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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148화 (149/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148화

생각해 보면, 한국에 돌아간 시점에서 이미 그 신탁이란 걸 의심했어야 했다.

그것도 그럴 게, 한국에는 최후의 던전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왜 한국에는 ‘최후의 던전’이 없는지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하지만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고, 막연히 한국 쪽 시스템이 이상하다고만 생각했었다.

그것도 그럴 게 오류니 랭킹이니, 겪어 보지 못했던 일이 많이 터졌으니까.

그래서 차마 생각도 못 했다.

설마 ‘최후의 던전’ 운운하는 게 모두 거짓말일 줄은.

나는 식탁 끄트머리를 짚고 선 채로 한숨을 내쉬었다.

진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건 알지만, 한번 뜨거워진 머리로는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교황이 거짓말을 했다, 라.”

일부러 그 말을 내뱉어 보았더니, 놀라울 정도로 이해가 되었다.

너무나도 그럴 법한 일이었다.

아, 그래. 원래 그렇게 믿을 만한 작자들은 아니었다.

나는 이를 갈았다.

“처음부터 그 늙은이가 마음에 안 들었어.”

타르토스 대륙에는 많은 국가가 존재했지만, 던전이 나타난 이후로 가장 이득을 본 세력은 신전이었다.

범국가적인 단체는 그만큼 제약도 적다는 것을 의미했다. 신전은 성직자를 파견하는 대가를 받았고, 그건 즉…… 대가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작자들이란 뜻이다.

그래서 아리아드네는 별종 취급을 받았다.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성력을 가졌으면서, 대가도 받지 않고 자신에게 손을 뻗는 이들에게 모두 베풀었다.

교황은 겉으로는 그런 아리아드네야말로 성녀에 걸맞다며 칭송하면서도, 실제로는 매우 견제했다. 하는 일마다 영리하게 굴지 못한다며 견책만 했고 꼬투리를 잡으려 안달이었다.

그 애는 그냥 자기가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을 도왔을 뿐인데도.

그걸 생각하니, 애초에 신탁을 믿은 것부터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사실 알리시아만 해도 공공연히, 그딴 걸 누가 믿느냐고 말하고 다니긴 했다.

“도마뱀 한 마리 잡는다고 뭐가 그렇게 달라지겠어?”

알리시아가 누누이 하고 다니는 말이었다. 심지어는 옵타티오가 쓰러진 후에도 그렇게 말했었지.

젠장, 알리시아. 네가 우리 중에 제일 현명했다니 믿을 수가 없네.

그야 물론 나도 완전히 믿었던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설마, ‘최후의 던전’이라는 게 완전히 꾸며 낸 헛소리라고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허탈했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따져 보았을 때, 여자의 말을 듣자마자 납득되는 것이 있었다.

“……그래, 시스템 메시지를 본 적이 없긴 했지.”

단 한 번도, ‘최후의 던전’이라는 메시지를 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말하니 왜 믿었는지 오히려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지만, 그런데도 내가 옵타티오를 쓰러트리면 타르토스를 구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은, 이 명제 자체가 대륙에 퍼져 있던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신탁이 있다.

최후의 던전을 쓰러트리면 이 모든 시련이 끝이 난다.

모두가 그렇게 믿고 있었다.

“…….”

나는 침묵했다.

실은, 왜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았는지 답은 알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믿고 싶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가. 용사가 마지막 보스 몬스터를 물리치고 나면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엔딩 크레딧이 올라온다.

그래서 나도, 옵타티오만 쓰러트리면 영원한 해피 엔딩이 기다리고 있을 거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우스운 일이다.

삶이 이어지는 한 고난은 끊이지 않는다는 것쯤은 이미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내 마음속 어딘가에 이런 희망이 남아 있었다는 것이.

진짜 웃기네.

아니, 사실 웃음이 나오지는 않지만 말이야.

그러다 나는 바닥에 엎드린 채 나를 관찰하고 있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는 흥미롭다는 눈길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이거 재미있네. 그쪽 얼굴이 안 보여. 검사인 것 같으니까 마법은 아닐 테고, 아이템을 쓰고 있는 거야?”

“그렇겠지.”

“너 같은 실력자가 있는데 왜 나는 들어 본 적도 없지? 이봐, 이름이 뭐야?”

“친한 척하지 마. 불쾌하군.”

“지금 내 목숨 줄을 잡고 있는 인간한테 아부 좀 하는 것뿐이야. 그래서, 알고 싶은 정보는 그게 다인가? 뭐든지 대답해 주지.”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그럼, 옵타티오를 공략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알아? 그들은 어떻게 됐지?”

이 여자의 말에 따르면 지금은 옵타티오 공략 성공 후 3년이나 지난 시점이었다.

그렇다면 그 애들은 어떻게 했을까.

옵타티오를 공략한 이후에 나는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신탁은 완전히 거짓말이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모르기는 몰라도 아마 그 혼란은 상당했을 것이다. 전 대륙적인 혼란이었을 테고, 그 중심에는 내 친구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일행 모두가 그랬겠지만, 특히나 성직자라 신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처지인 아리아드네는 정말이지 입장이 곤란해졌을 게 분명했다. 본인이 소속된 집단의 거짓말을 들추었으니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여자가 물었다.

“누굴 말하는 거야? 루카스 왕자? 아리아드네 성녀? 아니면 용병왕 남매?”

“누구든…….”

“아, 용사 레나의 행방은 아무도 몰라.”

갑작스레 들이닥친 이름에 숨이 턱 막혔다. 나는 믿을 수 없는 심정으로 질문을 되풀이했다.

“너, 방금 뭐라고 했어?”

“뭐야, 설마 ‘방랑하는 구도자’를 몰라? 대륙에서 제일 유명한 용사님 아닌가?”

확실했다. 그건 나를 뜻하는 말이었다.

대륙에서 제일 유명한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어쨌거나 내가 알기로 용사 클래스에 레나라는 이름을 쓰고, 게다가 플레이어명이 방랑하는 구도자인 인간은 나 외에는 없었다.

“나를…… 그러니까, 레나를 알아?”

“그야 개인적으로 안다는 뜻은 아니고. 물론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는 일종의 경탄이 섞여 있었다. 내가 본인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하는 눈치다.

그야 그렇겠지. 이름도 모르는 꼬맹이 몸을 빌리고 있는 처지니까.

내가 입을 다물고 있자 뭘 오해한 건지 여자가 제멋대로 떠들기 시작했다.

“왜, 가난한 애들의 불행을 방치하는 인간이 용사는 만나 보고 싶다니까 이상해? 난 그냥 한번 겨뤄 보고 싶을 뿐이야. 엄청 세다고 들었거든. 그렇지만 실종된 지 좀 됐다고 하더라고.”

엄청 세기는 무슨, 내 지금 능력치를 보면 아주 졸도를 하겠어…… 그렇게 별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나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방금 이 여자가 내 이름을 말했다.

내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건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다.

타르토스의 누군가가 내 존재를 알고 있다.

생각해 보았자 해결될 일이 아니라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사실 언제나 마음 한편에 불안이 자리 잡고 있었다.

혹시 내가 겪은 그 모든 일들이, 그냥 내게만 일어났던 환상 같은 일은 아니었을까, 하는.

그 추측에는 상당한 가능성이 있었다.

나는 아마도 일산의 던전을 통해 타르토스에 왔다. 그러니 타르토스가 실재하는 세계라는 것과는 별개로…… 내가 겪은 일은 그저 던전 안에서 일어난 사건일 뿐이고, 아리아드네가, 루카스가, 알리시아가, 일리아스가…… 실제로는 나를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애초에, 그들이 나를 모를 수도 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 여자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왔다.

‘정말 있었던 일은 맞나 보군.’

놀랍게도, 교황에게 이렇게까지 엿을 먹은 상황인데도 그 사실이 기뻤다.

망할, 나는 혀를 찼다.

최후의 던전은 거짓말이고, 심지어 타르토스가 망한 마당에 이런 걸로 기뻐하고 있다니. 내가 엄청나게 이기적인 새끼 같잖아.

“하여튼, 이렇게 수다나 떨 거라면 이것부터 좀 풀어 주지? 피차 용병인 것 같고, 어디서 얼굴 볼지도 모르는데 너무 박하게 굴지 말라고.”

여자가 실실 웃으며 묶인 손을 흔들었다.

넉살도 좋지. 여러모로 돈만 받으면 뭐든지 하는 타르토스 용병의 정석, 그 자체인 모습이다.

나는 날카롭게 대꾸했다.

“꿈도 꾸지 마. 아이들한테 그런 짓을 한 녀석을 내가 가만히 놔둘 것 같아?”

“레나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용사 흉내는 내는 거야? 그냥 솔직히 레나를 따라 하는 거라고 해. 그런 녀석들이 한둘이어야 말이지.”

내가 언제부터 용사의 대명사였는지 모를 일이로군. 그리고 그런 나를 따라 하는 녀석들이 많다는 것도 금시초문이었다. 대체 누가 이런 미친 짓을 한다는 거야?

“다른 녀석들 행방이 궁금하면 다 말해 줄 수 있어. 대신 우리, 협상을 좀…….”

그때였다.

내가 통과했던 문이 끼긱, 소리를 내며 조심스럽게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내 주의를 끌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순식간에 검을 뽑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아연해졌다.

“……너 거기서 뭐 하니?”

“어, 그게…….”

문 앞에 서 있는 것은…… 메이었다. 기묘한 백발에, 녹색 눈동자를 가진 꼬마. 내가 다른 애들을 대피시키는 데 도움을 달라고 말했었던.

그런데 아이의 모습이 어딘지 어색했다.

다쳤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아이는 익숙하지 않은 제 몸 반쯤만 한 곤봉을 들고 있었을 뿐이다.

간수의 곤봉을 빼앗기라도 한 건가? 비쩍 마른 아이에게는 가혹하리만치 무거운 곤봉이었다. 메이의 두 팔이 달달 떨리는 게 보였다.

그 곤봉을 쥔 채 메이가 이렇게 말했다.

“음, 문 건너편에서 엿듣고 있었는데 다투는 소리가 나서…….”

아이의 표정은 놀랍게도 걱정스러워 보였다.

“저기, 용사님. 괜찮은 거예요?”

나는 그 질문이 나를 향한 것이라는 것을 조금 늦게 깨달았다. 하지만 그 의미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괜찮냐니…… 아니, 잠깐만. 누가 용사님이야?”

하지만 메이는 내 말을 무시하고 눈썹을 찡그렸다.

“그럼 뭐라고 불러요? 이름은 안 가르쳐 주셨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왜 용사라고 하는 거야?”

“그럼 뭔데요?”

나는 무어라고 말하려다가 대답할 말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냥 입을 다물었다.

클래스가 용사인 건 사실이지. 도대체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다만.

“역시 ‘방랑하는 구도자’ 따라 하는 거였구만? 워낙에 유명한 일화가 많긴 하지. 나는 에키돈 공작령 사건이 제일 좋더라.”

아무렇게나 떠들어라.

나는 여자의 등허리를 한 번 발로 차 버린 후 메이에게로 다가갔다. 메이는 간수들이 모두 제압당한 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와, 진짜 강하신가 봐요. 괜히 걱정했네. 다행이에요. 솔직히 이게 너무 무거워서 휘두르기는 힘들 것 같았거든요.”

“뭐라고?”

나는 그 말에 경악했다.

“너 설마, 그걸로 나를 도와주려고 온 거야?”

저 곤봉은 나를 도와서 누군가의 머리를 후려갈길 셈으로 들고 있었던 거고?

내 반응에 아이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어, 음…… 저는 혹시 도움이 필요한 상황일까 싶어서…….”

그 말을 들은 용병 여자가 나보다도 빠르게 반응했다.

나온 것은 비웃음이었다.

“세상에, 저 꼬맹이가 지금 나를 쓰러트리려고 곤봉을 들었다는 건가? 배짱 한번 죽여주네!”

칭찬보다는 비꼬는 어조였다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도 한숨을 쉬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야? 차라리 도망갔어야지.”

메이는 이미 내가 간수들 모두를 쓰러트린 것을 보았다. 만약 그런 내가 여기서 고전하고 있다면 아이에게는 더더욱 승산이 없으니까, 메이는 이곳으로 오는 대신 몸을 피했어야 했다.

하지만 꼬맹이는 납득하는 대신 항의의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그럼 어떻게 해요? 누군가 절 죽이러 올 때까지 가만히 기다릴까요?”

그 건방진 건지, 무모한 건지, 혹은 대견한 건지 모를 말에서 이상하게도 기백이 느껴져서 낄낄대며 까불던 용병조차도 입을 다물었다.

“그럼, 이제 애들을 여기로 데려와도 되나요? 준비 다 됐어요.”

그리고 목표를 향해 행동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저 추진력까지.

훌륭했다. 20년쯤 후에는 정말이지 볼만하겠군.

나는 잠자코 메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래, 20년 후에는 정말 볼 만하게 클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비쩍 마르고, 더럽고, 도움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아이였다. 부당하게 잡혀와 학대받아야만 했던.

그때 바닥에 드러누운 여자가 외쳤다.

“이봐, 원하는 정보를 준다니까? 저런 애는 그냥 내버려 둬!”

여자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있었다. 아마도 내가 자신이 뱉어 낸 정보에 흔들렸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 분명히 유혹적인 제안이기는 했다.

이 여자는 내 친구들이 현재 어디에 있는지 정보를 줄 수 있었다.

‘게다가 선행 조건도 아직 안 떴어.’

기본적으로, 퀘스트 수행에 성공해야 던전을 탈출할 수 있다.

그럼 만약, 일부러 그 퀘스트를 진행하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이 던전 내에 머물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런 돈도 안 되는 일은 그만두고 나랑 거래하자고!”

그래, 어쩌면…….

“어이, 내 말 듣고 있어?”

“아니.”

안 듣고 있다.

나는 곧장 대꾸했다.

“너 따위에게 들어야 하는 정보 따위는 없어.”

그래, 지금 친구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간절히 알고 싶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내 앞에 놓인 할 일을 무시할 순 없었다.

“어차피 알고 있으니까.”

아마 너희들도 그랬겠지.

지금 내 앞에는 감옥에 갇힌 어린애들이 있고, 싸워야만 하는 적이 있듯이…… 그 애들도 끊임없이 싸우며 자신의 코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고 있을 것이다.

삶에는 해피 엔딩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문제를 한번에 해결해 주는 편리한 도구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하루하루,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문제를 해결하며 살아가야만 한다.

아무리 허무한들 무릎이 꺾이면 그걸로 끝장이다.

죽고 싶지 않다면, 살아남으려면 이를 악물고 다시 맞서 싸우는 수밖에 없다.

내게 그걸 가르쳐 준 것은 내 친구들이다. 그리고 지금 내 눈앞에는 당장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

나는 메이의 어깨를 감싸 안고 말했다.

“자, 가자.”

세상을 구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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