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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133화 (134/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133화

Chapter 12. 세상에 우연은 없다.

세상에 우연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나?

물론 있기야 있겠지.

횡단보도를 건너기 전에 빨간불이 되어 버린다든가, 먹고 싶은 붕어빵을 파는 곳이 마침 눈앞에 나타났는데 지갑에 현금이 없었다거나, 겨우 현금을 빌려서 샀는데 하필 꼬리 부분이 물렁하고 속에 밀가루는 엉켜 있었다든가.

그러니까 그런 불운함이라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이우연도 말고.

망할.

“진작에 깨달았어야 하는데.”

나는 딸기 라떼를 한번에 들이마시며 분을 삭였다. 하지만 순식간에 올라가는 혈당으로도 분노를 잠재우기에는 부족했다.

조한율.

한국에 돌아온 후 참 많이 들었던 이름이다.

포션 대량 생산에 성공해서 한국의 포션 시세를 안정화시켰을 뿐 아니라, 그 외 던전 부산물들을 이용해 만든 아이템을 판매하는 ‘선율 공방’의 주인이기도 했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바로는 마법사이되 이우연이나 김숙자, 이선처럼 전투 특화형이 아니라 힐링 계열 전문으로, 그중에서도 포션과 아이템 제작에 특화된 마법사라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강남 헌터 스토어에 처음 간 날 우연히 스쳐 지나간 적이 있는 인물이다.

그래, 우연히.

‘따져 보자면 그날, 이상했지.’

랭커와 우연히 마주친다, 라.

한 번이라면…… 그래, 그럴 수 있다. 하물며 장소가 강남 헌터 스토어 본점이었다. 수많은 헌터들이 거쳐 가는 곳이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내가 그날 만난 건 조한율뿐만이 아니었다.

‘이선도 만났었어.’

물론 당시에는 임미솔이라는 신입 헌터로 알고 있기는 했지만, 하여간에 나는 그날 랭커를 두 명이나 만났었다.

한 번은 그렇다 치자. 그런데 두 번이라고? 아무리 현실이 소설보다 장난 같다고는 해도 우연이라고 하기엔 과하지.

만일 이런 상황이 타르토스에서 일어났다면 루카스가 진작 의도한 접근이라며 잔소리를 해 댔을 것이다. 사람 좋은 아리아드네조차 이상하다며 고개를 갸웃거렸을 테고.

반대로 그 애들이 그런 상황을 겪었다면 당장 나부터 무슨 순진한 소리를 하냐며 짜증을 냈을 테고.

그런데 나는 별생각 없이 그 상황을 넘겼단 말이지.

물론 내게도 변명할 거리 정도는 있었다.

당시의 나는 그저 랭킹 1위에 불운하게 선정되었을 뿐인 허접 깡통이었다. 설마 누군가 호의적으로 접근하는 것까지 의심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사실 그건 지금도 의심스럽다.

조한율이 그날 나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거라면 대체 그 의도가 뭔지. 그날 그쪽이 한 일이라고는 접히는 핸드폰을 자랑하고, 내게 핸드폰 번호를 준 것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그게 의도적인 접근이 아닐 수는 없다.

- 시스템이 ‘특별 관리 대상’에게 조언을 제공합니다.

- TIP : 플레이어, ‘조한율’과 대화

저 시스템 메시지를 본 순간 확신했다. 그 만남은 분명 시스템의 장난질이었다고.

애초에 저 조언이라는 것도 웃겼다. 심지어 시스템 주제에 특정한 ‘플레이어’의 이름을 대는 것은 더더욱 이상한 일이었다.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가설을 뽑았지만, 그 어느 것 하나 말이 되는 게 없고 말이 되지 않는 것도 없었다. 근거가 아무것도 없는 탓이다.

‘……어쨌든, 조한율은 적으로 규정하는 게 좋겠지.’

물론 조한율 본인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시스템이 무언가의 목적을 위해 나와 조한율이 만나도록 장난질을 한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그렇게 속 편하게 생각하기엔, 이제껏 느꼈던 여러 위화감이 말라붙은 강가의 조약돌처럼 선명하게 드러났다.

일단 첫 번째.

현 대한민국보다 실력이 뛰어난 플레이어가 많았던 타르토스에서조차 포션의 대량 생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건 능력이 되는데도 하지 않은 게 아니라, 정말로 제법 노력했는데도 실패한 것이다.

대륙에서 가장 강한 성직자였던 아리아드네가 주도한 여러 실험이 실패했던 건 내가 제일 잘 안다. 마법사들이 모여 있던 마탑 쪽도 비슷한 실험을 했지만,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성공에 이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시스템이 생긴 지 고작 5년밖에 되지 않은 이 대한민국에서 포션 대량 생산에 성공했다.

‘그에 비해 한국 헌터들 수준은 좀 뒤떨어졌어.’

뛰어난 헌터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아무리 5년 차라고는 해도 전체적인 수준이 아직은 부족했다.

이우연이 말한 대로 여러 요소의 영향이 있겠지만, 어쨌거나 포션 생산이 뚜렷한 약진을 보이는 것과 비교하자면 머리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게 조한율이라고 하는 특별하게 뛰어난 인물이 주도해, 짧은 시간 안에 만들어 낸 믿을 수 없는 성과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시스템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하겠지.

그리고 두 번째로 든 위화감.

‘묘하게 호감이 갔었단 것도 걸려.’

되짚어 보니 그랬다.

나는 조한율에게서 상당히 좋은 인상을 받았다. 친절하게 핸드폰을 보여 주고, 내가 호구 같은 계약을 맺었다는 걸 알고 나서는 참견도 해 주고.

그렇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것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말하기는 뭐하지만 나는 제법 경계심이 강한 편이다. 20대 전반을 온갖 종류의 사람들에게 데이면서 살았기에 더더욱.

그런데 그런 내가 별다른 이유도 없이, 랭킹 5위라는 걸 알았는데도 좋은 인상이 남았다는 건 이상했다.

그리고 설령 좋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들, 조한율이라는 이름을 본 순간 그 위화감을 알아차리고 경계심을 가졌어야 정상이다.

이우연에게 그러했듯이.

그렇지만 나는 경계하지 않았고, 이상하게도 오히려 근거를 알기 힘든 호감이 남았다.

내가 이 위화감을 알아차리기 전까지도 계속.

여기서 추론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이 하나 더 있다.

‘정신계 마법에 당했을 수도 있겠지.’

힐링 계열 마법에 특화되어 있는 마법사라고 해도 정신계 마법 하나둘쯤 터득하는 이들이 많다는 걸 생각해 보면 더욱더 그렇다.

직접적인 공격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마법사들이라면 자기 보신을 위해서라도 일부러 배우기 마련이기도 하고.

당시의 나는 앙겔루스의 가호를 제대로 활용할 수조차 없었던 능력치였다. 그사이 정신계 마법에 걸렸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물론 거창한 정신계 마법이라면 아무리 그래도 마력의 흐름으로 낌새는 알아차렸을 테고, 저주에 걸렸다면 능력치가 올라간 순간 에이펙스의 광검으로 파훼 메시지가 떴을 것이다.

하지만 정신계 마법 중에는 그저 시전하는 것만으로 상대방의 호감도를 약간 높이는 정도…… 의 미약한 마법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당시의 내가 거기 걸리지 않았을 확률?

‘망할.’

하나하나 따지다 보니 절로 이가 갈렸다.

조한율이라는 인물에게는 물론이고, 무엇보다도 시스템 때문에 성질이 났다.

그야 내 목표를 위해서라면 그깟 미공략 던전을 공략하거나 S급 몬스터 따위를 잡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시스템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장기짝이 된 기분은 무척이나 불쾌했다.

‘마음에 안 들어.’

이래서야 우연한 만남 하나하나까지도 혹시 시스템의 의지로 이루어진 건 아닐지 검열하게 될 판이지 않은가. 그렇게 남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판은 아무리 도움이 된다고 한들 걷어차고야 말 테다.

그야 시스템 팁이랍시고 뜬 데다 이번 퀘스트 보상으로 받은 ‘운명의 씨앗’을 진행하려면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하겠지만…… 심기가 영 불편했다.

조한율을 불러내는 것 자체는 놀라울 정도로 쉬웠다.

그때 조한율이 내게 남겨 준 핸드폰 번호로 문자를 남기니 금세 답장이 온 것이다.

사실 답장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때 만난 조한율이라는 사람과 시스템이 지정하는 조한율이 동명이인일 가능성도 생각했는데, 그 가능성은 허무하게 사라져 버렸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강예나 씨. :)

무슨 스토커도 아니고, 솔직히 본 순간 소름이 돋더라.

나름대로 호감이 남아 있던 인상이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다.

만나는 장소는 조한율 쪽에서 지정했다. 지정한 곳은 내 경계심을 피하려는 의도에서인지, 강남 대로변에 있는 한 작은 카페였다.

만나는 날짜는 평일 오후 1시.

통유리로 되어 있어 바깥 풍경이 시원하게 비치는 카페 안에서는 막 점심시간이 끝난 직장인들이 바쁘게 걸어 다니거나, 도로를 지나다니는 자동차들이 훤히 보였다.

평화롭기 짝이 없는 풍경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풍경을 보는 대신 주위를 살폈다.

내가 여기에 도착한 것은 적당히 1시간 전의 일이었다.

강남 직장인들이 대개 싼 맛에 테이크아웃으로 이용하는 카페이니만큼 카페 내 좌석도 적고, 나처럼 1시간씩 앉아 있는 사람들은 드물었다.

또 음료를 만드는 알바생에게서도 딱히 마력의 흐름이나 몸을 단련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고, 몰래 에이펙스의 광검으로 건물 주변을 탐색해 보았지만 심어진 아이템이나 저주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면 깨끗하다, 고 볼 수 있기는 한데…… 뭐, 솔직히 조한율이 정말로 시스템의 도움을 받는 인간이라면 내 이런 경계가 무슨 쓸모일까 싶기도 했다.

그래도 무방비한 상태로 뒤통수를 얻어맞고 싶지는 않다. 적어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다 해둬야지.

주변을 경계하는 것도 늦추지 않았다.

카페 내의 사람들은 계속 바뀌고 있었다. 바쁘게 커피를 테이크아웃해서 나가거나, 아직 점심시간이 조금 남았다며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도 있었다.

여차하면 휘말리게 할지도 모르니까 되도록 조심하기는 해야겠지.

알바생의 손이 바쁘게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대학생인가? 머리를 화려하게 염색한 여자가 에스프레소 기계로 커피를 내리고, 휘핑을 치고, 계산까지 하느라 아주 바쁘게 움직였다.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랄 것 같았다.

나는 시계를 보았다.

이제 시간은 2시 3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약속 시간 10분 전에 도착하는 타입은 아닌 모양이군.

몬스터를 앞에 둔 것과 비슷하게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자, 언제, 어디로 올 거냐.’

평범하게 열려 있는 문으로 들어오려나?

그럴 수도 있겠지만, 조한율은 전투 클래스의 플레이어가 아닌 만큼 직접 나에게 접근하는 대신 근처로 다시 나오라고 불러낼 가능성이 더 컸다.

적어도 나라면 그렇게 했을 테니까.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연락은 따로 오지 않았다.

그리고, 2시가 지났다.

2시 10분 즈음이 되었을 때 나는 핸드폰을 한 번 더 켰다.

늦는다는 식의 기특한 연락은 기대하지도 않았다만 역시나 아무런 메시지도 도착해 있지 않았다.

이쪽에서 먼저 연락해야 하나.

하지만 그것도 어쩐지 꺼림칙해서 나는 카페의 출입구를 한 번 더 노려보았다. 혹시 도로 건너편에서 이쪽으로 오는 누군가가 없을까, 해서.

그러나 모두가 별 흥미 없이 카페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2시 15분.

그때 슬슬,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바람을 맞은 건 아닐까?

주문했던 딸기 라떼는 이미 바닥을 보인 지 오래였다. 그동안 내 근처 테이블에 앉았던 사람들은 제각기 일정이 바쁜지 자리에서 일어난지라, 어느새 가게 안은 텅 비었다.

한참 이어진 점심시간 주문 러쉬로 바쁘게 움직였던 알바생이 한숨 돌리는 것이 보였다.

나, 진짜 바람이라도 맞은 건가?

‘장소는 여기가 맞는데.’

나는 한 번 더 카페 안과, 알바생과, 거리를 둘러보았다.

역시 조한율은 보이지 않았…….

“……아니, 잠깐만.”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 그러니까 거리에서 조한율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었다.

분명 스쳐 지나갔었다. 대화도 나누고, 번호도 받았다.

그런데 왜 조한율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거지?

‘이런 미친…….’

정말이었다.

나는 땡겨 오는 뒷골을 짚었다.

조한율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나마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여러 색깔로 염색한 짧은 단발머리와, 맑은 눈망울…… 어렴풋하게 서른 대여섯이라 생각했던 기억도 나고.

그런데 이목구비가 정확히 어떻게 생겼더라?

‘잠깐만. 이거 혹시…….’

당황한 것도 잠시, 나는 곧 이 기가 막힌 상황에 대한 해답을 찾아냈다.

어려운 답도 아니었다.

나도 그 비슷한 아이템이 있지 않은가.

‘은의 장막…… 비슷한 아이템을 가지고 있는 건가.’

내가 착용하곤 하는 ‘은의 장막’ 또한 분명히 그런 용도다. 상대방의 인지를 흐리게 하고, 심지어 방심하고 있다면 흐려졌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게 하는.

그럼 조한율이 그날 나와 만났을 때…… 이미 내 인지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아이템을 착용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나가자.

나는 곧바로 결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정도로 작정하고 나와 만났던 인물이라면 나도 좀 더 준비된 상태에서 맞이하고 싶었다. 게다가 이미 약속 시간은 지났다. 더 기다려 줄 이유도 없다.

하지만, 그때였다.

겨우 한숨을 돌린 알바생이 출입구로 다가가더니 문 아래의 잠금쇠를 철컥, 잠그는 게 보였다.

그리고 돌아섰다.

알바생이 젖은 손을 제 앞치마에 대충 털어 닦더니 앞치마를 벗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 채로 그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초면인 여자였다.

무지개 빛깔로 염색한 긴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 높이 올려 묶고, 고양이처럼 올라간 눈망울에 바짝 올린 속눈썹이 화려한. 전체적으로 예쁘장한 인상이었다.

그 여자가, 씩 웃었다.

- 앙겔루스의 가호가 정신계 마법 방어에 성공하였습니다.

“생각보다 손님이 많아서 좀 오래 걸렸네요. 자, 이제 여긴 브레이크 타임인 걸로 해 두고.”

이런 X발…….

내가 욕을 하든 말든 알바생, 아니, 조한율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딜 보나 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어린 얼굴의 여자가 산뜻하게 웃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특별 관리 대상’ 씨. 오랜만에 뵙네요. 당신을 아주 오래 기다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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