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144화
나는 곧장 기절한 남자의 허리춤부터 뒤졌다.
불쾌한 접촉 끝에 열쇠 꾸러미가 튀어나왔다.
‘그래도 보람이 없지는 않군.’
빼앗은 열쇠 꾸러미를 찬찬히 살펴보니 꾸러미에는 대략 십여 개의 열쇠가 달려 있었는데, 두어 개를 빼고 나면 모양은 달랐지만 크기가 일정했다.
이 남자가 나와 나무문 너머의 꼬맹이와 함께 이 층을 순찰할 예정이었다는 것까지 감안하면, 아마도 이 5층의 감옥 문을 열 수 있는 열쇠일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열쇠 꾸러미를 쥔 채 생각에 잠겼다.
아이들을 탈출시킨다.
간단하게 정리한 해야 할 일 중에 하나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문이야 열쇠로든, 검으로든 베어서 열면 그만이긴 한데.’
감옥에 갇힌 아이들을 탈출시키는 거야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만 언제, 그리고 어떻게 문을 열어 주느냐는 또 다른 문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철창 안의 아이들은 모두 바닥에 축 늘어진 채 미동도 보이지 않는 상태였던 것이다.
‘걸을 수 있는지도 의심스러운데.’
아마도 다들 실험 부작용을 겪고 있는 거겠지.
이 상태로는 내가 감옥을 부수고 아이들을 내보낸다고 한들, 감옥 내의 추격자들이 쫓아간다면 별 반항도 하지 못하고 다시 잡힐 확률이 높았다.
‘아이들의 안전이 최우선이어야 해.’
게다가, 나는 이 감옥 밖의 상황이 어떤지 모른다. 보급품이 한 달에 한 번씩 들어온다면, 이 감옥이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을 확률도 있었다.
여러모로 정보가 필요했다.
또 다른 문제도 있었다.
‘탈출시키고, 그다음은?’
탈출시킨 아이들은 어디로 보내야 하는가?
나는 타르토스 대륙이 힘없는 아이들에게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 곳인지 알고 있다.
내가 스무 살 때 겪은 일이라 더더욱.
이 감옥이 정확히 타르토스 대륙의 어떤 국가에 위치해 있는지는 모르겠고, 내가 온 시점이 어느 때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한 아이들이 자립할 만한 능력을 키우기 전까지 돌봐 줄 곳은 많지 않다.
현대 한국이 하듯이 아이들을 국가 예산으로 병원에 보내고 적절한 보호처를 찾아 주는 식의, 그런 최저한의 보호 장치도 없다는 뜻이다.
특히나 아이들이 당장 노동력으로 쓸모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실험으로 인한 부작용까지 겪고 있는 상황이면…….
물론 내가 이 감옥에서 애들을 꺼낸 후에도 이곳…… 타르토스에 머물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나는 그 가능성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이었다.
‘정소현 때처럼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지.’
어쨌든 시스템이 내건 메인 미션을 해결하라는 형식으로 타르토스에 온 것이니, 그 미션을 해결하고 나서도 타르토스에 머물 수 있는 확률은 적다고 봐야 한다,
즉, 나 혼자서는 미션이 끝난 후 아이들을 돌봐줄 방법을 찾을 수 없다.
그렇다고 이번에도 119 버튼조차 제대로 누르지 못하고 쫓겨날 수는 없다. 결코.
어떻게든 친구들…… 특히 아리아드네에게 연락할 방법이 있다면 아이들 문제는 해결될 테지만……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도 그럴 게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아리아드네의…….
“……쳇.”
나는 혀를 찼다.
그래, 인정하자.
내가 있는 곳이 타르토스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부터 마음이 통 진정되질 않았다.
원래라면 당장 이 암막 커튼 따위는 해제하고 감시탑부터 부수러 나섰겠지.
그런데 어쩐지 바닥에 발이 붙은 듯이 떼어지질 않는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당장 이 감옥을 뛰쳐나가고 싶다. 한시도 더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일에 신경 쓰고 싶지도 않다.
내 친구들이 다들 무사한 모습을 볼 때까지는…….
‘그만.’
나는 자꾸 요동치는 마음을 다스리려 애썼다. 허리에 찬 검의 손잡이를 꾹 쥐자 손안에 식은땀이 맺혀 있는 것이 느껴졌다.
‘진정하라고.’
그래, 당장 이곳에서 뛰쳐나갈 수도 있겠지.
뛰쳐나가서 여기가 어딘지 파악하고, 아무나 붙잡고 이곳이 어딘지 알아내고, 그러고 나서 타르토스에서 가장 유명한 용병 일행이 지금 어디에 있냐고 윽박지를 수도 있다.
하지만…… 학대받는 아이들을 구할 수 있는데도 애들을 못 본 척, 내팽개치고 친구들의 안전부터 확인하러 간다?
당장 알리시아부터 나를 죽이려 들 것이다.
알리시아의 과거야 워낙 유명했지만, 그 애가 제 입으로 직접 과거를 설명한 건 마음을 연 친구 몇 명뿐이다.
그만큼 이 감옥은 알리시아에게 씻어 낼 수 없는 상처고, 동시에 책임이기도 했다.
알리시아는 자신이 피를 묻히는 걸 망설인 탓에 더 많은 피해자가 나왔다고 스스로를 비난해 왔다.
그런데 심지어 아직도 이런 시설이 존재하며,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고통받는 아이들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도저히 참을 수 없어 할 것이다.
나도 그 꼴을 참아 줄 수 없을 테고.
- 메인 퀘스트를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여기서 벌어지는 사건 때문에 타르토스가 멸망한다면 다들 무사하고 말고도 없다.
내가 여기서 타르토스의 멸망을 막아 내야만 다음 기회가 있다.
나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됐다. 진정했어.’
나는 슬쩍 암막 커튼 뒤에서 고개를 내밀어 전체적인 모습을 살폈다.
다행히 소음 부스 아이템이 역할을 톡톡히 했는지 아직까지는 누군가가 소란을 눈치챈 흔적은 없었다.
하지만 각 층에서 순찰을 도는 간수들이 보였다.
돌아다니는 인원은 각 층마다 두 명 정도. 감시탑은 역광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저쪽에도 사람이 있겠지.
‘몰래 7층까지 접근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겠군.’
간수들의 수 자체는 적다.
하지만 이쪽은 길도 모르는 데다 이 감옥의 구조 자체가 문제였다. 판옵티콘 형태를 취한 여기는 감시탑에서 모든 층이 훤히 들여다보였기 때문이다.
솔직히 이 암막 커튼의 존재가 아직까지 들키지 않는 유일한 이유는, 지금 감시탑에 있는 놈들 쪽이 얼큰하게 취해 있기 때문이다.
오늘이 한 달에 한 번 있는 보급날이었다는 게 행운이다.
타르토스에서 꽤 많은 감옥을 보았지만, 처음 보는 형태였다.
‘대체 왜 이런 감옥을 지은 거지?’
그저 효율적으로 아이들을 감시하려고?
하지만 여기에 갇힌 죄수들은 제 발로 걷지도 못할 정도로 힘들어하는 아이밖에 없는데, 대체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감시하려는 이유가 뭐지?
혹은, 다른 경우를 상정하고 지은 건물인가?
머리를 굴리는 동안에도 감시탑의 조명은 여전히 일정한 간격으로 온 감옥을 비추며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감옥 안을 도는 조명이 대략 어느 정도 간격으로 돌아오는지 숫자를 세어 보았다.
하나, 둘 셋…… 조명이 같은 곳에 다시 돌아오기까지 대략 10초 정도 걸렸다.
그래, 10초라.
뚜둑, 나는 손가락을 꺾었다.
‘가장 먼저 할 일. 감시탑에 있는 인원을 제압해야 해.’
저 감시탑에서는 모든 층이 훤히 들여다보이니까.
그리고 다행히도 감옥 복도에서 중앙의 감시탑까지는…… 뭐, 뛰지 못할 거리도 아니다.
즉, 조명이 잠시 떠났을 때를 노려 감시탑까지 뛰어서 침입하면 된다.
‘문제라면 님페의 바람을 못 쓰는 것 정도.’
아이템을 사용했다간 바람 소리 때문에 들킬 확률이 높아진다. 결국 내 다릿심만으로 저 멀리까지 도달해야 한다.
그리고 조명이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내가 감시탑에 매달려 있다면…… 들키겠지.
즉 10초 안에 감시탑 위로 기어 올라가 간수들을 제압해야 한다.
나는 아직 부족하게만 느껴지는 다리 근육을 툭툭 두드려 보고, 내가 뛰어야 할 거리를 가늠해 보였다.
음, 솔직히 좀 멀긴 해. 떨어질 확률은 반반일까? 여기 5층이었지. 어, 바닥에 떨어지면 좀 아프긴 하겠군. 갈비뼈 몇 대 정도는 각오해야 할지도. 그래도 팔이랑 머리만 지키면 뭐, 검은 휘두를 수 있겠지. 아주 멋진 플랜 B네. 망할.
조명은 감시탑의 꼭대기에 있었고, 그 바로 아래에 사람이 있었다.
감시자는 둘.
술에 취해 시뻘건 얼굴을 한 채 하품을 쩍쩍 하는 꼴을 보니 상당히 피곤해 보인다.
“……후우.”
나는 심호흡을 했다.
‘할 수 있어.’
그대로 잠재워 보자고.
- 아이템, ‘은의 장막’을 사용하였습니다.
가면을 쓴 채, 조명이 암막 커튼을 막 지나쳤을 때 복도의 난간을 짚고…… 재빠르게 허공으로 뛰었다.
텁!
하지만 아슬아슬했다. 벽돌로 된 벽에 몸이 세게 부딪혔다. 나는 매끈한 벽돌에 거의 손을 박았다. 몸을 둘 곳이라곤 아무데도 없었다.
망할.
조명이 제자리로 돌아오기까지 남은 시간 8초.
벽에 박혀 버린 손가락 때문에 벽돌 조각이 부스러져 떨어져 나가는 것이 보였다.
저 조각이 바닥에 부딪혀 소리가 나기 전에 이 위로 올라가야 한다.
남은 시간, 7초.
소리를 내면 안 되기 때문에 발로 벽을 박찰 수는 없었다.
손가락 힘만으로 벽을 오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몸 전체의 무게를 지탱하는 손가락에 으득, 하고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고, 어떻게든 힘을 넣어 몸을 밀어 올렸다.
5초.
“허……?”
그리고, 감시탑 조명 아래에 앉아 있던 간수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입이 벌어지고, 옆에 있던 동료에게 손을 막 뻗으려고 하던 찰나.
3초.
- 아이템, ‘즉각성 수면제’ 를 사용합니다.
조한율의 카드에 한 번 더 감사하도록 하자. 향수 형태의 수면제라니, 유용하기 짝이 없다.
아이템을 사용하는 즉시 두 사람이 바닥으로 픽 쓰러졌다. 나는 바닥에 쓰러지기 전에 두 사람의 몸을 잡고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했다.
좋아, 해치웠……!
“어이, 오늘 5층 담당은 누구야? 왜 순찰하는 게 안 보여? 감시탑, 무슨 문제가 있나?”
그때였다. 3층 즈음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 목소리가 뻥 뚫린 중앙의 공간을 타고 울려 퍼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이런.
은의 장막을 쓰고 있긴 했지만, 여기에도 육감이 뛰어난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이 모습을 당장 노출시키는 건 도박이다.
나는 순간적으로 판단했고, 결국 바닥에 뻗어 있는 두 사람 중 여자의 뒷덜미를 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일으켜 세운 간수의 몸 뒤로 내 몸을 숨기고 기절한 녀석의 팔을 대신 흔들어 주었다.
“아니, 아무 일도 없어!”
웃긴 꼭두각시 연기였다.
그 후 잠시 침묵.
나는 긴장했다.
“뭐야, 에린. 목소리가 왜 그래? 감기 걸렸냐? 무슨 연기하는 꼬맹이 같구만.”
망할, 내 연기력에 대체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하다못해 저런 놈들까지 거짓말을 간파할 정도라니.
또 다른 층의 누군가가 대답했다.
“아까 식당에서 술 퍼마시는 거 봤는데, 아무래도 술에 취한 것 같아. 심지어 혼자 있는 것 같은데?”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니, 그걸 보고도 그냥 감시탑에 올라가도록 놔뒀어? 바꿔 줬어야지!”
“농담하는 거지? 오늘 저녁 감시탑 순번은 저 녀석들이라고. 나는 순찰 마치면 술 마시러 갈 거야. 술이라곤 근 반년간 입에도 못 댔다고!”
“그건 그렇지. 나도 끝나면 코가 비뚤어지게 마실 거야!”
저마다 낄낄대는 소리가 각 층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잘…… 넘어간 건가?
나는 뒷덜미를 잡고 일으켜 세운 간수 뒤에 숨어 상황을 살폈다.
각 층의 간수들은 완전히 긴장을 푼 채 층 너머로 소리를 질러 가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서로 사무적인 관계가 아니라 장난을 주고받을 정도로 친밀감이 있는 사이라는 건 확실했다.
“다들 술 마시는 건 좋은데 일이나 똑바로 하자고. 어?”
“그래, 잔소리쟁이 같으니.”
“저 녀석에겐 술 한 방울도 주지 마!”
그리고…… 그건 역겨웠다.
“아, 그건 너무하잖아! 나도 술 마실 거야.”
그렇게 말한 간수는 3층에서 낄낄대며 철창 안의 아이를 끌어냈고, 이윽고 그가 끌고 있는 수레에 실었다.
그들이 돌아다니는 감옥의 복도 안. 철창살 안에는 어린아이들이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감옥 안에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에 힘없이 누운 아이들이 바닥에서 움찔거렸고, 간수들은 그들을 살피며 미동조차 하지 않는 시체를 골라내고 수레에 실었다.
이런 풍경을 뒤로하고 마치 정상인처럼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건, 분명 역겨운 일이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어 잡생각을 치워 버렸다.
‘자, 감시탑은 제압했어.’
그리고 할 일 두 번째.
이제 각 층에 있는 모든 간수들을 제압할 차례다.
- 에이펙스의 광검이 주인에게 항의를 표시합니다.
허리에 찬 검이 자신에게도 기회를 달라며 울고 있었다.
나도 알아.
- 어느 이름 없는 활이 당신의 의지에 반응합니다.
하지만 이쪽도 충분히 자격이 있다.
- 용사 클래스 보정이 적용됩니다.
- 무명의 활에게 당신의 영혼이 사명을 부여합니다.
- 당신의 마력이 화살을 대체합니다.
“이봐, 나 먼저 내려간다! 위스키가 날 기다린다고!”
그리고 마력으로 이루어진 화살은, 막 수레를 끌고 내려가려던 남자의 머리를 가격했다.
퍽!
- 당신은 해당 인물로서 행동해야 합니다.
경고 메시지가 떴지만 무시했다.
가면도 썼고, 죽지 않을 정도로 조절했으니까 그만 칭얼대.
나는 결코 망설이지 않았다.
막 마력으로 된 화살에 맞은 남자의 몸이 쓰러지고 있었고, 그 남자의 몸이 바닥에 부딪혀 소리를 내기 전에…… 활을 한 번 더 당겼다.
마력이 화살의 형태를 띠고 모여들었다. 나는 팔을 아주 약간만 틀었다.
다음 상대는 곧장 발견되었다.
중앙의 감시탑에서는 모든 층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볼 수 있고, 그래서 모두를 한꺼번에 저격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그래서 나는 그저 360도로 돌아가며 모든 층의 간수를 화살로 저격하기만 하면 되었다.
“윽!”
“악!”
활을 겨눈 너머, 대부분의 간수들은 상황을 채 파악하지 못한 채 외마디 비명만 지르고서 쓰러졌고…….
“무슨 일……!”
순전히 운 때문에 마지막으로 화살을 맞은 간수는 겨우 세 글자 정도 내뱉었다.
마지막 간수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감옥은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나기라도 했냐는 듯 곧바로 조용해졌다.
감시탑의 조명은 그대로 돌아가며 감옥 내를 비추었고, 소란은 일어난 적도 없다는 듯 잠들었다.
그리 대단한 위업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감시탑에 선 채로 철창 안에서 조심스레 고개를 내민 한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빈 활을 막 내려놓은 날 발견한 아이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어, 어……?”
나는 조용히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댔다. 아이가 힘없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 것이 보였다.
미안. 아주 조금만 더 참아 주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