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143화
하지만 메인 퀘스트가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고 해서 이 상황이 갑자기 기름 친 쳇바퀴처럼 부드럽게 굴러갈 수는 없었다.
도대체 이 감옥의 어디에서 타르토스의 멸망이 시작되었던 걸까?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가능성, 첫 번째.
던전 브레이크가 터졌다.
꼬맹이가 말해 준 정보에 따르자면 이 감옥의 지하에는 던전이 있다. 난도 혹은 보스 몬스터 따위의 상세 사항은 불명.
그러니 해당 던전의 포화도가 넘쳐서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난 결과 타르토스가 멸망에 이르렀을 가능성이 있다.
혹은, 두 번째.
이 감옥을 지배하는 악당들이 타르토스를 멸망시켰다.
이 경우 악당들을 처치하면 그만이니까 제일 간단하겠군.
악당들을 몇 마리 마주쳤는데도 선행 조건이 뜨지 않는 걸 보니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만, 개인적으로는 이 가설이 맞았으면 좋겠다.
‘당장 확인해 볼 수 있는 건 이 두 가지 정도인가.’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가설이 떠오르기는 하지만, 어쨌든 선행 조건을 채우지 못한 상황이다. 정보가 없는 현재 상태로는 모든 게 그저 가능성일 뿐이다.
결국, 일단은 밖으로 나가서 뭐라도 캐 봐야 한다.
그래도 당장 할 일은 정해졌군.
악당들의 우두머리를 찾아가서 부수고, 아이들을 풀어 주고, 던전의 포화도를 확인한다. 이 모든 게 메인 퀘스트가 아니라면 그다음에 다시 생각한다.
간단해서 좋군.
‘좋아, 가 보자고.’
나는 두꺼운 나무문에 바짝 붙어 서서 귀를 기울였다. 바깥 상황을 엿듣기 위해서였다.
얼마 있지 않아 귀에 소리가 잡혔다.
“망할, 이 꼬맹이들은 대체 어딜 간 거야? 요새 배때기가 불렀지, 아주!”
쿵쿵대는 발소리, 화가 잔뜩 난 목소리까지.
상황을 미루어 보아 아무래도 나와 지금 침낭 위에서 쿨쿨 자고 있는 꼬맹이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기절시킨 두 사람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 걸 보니 그 둘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는 거고.
다행이군.
흠흠, 한번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좋아, 아이를 연기할 준비 다 됐다. 되도록 많은 정보를 빼내야 하니 순진한 아이인 척을 하면서…… 나는 숨을 가다듬고 문을 열었다.
“어디 있어, 이 새끼들!”
퍽!
“으억!”
“…….”
나는 내가 밀친 문에 머리를 맞아 바닥에 쓰러진 남자를 멀거니 내려다보았다. 두꺼운 나무문에 얼마나 세게 부딪힌 건지 그대로 바닥에 뻗어 버린 것이다.
“……아니, 뭐 이런…….”
난 분명히 평화롭게 가려고 했는데, 하필이면 그때 문 앞에 서 있을 게 뭐람.
아니, 잠시만.
감시탑 조명!
나는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원형으로 된 감옥의 중심에 있는 감시탑 조명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벌써부터 내 움직임을 들키면 곤란하지.
‘일단 이것부터!’
나는 재빠르게 미리 준비해 둔 아이템을 바닥에 던졌다.
시스템이 곧 메시지를 띄웠다.
- 아이템, ‘암막 커튼’을 사용 중입니다.
- 제한 시간 06:00:00
메시지와 함께 눈앞에서 조그마한 검은색 장막이 펼쳐졌다. 시야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별건 아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조명탑의 빛을 완전히 차단한 것이다.
‘역시 뭐든지 모아 둬야 한다니까.’
이건 사실 내 돈으로 사라면 돈이 아까워서 굳이 사지 않았겠지만, 조한율 카드로 사는 김에 산 소도구였다.
그런데 이렇게 쓸모가 생길 줄은.
물론 사방이 철창 달린 감옥인 만큼 아무 데서나 사용했다간 감시탑에서도 금방 위화감을 알아차리겠지만, 다행히 여기는 두꺼운 나무문 앞이었다. 그리고 이 암막 커튼은 내가 지정한 대로 꼭 나무문만큼의 크기만 가려 주고 있고.
겉으로 언뜻 보기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래도 오래 있으면 들킨다.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해.’
그러니 지금 눈앞의 이 남자에게서 최대한 정보를 뽑아내야 했다.
일단 조용히 움직여야지. 나는 빠르게 소지창을 뒤져 아이템 몇 개를 더 꺼냈다.
“으, 으윽…….”
막 아이템을 사용한 그때, 마침 쓰러졌던 남자가 신음을 흘렸다. 기절한 것까지는 아니고, 잠시 뇌진탕이라도 일으킨 듯했다.
혹시 상대의 정보가 떠오르지는 않는지 아이의 기억을 뒤져 보았지만, 피터나 에이미와는 다르게 남자의 머리 위에는 이름도 떠오르지 않았다.
뭐, 죄수가 간수의 이름을 아는 게 더 이상한 상황이긴 하지.
……이거 점점 더 열 받는데. 그리고 시간도 없다.
나는 손을 들어 올렸다.
철썩!
“욱!”
“정신이 들어?”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이자 뺨을 얻어맞은 남자가 멍청하게 눈을 껌벅였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본인이 누구한테 맞았는지 알아차리기 전에, 남자의 눈이 내 모습을 인식했다.
곧장 익숙한 경멸과 혐오가 눈동자에 자리하는 것이 보였다.
흠, 순순히 꼬맹이 흉내는 무슨. 역시 익숙한 방법으로 가자.
“이 망할 꼬맹이가, 지금 뭘 하는……!”
뻐억!
이번엔 주먹으로 적당히 턱을 갈겼다. 턱을 때려서 남자는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나는 남자의 멱살을 잡고 몸을 일으키게 했다. 남자의 얼굴이 다시 나를 응시했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보는 듯한 눈이었다.
나는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아리아드네가 그랬는데, 내가 이렇게 웃으면 무섭다고 했다. 물론 아리아드네는 내가 눈만 흘겨도 너무 무섭다고 호들갑을 떠니까 신빙성은 별로 없다만.
아니, 지금 생각해 보니 그냥 날 놀린 건가?
뭐, 어쨌든 남자의 눈에 슬슬 두려움이 차오르는 걸 보니 내가 몸을 빌린 꼬맹이 얼굴이 나보단 좀 더 무섭게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남자의 멱살을 잡고 좀 더 흔들었다.
“네 혀를 뽑은 건 아니니 말을 할 수는 있겠지. 안 그래?”
“뭐, 이게 무슨…… 네깟 게…… 꾸엑!”
배를 주먹으로 갈겼더니 이번에야말로 입을 다물었다.
음, 타르토스에 왔다는 게 새삼 실감이 나는군. 저놈의 네깟 게, 네 주제에 운운하는 놈들은 질리지도 않고 나타난다. 물론 악당이야 어디든 있겠지만 역시 신분제 사회는 망해야 한다.
아차, 루카스한테는 미안.
남자의 머리채를 잡아 올린 후 나는 조용히 물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묻는 말에만 대답해. 그게 내가 널 살려 두는 유일한 이유니까…… 질문은 두 가지야.”
“커헉…….”
“첫 번째. 아이들을 실험하는 작자는 어디에 있지? 대장이 있을 거 아니야.”
내 질문에 남자의 눈에 불신이 서렸다.
“……그런 건 왜 묻…… 컥!”
나는 한 번 더 주먹으로 갈긴 후 한숨을 쉬었다.
‘대체 이 꼬맹이들이 뭔 일을 당한 건지 상상도 하기 싫어지네.’
그것도 그럴 것이 남자의 얼굴을 본, 몸속 어딘가 남아 있는 꼬맹이가 덜덜 떨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 본인을 괴롭히던 악당을 때려눕혔는데 속 시원해하기는커녕 오히려 겁을 집어먹은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이 남자는 피터와 에이미보다도 훨씬 더 공포를 느끼게 하는 대상이었던 모양이다.
‘죽이기라도 했다간 정말 큰일 나겠군.’
추측해 보자면 저번에 페트라에 빙의했을 때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것이 ‘배신’이었듯이, 이번 꼬맹이의 경우 ‘살인’이 비슷한 무게로 느껴졌다.
하기야 나이를 생각해 보면 당연한가.
물론 그런 것치고 이런 고문 비슷한 행동이 허용되는 걸로 봐선, 시스템이 적을 상대로는 상당히 유한 판정을 해 주는 듯싶지만.
‘내가 한 일이 꼬맹이 기억에도 남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겠군.’
나는 남자의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다음에 다른 소리 하면 혀를 뽑을 거야.”
그렇다면 죽이는 거 빼고는 다 할 생각이다.
허풍이 아니라 진심으로.
옆구리에 찬 성검도 동의하는지 조용했다. 내 진심이 전해진 건지 악당의 얼굴에 서서히 두려움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야 조금 귀찮아질 뿐이야. 네 혀를 뽑은 다음에는 다른 놈을 찾으러 갈 거라서.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닐 듯싶은데.”
목을 틀어쥔 채 말하니 이제야 좀 말을 알아듣는 눈치였다.
남자가 벌벌 떠는 것이 손아귀 사이로 느껴졌다. 드디어 남자가 입을 열었다.
“시, 실험 소장은 보통 실험실에 있어. 7층이야.”
“내가 7층까지 그냥 올라갈 수 있나? 가는 길에 지키는 사람 있어?”
“당연히 있…… 지. 층마다 우리가 있고, 가는 길에는 보안 마법도 걸려 있고…….”
그렇게 말하던 남자의 눈이 문득 의심으로 가늘어졌다.
“이상하군. 왜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묻지? 너는 제법 똑똑한 아이인데…… 억!”
“질문은 내가, 대답은 너만. 알아들었지? 그럼 두 번째 질문이야.”
어린애나 괴롭히는 악당 주제에 근성 있는 척하기는.
나는 한 번만 더 건방지게 굴면 얼굴을 영구적으로 변형시켜 줄 생각으로 주먹을 든 채 물었다.
“지하에 던전이 있다지? 계속 공략이 되고 있는 건가, 아니면 내버려 두고 있나?”
“……쿨럭, 던전은…… 한 달에 한 번씩 정기 공략하고 있어.”
“그럼 포화도에 문제는 없어?”
“없어! 내 말을 못 믿겠다면 직접 내려가서 확인해 보면 될 것 아냐!”
남자가 제법 큰 소리를 냈다. 그러고 나서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푸, 푸하하하하!”
“뭘 처웃고 있어?”
“죽일 거면 진작 죽였어야지. 이런 건물에서 내 목소리를 아무도 듣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거야? 곧 동료들이 달려올 거다!”
“아…… 저런.”
뭐, 그런 걸 노린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픽 웃었다. 남자도 나를 따라 웃었다. 피를 질질 흘리면서도 웃는 게, 어딜 봐도 훌륭한 악당이었다.
“상황 파악이 안 되냐, 꼬맹아? 애초에 너 같은 게 어떻게 실험에서 살아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봤자 부작용이 일어나서 곧 뒈질걸.”
“부작용?”
“그래, 그리고 네 친구들처럼 저 지하 던전 안에서 처리되겠지. 쓰레기들.”
그렇게 말하며 남자가 침을 탁 뱉었다.
물론 맞아 주진 않았다만, 심히 불쾌했다. 한 대 칠까, 생각하다가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어떤 위화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네.”
“뭐가 말이냐?”
“너희들, 대륙의 안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인체 실험까지 하는 게 아니었어? 어째 실험의 성공보다는 실패를 바라는 것 같아서.”
그 점에 착안하니 점점 이상하게 느껴진다.
알리시아만 해도 각종 인체 실험으로 학대당하기는 했지만, 살아남은 후 말도 안 되는 힘을 손에 넣으니 전폭적인 후원을 해 주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역겹기는 해도 이 집단의 궁극적인 목적은 던전의 공략을 도와 대륙의 평화를 이룩하는 것이니까.
그런데 이들은 실험의 성공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이 차이점은 대체 뭐지?
“하, 하하하하!”
그런데 내 말을 들은 남자가 갑자기 폭소하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찌푸렸다.
남자의 입이 웃음으로 벌어졌다.
“하하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우리가 또다시 그 최악의 실수를 반복할 것 같아?”
“최악의 실수?”
“그래, 그 저주받을……!”
그러다가, 남자가 갑자기 말을 뚝 멈추었다.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뭐야. 하던 말 계속하지?”
“……왜 아무도 오지 않지?”
내게 머리채를 잡힌 채 남자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그렇게 크게 말하고 있는데도 아무도 달려오고 있지 않으니까.
“뭐, 뭐야? 언제 저런 걸 쓴 거지?”
그리고 남자는 곧 감시탑의 조명을 가리고 있는 아이템, 암막 커튼까지 발견하고야 말았다.
이런, 혀가 아니라 눈을 어떻게 했어야 하나.
“그래서 저주받을, 그다음 말은 뭐야? 100원 줄 테니까 다음 말 좀 해 봐.”
“이게 무슨……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아무래도 그른 것 같군.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망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여기까진가.”
그래도 악당의 우두머리가 7층에 있다니 당장의 행선지 정보는 얻었다.
이 남자를 더 추궁하면 뭐가 나오기는 하겠지만, 계속해서 암막 커튼을 사용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무래도 자세히 보면 티가 날 테니까.
나는 남자를 오랫동안 기절시키기 위해 주먹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내리치기 전에 문득 대답했다.
“아, 뭘 했길래 네 동료가 오지 않는 거냐고 물었지?”
처맞기 직전의 남자가 눈을 껌벅였다.
나는 거기다 대고 씩 웃어 주었다.
“남의 카드로 산 아이템 썼다. 왜?”
빠각!
턱에 시원한 어퍼컷을 후려 맞은 남자의 눈이 휙 돌아가며 몸이 축 늘어졌다. 일어나더라도 아마 한동안은 두개골이 빠개질 만큼 아플 거다.
“나이스.”
나는 나직이 휘파람을 불었다.
물론, 이 소리가 원형 감옥 안에 울려 퍼질 일은 없었다.
- 아이템, ‘소음 방지 부스’를 사용 중입니다.
- 제한 시간 01:00:00
대한민국 제작자 만세다.
참고로, 이 아이템의 부가 설명란에는 ‘개인 노래방으로도 사용 가능’이라고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