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142화
검이 휘둘러졌다.
검이 일으키는 바람이 아슬아슬하게 목의 살갗을 스쳐 지나갔다. 그 예리한 검풍에 피부가 슬쩍 베이는 것이 느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목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피부 한 겹?
이 여자를 상대로 겨우 그것만 내준다면 선방이지.
나는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느꼈다.
내 목을 찌르려 했던 검은 스쳐 지나가고, 반면에 내가 휘두른 검은 곧 상대방의 몸통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피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나는 상대의 무릎이 뒤로 물러서기 위해 움직이는 것을 보았지만, 그보다 휘둘러지는 내 검이 더 빨랐다.
‘이대로!’
나는 내 검이 상대방의 몸통에 닿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깡!
마치 철에 부딪치기라도 한 것처럼 검이 튕겼다. 휘두른 힘만큼 반동이 거세게 들이닥쳤다.
“윽!”
검을 쥔 팔이 튕겨 나가며 발이 흐트러졌다. 내가 자세를 무너트린 사이에 상대는 실패한 검로를 수습했다.
“흐압!”
기합 소리와 함께 상대의 발이 제자리를 찾았다. 내가 팔을 회수하는 사이에 한 발자국 내게로 가까워졌고, 방금 전 내 목을 자르는 것에 실패한 검이 다시금 길을 찾았다.
검이 내 목을 베려던 순간.
“항복!”
- 님페의 바람을 사용합니다.
나는 뛰어서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전략적으로는 후퇴였고, 다만 누가 보더라도 도망이었다.
님페의 바람이 내 몸을 아주 멀리 데려다 놓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알리시아가 크게 웃었다.
“하하하. 멍청이! 그렇게 당하고도 또 속냐?”
“속는 내가 문제가 아니라고! 대체 그 팔은 어떻게 되어 먹은 거야?”
방금 전 내 검은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된 알리시아를 타격했지만, 알리시아는 갑주조차 장비하지 않은 맨 팔로 내 검을 튕겨 냈다.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튼튼함이었다.
알리시아가 낄낄대며 제 팔을 휘둘러 보였다. 겉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고, 아마 실제로도 별 타격이 없을 것이다.
“튼튼한 건 알았지만 설마 성검까지도 튕겨 낼 줄이야. 이거, 용사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아주 거들먹거리는군, 젠장.
나는 혀를 차며 검을 검집에 도로 집어넣었다.
“궁금증이 풀려서 다행이군.”
나는 얼마 전 ‘에이펙스의 광검’을 손에 넣었고, 알리시아는 이 검이 자신의 몸을 벨 수 있는지 궁금해했다. 그래서 오랜만에 진검을 꺼내 들고 대련을 한 것이다.
“응, 마침 찌뿌둥했는데 잘됐지.”
다만 알리시아가 만족스러운 것과 달리 이쪽은 불만만 쌓였다.
나는 부루퉁한 표정으로 알리시아를 쏘아보았다.
“기분이 아주 좋아 보이네. 어?”
사실 이건 알리시아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냥, 내 성검의 문제이자 내 클래스의 고질적인 문제였다.
상대방이 악으로 규정되지 않는 이상 버프를 받지 못한다는 것.
몬스터의 경우 고위 몬스터일수록 마법을 사용하거나 마력을 축적하기에 그다지 상관없지만, 대인 전투에서는 확실히 약점이라고 할 만했다.
검사 클래스가 검을 사용할 때 시스템상 어느 정도 도움을 받는다는 걸 생각하면 여러모로 아쉬운 일이었다. 그 덕분에 아무래도 내 검술은 순수 검사 클래스인 알리시아보다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어쩔 수 없다고는 해도 역시 자존심은 상했다. 마검사 클래스조차 검술 보정을 받는데, 용사 클래스는 아무것도 없으니.
“망할, 왜 용사가 되어서.”
“어이쿠, 그런 희귀한 클래스를 열었는데 불평할 건 아니지. 나는 그냥 검사라고.”
대륙 제일의 검사이자 용병왕인 여자가 씩 웃었다.
웃기고 있네.
나는 자존심을 놓지 못하고 투덜거렸다.
“네가 악마라면 이야기가 달랐을걸. 방금 전 그 한 방으로 아주 보내 버릴 수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나는 너처럼 마왕을 꼬드기는 재주가 없어서 말이야. 앞으로도 악마가 될 일은 없어 보이는데?”
나는 검집에 넣었던 검을 도로 빼 들고 알리시아를 노려보았다.
“다시 한번 말해 봐. 뭐가 어쩌고 어째?”
“응, 네가 릴리스를 꼬드겼다고. 어쩌다 마왕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가…….”
나는 질겁했다.
“야! 죽고 싶어?”
“아, 진짜 웃기다. 질색하는 것 좀 봐.”
“질색 안 하게 생겼어?”
“하하, 푸하하하하!”
알리시아는 이제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흙바닥에 앉아서.
대체 뭐가 그렇게 재밌다는 건지 모르겠다. 저러다 아주 뒤로 넘어가시겠네. 긴 은발이 흙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내 화난 얼굴은 아무 효과도 발휘하지 못했다.
망할.
“에라이.”
나는 결국 화를 내는 걸 포기하고 검을 집어넣은 채 알리시아 옆에 냅다 누워 버렸다. 딱딱하고 차가운 기운이 대련의 열기를 적절히 식혔다.
“그러게 누가 악마 앞에서 매력을 발휘하래?”
“그 농담 아직도 안 끝났어?”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아마…… 릴리스가 다시 나를 마계로 데려오겠답시고 인간 계약자를 만들어 발악하던 때였을 것이다. 덕분에 나는 한동안 알리시아의 놀림감이 되었다. 마계에 다녀오더니 마왕을 추종자로 만들어 왔다면서.
젠장, 그딴 추종자는 이쪽에서 사양이다.
나는 진심으로 억울했다.
“도대체 내가 뭘 했다는 거야? 나는 그냥 릴리스 목을 딴 것밖에 없다고.”
알리시아가 코웃음을 쳤다.
“그러게, 목을 따는 게 아니라 무릎 꿇고 두 손으로 싹싹 빌면서 살려 달라고 했어야지.”
“뭐?”
“그럼 걔들 특성상 금방 질려서 거들떠도 안 봤을걸. 그럼 피차 해방이잖아. 악마는 질리고, 너는 귀찮은 것들 떨어 버리고.”
나는 잠시 그 조언을 진지하게 고려해 보았다.
그러니까 릴리스의 그 오만한 얼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하라고?
……그래, 뭐, 확실히.
나는 인정했다. 릴리스가 가장 싫어할 짓이긴 했다.
“상상해 봤는데, 절대 못 할 것 같다.”
하지만 실제로 내가 그런 걸 할 수 있냐는 건 별개였다. 그냥 혀 깨물고 죽고 말지.
내 질린 얼굴을 바라보며 알리시아가 한 번 더 낄낄댔다.
“그래그래, 원래 곧으면 곧을수록 꺾고 싶어 하는 변태들이 몰려드는 법이야. 그런 작자들한테는 적당히 숙이고 두려운 척 연기도 해야 재미가 없다고 떨어져 나가는데.”
알리시아의 말에 이제껏 내가 겪어 왔던 숱한 인물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나를 손에 넣으려고 별 더러운 짓을 꾸몄던 귀족들이라든가, 왕족이라든가, 기타 등등 기타 등등…….
그리고 나는 곧 인정했다.
되짚어 보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러냐? 자존심 상하게.”
“자존심이 밥 먹여 주냐? 굽혀서 편해진다면 굽히는 것도 방법이야.”
“물론 일주일쯤 굶으면 눈이 돌아가기야 하겠다만…….”
뭐든 간에 쓸데없는 소리였다.
나는 몇 마디 더 투덜댔지만, 그보다 뒤늦게 찾아온 피로가 나를 덮쳐 와서 입을 다물었다. 그건 알리시아도 마찬가지였는지 곧 우리 사이에는 침묵이 찾아왔다.
깊게 호흡을 하면서, 나는 천천히 공기가 폐부를 채우는 것을 느꼈다. 얼마 전까지 마계에서 호흡하던 때와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망할.’
가볍게 이야기하고는 있었지만 나는 아직 마계에 떨어졌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내가 겪어야 했던 수모, 고통, 그 모든 게 아직도 내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순간적으로 호흡이 불안정해졌다.
그러자 옆에서 귀신같이 다정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숨 쉬어.”
“……어, 알아.”
“흠, 그나저나 생각해 보니까 말이야.”
알리시아가 문득 침묵을 깼다.
누운 채 옆을 돌아보니 알리시아가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그 시선은 흐린 밤하늘을 더듬었다.
“나도 너한테 충고할 만한 입장이 아니군. 나도 절대로 굽히지 못했던 게 하나 있었어.”
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알리시아가 이야기를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알리시아는 스스로에게 말하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대륙 최고의 살인마가 되었을 때 이야긴데.”
알리시아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안다.
일리아스와 알리시아는 어릴 때 고아가 되었고, 대륙의 멸망에 맞선답시고 아이들을 학대하는 단체에 붙잡혔다.
그렇게 오랜 세월 고통받아 왔다.
그리고 알리시아는 성년이 되자마자 그 모든 이들을 학살했다.
아주 유명한 이야기였다. 타르토스 대륙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 정도로.
대륙 최고의 악명을 떨친 용병왕이 흥얼거리듯 말했다.
“내가 베었던 놈들 말이야. 나를 그들의 최고 걸작품이라며 치켜세우고 던전 공략을 전폭적으로 후원해 준다고 했어.”
“응, 알아.”
“그래도 나는 그들을 모두 죽였어. 도대체 왜 이러냐며 빌더군. 흐음, 아마 수백은 족히 베었을 거야. 어쩌면 천 명 이상 이었을지도 몰라. 그런데 다들 어쨌든 너는 살아남아 강해졌으니 성공한 게 아니냐며 그러지 말라고 하더라.”
알리시아의 얼굴을 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보지 않아도 그 표정이 어떨지 느껴졌다.
비웃음을 띠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딴 건 상관하지 않았어. 세상의 멸망을 막고자 한다는 대의명분 아래,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이유로 고아들을 데리고 실험을 한 놈들이야. 내 어깨에 몬스터의 팔을 가져다 붙이고, 던전에 집어넣고, 죽지 않으면 또 집어넣었어.”
그래, 지금 이 용병왕의 팔 또한 그 실험의 결과물이었다.
어릴 때 알리시아는 던전 브레이크에 휘말려 오른팔을 잃었으나, 실험을 통해 몬스터의 팔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알리시아의 오른팔 모습은 무척 기괴했다. 멀리서 보기에도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적당한 크기의 몬스터가 그리 많지 않아 선택지가 적은 편이었다나? 보통은 고블린, 운이 좋으면 오우거. 그런 식이다.
그래서 저 팔은 검을 맨몸으로도 튕겨 낼 정도로 강하지만, 주기적으로 관리를 해 주지 않으면 썩어 들어간다.
“차라리 실험이 실패해서 죽었다면 좋았을 텐데, 왜 나 같은 천재가 튀어나와 버린 걸까.”
알리시아가 침을 뱉으려다 지금 누운 상태라는 걸 자각한 건지 멈추었다.
그대로 뱉었으면 재밌었을 텐데. 어조는 이제 제법 연극적이었다. 알리시아의 경우, 그건 농담보다는 진담의 비율이 높다는 의미였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뭐라고 해 주길 바라? 넌 천재 맞아. 그리고 그딴 실험이 없었어도 똑같았을 거야.”
알리시아를 천재 외의 무엇이라고 부른단 말인가. 뭐, 하늘의 재앙 같은 걸로 부를 수는 있겠군.
알리시아가 내 말을 듣고 웃었다.
“그래, 그냥 내가 천재였을 뿐이지. 그런데 그런 나를 보고 계속해서 같은 짓을 할 거라고 생각하니 모조리 죽이지 않고서는 도저히 못 참겠더라고.”
알리시아가 씩 웃었다. 녹색 피부의 팔이 불길하게 꿈틀거렸다. 아무래도 관리를 해 줄 때가 다가오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전 대륙을 이 잡듯이 뒤져서 다 베어 버렸다, 이거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모르겠어? 음, 아무리 끔찍한 일을 겪어도 결국 지나고 나니 별거 아니더라, 그런 이야긴데.”
“그래, 알겠어. 그리고 알리시아. 넌 진짜 위로에 소질이 없어.”
“아, 그건 나도 느꼈어.”
* * *
하지만, 알리시아는 결국 모든 것을 다 부수지는 못했던 것이 분명했다.
나는 타르토스에 있다.
그렇다면 이곳은 알리시아가 전 대륙을 거쳐 죽여 버리려고 했던 집단 중 하나가 장악한 곳이 틀림없었다.
아이들을 가두어 놓고, 인체 실험을 하고, 던전에 집어넣는다.
어쩐지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알리시아가 떠오른다 싶더니, 여기가 타르토스라는 상상을 못 해서 연결시키지 못했다 뿐이지 너무도 알리시아의 이야기 그 자체였다.
“망할 새끼들.”
그렇게 내뱉으며, 나는 루카스의 기념주화를 조심스럽게 손에 쥐었다.
그 동전은, 내 희망적인 관측이었을지 모르지만, 그리 오래되어 보이지는 않았다. 적어도 100년 전에 발행된 동전 같지는 않다는 말이다.
이 동전이 언제 발행되었더라?
기억은 금세 되살아났다.
‘나랑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야.’
나와 아리아드네는 가출한 왕자님을 우연히 만났고, 셋이서 함께 수도 근처의 한 던전을 공략했다. 이건 그 공적을 치하하는 의미에서 찍어 낸 기념주화다.
이게 있다는 건 지금 내가 있는 이 타르토스는 그 시점 이후의 장소라는 말이 되겠지. 그리고 아주 오래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타르토스는 아직 멸망하지 않았다.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희망이 가슴을 맴돌았다.
- 메인 퀘스트 : 운명의 씨앗을 수집하여 운명을 변화시키십시오.
- 보상 : 멸망한 세계의 복구
이제껏 이 메인 퀘스트의 내용이 제대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슬슬 감이 잡히기 시작하고 있었다.
먼저, 운명의 씨앗.
운명의 씨앗은 정소현이 살고 싶다고 말했던 순간에 나타났다.
만일 정소현이 없었더라면 과거 대한민국은 벌써 아무도 모르게 끝장났을 것이다. 당시에 한국에 살고 있던 꼬맹이였던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정소현은 희생했다. 사람들을 살렸다.
그러나 그 희생은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고, 정소현은 어린 아들을 남기고 죽어야 했다.
그렇게 끝난 과거였다.
하지만 거기서 내가 개입했다.
정소현은 나를 만났고,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의지가 정해져 있는 줄로만 알았던 운명을 아주 약간, 뒤틀었다.
‘맙소사…….’
나는 주먹을 쥐었다. 왜 진작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이 모든 게 가리키는 바는 명확했다.
그러니까. 즉, 운명의 씨앗이란 이미 흘러가 버린 과거를 바꿀 수 있는 기회, 그 자체였다.
그리고 지금 나는, 운명의 씨앗을 가지고 타르토스에 돌아왔다.
시스템상 이미 멸망했다는 세계에, 운명을 변화시키라는 퀘스트를 수행하러 돌아왔다.
그게 의미하는 바는 명료했다.
“여기서 타르토스의 멸망이 시작되는 거로군.”
그리고 나는 그걸 막아야 했다.
막을 기회가 주어졌다.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 메인 퀘스트가 시작되었습니다.
시스템 메시지를 보며 나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래, 이제야 좀 할 맛이 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