로 튀어나오려던 말을 겨우 집어삼켰다.
마석을 빼돌리려다가 우연히 몬스터의 흔적을 발견한 주제에, 마치 공이라도 세운 것처럼 말하는 게 거슬리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무소속 헌터라면 모를까, 정부를 대표하는 입장에서 경솔하게 발언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 상황을 정부에 보고한다고 한들, 김성연에게 제대로 된 징계를 줄 수 있을까?
이선은 회의적이었다.
아무래도 여론은 정부보다는 목숨 바쳐 던전을 공략하는 헌터들에게 상냥한 편이고, 정부 입장에서도 던전 공략은 온전히 헌터에게 맡길 수밖에 없는 만큼, 최상위 랭커는 소중한 전력이었다.
그러니 김성연이 저지른 짓이 아예 위법이라면 모를까, 이 정도의 부정행위는 가벼운 문책으로 넘어갈 확률이 높다.
결국 이번에도 자신만 고구마를 처먹게 될 결말이 너무도 빤히 보였던 것이다.
망할 공무원, 어쩌다 김숙자 교수님께 코가 꿰여 가지고…… 그냥 그대로 한의학이나 공부하는 건데.
1학년 때 우연히 들은 교양 수업에서 김숙자 교수를 만난 후 여러모로 인생이 바뀌어 버렸다.
‘던전에서 나가면 카톡 상메나 바꿔야지.’
대충 오늘도 수양 중…… 같은 걸로.
이선은 한 번 크게 숨을 들이쉰 뒤,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몬스터를 쫓는 게 급하니 일단 넘어가지만, 그래도 이 상황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지게 만들 겁니다. 그리고, 김하현 헌터.”
“네, 네.”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김하현이 튀어나왔다.
“죄송하지만 해안가로 가서 류세연 헌터를 찾아봐 주세요. 그 후 최대한 빨리 합류 부탁드립니다.”
“……그래도 괜찮겠어?”
이제껏 이선의 지시에 불만을 가진 적이 없던 김하현이 처음으로 약간 불안한 반문을 했다.
김하현이 그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현재 랭킹 1위와 이우연이 불의의 사고로 떨어져 나간지라 여기에 있는 인원은 1조를 제외하면 이선, 김하현, 백사현, 양태원뿐이었다.
백사현은 무소속인 데다 보신주의자라 무슨 일이 생긴들 나설 타입이 아니고, 양태원은 갓 미성년을 벗어난 어린애다.
그러니 만일 불의의 사태가 생기면 이선 혼자 컨트롤해야 했다.
이런 상태에서 이선을 혼자 남겨 두는 게 옳을까?
김하현의 우려는 타당했다.
하지만 이선은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지. 그렇다고 류세연 혼자 방치해 둘 수는 없잖아.”
친구인 것을 떠나서 이번 공략대의 책임자로서도 당연한 결정이었다.
“그래, 알겠어. 그래도 조심해라.”
“응, 너도.”
김하현은 두말하지 않고 곧바로 동굴 밖으로 이탈했다. 이선은 완드를 쥔 채 김성연을 향해 몸을 돌렸다.
“앞장서시죠. 엄호하겠습니다.”
어쨌든 강예나와 이우연이 빠진 상태에서 전방을 맡을 최적의 인선은 김성연이었다.
김성연은 허리에 걸린 롱소드를 빼며 앞으로 나섰다.
“그러지. 잘 부탁하네.”
이미 마석을 빼돌리려던 꼴까지 봤는데 점잖은 체하기는.
이선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어쩔 수 없이 무리의 뒤에 섰다.
그렇게 전열을 갖추고 굴 안으로 진입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시점이었다.
“저기 있다!”
“몬스터야!”
김성연과 함께 전방에 선 헌터 몇이 몬스터를 발견했다. 이선은 뒤에서 머리를 내밀고 몬스터를 보려 애썼지만, 그 전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 선행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 선행 조건 : ‘해당 필드 내 몬스터’와 조우 혹은 처치
드디어 찾아낸 조건에 헌터들의 입에서 제각기 탄사가 흩어졌다.
“와, 선행 조건 떴다!”
“그럼 저 몬스터를 처치하면 되는 것 같은데요?”
“그런데 왜 조우 또는 처치지? 이미 만났는데.”
“그리고 몬스터도 한 마리밖에 없어.”
동굴 안에는 뱀처럼 생긴 형태의 몬스터가 바닥에 축 늘어져 있었다. 아마도 사람들을 피해 도망치려다 힘이 다한 듯했다.
이선은 무리를 헤치고 몬스터에게로 다가갔다.
아니, 다가가려고 했다.
“잠시만, 이선 헌터.”
김성연이 몬스터에게 다가가려 하는 이선을 제지했다.
“왜 그러시죠?”
“여기서 치사하게 따지고 들자는 건 아니지만…… 이 동굴은 내가 발견하지 않았나.”
그렇게 말하며 김성연이 허리에서 찬 검을 빼 들었다.
“그러니 내가 처치하는 게 맞지. 물러나게.”
“아, 그렇죠. 협회장님이 업적치를 가져가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하긴 다른 사람이 업적치를 가져가는 건 이상하겠네요.”
김성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른 헌터들도 거들고 나섰다.
이선은 머리가 아파 오는 걸 느꼈다.
‘진짜 이 인간들이…….’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나?
그야 원래 공략대의 인원이 많을수록 이렇게 업적치나 보상 때문에 눈치 싸움이 일어나는 건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이선도 이런 상황이 일어나리라고 당연히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공략에 적극적으로 임한 헌터들끼리 다투는 거지, 마석을 빼돌리려고 하다가 어부지리로 걸린 주제에……!
아무리 경솔하게 굴면 안 된다고 해도 이건 진짜 한마디 해야겠다.
이선이 막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잠시만요. 그 몬스터는 건드리지 않는 게 좋겠어요.”
양태원이 먼저 나섰다.
나이 때문에 그 목소리에 무게감은 없었지만, 묘하게 사람들의 귀에 파고드는 것 같은 느낌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동작을 멈추고 양태원을 바라보았다.
만일 강예나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양태원의 몸을 휘감고 있는 청룡이 고개를 들어 주위의 헌터들을 노려보는 것을 목격했을 것이다.
다만 그걸 보지 못하는 다른 이들은 그저 등골에 스치는 오싹한 감각을 느끼고 위압되어 한 발자국씩 물러났을 뿐이다.
“다들 물러나세요.”
그리고 사뿐사뿐 앞으로 걸어 나간 양태원이 김성연의 앞으로 걸어 나가 양팔을 벌리고 헌터들의 앞을 막아섰다.
이선조차 그 돌발 행동에 놀라 입을 벌렸다.
“태원아?”
“건드리면 안 돼요.”
아직 어린 티가 완연한 얼굴에는 진지함이 가득 차 있었다.
바닥에 축 늘어져 있는 뱀 형태의 몬스터는 흰 몸체를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직 새끼고, 심지어 방금 허물을 벗었잖아요.”
얼굴에서 어린 티가 났기 때문일까, 김성연에게 아부하던 한 헌터가 드디어 묘한 압박감에서 벗어나 자신감을 되찾고 코웃음을 쳤다.
“갑자기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설마 불쌍해서 살려 주자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맞아요.”
양태원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딱히 인간을 위협하고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연약하고 어린것을 건드리면 반드시 부정을 타기 마련입니다.”
부정을 타다니.
그 말을 들은 순간, 양태원과 던전 공략을 한 경험이 있어 그가 얼마나 용한 무당인지 알고 있는 이선과 백사현은 내적 비명을 질렀다.
‘아, 태원이가 저러면 이제 진짜 나 혼자는 감당 안 돼. 예나 씨랑 우연이는 언제 오는 거야?’
‘쟤가 저러면 꼭 무슨 일이 나도 단단히 나던데. 망했다. 지금이라도 토낄까?’
반면에 김성연은 이렇게 생각했다.
그는 다른 두 사람과 달리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만 삼키지도 않았다.
“말도 안 되는 미신이로군.”
김성연 또한 양태원이라는 헌터가 용한 무당이라는 정보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양태원이 나이 때문에 이제껏 한정된 몇 개의 던전에서만 활동했던 탓에 직접 만나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고, 아무래도 그 발언을 무턱대고 믿기에는 어려웠던 것이다.
“관련 스킬이 있는 건가?”
“그런 건 아니지만…….”
“그렇다면 그냥 감이라는 거군.”
무엇보다도 근거랄 게 없었다.
“겨우 그런 감이라는 말 때문에 몬스터를 방치해 둘 수는 없어.”
아무리 지금은 연약해 보인다고 한들 몬스터는 몬스터.
이제껏 많은 던전을 공략하면서 지능적인 몬스터도 숱하게 접해 보았다. 약한 척을 하다가 사람을 습격하는 몬스터는 셀 수 없이 많았다.
게다가, 여기서 누가 몬스터를 처치해서 최대 업적자가 되느냐에 따라 이후 이 던전의 소유권이 어디로 갈지 정해질 확률이 컸다.
적어도 김성연이 최대 업적자가 된다면 정부에서 독식하지는 못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괜히 우물쭈물하다가 이 공로를 정부 측 헌터에게 넘길 수는 없다.
김성연은 그렇게 판단했다.
“비키게.”
김성연은 더 들을 가치가 없다는 듯, 양태원의 어깨를 가볍게 밀쳤다. 가벼운 접촉이었음에도 힘의 차이 때문에 양태원은 퍽 크게 밀려나 동굴 벽에 몸을 부딪쳤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윽!”
“잠시만요. 아무리 그래도 어린애한테 이게 무슨 짓입니까!”
이선의 제지도 소용없었다. 김성연은 몬스터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가 검을 빼 들었다.
바닥에 꿈틀대던 몬스터가 살기를 느끼고 더 안쪽으로 도망가려는 듯했으나, 김성연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기다리라니까!”
이선이 제지하기 위해 완드를 들었으나 검사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결국 김성연이 휘두른 검이 먼저 허공을 갈랐다.
빛을 모두 빨아들이는 것 같은 어둠 속에서도 검은 정확하게, 힘없이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몬스터에게로 날아갔다.
“안 돼!”
양태원이 그렇게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몬스터의 목이 떨어지는 순간, 번뜩하고 무언가 붉은 시선이 동굴 안을 휩쓰는 듯했다.
키엑!
허무한 끝이었다.
아직 비늘조차 단단해지지 않은 몬스터는 짧은 단말마의 비명을 남겼을 뿐이다.
“이게 끝인가?”
김성연이 여유롭게 중얼거렸고, 이선은 허탈하게 들었던 완드를 내려놓았다.
“아, 망했다.”
양태원은 제 이마를 짚었다.
백사현이 불안하게 눈알을 굴리는 와중에 이선 또한 주위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 선행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 ‘해당 필드 내 몬스터’를 처치하였으므로 클리어 조건이 맞추어 변경됩니다.
- 해당 던전 클리어 조건 : ‘거만한 왕’의 처치
- 경고! 곧 S급 몬스터, ‘거만한 왕’이 출현합니다.
메시지를 본 김성연의 눈썹이 꿈틀거렸고, 이선 또한 동요했다.
“S급이라고?”
보스 몬스터가 나올 거라는 건 어느 정도 예상했기에 그리 놀랍지는 않았지만 생각보다 높은 등급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르자 주변 헌터들의 입에서 헛바람이 새어 나왔다.
“헉, S급…… 난 S급은 처음 보는데.”
“예상보다도 높긴 하네요. 그래 봤자 A급 몬스터일 줄 알았는데.”
김성연이 나서서 동요하는 사람들을 다독였다.
“다들 걱정할 것 없네.”
김성연 또한 이제껏 한국 각지의 던전을 공략해 온 순위권의 헌터였다. 물론 S급 몬스터를 공략해 본 경험도 있었다. 그래서 자신감도 충분했다.
“S급 몬스터라고 해도 얼마나 강한지는 봐야 아는 거고, 이번 공략대는 유례없이 강한 헌터들이 많지 않은가. 함께 공략하면 해낼 수 있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같은 등급이라고 해도 몬스터의 특성과 헌터의 클래스 궁합도 있고, 이번 공략대에는 최상위권 헌터들이 끼어 있는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김성연의 말에 긴장한 사람들의 낯빛에 안도가 스쳐 지나갔다. 김성연은 자신의 말 한마디에 안도하는 사람들을 보며 흡족함을 느꼈다.
‘그래, 이게 진정 사람을 이끈다는 거라고.’
물론 형식적으로는 이선이 이 공략대의 책임자지만, 이럴 때는 자신이 나서서 헌터들을 안심시켜 줘야 했다.
김성연 본인이야말로 한국 헌터계의 왕이나 다름없는 존재니까.
김성연이 자신의 영향력을 확인하고 있는 한편, 이선은 양태원을 붙잡고 어디 다친 데는 없는지 등을 살펴보고 있었다.
양태원은 부딪힌 어깨를 연신 문지르면서도 허세를 부렸다.
“아, 괜찮다니까요. 저도 헌터거든요?”
“체근민 수치가 높은 것도 아니잖아. 하여튼 다치지 않았으면 됐어. 그건 그렇고…….”
이선은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네가 말한 ‘부정 탄다’는 게…… S급 몬스터 출현 건이었을까?”
“글쎄요…….”
양태원도 그건 확신할 수 없었다.
바닥에는 이제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뱀이 죽은 채 아직 몸을 꿈틀대고 있었다.
양태원은 천천히 몬스터에게로 다가가 간단하게 명복을 빌어 주었다.
청룡은 저것을 건드리지 말라고 말해 주기는 했으나, 건드리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말해 주지 않았다. 자신이 모시는 신이 말해 주는 것은 한정적이었고, 그래서 타인의 믿음까지 사기는 참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양태원 또한, 공략 목적으로 들어온 던전에서 자신의 말 한마디를 믿고 몬스터를 공격하는 걸 그만둘 거라는 안이한 생각을 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예나 누나나, 하다못해 이우연이라도 있었으면 들어는 줬을 텐데.’
그랬더라면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다지만 아무래도 아쉬웠다.
설마 이렇게 떨어져서 행동하게 될 줄이야. 이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이겠지만…… 양태원은 한숨을 쉬었다. 청룡이 그런 양태원을 위로하듯 제 꼬리로 그를 감쌌다.
그리고 양태원의 몸에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한 이선은, 그제야 한숨을 쉬며 다른 헌터들을 돌아보았다.
“일단 보스 몬스터가 어느 필드에서 출현할지 모르니 자리를 옮기죠. 동굴 안은 위험합니다.”
만일 여기가 무너지기라도 한다면 그대로 파묻히게 된다.
이선의 지시에 다들 빠르게 동굴에서 벗어날 준비를 하던 그때.
쿠르릉!
필드 전체에서 거대한 지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