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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140화 (141/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140화

- 메인 퀘스트를 시작했습니다.

내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누군가 내 뺨을 후려치는 감각이었다.

깃털처럼 느껴지는 감각이기는 했으되, 분명히 모욕적인 움직임이었다.

반사적으로 허리의 검에 손을 갖다 댔지만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 모든 장비가 해제되었습니다.

- 시스템이 플레이어, ‘방랑하는 구도자’를 재인식하였습니다.

- 플레이어, ‘방랑하는 구도자’의 재입장을 환영합니다.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것은 지저분한 금발에 주근깨가 가득한 얼굴을 한, 키가 큰 여자였다. 여자는 아주 심술궂은 표정을 짓고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래, 충분히 잤어? 네 근무 시간이라는 걸 잊을 정도로 잤길 바란다.”

“아, 음…….”

나는 곧 내가 무슨 상황에 처한 것인지 이해했다.

- 당신은 해당 시간선의 인물 중 하나로 빙의하게 됩니다. 해당 인물은 플레이어와 가장 비슷한 성향을 따라 무작위로 선택됩니다. 해당 인물의 능력치와 기억을 일부 이어받을 수 있습니다.

- 당신은 해당 인물로서 행동해야 합니다.

익숙하다면 익숙한 내용이었다. 벌써 두 번째 겪는 것이었으니까.

별개로, 뺨을 맞는 모욕도 익숙하다면 익숙한 것이었다. 나는 멍하니 내 뺨을 문질러보았다.

맞은 감각이 남아 있었다.

그래, 근 5년 정도는 겪어 보지 못했던 것 같네. 타르토스로 간 직후에는 수없이 겪었던 일이기는 했지만.

망할 신분제 사회붕 민주주의 만세였다.

어쨌든, 나는 곧장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검을 소지창에서 불러내 뽑아 드는 대신 그렇게 순순히 대답한 이유는, 속에서 낯선 감각이 치솟았기 때문이었다.

저번 유령의 성에서 기사단장, 그러니까 페트라라는 이름의 단장에게 빙의했을 때와 비슷했다. 내가 느끼는 것이 아닌 감각이 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다만.’

눈앞의 여자에게 반항해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 강하게 내 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저절로 몸이 움츠러드는 게, 겨울날의 추위를 연상시켰다.

실제로 지금 이곳의 공기는 아주 차가웠다. 나는 슬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바로 여자 위에 떠올라 있는 이름이 보였다. ‘에이미’라는 이름이었다.

좋아, 여기까지는 유령의 성 던전과 비슷한 느낌이다. 클리어 조건은 떠오르지 않는 걸 보니, 이번에도 선행 조건이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

‘그럼 일단 선행 조건부터 찾아야…….’

하지만 내가 사고를 더 이어 가기 전에 뺨을 때린 여자가 날카로운 어조로 말하며 내 신경을 빼앗았다.

“죄송은 무슨! 맙소사, 정말 불경한 눈빛이야.”

불경하다니…… 그 단어에 등골에 한 번 더 오싹한 것이 달렸다.

이번에도 내가 느낀 건 아니었다. 아무래도 에이미라는 여자는 내가 빙의한 누군가에게 공포의 대상인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내가 빙의한 누군가가 이 여자의 얼굴을 이렇게 똑바로 쳐다본 것이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단지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이 몰려왔다. 공포가 사지를 마비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빙의한 인물만큼이나 에이미 또한 노려보는 시선에 익숙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에이미가 코웃음을 쳤다.

“그래, 네가 시건방지다는 거야 진작 알아봤지.”

그리고 그때쯤, 나는 내 몸이 에이미에 비해 아주 작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개가 갸우뚱 기울여졌다.

‘성인이…… 아닌 것 같은데.’

거울이 없어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어린애다. 저번에 기사단장, 그러니까 페트라의 몸을 빌렸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었다. 팔다리가 아주 짧고 연약하게 느껴졌다.

그에 비해 앞에 서 있는 여자는 건강했고, 키가 한참 컸다. 에이미는 확실하게 나를 압도하듯 노려보고 있었다.

“내 자비로움이 없더라면 당장 내일 죽을 벌레 주제에.”

아니, 저게 어린애한테 할 소린가?

솔직히 이쯤 되면 화도 나지 않았다. 너무 전형적인 악당의 대사였다. 아무래도 용사다운 일을 해 주기를 바라고 일부러 저러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시스템의 안배라도 되나? 보너스 경험치, 뭐 그런 건가?’

심지어 그런 의심까지 들었다. 용사답게 악당을 물리치고 능력치를 쟁취하라든가…… 아니겠지.

나는 저도 모르게 내 뺨을 긁었다. 그 성의 없는 태도를 본 에이미의 얼굴이 분노로 물들었다.

나는 혀를 찼다.

“앗차.”

“너, 너! 지금 그게 무슨 태도야!”

에이미가 소리를 버럭 지르며 내 어깨를 손으로 붙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에이미가 콧김을 뿜는 것이 느껴졌다.

“뭐야? 뭘 그렇게 보는 거야? 지금 감히 나한테 반항하는 거야?”

나는 이제 술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빙의’ 형식을 취해서 그런지 감각이 늦게 돌아오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그나저나 근무 시간 어쩌고 하더니 지금 술에 취해서 주정을 부리는 거였어? 그러고 보니 볼도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감히, 감히 네가 나한테!”

에이미가 허리춤에 찬 무언가, 자세히 보니 곤봉 같은 것을 움켜쥐고 꺼내드는 것이 보였다. 그걸 휘두르기 위해 팔을 들어 올리는 것도 보였다.

그걸 보는 순간 머릿속의 누군가가 경직했다. 손이 떨리고, 어깨가 떨리고, 공포가 머리를 마비시켰다.

이건 분명히, 학습된 공포였다. 몇 번이고 경험했던 폭력이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대로라면 이 어린애는 저 무자비한 폭력에 머리를 맞아 그대로 바닥에 쓰러질 테고 운이 좋으면 뇌진탕, 혹은 죽을지도 모른다.

“이봐.”

하지만 그 폭력 앞에 선 것은 본래의 인물이 아니라 나였다.

탁.

어쩔 수 없이, 반사적으로 그 곤봉을 잡아챘다. 술에 취한 눈이 깜박이는 것이 보였다.

솔직히 말해서 아무리 맞아 주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는 움직임이었다.

“어, 어……?”

아직도 미약한 두려움이 일었지만, 나는 내 것이 아닌 감각을 쉽게 타일렀다.

걱정 마. 이딴 악당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극복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그런 종류의 공포에 불과하다. 지금 네 곁엔 내가 있어. 괜찮아.

나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에이미, 당신은 아무래도 술에 취한 것 같아. 그렇지?”

“어? 그, 그야 그렇지만…….”

에이미가 눈을 껌벅였다. 에이미는 연약한 어린아이가 어떻게 자신의 곤봉을 잡고 폭력을 막을 수 있는지 믿을 수 없어하고 있었다.

여자의 눈 속에서 의심이 읽혔다.

그래, 현실감이 없겠지.

“그거 알아?”

나는 곤봉을 막은 손에 힘을 주었다. 쇠로 된 무거운 곤봉이 손가락 모양대로 우그러들었다.

에이미의 표정에 경악이 엿보였다.

“취하면 보통 악몽을 꾸기 마련이야.”

그리고 나는 곤봉을 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에이미의 목덜미를 세게 후려쳤다.

머릿속의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악!”

그리고 에이미도.

나름대로 힘 조절을 했기 때문에 목뼈가 부러지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에이미는 짧은 비명을 내지른 채 바닥으로 쓰러졌다.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나는 손바닥을 탁탁 털고 완전히 우그러진 곤봉을 바닥에 내던졌다.

쇠가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나는 원래 악당한테 악몽 같은 존재고.”

이래 봬도 용사라서.

뺨을 맞은 것에 대한 분이 풀린 건 아니었지만…… 뭐, 이 정도면 나름대로 응징은 된 것 같았다.

하지만 내뱉은 말이 용사보다는 같은 시정잡배 같아서 그런지, 아쉽게도 능력치가 올랐다는 알람은 없었다.

까다롭기는.

“그래서 여긴 뭐야?”

겨우 상황을 둘러볼 수 있게 된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닥에 쓰러진 여자는 술 내음을 풍기며 쿨쿨 잠들어 있었고, 그 얼굴을 보자마자 알게 되었지만 여기는 분명 한국이 아니었다.

예상했던 가설 하나가 사라졌다.

‘메인 퀘스트라길래 또 한국의 미공략 던전을 공략하라는 건 줄 알았는데.’

운영자인 조한율이 백록담을 언급했기에, 나는 또 내가 한국의 멸망이라도 막아야 하는 건 줄 알았지.

그런데 아무래도 아닌 모양이었다.

내가 있는 곳은 아주 작은 방이었다. 차가운 회색 빛깔의 돌이 사방을 두르고 있었고, 가구라고는 담요가 걸쳐진 아주 낡은 소파 하나였으며, 냉기를 물리칠 만한 건 작은 촛불뿐이었다.

그러니까, 어느 시점의 한국이든 한국인이 온돌을 포기하지는 못할 거라는 점에서 미루어 보아 이곳은 분명히 한국이 아니었다.

감도는 공기가 차갑다 못해 칼로 피부를 찌르는 것처럼 살을 저미는 것 같았다.

게다가 내가 빙의한 어린애가 입고 있는 건 낡은 원피스와 얇은 로브, 그리고 다 닳은 천으로 된 신발뿐이었다.

“아무래도 스타팅이 불길하네.”

저번보다 운이 나쁜 것 같군. 적어도 저번에는 앨리사 메이와 천 명쯤 되는 병사가 있었는데 말이야.

어쨌든 먼저 상태창부터 확인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저번처럼 누군가에게 빙의한 상태라면 능력치를 계승했을 것이다. 이 상황에 대한 힌트가 있을 수도 있고.

나는 곧장 상태창을 열었다.

플레이어명 : 방랑하는 구도자(상태 : 빙의)

LV.79 (LV.1)

특성 : 관철하는 아귀 (아직 발견되지 않음)

클래스 : 용사 (아직 발견되지 않음)

체력 : 890 (+30)

근력 : 785 (+12)

민첩 : 565 (+8)

마력 : 850 (+10)

스킬 : 멸혼의 불꽃 lv.6, 기사회생 lv.5, 불굴의 의지-on

(스킬은 전이되지 않습니다.)

아니, 이게 뭐야.

나는 이 비참한 상태에 얼이 빠졌다.

“혹시 병자한테 빙의했나?”

육체적으로 빈약하다는 건 알겠다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내가 5년간 병상에 누워 있다가 일어난 직후와 비슷한 상태였다.

이 정도면 오래 걷는 것조차 하지 못했을 텐데.

아니, 그럼 저 에이미라는 여자는 지금 병자 같은 어린애를 상대로 곤봉을 휘두르려고 했던 거야?

나는 바닥에 뻗어 있는 인간을 내려다보았다.

뭐 하는 작자길래 그런 짓을 아무렇게나 하는 거지? 메인 퀘스트가 저 에이미라는 인간을 골탕 먹이는 거라면 참 좋을 텐데.

하지만 여전히 선행 조건은 떠오르지 않았다.

어쨌거나 뭐든 내가 처한 상황이 어떤지 파악할 수 있는 힌트가 필요했다.

나는 곧장 뻗어 버린 악당 옆에 쭈그려 앉아 몸수색을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시작하려고 했다.

방의 문이 삐걱대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야야, 에이미! 여기서 뭐 해? 아직 파티가 한창인데 너만 빠져나갔다고!”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바닥에 뻗은 작자와 같은 옷을 입고 있는 한 남자였다. 붉은 색깔 머리를 한 남자는 손가락에 수갑을 걸고 장난처럼 빙빙 돌리고 있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들어오려던 남자는 바닥에 뻗은 에이미와 그 옆에 쭈그려 앉아 있는 나를 보고 멈칫했다.

또 적인가?

나는 소지창에서 검을 꺼내 들까, 고민했다. 하지만 그 전에 남자가 손뼉을 치며 웃기 시작했다. 남자의 머리 위에 ‘피터’ 라는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뭐야, 에이미 소장은 술에 취해서 뻗은 거야? 혼자 한 병 빼돌리더니 그럴 줄 알았다.”

“어, 어?”

“너도 참 너다. 그냥 내버려 두지. 뭐 하러 깨우려고 하는 거야?”

아무래도 내가 에이미를 기절시켰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저대로 내버려 둬. 내일 아침쯤에는 정신 차리겠지. 됐고, 너도 같이 가자. 어때, 좋지?”

피터는 친근하게 굴고 있지만 내가 빙의한 사람은 저 남자도 그리 친하게 여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경계심이 철갑처럼 몸을 두르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아무래도 눈에 띄는 사람 모두가 다 재수 없는 악당들인 것 같은데.’

하지만, 어쨌거나 이 방에서 나가 상황을 확인하는 게 우선이었다.

결국 나는 피터 근처로 걸어갔다.

피터가 웃으면서 두 팔을 벌렸다.

“자, 자. 내가 너한테 특별히 술을 하사하마! 이런 건 정말 특별한 기회라고. 알고 있지?”

피터가 그렇게 말하며 친근하게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그대로 품속으로 끌어당기려고 했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공포심과 혐오감이 피할 수 없이 솟아올랐다.

‘이런 X발.’

그건 정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어깨에 올려진 피터의 손을 잡아채고 내 어깨에서 떼어 냈다. 거칠거칠한 피부에 닿는 느낌이 소름 끼쳤다. 그게 내가 느끼는 감각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내가 그의 손목을 잡았을 때 피터의 눈이 커지는 게 보였다.

나는 욕설을 내뱉었다.

“이 개자식이.”

“뭐, 뭐……?”

“너 이 새끼. 애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대체 그게……!”

물론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쾅!

나는 남자의 팔뚝을 잡아챈 후 꽉 잡았다.

피부가 마치 찰흙처럼 변했고, 뼈가 우두둑 소리를 냈다. 피터의 얼굴이 고통과 경악에 물들었다.

“어, 어어?”

“뒈져라. 그냥.”

나는 그대로 피터의 팔을 부쉈다.

피터의 비명이 샐 찰나, 나는 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갈겨 버렸다.

“컥!”

주먹에 뼈가 부러지는 느낌이 와닿았다. 덩치 큰 남자는 주먹 한 방에 날아가 좁은 방의 벽에 부딪혔고, 그대로 기절했다.

남자가 기절한 채 바닥으로 주르르 미끄러졌다.

그 모습에 가슴 한편이 통쾌해졌다. 물론 내 감정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저 남자에게 쌓인 게 많았던 모양이다.

다만 나는 아주 통쾌해할 수만은 없었다.

절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이런 미친 새끼들이…… 대체 뭐 하는 놈들이야?”

메인 퀘스트를 시작한 지 이제 겨우 5분 정도 되었는데 나는 이 방에서 벗어나지도 못했고, 대신 두 사람을 곧장 기절시켰다.

음, 누가 봐도 사고를 쳤군. 이놈의 다혈질을 좀 고쳐야 할 텐데…….

뭐, 엎질러진 물은 어쩔 수 없다.

‘일단 이 자리부터 벗어나자.’

나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았다.

먼저 소지창에서 에이펙스의 광검, 앙겔루스의 가호, 님페의 바람을 꺼내어 장비했다. 키가 작기는 했지만 그래도 광검이 바닥에 끌릴 정도는 아니라 다행이었다.

나는 방을 나서기 전에 바닥에 누운 두 사람을 흘깃 눈짓했다.

제법 세게 때렸으니 둘 다 당분간 일어나지는 못할 테지만, 둘의 태도로 보아 기절에서 깨어나면 이쪽이 좀 곤란해질 위치인 듯했다.

솔직히 이대로 죽여서 입을 닫게 만들고 싶긴 하지만.

- 당신은 해당 인물로서 행동해야 합니다.

시야 한구석에서 메시지가 점멸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살인’은 내가 빙의한 꼬마가 할 법한 행동은 아닌 듯했다.

쳇. 나는 혀를 찼다.

어쩔 수 없지. 최대한 빠르게 행동하는 수밖에.

클리어 선행 조건을 찾는 게 우선이다. 나는 방을 벗어나기 위해 문고리에 손을 올리고 힘차게 젖혔다.

“아야!”

누군가 내가 열어젖힌 문에 이마를 부딪혔다. 열린 문틈 사이로 이마를 짚고 있는 조그마한 금발 여자애가 보였다.

그리고 나는 경악했고, 내가 말을 잃은 사이 여자애가 머리를 문지르며 날카롭게 외쳤다.

“뭐 하는 거야! 사람이 있는지 보고 문을 열어야지!”

하지만 나는 그 말에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진짜 무슨 상황인 거야?’

그도 그럴 것이, 여자애의 머리 위에 떠오른 이름이 바로 ‘42호’였기 때문이다.

사람 이름이 어떻게 42호일 수가 있어?

“뭐야. 왜 그래?”

여자아이는 나를 이상하게 여기는가 싶더니, 열린 문틈을 통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악당 둘을 발견하고 눈이 둥그렇게 변했다.

입도 덩달아 커졌다. 아무래도 비명을 지를 모양이었다. 나는 당황해 아이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으읍!”

“쉿!”

입을 틀어막힌 아이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당황, 경악, 공포, 그리고 약간의 통쾌함이 엿보였지만 곧 사라졌다.

아이가 곧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대체 뭘 한 거야, 77호.”

심지어 나는 77호야?

어이가 없었다. 그딴 게 어린애들 이름이라니, 아무래도 여기 미친 악당들이 있는 모양인데.

여자애, 그러니까 42호가 숨죽여 속삭였다.

“네가 뭘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빨리 도망가자. 여기 있으면 X될 것 같아.”

입이 험했다. 아무래도 보호를 받고 자란 꼬맹이는 아닌 듯했다.

빠르게 상황 파악을 끝낸 여자애가 내 손을 잡고 빠르게 문밖으로 이끌었다.

그렇게 나는 드디어 그 의문의 방을 벗어날 수 있었다.

물론, 그게 나쁜 일의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여자애의 손에 이끌려 방을 나와 복도로 나온 나는 숨을 삼켰다.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42호가 나를 재촉했다.

“왜 그래? 지금은 감시탑에 사람이 없어. 그들이 돌아오기 전에 얼른 벗어나야 해!”

문 밖의 광경을 본 순간 왜 나와 눈앞의 이 어린 여자애에게 이런 어이없는 이름이 붙어 있는지 깨달았다.

먼저 눈이 부셨다.

그건 중앙의 감시탑에서 쏘는 조명이 원형으로 된 감옥을 돌아가며 비추고 있기 때문이었다.

감시탑의 조명은 아직 우리를 비추고 있지 않았지만, 곧 가까워질 것 같았다.

내가 잠시 상황을 이해하느라 멍해져 있는 동안 42호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빨리 뛰어!”

그건, 조명이 우리를 비추기 전에 뛰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42호는 어린애치고 강한 힘으로 내 손목을 끌었다.

나는 42호와 함께 둥글게 이어진 복도를 달리면서, 철창살이 달린 감옥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감옥 안에는, 아이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마치 쓰레기처럼.

모두가 죄수였고, 비참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제야, 정말로 이 상황을 이해했다.

그래, 나는 지금…… 거대한 감옥, 판옵티콘 안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죄수 77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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