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138화 (139/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138화

안내받은 방 안으로 들어가니 그곳은 또 다른 세계였다. 사방에 온갖 아이템들이 줄을 맞추어 진열되어 있었던 것이다.

“음료는 어떤 걸로 드릴까요? 탄산수, 주스, 차, 커피가 있습니다.”

안내를 해 준 직원은 그 외에도 이것저것 챙겨 준 후, 편하게 방 안에 미리 준비된 아이템과 카탈로그를 보고 나서 필요하면 부르라고 말한 후 방을 나섰다.

“원래는 여기서 직원이 아이템을 설명해 주는데, 내가 그런 걸 워낙 싫어해서. 알아서 할 테니 내버려 두라고 했지.”

어쩐지, 보통이라면 붙어서 설명을 해 줄 법도 한데 나가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알고 보니 이우연 개인 성향에 맞춘 서비스였나 보다.

방 중앙에 놓인 소파에 털썩 앉은 이우연이 미소했다.

“다른 사람 없이 우리끼리 보는 게 편하잖아?”

그거야 그랬다.

한편 양태원은 방 안에 미리 준비되어 있던 아이템들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신기하다. 원하는 카테고리를 말하면 거기에 맞춰서 준비해 준다는 거죠?”

“맞아.”

“근데 누나, 대체 뭘 주문한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양태원이 한쪽 벽면을 가리켰다.

그도 그럴 게, 테이블 위에는 겉으로 보기엔 무엇인지 모를, 반들반들한 검은색의 무언가가 크기별로 쌓여 있었다.

가까이 가서 아이템을 조회해 본 양태원이 으악, 하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멀리 물러났다.

“이거 포, 폭탄이네요.”

대한민국 제작자가 만든 제작템이라 그런 건지, 수류탄 같은 모습을 한 아이템도 있었다.

“누나, 폭파시키고 싶은 건물이라도 있는 거예요?”

그야 물론 건물을 폭파한 적도 있지만, 가장 최근에 폭파시킨 건 산이다.

나는 적당히 손에 잡힐 만한 아이템이 있는지 둘러보았다.

“혹시 모르잖아. 무슨 상황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아니, 그렇게 솔플을 많이 하세요? 그럼 저거는요? 일반 포션만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다른 한쪽은 태원이 말대로 각종 포션이 한 무더기.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회복 포션 외 마력, 체근민 일시 증강제, 그리고 몬스터에게 쓸 독극물 종류까지.

그 외에도 재고가 있는 상품은 다 보고 싶다고 해서 그런지 거의 대형 약국 수준으로 진열되어 있었다.

나는 병 몇 개를 들어 살펴보았다. 아이템 조회 창에 여러모로 살벌한 설명이 떠올랐다.

“우왁, 이건 또 독약이네요.”

내 옆에서 졸랑거리며 아이템을 살피던 양태원이 깜짝 놀라며 물건을 내려놓았다.

나는 그런 양태원에게 충고했다.

“그러지 말고 너도 잘 봐 둬.”

“엑, 독약을요?”

“그래, 너처럼 특수 클래스일수록 이런 소도구를 활용해야 실전에서 커버할 수 있는 영역이 늘어나는 거야.”

가뜩이나 체근민 수치도 약한 판에 특수 클래스라서 특정 몬스터 공략에만 탁월한 녀석이라 그런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히나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여러 던전을 공략한다면 더더욱.

솔직히 폭탄 한두 개쯤은 들려 주고 싶은데, 폭탄을 던져 놓고 안전거리 밖으로 물러날 정도의 판단력이 아직 없을 것 같아서 참았다.

“당장 네 눈앞에 몬스터가 들이닥치면 부채가 아니라 검이라도 휘둘러야 할 텐데, 네 근력으로는 즉사시킬 수 없는 몬스터일 수도 있잖아. 그럼 어떻게 할래?”

“으, 으음…….”

“즉사시킬 자신이 없으면, 청동검에 미리 독약이라도 묻혀 놔야지. 그럼 아주 조금만 생채기를 내도 승산이 생기는 거야. 그게 결국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게 되는 결과로 이어질 거고.”

말하면서도 귀찮게 여기지 않을까 싶었는데, 다행히도 양태원은 잔소리로 받아들이지 않고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넵, 명 받들겠습니다!”

알아들었으면 다행이고.

나는 빠르게 아이템들을 훑었다. 다행히 건질 만한 것들이 제법 보였다. 몇 가지 아이템을 마음속 장바구니에 넣어 두고 다시 소파에 앉아 패드를 집었다.

카탈로그는 현대 대한민국답게 종이 따위가 아니라 패드 위에 주르륵 떠 있었다. 각종 아이템의 목록이 보였다. 모두 다 일반 헌터 스토어에서는 보지 못했던 아이템들이었다.

“여기에 없는 건 이걸로 보면 되는 건가?”

“응, 대신 여기에 재고가 없어서 가져오는 데 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어. 아마 제작 주문란도 있을 텐데…… 아, 제작자에 따라 다르기는 해도 보통 주문하면 한 달은 더 걸리니까 주의하고.”

혼자 여유 있게 소파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던 이우연이 설명해 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주문 제작란을 보던 터라 나는 혀를 찼다.

앞으로 일주일 후에 내 소지창에 없다면 아무리 좋은 아이템이라도 소용이 없는데. 물론 그 후로도 공략할 던전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니 봐 두기는 해야 할 것 같다.

‘흠, 일단 역시 주문이나 해 둘까. 다음에 써도 되는 거고.’

그리고 어느샌가 내 옆으로 따라와 같이 패드를 들여다보던 양태원이 헙, 하고 숨을 들이켰다.

“보통 제가 보던 것보다는 0이 하나씩 더 붙은 것 같은데요.”

“비쌀수록 효과가 좋으니 어쩔 수 없지. 목숨값이나 마찬가지야.”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온갖 아이템을 다 장바구니에 넣고 계신데요? 누나, 합계가 벌써 10억을 넘어갔어요.”

“으응? 괜찮아.”

“방금 주문 제작템 10개 주문하면서 13억이 넘었는데도요?”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그냥 장비가 아니라 소모템 주문하는 거잖아.”

과연, 그쯤해서는 이우연도 한마디 건넸다.

말이야 옳은 말이다. 아무리 돈벌이를 괜찮게 하는 헌터라고 한들, 1회용 제품에 집 한 채 값을 태우는 건 가성비가 좋은 편은 아니다.

옆에서 태원이의 눈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이우연마저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와, 20억 돌파했는데?”

“……예나야. 진정해, 진정.”

필요 없는 걱정이다.

얼마 후, 주문을 마친 내가 직원을 부르자 직원이 결제는 어떻게 하시겠냐며 물었을 때, 나는 품에서 카드 하나를 꺼냈다.

카드치고는 묵직한, 검은색의 카드였다.

카드의 명의를 확인한 직원의 눈이 움찔했다.

나는 여유 있게 웃었다.

“미리 연락해 놨다고 들었는데요.”

“아…… 네, 네! 조한율 고객님이 미리 연락 주셨었는데…… 그래도 거액이니, 일단 한 번 더 확인해 보고 결제 도와 드리겠습니다.”

“네, 그러세요.”

베테랑 직원이 침착함을 유지하지 못한 채 허둥지둥 방을 빠져나갔다.

이우연과 양태원이 동시에 질문했다.

“조한율?”

“랭킹 5위요?”

“그래.”

그렇다.

아무리 내가 20억대의 자산가라고 한들, 던전 한 번 들어가는데 그 금액을 다 태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든든한 후원자가 하나 있었다.

조한율과 만났던 그날, 헤어지기 전에 조한율이 내게 카드를 건넸다.

잘해 보자니 어쩌니 하더니, 이건 뭐지?

나는 내밀어진 카드를 노려보았다.

“무슨 의미야?”

“저는 명색이 운영자고, 강예나 씨는 특별 관리 대상이잖아요. 그러니까 던전 공략만큼은 팍팍 밀어줘야죠.”

그러더니 웃으며 덧붙였다.

“앞으로 대한민국 서버 최고 난도의 던전 4개를 더 공략해야 할 테니, 이걸로 필요한 아이템은 뭐든지 구매하시라고요.”

조한율이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팡팡 쳤다.

“이래 봬도 근 5년간 대한민국 최고의 갑부로 떠오른 사람이랍니다.”

그때만큼은 정말로, 조한율이 제법 든든해 보였다.

‘최고의 갑부가 맞기는 하겠지.’

헌터 또한 일반인보다는 수입이 좋은 편이지만 결국 주 수입원은 던전 내에서 얻은 아이템을 파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수입원의 일정 부분은 또 던전 공략에 필수적인 아이템, 즉 포션에 쓰일 테고.

그런데 조한율은 이제껏 한국의 아이템 제작, 특히 소비량이 가장 큰 포션 제작을 거의 도맡아 해 왔다. 아무리 포션 가격을 싸게 매겼다고 한들, 그간 쌓인 재물이 얼마나 많을지는 능히 상상이 되었다.

뭐, 돈이 돈이 아니라 숫자로 보이는 상황이겠지.

‘이왕 받은 건 제대로 털어먹어야지.’

조한율이 저렇게 나온 이상 저 여자의 통장을 홀랑 털어먹어 줄 작정이었다.

사감이 다분히 섞여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겠다.

그래서 몇 달 후에나 제작된다는 아이템들도 일단 모두 결제했다. 결제 대금 문자를 받은 조한율이 잠시라도 기절초풍했기를 빈다.

“조한율이라…….”

이우연이 노골적으로 표정을 찌푸렸다.

“언제부터 당신이 조한율과 아는 사이였어? 그리고 왜 그 여자 카드로 몇십 억을 결제하는 건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 아니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의문이었다. 걱정이 섞여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냥, 어쩌다 보니.”

하지만 나와 조한율의 관계를 무어라 설명해야 좋을지 몰라 대충 얼버무렸더니, 이우연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강예나.”

“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성의 없이 대답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니야? 나는 지금 네 걱정을 하는 거라고.”

“그야…….”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대꾸하려던 나는 이우연의 표정을 보고 말문이 막혀 버렸다.

이게…… 차라리 짜증이 섞인 말이었다면 가볍게 떨쳐 버리겠는데, 지금 이우연은 속이 상한 티가 풀풀 나는 표정이었다.

나는 순간 헉, 했다.

생각해 보니 대답이 너무 무심하기는 했다.

아무리 이우연과 어느 정도 거리감이 있고, 내가 그의 의도에 의구심을 품고 있다고 한들, 이우연이 내가 하는 일에 협조적으로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양태원의 말마따나 내 부탁 한마디에 본인의 개인 스케줄도 다 미루고 달려와 줄 정도로.

그 외에도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나는 이우연과 이제는 제법 친한 사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야 내 사정을 모두 털어놓을 수는 없다고 해도 어느 정도의 성의 정도는 보였어야 했다.

‘……내가 잘못했네.’

이번에는 아무리 나라도 양심이 찔렸다.

워낙에 능글맞고 친근감 있게 굴다 보니 이우연을 다루는 내 태도가 점점 더 거칠어진 것도 사실이고…… 나는 일단 입을 열었다.

“그…… 미안. 자세히 말하기는 개인적인 일이라서 좀 그렇고…… 조한율과 거래를 좀 했어. 의뢰를 받았다고 해야 하나. 이건 대금이고.”

“……아, 그래.”

원하는 대로 대답은 해 줬는데 이우연의 표정은 영 아리송했다.

내 성의가 없는 대답에 이미 마음이 상한 건지, 혹은 본인이 모르는 사이에 내가 조한율과 모종의 관계를 구축한 게 마음에 들지 않은 건지는 모를 일이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고.

분위기가 삽시간에 어색해졌다. 등골에 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삐졌다. 저거, 완전히 삐졌다.’

그 와중에 새우처럼 사이에 끼어 버린 양태원이 옆에서 눈만 데굴데굴 굴리며 눈치를 보다가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개인이 카드로 몇십 억씩 결제를 할 수가 있어여? 저게 그 유명한 블랙 카드라는 건가?”

이우연은 여전히 뚱한 표정이었지만 양태원에게 성실히 대답을 해 주었다.

“조한율은 걸어 다니는 대기업이라고 볼 수 있으니까. 제작자 클래스는 워낙에 오가는 돈이 많기도 하고.”

“그럼 형도 저 카드는 없어?”

형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분위기 파악을 제대로 한 모양이다.

“없어. 나도 어지간하면 길드 법인 명의 카드로 구매하는 편이고. 한국에서는 조한율이 유일할 거야.”

“그, 그렇구나.”

“…….”

그리고 침묵은 나갔던 직원이 돌아올 때까지 이어졌다.

곧 조한율과 확인을 마쳤는지 직원이 후닥닥 자리로 돌아왔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고객님! 확인 마쳤습니다. 그럼, 이 카드로 결제 도와 드리겠습니다.”

내 돈은 아니다만, 그래도 몇십 억쯤 하는 돈이 한번에 결제되는 건 제법 재미있는 광경이었다. 아마도 양태원이 보고 싶었던 모습도 저것이었을 테다.

……그러니까, 그 옆에 당당히 ‘나 삐졌다.’는 걸 드러낸 이우연만 없었다면, 양태원도 이 플렉스를 조금 더 마음 편히 즐겼을 것이 틀림없다.

*   *   *

양태원은 도중에 줄행랑을 쳤다. 이왕 강남에 온 거, 혼자 서울을 좀 더 구경하다 들어가겠다고.

그리고 나도 함께 줄행랑을 치고 싶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 어른답지 못한 행동이었다.

“…….”

“…….”

우리 둘은 어색한 분위기로 차에 올라탔다.

이우연이 말없이 이 시동을 걸었다.

그래도 결국 차로 데려다주는 걸 보면 아주 화가 났다거나 정이 떨어진 건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이우연 옆얼굴로 시선을 던졌다.

완전히 무표정이다.

내 시선이 느껴질 텐데도 이우연은 여전히 정면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시동은 걸렸지만, 차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우와…… 진짜 삐졌다.’

맹세코, 한국에 와서 이우연을 알게 된 몇 개월 동안 이우연이 저렇게 오래 침묵한 건 처음이었다.

‘사과? 사과를 해야 하나? 사과할 일이 맞긴 하지? 그런데 뭘 어떻게 사과해? 이미 미안하다고 했는데?’

그리고 나는 속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친구가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고, 적이 아닌 인간과의 관계를 잘 다루는 편도 아니며, 있는 친구라곤 타르토스의 4인방뿐이다.

그리고 그때는 누구랑 싸워도 나머지 다른 사람들이 화해시켜 주곤 했다.

만약 아리아드네가 없었다면 나는 루카스의 머리카락을 대머리가 될 때까지 다 뽑아 버렸을 수도 있다. 왕자님 잔소리를 못 이겨서.

그런데 여기는 아리아드네가 없고, 나와 이우연은 엄연히 말해 친구 사이라고는 할 수 없다.

좋게 말하자면 묵시적 협력 관계이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무것도 아닌 사이.

“……그렇게 안절부절하지 마.”

그때, 이우연이 드디어 침묵을 깼다.

나는 고개를 홱 돌렸다.

“어, 뭐라고?”

“내 눈치 볼 필요 없다고. 남의 눈치 보는 거, 당신한테는 진짜 안 어울려.”

이제껏 한껏 삐져 눈치를 보게 만들었으면서 그런 소리를 해 봤자…… 그렇게 생각하다가, 나는 하나 깨달았다.

이우연이 저러든 말든 사실은 그냥 내버려 두면 그만이었다. 이우연의 성격상 조금 삐지더라도 결국 알아서 풀 테니까.

그런데 나는 영 신경이 쓰였다.

아무런 사이도 아니고, 그냥 내버려 두고 무시하면 될 일이었는데도 어쩔 수 없이.

“……미안. 내가 좀 함부로 대답했어. 앞으로는 조심할게.”

“겨우 그런 거에 화가 난 건 아니야.”

저렇게 말은 하지만, 누가 보아도 내 태도에 화난 사람이었는데.

나는 최대한 부드럽게 물었다.

“그럼 왜 그러는데?”

“그냥…… 나 스스로 내 꼴이 우습다는 생각을 좀 하느라.”

지금도 그랬다. 그렇게 말하며 이우연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소리를 듣자니 양심을 누가 포크로 마구 찌르고 있는 것 같았다.

“당신에게 말하지 못할 사정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 모르면 바보지.”

“…….”

“그리고 당신이 나를 의심한다는 것도 알아.”

핸들을 잡은 손가락이 톡톡, 가죽 위를 두드렸다. 나는 가만히 그 손가락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그 의심은 지극히 타당해. 그리고 나도 당신한테 설명할 생각 없고. 그래서 이제껏 아무 말도 안 한 거야. 피차 숨기는 게 있으니까.”

그 말 자체는 놀랍지도 않은 일이었다.

이우연에게 나처럼, 모종의 사정이 있으리라는 짐작은 진작부터 했으니까.

그런데 설마 이렇게 대놓고 까발릴 줄은 몰랐다.

우리 사이에는 이제껏 알게 모르게 지키던 거리감이 있었다. 서로에게 비밀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접근하지 않음으로써 생기는 거리감이다. 이우연도 나도 그걸 뻔히 보면서 주위를 뱅뱅 맴돌고 있었다.

그게 안전했다.

남의 비밀 따위는 알아보았자 피곤하기만 하다.

알게 되면 이해하게 되고, 서로의 사정을 모른 체할 수 없게 된다. 필연적인 소모가 따른다. 내게는 그럴 여유가 없고, 아마도 이우연 또한 그랬을 것이다.

그저 내 목적만 달성하면 족하다. 그걸 위해서라면 남을 이용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나와 이우연의 사고방식은 잘 맞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여기서 더 가까워질 일도 없다.

“그런데…… 서운해.”

전혀 좁혀지지도 않았고, 좁힐 생각도 하지 않은 거리 밖에서, 이우연이 거리감을 무시하고 중얼거렸다.

“그래서 내 꼴이 좀 우스워졌다는, 그런 생각을 했을 뿐이야.”

결국 그날,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우리는 쭉 어색했다.

집에 도착해 내가 차에서 내릴 때 이우연이 이렇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든, 건강하게 돌아오길 바랄게.”

“……그래, 고맙다. 너도 몸조심하고.”

그러자 이우연이 한숨처럼 들리는 웃음을 픽 뱉었다.

“응, 고마워.”

나는 떠나는 자동차 뒤꽁무니를 보면서 생각했다.

아마도 다음에 만날 때, 이우연은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할 것이다. 마치 그런 대화는 하지 않은 것처럼.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게는 당면한 과제가 있다.

떠오른 이후 한 번도 끈 적이 없는 시스템 메시지창.

- 메인 퀘스트 : 운명의 씨앗을 수집하여 운명을 변화시키십시오.

- 보상 : 멸망한 세계의 복구

별것 아닌, 아무것도 아닌 사이에 일어난 감정의 동요는 그냥 변덕이고, 해야 할 일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내게는 더 소중한 것이 있고, 그건 지금 내게 너무도 간절했다.

나는 곧 등을 돌렸다.

첫 번째 메인 퀘스트가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