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146화
다만 7층으로 올라가기 전에 할 일이 많았다.
나는 먼저, 7층 실험실 앞으로 뛰어올라가 빠르게 소음 부스 아이템부터 설치했다.
아직까지는 조용하게 움직인 터라 바깥의 소동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기는 한데, 어쨌든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언제 여기서 쫓겨날지 모르는 일이고.’
이렇게 애매하게 간수들 몇을 쓰러트렸는데 애들은 갇힌 상태고, 그 상태에서 내가 던전에서 쫓겨나기라도 해 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끔찍하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 상황이 끔찍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아이의 말을 빌어 보자면, 설령 내가 간수들을 다 쓰러트린다고 한들 여기는 몬스터들의 자생지가 형성되어 있는 깊은 숲 한가운데였다. 여기서 어떻게 더 나빠질 수가 있을지 모르겠군.
‘거기다 지하에는 던전도 있지.’
지하 던전의 포화도도 확인을 해 봐야 했다. 할 일은 태산이고, 사방이 적이로군.
나는 혀를 차며 일단 모든 층에 쓰러져 있는 간수들을 1층에 한데 모아 놓은 후, 재갈을 물리고 손발을 묶는 작업부터 시행했다.
얼마 있지 않아 나는 모든 인원을 묶어 놓고서 손을 탁탁 털었다.
그럼 보자…… 무엇부터 해야 하지?
- 에이펙스의 광검이 항의를 표시합니다.
내 파트너가 자신에게도 기회를 달라며 항의하는 것이 들렸다. 검집 안에서 발광하는 게 보일 정도였다.
“진정 좀 해.”
뭐, 그래. 이번에는 내 파트너가 나설 차례이기는 했다.
“누굴 닮아서 이렇게 성질이 급한 건지 모르겠군.”
나는 투덜거리며 감시탑 위로 뛰어오른 후 검을 뽑았다. 흰빛이 어두운 감옥 속에서 눈부시게 빛났다.
“합!”
검날은 순식간에 길어졌다. 감시탑이 중앙에 있는 만큼, 걸리적거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감옥 안의 모든 창살을 베기까지, 팔을 휘두르는 건 딱 6번이면 충분했다.
철컹!
파트너가 드디어 맡은 역할에 환호하는 것이 느껴졌다.
- ‘에이펙스의 광검’이 ‘알림 마법’을 파훼하였습니다.
그 메시지가 총 6번.
텅!
텅텅!
모든 감옥의 창살이 차례로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코웃음을 치며 간수에게 빼앗았던 열쇠 꾸러미를 아무렇게나 떨어트렸다.
처음부터 필요가 없었다니까.
그리고, 창살이 떨어지는 산발적인 소음 때문에 아이들이 슬슬 일어나기 시작했다.
“뭐야? 무슨 소리야?”
“창살이……?”
아이들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어떤 용감한 아이 하나는 잘린 창살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가 나와, 그리고 1층에 묶여서 쓰러진 간수들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헉, 저거 봐!”
그러고 나서는 제 입을 가로막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저도 모르게 소리친 모양이다.
“다들 쓰러져 있어!”
“저 사람은 대체 뭐야?”
한번 시작된 웅성거림은 멈출 수 없었고, 갈수록 커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창살 너머로 고개를 내밀던 아이들은 하나같이 나와 눈이 마주치고 나서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다시 고개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5층 복도 한구석에서 나무문이 쾅 하고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거세게 문을 열며 밖으로 튀어나온 것은 물론, 내가 아까 잠재워 놓은 녹색 눈동자의 꼬맹이었다.
힘 조절을 했다고는 해도 어지간해서는 못 깨어났을 만한 타격이었는데, 제법 터프한걸.
그 꼬마 아이는 창살이 죄다 사라져 버린 감옥의 상태를 보고 놀라는가 싶더니, 곧 감시탑에 올라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겁을 집어먹은 다른 애들과는 달리,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그 눈빛은 제법 적대적이었다. 아까 전 제 친구를 볼 때와는 완전히 다른 태도였다.
‘은의 장막’을 쓰고 있으니만큼 나를 경계해야 할 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흠, 이것만 봐도 저 녀석이 여기서 제일 배짱 좋은 꼬맹이라는 것쯤은 알겠다.
공포도 있었고, 두려움도 있었지만, 갑자기 나타난 새로운 인물을 향해 경계심을 느끼고 있었다.
아직 싸울 의지가 있다는 건 나쁘지 않은 징조였다.
‘좋아, 여기에 걸어 보자.’
어차피 다른 수도 없다.
나는 감시탑에서 아이가 서 있는 감옥 복도를 향해 훌쩍 뛰었다.
아이는 놀랍게도 제 앞에 곧장 착지한 나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이렇게 내뱉었다.
“당신도 우리처럼 개량됐어요?”
개량이라니.
나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개량 같은 건 필요 없어. 나도, 너도. 그냥 아이템 도움만 조금 받으면 돼.”
“아뇨, 그런 물건은 무지 비싸잖아요. 저 같은 애가 손에 넣기는 힘들 거예요.”
“너무 장담하지 마, 꼬맹아.”
똑똑한 걸 보니 미래가 아주 밝아 보이는 데 말이다.
내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건 어떻게 보면 자연스럽지만, 사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검을 들고 있는 상대방을 향해 기세등등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미래가 기대되는걸. 그 미래를 내가 지켜볼 수 있느냐는 차치하고.
“꼬맹아, 이름이 뭐야?”
“42호요.”
“그건 이름이 아니야, 그냥 번호지. 이름을 하나 짓는 건 어떨까?”
아이가 내 말에 눈을 깜박였다.
녹색 눈동자가 순간 반짝이는가 싶더니, 곧 아이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럼, 메이.”
나는 픽 웃었다.
확실히, 저 녹색 눈동자는 그리운 봄의 내음이 느껴질 만큼 싱그러웠다.
느낌이 좋은데.
“이름보다는 성처럼 들리긴 하지만…… 좋아, 잘 어울리네. 그럼 메이, 부탁이 하나 있어.”
“저 같은 어린애한테요?”
“응, 여기는 어린애들밖에 없으니까. 자, 보다시피 지금 감옥 창살을 다 부쉈는데, 나는 너희들이 여기가 아니라 어딘가 안전한 곳으로 가길 원해.”
“안전한 곳이라고요?”
“그래, 곧 여기서 난장판이 벌어질 거거든.”
나에게는 7층 실험실과, 지하의 던전이라는 위험 요소가 두 가지나 있다. 그걸 시작하기 전에 적어도 말려들지 모르는 아이들을 여기서 최대한 멀리 떨어트려 놓는 것이 선결 과제였다.
메이의 눈이 1층에 묶여 있는 간수들의 모습을 빠르게 훑고,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믿어도 좋을지 의심하는 걸까.
나는 잠시 동안 아이가 결심을 굳힐 수 있도록 내버려 두었다.
“알겠어요.”
그리고 그 침묵은 길지 않았다. 아이답지 않은 결단력이었다.
“걷지도 못 하는 애들이 있으니까 멀리 가는 건 힘들 테지만…… 간수들이 쓰는 생활 공간이 있어요. 몇 번 가 봤는데, 어…… 모두가 잠깐 머무를 만한 크기는 될 거예요. 애들이 작으니까요.”
“좋아, 어떻게 가는데?”
“1층에 이어지는 통로가 있어요. 물론 쇠사슬이나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긴 한데…….”
메이가 말끝을 흐렸고, 나는 고개를 끄덕여 아이의 자신감을 북돋았다.
“그래, 큰 문제는 아닐 것 같군. 자, 이리 와.”
“으악!”
메이를 팔에 안은 채 1층으로 뛰어내리자 우렁찬 비명이 터졌다. 그 비명에 용기를 낸 건지, 아이들이 감옥 복도로 달려 나오는 것이 보였다.
“쟤 42호 아니야? 괴롭히는 건가?”
“저 사람은 대체 뭔데?”
그러더니 곧 툭, 하고 무언가가 내 머리를 스쳤다. 누군가가 돌조각이라도 던진 모양이다. 내가 고개를 돌리기 전에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 애를 가만히 내버려 둬!”
두려움에 찬 외침이었지만, 그야말로 용기 있는 행위였다. 내가 고개를 들어 돌을 던진 쪽을 바라보자 다른 쪽에서도 산발적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제발, 그 애를 풀어 주세요!”
“그래, 풀어 줘!”
나는 씩 웃으며 메이의 몸을 바닥에 내려 주었다.
“너, 제법 인망이 있구나. 감동적인데.”
내 눈치를 보던 아이가 그제야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기에 오래 있었고, 제가 반장이니까.”
“그럼 애들이 네 말을 들을 확률이 높겠네. 좋아, 잘 들어. 이제부터 내가 그 공간에 가서 간수들을 제압할 거야.”
“네?”
“너는 그동안 최대한 빨리 아이들을 1층으로 데리고 와서 저쪽으로 이동할 준비를 시켜 줘.”
메이가 눈을 깜박였다. 시선이 어지럽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아이가 불안하게 물었다.
“저, 정말 그거면 되나요?”
“쉬운 일은 아닐 것 같은데. 네 말대로 걷지 못하는 아이들도 있으니까.”
게다가 통솔해야 하는 인원이 200명 남짓이다. 어른들을 시켜도 쉽게 해내지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메이는 굳건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수레를 쓰든가, 서로 부축하면 어떻게든 돼요. 우리가 여기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 그렇게 될 거야.”
내가 장담하자 메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왜, 왜 이런 일을 하는 거예요? 누구신데 이런 일을……?”
“내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사실, 누구든 이런 일을 진작 했어야 했지.”
나는 떨리는 아이의 손을 잡아 주었다.
“너무 늦어서 미안하다.”
진심이었다.
누구든 해야만 했던 일인데, 이제껏 아무도 하지 않았다.
못내 입맛이 썼다.
감옥에 갇힌 아이들은 못해도 이백 명은 넘었다. 아무리 타르토스라고 해도, 아무도 이만한 규모의 실종을 모른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다.
그러니 바깥세상에서 누군가 실종된 아이들에게 조금의 관심만 주었다면, 누구든 진작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힘없는 아이들을 돕기 위해 나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문득 알리시아와 일리아스를 떠올렸다.
‘……하기야 그 애들한테도 아무도 손을 뻗어 주지 않았지.’
알리시아가 스스로 나서기 전까지, 그리고 그 결과로 대륙 제일의 살인자라는 악명 아닌 악명을 얻기 전까지, 아무도 이 범죄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심지어 알려지지도 않았다.
알려진 후에도, 대륙의 안전을 위해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다고 말하는 작자도 있었다.
결국 알리시아 같은 강자가 탄생했으니 잘된 일 아니냐, 라는 논리였다.
이런 망할.
나는 한숨을 쉬었다.
감상적인 시간을 보내기에는 타이밍이 여러모로 좋지 않았다.
나는 메이의 어깨를 한 번 더 두드려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가 말한 생활 공간으로 가는 통로는 저기니?”
“네, 맞아요.”
메이의 말대로 1층 구석에는 아치형의 돌로 된 입구와 육중한 나무로 만들어진 문이 있었다.
거대한 자물쇠가 걸려 있기는 했지만, 메이가 내가 포박한 간수의 주머니를 뒤져 열쇠를 찾아 주었다.
정말 똑똑한 아이였다.
‘좋아, 여기는 대충 정리했고.’
나는 메이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러 자리를 떠나는 것을 잠시 지켜본 후, 육중한 나무문 앞에 몸을 찰싹 붙였다.
이제부터는 내가 할 일이 남았다.
귀를 기울여 인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드러난 것은 돌로 굳건히 쌓은 아치 형태의 통로였다. 공기는 눅눅했고, 어둠을 밝히는 것은 촛불 몇 개였다.
그리고 과장 없이 5미터마다 통로를 막는 육중한 나무문이 있었다. 지금은 열려 있었지만, 각각 쇠사슬로 된 고리를 걸 수 있는 장치가 되어 있었다.
아이들의 탈옥을 염려해서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지하에 있는 던전의 포화도가 터질 때를 대비한 걸까?
나는 숨을 죽여 가며 통로를 통과했다.
통로는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통로의 끝에서 불빛이 희미하게 비쳤다. 나는 벽에 최대한 몸을 바짝 붙이고 통로 너머를 훔쳐보았다.
그리고 탄식했다.
“아, 미친…….”
긴장할 것도 없었다.
통로에서 이어지는 것은 간수들이 아까 지껄인 대로 조그마한 식당이었다.
감옥과는 다르게 온화한 분위기로 지어진 건물은 확실히 생활감 있는 공간이었고, 공간 한가운데는 커다란 식탁이 놓여 있었으며, 심지어 한구석에는 난로가 타오르고 있었다.
식탁 위에는 소소한 만찬과 함께 술병이 뒹굴었다.
그리고, 그 식당 안에는 열댓 명쯤 되는 사람들이 술을 마신 채로 여기저기 뻗어 있었다.
나는 그들 모두를 빠르게 묶기 시작했다. 그들은 내가 동료라고 생각했는지 몸을 건드리자 행복하게 무슨 말을 웅얼거렸다.
통로 하나만 건넜을 뿐인데 아주 다른 세상이다.
‘역겹게.’
다만 일이 쉽게만 풀리지는 않았다.
식당과 연결된 또 다른 계단을 쿵쿵대며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파티 중이야? 다들 그쯤하고 방에 들어가서 잠이나 자…… 뭐야?!”
계단을 내려온 자가 간수들의 손을 묶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
눈이 마주쳤다.
계단을 털레털레 내려온 것은 한 여자였다. 가벼운 차림이었지만 손목의 아대와 허벅지에 차고 있는 단검이 보였다.
그리고 확실히 판단이 빨랐다. 여자는 허벅지에 차고 있던 단검을 꺼내며 즉각적으로 내게 달려들었다.
간수들의 손목을 묶는 막바지 작업을 하고 있었던 터라, 나는 여자가 가까이 접근하는 것을 허용해야만 했다.
휭.
아주 가까운 곳에서 단검이 휘둘러졌다.
허리를 숙이지 않았더라면 곧장 목을 베였을 것이다. 고개를 숙여 피하기는 했지만, 머리카락 몇 가닥이 잘려 공중에 하늘거렸다.
힘도 속도도 제법이었다.
‘레벨 30은 가볍게 넘겠는데?’
상당한 실력자였다. 여기가 타르토스라는 점을 고려해 보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만.
게다가 곧장 목숨을 노렸다는 점에서, 대인전에 특화되었다는 게 확실히 티가 났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불리하다는 건 아니었지만.
나는 허리를 숙이며 바닥에 손을 짚고는 몸을 허공으로 차올리고, 반동을 받아 두 발로 여자의 몸을 거세게 치받았다.
“컥!”
여자가 용케도 한 팔로 제 가슴을 감싸며 내 발차기를 어떻게든 막아 내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혀를 찼다.
‘앗차.’
본래라면 그대로 기절시킬 법한 일격이었는데, 지금 몸이 어린애다 보니 다리가 미처 깊게 닿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약간 깔짝거린 수준에 그쳤다.
아무래도 한국에 있는 동안 대인전 실력이 좀 녹슬긴 했다.
내 발이 바닥에 닿는 순간 다시 단검은 곧장 내 목을 향해 휘둘러졌다.
깡!
그리고 나는 손목에 두르고 있었던 강철 보호대로 단검을 막았다.
팔목이 잘리지는 않았지만 타격은 상당했다. 곧장 다른 팔로 여자를 향해 주먹을 내뻗었지만, 이쪽은 또 여자의 손에 가로막혔다.
잠깐의 힘겨루기가 이루어졌다.
단검이 강철 보호대를 긁으며 끼긱대는 괴상한 소리를 냈고, 여자의 손바닥은 내 주먹을 감당하지 못하고 점점 밀려나고 있었다.
여자가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너, 넌 누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