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137화
조한율을 만나고 온 후, 내게는 대략 일주일의 말미가 주어졌다.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나더라도 주위에 피해가 없을 만한 던전을 골라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내가 비어 버린 이 일주일간 무엇을 하려고 했느냐, 하면…… 본래는 A급 던전이나 몇 군데 돌며 컨디션 점검이나 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계획은 최민혁한테 가로막히고 말았다.
“이번 달 할당량을 훨씬 넘기셨는데…… 당분간 휴식을 취하는 게 낫지 않습니까?”
여느 때처럼 던전 입장 허가를 받으려고 전화했더니 이런 반응이 돌아왔던 것이다.
“나는 상관없는…….”
“실은, 현재 강예나 헌터를 궁금해하는 기자들이 워낙에 던전마다 진을 치고 있어서요.”
그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얼마 전 너튜브에 올라간 동영상 때문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는 건 알고 있었다. 조회 수가 금세 천만을 넘겼다던가. 하지만 설마 기자들이 내 정체를 캐겠답시고 진을 치고 있을 정도인지는 몰랐다.
최민혁의 설명이 이어졌다.
“물론 우리도 신상 보호에 주력하고 있습니다만, 워낙 그 동영상 인기가 좋고, 사람들 관심이 많다 보니 한계가…… 여전히 신상 보호를 원하신다면 당분간은 던전에 입장하는 건 자제하시는 편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침묵했다.
아무리 내가 정부에게 신상 보호 요구를 했다고 한들, 이번만큼은 정부 탓을 할 수만은 없었다.
‘이놈의 성질머리.’
어지간히 눈에 띄었어야 말이지.
게다가 내가 바다뱀의 머리를 검으로 후려치는 영상이 굉장한 인기인 것도 문제였다. 공개된 지 벌써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해당 화제는 식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더 흥미진진한 화제가 되어 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냥 머리나 식힐 겸 동영상 사이트에 들어갔다가 [검사의 불모지 대한민국의 자랑?! 제가 모두 분석했습니다], [‘방랑하는 구도자’는 검신인가? 전직 국대의 분석], [‘방랑하는 구도자’가 정체를 숨기는 이유 심층 분석] 따위의 제목을 봐야 했던 내 심정을 누가 좀 헤아려 줬으면 좋겠다.
물론 랭킹이 공개된 후로 다들 관심이야 있었다만 얼마 전과 다른 점이라면, 그때는 다들 호기심과 약간의 적의에 기반한 의문이 지금은 좀 더 호의에 가까워졌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래서 더욱 집요하게 느껴지는 일면이 있었다.
가령 대체 왜 정체를 비밀로 하는가, 하는 점.
무언가 흠이 있지는 않을지 궁금해하는 분위기가 느껴진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나야 뭐, 상관은 없다만.’
남들이 나를 두고 찧고 까부는 소리야 아무래도 상관없다. 김숙자 교수님에게 말했던 것처럼 필요하다면 정체를 밝히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고, 나 자신이 세상에 드러나는 게 무서운 것도 아니다.
하지만, 요새 가끔…… 그런 생각은 들었다.
나 하나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내 주변 사람들까지 드러나지는 않을까.
아무리 그래도 어쨌든 내 신분은 일반인이니, 설마 요새 세상에 별 특이할 것도 없는 내 가정사 따위까지 보도될까 싶기도 하지만…… 이건 순진한 생각이려나.
문득 머리가 아파졌다.
‘한번 연락을 해야 하나.’
모르겠다.
이것만큼은 아무리 나라도 마음을 먹기는 쉽지 않았다.
사실 입원비가 제법 비쌌을 병원비부터 시작해서, 따지자면 진작 연락을 했어야 했지만…… 핸드폰 번호는 바꾸지 않았음에도 저쪽에서 딱히 연락을 하지 않는다는 핑계로 미뤄 두고 있었다.
지금 심정을 생각하자면, 차라리 거대한 바다뱀과 붙는 게 나을 듯했다.
일단은…… 조금 미뤄 두고 싶다. 그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어쨌든, 나는 결국 당분간 몸을 사리라는 최민혁의 충고에 동의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당분간 좀 쉬죠, 뭐.”
“잘 생각하셨습니다! 이미 할당량 3개월 치는 채우셨으니 천천히 몸을 회복하세요.”
최민혁이 반색했다.
물론 쉰다고 해 보았자 일주일뿐이기는 했지만, 최민혁에게 해당 건을 알릴 이유는 없으니 휴식하는 걸로 해 두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 외에도 최민혁은 혹시 무슨 문제가 생기면 곧장 연락을 달라는 등의 으레 하는 말을 몇 마디 더 한 후, 통화가 끝나기 직전에 이렇게 덧붙였다.
“그…… 활약상, 매우 인상 깊었습니다. 국가 아카데미 검사과정에서는 매일 동영상을 돌려 본다더군요.”
그리고 내가 뭐라 답할 새도 없이 ‘그럼 이만!’ 하고 전화가 끊겼다.
날 칭찬하고 싶은 건지 무서워하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뭐, 아마 둘 다겠지.
하여튼 그렇게 던전 돌기를 포기하고 나니 결국 일주일간 할 일이라곤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그게 즉, 아이템 쇼핑이었다.
‘루카스가 봤다면 기절하겠군.’
그렇게 모아 두고도 아직 부족하냐면서 말이다. 나는 루카스의 잔소리를 떠올리고 설핏 웃었다.
솔직히 지금 내 소지창이 텅 비었냐면 그건 아니었다. 무려 10년간 겨울 식량 모으듯 차곡차곡 모았는데 그게 다 떨어질 리가.
다만 한국에 돌아온 후 던전을 공략하면서 내 부족한 능력치를 보완하기 위해 썼던 특정 종류의 아이템이 좀 부족했다.
가령 몬스터에게 듣는 독이라든가, 백록담에서 유용하게 썼던 작은 폭발을 일으키는 아이템, 그리고 일회용 방어구 따위의 재고가.
‘분명히 만만한 던전은 아닐 테고.’
일단은 현재 능력치로 던전 클리어에 도전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내 약점을 보완할 수 있을 만한 아이템은 최대한 채워 놓아야 했다.
그래서 나는 조한율을 만난 직후, 곧바로 강남 헌터 스토어 본점에 들렀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그간 포션 정도만 구매해 왔으므로 나는 대한민국에서 제작된 아이템을 처음 제대로 보았는데, 스토어에 일반적으로 구비되어 있는 아이템들이 모두 내가 바라는 수준에 한참 못 미쳤던 것이다.
‘쓸 만한 게 하나도 없었지.’
물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좀 박한 평가일 수 있겠다. 어쨌거나 한국 쪽은 아직 역사가 짧으니까.
그리고 장점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타르토스와 비교했을 때 한국의 경우, 동일 스펙의 아이템 가격이 비교도 되지 않게 저렴했다.
포션 가격과 마찬가지로, 무기류나 소도구들이 막 헌터업을 시작한 초보들도 쉽게 손을 댈 만한 가격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이건 사실, 조한율이라는 운영자가 원하는 지점을 가리키고 있기도 했다.
‘입문 장벽은 확실히 낮춰지겠군.’
어차피 상위권 헌터들이 주로 사용하는 장비는 제작템보다 던전 내에서 드랍되는 아이템인 경우가 많다. 결국 이 모든 건 헌터 하위층을 두껍게 만들려는 의도인 셈이다.
내가 타르토스에서 싸구려 철검 하나도 사지 못해 고생했던 걸 생각하자면 눈물이 날 지경이다.
진입이 쉬운 만큼, 일반인들이나 초보가 목숨을 잃는 일도 적어지겠지.
그러나 그런 생각과는 별개로 나는 꽤 곤란해졌다.
지금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가성비템이 아니라 본래 가지고 있던 것과 동일한 효과를 낼 만한 아이템이었다. ‘페탈의 죽음’이라든가, 폭발 아이템이라든가.
그리고 그런 아이템들은 대한민국에서는 아직 상당한 상급에 속했다.
그래서 알아보았더니, 상급의 제작템을 구하고 싶으면 일반 헌터 스토어가 아니라 VIP 별관을 이용하는 게 빠르다고 했다. 워낙에 고가의 아이템들이라 일반 스토어에서는 취급하지 않는다고.
그런데 그 VIP 별관이라는 데를 들어가려면 갖가지 실적 따위가 있어야 한단다.
게다가 실적이 있더라도 언제나 예약 손님이 꽉 차 있어서 대기를 해야 하고, 전담 서비스하는 직원과 매칭이 되어야 하며…… 여러모로 복잡했다.
그래서 각설하고, 나는 여기서 이우연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얄미운 것과 별개로 이우연 정도면 이 바닥에서는 프리 패스가 아니겠는가.
실제로도 이우연에게 연락하자 10분도 되지 않아 VIP 스토어 예약을 잡아 주었다.
“나도 직접 오는 건 오랜만이긴 해. 바람도 쐴 겸, 잘됐지.”
주차를 끝낸 이우연이 익숙하게 길을 안내했다.
그 와중에 신난 태원이가 옆에서 떠들었다.
“저도 진짜 여기 한번 와 보고 싶었는데. 사현이 형 브이로그에 찍힌 것만 봤거든요.”
걔는 그런 것도 하냐? 엄청 열심히 사네.
어쨌든, 그런 관계로 이우연을 프리패스로 이용하다 보니 이우연 본인은 물론이고, 제주도에 내려가기 귀찮다며 이우연 집에서 뭉개고 있던 양태원까지 얼떨결에 쇼핑에 동행하게 된 것이다.
“내가 데려가 달라고 할 때는 귓등으로도 안 듣더니, 누나가 한마디 하니까 스케줄까지 비우고 쪼르르…….”
“비교할 걸 비교하지 그래.”
“우웩…….”
옆에서 쫑알거리고는 있다만, 어쨌거나 양태원은 굉장히 신나 하고 있었다. 무슨 수학여행이라도 온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래, 애라도 신났으면 됐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자 깔끔하고 우아한 건물 내장이 보였다.
저번에 방문한 헌터 스토어 본점도 제법 세련된 맛이 있었는데, VIP 별관이라고 마련된 장소는 훨씬 더 화려했다.
“이우연 고객님, 어서 오세요. 일행은 두 분, 맞으신가요?”
그리고 입장하자마자 전담으로 안내를 해 주는 직원이 붙었다.
어느 정도 단련한 각성자인 건지, 나나 이우연 앞에서도 그리 겁먹은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방으로 안내 도와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헌터 스토어 본점의 경우 1층에는 포션이나 아이템이 진열되어 있었지만, VIP 별관에서는 각각 독립되어 있는 방으로 안내받은 후에야 아이템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방까지 향하는 길에 있는 복도며 천장에 신경을 쓴 건지 인테리어를 보는 재미가 있었다.
과연, 양태원이 감탄했다.
“오, 저 조명 브이로그에서 봤는데. 생각보다 엄청 크네.”
양태원이 높은 천장에 매달려 있는, 솜사탕이 줄줄이 매달린 포도처럼 생긴 조명을 가리켰다.
“L사에서 특별히 주문 제작한 조명이라, 찾아오시는 고객분들이 많이 마음에 들어 하세요. 그뿐만 아니라 재생 에너지를 사용하는 조명이라 에너지 절약 차원에서도 훌륭하죠.”
앞에서 안내를 하던 직원이 친절하게 양태원의 감탄사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가정용으로 나온 상품도 있는데, 혹시 필요하시면 안내 도와 드리겠습니다.”
그냥 설명이 아니라 판매였군.
그 말에 양태원이 식겁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뇨. 괜찮아요. 그냥 본 거예요.”
그렇게 말은 한다만 가끔 천장으로 눈이 가는 게 아무래도 궁금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저런 취향인가? 내가 보기엔 그냥 그런데. 어쨌거나 갖고 싶어 하는 눈치라 나는 슬쩍 옆구리를 찔러 보았다.
“갖고 싶으면 하나 사. 보러 갈래?”
“누나,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진짜 괜찮거든요. 우리 집에 어울릴 것 같지도 않고…….”
“이건 쟤 말이 맞아. 애초에 저런 조명을 두려면 층고부터 뜯어고쳐야 한다고.”
옆에서 걷던 이우연이 끼어들었다.
“아니면 그냥 서울에 집 하나 마련하든가.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고, 필요할 때마다 제주도에 있으니 번거롭긴 하더군. 내가 집 하나 구해 줘?”
“뭐? 진짜?!”
이번에는 양태원이 반색했다. 이우연이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집 하나 정도야 일도 아니지. 원하는 지역 있어?”
하기야 저놈에게 그 정도는 별일도 아니긴 하겠지.
헌터로 활동하며 비용을 가장 많이 들이게 되는 것은 아무래도 포션 같은 소모성 제품과 장비를 갖추는 것인데, 이우연의 경우 포션 값은 영원 길드가 대주고 있다.
장비 세팅도 이미 완성된 상태고. 게다가 재원이 던전에서 드랍되는 아이템인 만큼 현금 보유량은 어지간히 많을 터였다.
그에 비해 아직 나이가 어려 상대적으로 빈곤한 양태원이 그 말에 공손히 두 손을 모았다.
눈망울이 빛나고 있었다.
“와, 미친…… 혀, 형님……!”
급기야 입에서 형님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이우연이 씩 웃었다. 불길한 웃음이었다.
“대신 나랑 일대일 계약서 쓰자.”
“무, 무슨 계약서?”
“내가 부르면 24시간, 언제든 던전 공략하러 뛰어와야 함.”
순식간에 태원이의 얼굴에서 영혼이 빠져나갔다. 그제야 놀림당한 걸 알아차린 것이다.
“애 좀 작작 놀려.”
영혼이 빠져나간 태원이 대신 내가 이우연의 옆구리를 쥐어박았다. 이우연이 아파하는 시늉을 하며 제 옆구리를 문질렀다.
“왜, 뭐 잘못됐어? 유능한 헌터를 집 한 채로 전속 계약할 수 있다면 얼마나 싸게 먹히는 건데.”
“…….”
“지금 본인 상황이 그렇잖아요, 예나 씨. 아, 양태원 네가 유능하다는 건 아니니까 꿈 깨고.”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내가 정부에게 건 조건을 이야기하는 거였군. 결국 나한테 하는 잔소리였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도대체 그 소리는 언제까지 할 거야? 귀에 딱지 앉겠어.”
“딱지 앉게 이야기를 해도 들어 줘야 말이지.”
“내가 필요 없다는데 무슨 참견이야. 귀찮게 하지 마.”
“무슨 말을 그렇게 정 없이 해? 누가 봐도 호구를 잡혔는데 내 입장에서 아무 말도 안 하면 그게 더 나쁜 거지. 이게 다 애정 어린 잔소리라고나 할까?”
“애정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뭐지? 나만 중간에서 이용당한 것 같은 이 기분은?”
옆에서 양태원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하하하. 사이가 아주 좋으시네요. 나중에라도 혹시 필요하시면 말씀 주세요. 아, 이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그리고 길을 안내하던 직원이 매끄럽게 대화를 정리했다.
나는 그제야 방금 전 대화가 남들 들려주기 퍽 부끄럽다는 사실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