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124화
“말도 안 돼.”
‘거만의 왕’, 레비아탄이 나타남과 동시에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한 남자가 망연히 중얼거렸다.
백사현 또한 크게 다른 심정은 아니었다.
물론 백사현도 이제껏 꽤 많은 던전 공략에 참여해 왔다. 하지만 클래스의 특성상 아주 힘든 상위 던전 공략은 거절해 왔기에 S급 보스 몬스터를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런 괴물을 상대하라고?’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출현한 보스 몬스터의 위압감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하늘과 구분이 가지 않을 만치 투명했던 바다는 이제 폭풍우라도 몰아치는 것처럼 거대하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용돌이의 중심에,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대적하지 못할 것 같은 괴물이 우뚝 자리해 있었다.
백사현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아주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괴물의 모습도 끔찍했지만 무엇보다도, 크기가 너무도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저렇게 커다란 생물이 있다는 게 도저히 현실적으로 믿기지 않을 정도로.
뱀의 머리통도 족히 몇 미터는 되어 보이는데 꼬리까지 이어지는 몸통은 수평선을 다 뒤덮는 건 아닐지 의심이 될 정도로 길었다.
그야말로 물리적으로 압도적인 차이가 났다.
아직 수평선 너머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 정도다. 게다가 바다뱀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가까이 접근해 오고 있었다. 몸 주위로 크나큰 파도가 치는 모습은 공포에 가까웠다.
백사현은 이를 꽉 깨물었다.
‘이게 S급이라고?’
저걸 대체…… 어떻게 공략해야 한다는 거지? 차라리 아연해질 지경이었다.
백사현은 자신의 상태창을 점검해 보았다.
플레이어명 : 백사현
LV. 26
특성 : 모방하는 자
클래스 : 배우
체력 : 390
근력 : 525
민첩 : 580
마력 : 280
스킬 : 메소드 연기 lv. 10, 배역 연구 lv.8, 신 스틸러 lv.4, 집중암기 lv.9, 애드립 lv.6, 검술 lv. 5…… (이하 목록은 상세 조회)
현재 백사현이 배역으로 지정한 클래스 중 쓸 만한 것은 검사와 암살자 정도였다.
하지만 그 클래스들이 저런 거대한 자연 재해 앞에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아무리 보아도 이길 만한 요소가 보이질 않았다.
백사현은 등 뒤에 멘 바스타드 소드를 떨리는 손으로 더듬어보았다. 인간의 체구에 비하자면 묵직하고 거대한 검이었으나 저 바다뱀의 머리는커녕 비늘 하나보다도 훨씬 작아 보였다.
어쩔 수 없는 물리적 차이에서 오는 절망감은 백사현만이 맛보는 게 아니었다. 다른 헌터들 사이에서도 절망적인 신음이 새어 나왔다.
“저걸 어떻게 해…….”
“저게 S급이라니, 애초에 상대도 안 될 것 같은데…….”
“겨우 스물 몇 명으로 이걸 어떻게 공략해? 말도 안 돼.”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자연재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체념과 절망이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두가 일종의 무력감에 짓눌려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을 때.
“다들 정신 차려!”
다분히 짜증이 섞인 고함이 동굴 안을 울렸다.
물론, 이선이었다.
“이대로 멍하니 있다가 다 죽을 셈입니까? 보스 몹이 더 가까이 오기 전에 다들 이 동굴에서 나가 절벽을 올라가야 합니다.”
저렇게 커다란 몬스터가 접근하고 있으니 해일 수준의 파도가 이쪽을 덮칠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최대한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게 낫다.
“하, 하지만 지금 밖에 큰 돌덩이들이 우박처럼 쏟아지고 있어서 올라갈 수가……!”
안타깝게도 그 말대로였다.
어지간한 성인보다 더 큰 크기의 돌덩이들이 쏟아지고 있는지라, 아무리 신체 강화를 한 헌터라고 해도 저기에 맞으면 최소 뇌진탕은 입을 것이다.
더군다나 절벽을 올라가다가 돌덩이에 맞기라도 한다면 대참사가 일어날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 수는 없다.
김성연이 먼저 나섰다.
“이선 헌터 말대로야. 죽을 때 죽더라도 몬스터와 싸우다 죽어야지, 여기서 죽을 수는 없지. 내가 먼저 올라가겠네.”
그렇게 말하며 김성연은 동굴 입구 위로 늘어트려져 있는 로프를 잡았다. 이선과 김하현 등이 여기로 내려올 때 쓴 줄이었다.
양태원이 옆에서 ‘어쩐지 꼭 줄을 타고 내려가라고 하시더니…….’ 하고 중얼거렸다. 그 옆에서 이선도 가슴을 쓸어내리며 새삼스럽게 용한 무당이 최고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올라가는 도중에 이 로프가 끊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건데…….”
“강화 마법이 걸린 로프이니 한동안은 괜찮을 겁니다. 로프가 걸린 말뚝도 2조의 헌터들과 연락해서 보호하도록 했고.”
물론 그렇게 말은 했지만 2조의 헌터들이 있는 곳도 안전하지는 않은 만큼 최대한 빨리 합류해야 했다. 강화 마법도, 2조의 헌터들이 말뚝을 지키는 것도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니.
“그럼 내 뒤에 바짝 따라붙도록.”
김성연이 그렇게 말하며 훌쩍 뛰어올라 로프를 잡았다. 한국에서도 손꼽히게 강한 검사인 만큼 그는 놀라운 근력으로 절벽을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도 간다!”
“차라리 먼저 가는 게 낫겠어!”
한번 스타트를 끊자 다들 줄줄이 로프를 잡고 절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사실 처음 결심하고 발을 딛는 게 어려울 뿐이지, 보스 몬스터가 시시각각 빠르게 접근해 오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다들 절벽을 올라가는 속도는 빨랐다.
때때로 생존을 위협하는 거대한 돌덩이들이 떨어졌으나 그때마다 이선이 약한 실드를 펼쳐 방향을 살짝 틀었다.
“나, 나도 갑니다.”
백사현까지 로프를 잡고 절벽을 올라가기 시작해서, 이제 동굴 안에 남은 것은 이선과 양태원뿐이었다.
이제 보스 몬스터인 ‘거만의 왕’은 상당히 가깝게 접근해 있었다. 절벽 밑으로 치는 파도의 수위가 점점 높아진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양태원이 씩 웃으며 코를 훔쳤다.
“제가 먼저 올라갈까요?”
“까불지 말고 업히렴.”
양태원의 근력으로 이 절벽을 빠르게 올라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걸 아는 이선이 냉정하게 받아쳤다.
양태원은 우는 소리를 냈다.
“아니, 이렇게 짐짝 취급할 거면 조사대에 편성하지나 말든가요……!”
“그래, 다음부터는 절대로 넣지 말자고 건의할게!”
“그건 더 싫어요! 기회는 공평하게 주세요!”
혹시 양태원만 상대할 수 있는 종류의 몬스터가 나오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파티원에 넣기는 했지만, 사실 아직 나이가 어려 헌터 훈련을 제대로 받은 게 아닌지라 이런 경우에는 최우선 보호 대상이었다.
‘나름대로 좋은 경험이 될 거란 생각도 했고.’
또 말은 얄밉게 하고 성격은 거지같아도 결국 눈앞에서 사람 죽는 꼴은 못 보는 이우연이나, 무엇보다도 강예나가 있었으니 위험해질 일은 없다는 계산이었다.
그야 지금은 계획이 틀어져서 이우연도, 강예나도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너 하나 정도는 내가 책임질 수 있어!”
“뭐야, 멋있어! 반할 거 같아요!”
“헛소리하지 말고 빨리 업혀!”
양태원은 끝까지 내키지 않아 했지만 결국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이선의 등 뒤에 업혔다.
이선은 양태원을 업은 채 마지막으로 로프를 잡았다.
“꽉 잡아!”
클래스는 마법사이기는 했지만 던전을 공략하기 시작한 지 5년. 체근민 수치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꼈기에 이선은 단 한 번도 근력 운동과 유산소 운동을 게을리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마법사 클래스인데도 ‘근력 강화’ 스킬이 생겼을 정도였다.
로프를 잡고 절벽을 올라가는 팔에 힘줄이 돋았다.
콰쾅!
하지만 상황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어느새 제법 가깝게 접근한 바다뱀이 괴성을 지르고, 하늘에서는 우박처럼 커다란 돌들이 떨어졌으며, 천둥 번개가 치는 소리에 귀가 멀 지경이었다.
“윽!”
밟고 선 돌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 나갔다. 주르륵, 로프를 잡고서 밑으로 미끄러졌다.
이선은 이를 악물었다.
그냥 부유 마법을 사용할까?
아니, 아니다. 그랬다간 지금 머리를 보호하고 있는 실드 마법을 유지하지 못하게 된다. 게다가 마력 소모도 문제고. 체력을 사용해서 견딜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렇게 하는 게 옳다.
“에라이, 망할 시스템아!”
이렇게나 제약이 많다니!
이선은 한탄했다.
이왕 마법을 사용하게 해 주는 거 진짜 소설 속 드래곤이 사용하는 것처럼 말 한마디로 천지개벽할 일을 만들어 주면 어디 덧나냐는 말이다!
그때였다.
“로프를 꽉 잡게!”
휙, 몸이 허공으로 붕 떴다.
위를 올려다보자 어두운 하늘 아래로 이선이 쥔 로프를 잡고 끌어올리는 인영이 보였다.
번개가 쳐서 얼굴의 윤곽이 비쳤다.
“한번에 끌어올려!”
김성연이 외쳤다.
위에서 다른 헌터들이 로프를 쥐고 있는 건지 호응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위에서 로프를 잡아당기기 시작하자 이제껏 절벽에서 고전했던 것이 우스울 만큼 성큼성큼 절벽 위가 가까워졌다.
“오, 역시 개똥도 쓸데가 있다더니.”
등 뒤에 업힌 양태원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선은 차마 말하지는 못했지만 심정적으로 매우 공감했다.
그래, 뭐…… 엄청나게 꼰대에다, 제 공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자에, 성격도 성급하기 짝이 없고, 개인적으로 영 상종하고 싶지 않은 작자이긴 하지만, 아주 개자식인 건 아니다.
그 정도로 악인이었다면 이렇게 한국 헌터계에서 자리를 잡을 수도 없었을 테고.
“영차!”
“빨리해! 보스 몹이 거의 다 접근했다고!”
김성연 덕분에 이선과 양태원이 매달린 로프가 쑥쑥 올라가기 시작하기는 했지만, 문제는 ‘거만의 왕’이 정말로 지척까지 접근했다는 것이다.
본래 절벽 중간에 닿을까 말까 하던 파도의 높이는 이제 이선의 발치에 가끔 닿을 정도로 높아져 있었다.
이선에게 몸을 의지하고 있는 양태원은 불안한 눈으로 등 뒤를 살폈다. 남들의 눈에 보이지 않을 청룡은 양태원에게서 조금도 떨어지지 않은 채 마치 담요처럼 몸을 휘휘 감고 있었다.
그만큼 지금 상황이 위험하다는 건가?
‘으음,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양태원은 고개를 기울였다.
물론 그도 눈이 있으니 현재 상황이 상당히 심각하다는 것은 알았다. 바다는 요동치고, 땅은 흔들리고, 하늘은 굉음을 울리고 있었으며, 초자연적인 괴물이 나타났다. 어딜 보나 세계가 멸망할 것 같은 상태였다.
다만 양태원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청룡 님, 청룡 님. 저를 절벽 위까지 태워 주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그건 바로, 지금 자신의 몸을 꽁꽁 휘감은 청룡이 실체화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청룡은 본디 영적인 존재로 평소 실체를 지니지 않지만, 그를 모시는 양태원의 목숨이 경각에 다다랐다고 판단하게 되면 실체를 지니고 그를 지키려 할 것이다.
양태원이 직접 겪어 본 것은 아니지만 어머니인 정소현이 이야기해 준 것이기에 확실했다.
하지만 지금 청룡은 실체화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는 양태원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몸 주위를 감싼 채 빙빙 돌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죽을 정도로 심각한 일은 아니라는 건데…….
“그런데 또 이런 상황이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는 것도 이상하고.”
누가 봐도 완전 위험하지 않나? 이런 상황을 완전히 반전시킬 수 있는 요소가 존재하긴 하나?
양태원의 중얼거림을 들은 이선이 물었다.
“응? 뭐라고 했어?”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누나, 혹시…….”
그때였다.
절벽 위에서 비명이 들렸다.
“피해!”
“위험해요!”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무언가를 경고하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은 이미 늦었다는 뜻이다.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양태원은 이선의 목을 단단히 감고 있던 자신의 팔이 충격 때문에 풀리는 것을 마치 남의 일처럼 지켜보았다.
투콰과광!
폭음이 울리는 동시에 몸에 굉장한 충격이 가해졌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어, 어……!”
그리고 양태원은 허공에 뜬 다음에야 그것이 레비아탄의 꼬리라는 것을 알았다.
바다뱀의 꼬리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이선과 양태원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간 것이다!
그 별것 아닌 한 번의 부딪힘에 강화 마법이 걸렸다는 로프는 고사하고, 절벽조차 마치 찰흙처럼 부서졌다.
그건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동시에 오랫동안 지속되는 아주 느린 영화 같기도 했다. 자신이라는 인물이 마치 등장인물처럼 괴리되어 보였다. 그 상황이 하나하나 촘촘하게 보였다.
눈을 한 번 깜박 감았다 뜨는 사이.
완드를 꺼내 들며 양태원에게로 손을 뻗는 이선의 얼굴이 보였고.
다시 한번 깜박.
이선의 손이 자신을 잡지 못한 채 떨어지는 것을 보았고.
다시 한번 깜박.
뻗은 자신의 손이 그 무엇도 잡지 못한 채 허공을 휘저었다.
이선의 절망하는 얼굴이 시야에 스쳤다. 그런 이선의 등 뒤로도 거대한 절벽이 부서져 떨어지고 있었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그저 자연재해 같은 광경.
그리고 머릿속에 단 한마디가 스쳤다.
아, 이렇게 죽나 보다.
그리고, 양태원은 보았다.
콰과과광!
절벽이 폭발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외부의 충격 때문에 벌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건 내부에서부터 폭발한 것이었다.
무언가가 절벽 안으로부터 분화하듯, 물리적 법칙을 모두 거스르고 하늘로 튕겨져 나왔다.
‘아…….’
그건 사람이었다.
그 모습을 본 양태원은 상황도 잊고 웃었다.
손에 들려 있는 것은 푸른 바다보다 빛나는 검이었고, 등 뒤에는 흰 망토가 펄럭이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용사 같은 모습.
‘예나 누나다.’
다리에는 강풍 같은 바람이 맴돌아 중력을 이기고 위로 솟구치고 있었다. 추락하고 있는 양태원과는 정반대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닿지 않아.’
아무리 강예나가 용사더라도 결국에는 인간이다.
인간의 몸은 자연 앞에서 한없이 작게만 보였고, 바다에 출현한 모든 거만한 것들의 왕은 악몽처럼 거대했다. 강예나가 든 검도, 발도 도저히 그 재앙에게는 닿을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이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양태원은 손을 뻗었다.
이 손도, 갑자기 튀어나온 강예나의 검도…… 결국에는 어디에도 닿지 않고 그저 스러져 사라질 것만 같았다.
……아니, 아니다.
눈앞에 보이는 광경을 도저히 믿을 수 없어 양태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음 순간, 눈이 멀 것처럼 화려한 빛이 폭발했다.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에 바다의 물결이 넘실거려 도저히 눈을 뜨고 있을 수 없을 정도였다.
강예나의 손에 들린 검신이 바다에 닿을 만큼 길어진 것이다.
“흐아아압!”
그리고, 인간의 검이 휘둘러졌다.
이윽고 그 검이, 저 거만한 왕의 머리에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