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152화
나는 검을 들고 눈앞의 괴물을 경계하며 상태창을 열었다.
플레이어명 : 방랑하는 구도자(상태 : 빙의)
LV.79 (LV.1)
특성 : 관철하는 아귀 (아직 발견되지 않음)
클래스 : 용사 (아직 발견되지 않음)
체력 : 1490 (+30)
근력 : 1085 (+12)
민첩 : 965 (+8)
마력 : 1050 (+10)
스킬 : 멸혼의 불꽃 lv.7, 기사회생 lv.6, 불굴의 의지-on
(스킬은 전이되지 않습니다.)
상태창의 수치를 보는 순간 절로 이가 악물렸다.
‘드디어.’
본래 내 능력치의 반절 정도를 회복했다. 심지어 마력 수치의 경우는 본래 내 능력치를 훨씬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고갈되어 있던 사지에 힘이 돌아온 것이 느껴졌다.
‘그래 봤자 아직도 불리하긴 하지만.’
저 괴물은 본래 내 능력치와 비슷한 수준이고, ‘용사를 기리는 망토’의 지속 시간은 끝났다.
하지만, 그래도 체력과 근력 수치가 드디어 1000을 돌파했다.
나는 손을 꽉 쥐었다.
‘대충 레벨 40대 후반 즈음인가?’
어지간한 S급 보스 몬스터라도 머리를 잘 쓰면 혼자서 붙어 볼 만한 정도일까.
나쁘지 않은 감각이었다.
게다가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 그리고 옆에는 알리시아가 있었고.
그렇다면 해볼 만했다.
아니, 해볼 만하지 않아도 해야 한다.
검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자 파트너가 나를 격려하듯 희미하게 웅웅대고 있었다.
내게로 쏟아지는 알리시아의 아연한 눈빛이 느껴졌다.
“너는 대체……?”
그럴 만도 했다. 강렬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검은 한눈에 보기에도 성검, 그 자체였으니까.
게다가 알리시아가 내 ‘에이펙스의 광검’을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대체 그 검이 왜 여기에…….”
붉은빛의 눈동자가 연약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의구심, 슬픔, 그리움…… 그 모든 것이 부풀어 한 덩어리가 되기 전에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설명은 나중에.”
물론 시스템 방해 때문에 내 정체를 직접적으로 밝힐 수는 없으니, 제대로 설명해 주지는 못하겠지만.
어쨌거나 지금은 우리의 눈앞에 적이 있다. 대화를 나누기에 좋은 때는 아니었다.
“이제 정말 진심으로 궁금해지는군.”
그리고 검이 뿜어내던 강렬한 빛에 잠시 압도되어 주춤했던 괴물은 이제 빛에 적응한 듯했다.
괴물이 눈을 가늘게 뜨고 성검을 노려보았다.
“너는 누구고, 그 검은 대체 어디서 얻은 거지? 정말 이 대륙에 나타난 새로운 용사라도 되는 건가?”
“너에게 대답할 이유는 없어.”
짧게 대답하자 괴물이 코웃음을 쳤다. 주위를 맴도는 살기가 한층 짙어졌다.
“그래, 하기야 곧 죽을 테니까 말이지.”
그렇게 말하며 괴물이 땅을 박차고 나를 향해 뛰어들었다.
쿵!
얼마나 바닥을 세게 걷어찬 건지 반동으로 그렇지 않아도 불안정하던 지반이 한 번 더 흔들렸다.
내가 다리에 힘을 주고 애써 중심을 잡으며 몰아닥치는 괴물을 향해 검을 휘두르려던 순간.
“이리로 와!”
괴물이 내가 선 곳에 도착하는 것보다 알리시아가 내 몸을 한 팔로 들어 안는 것이 더 빨랐다.
그리고 나는 알리시아의 팔에 달랑 들리고 말았다.
상당히 굴욕적이었다.
“야!”
항의하는 목소리를 냈지만 알리시아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알리시아는 그대로 내 몸을 들어 안고서 괴물을 피해 뒤로 크게 점프했다.
순식간에 뒤로 물러난 알리시아는 인간의 팔로는 내 몸을 안고, 몬스터의 것을 단 팔로는 여전히 달려드는 괴물의 배를 크게 후려 갈겼다.
퍽!
달려드는 기세에 힘입어 잘 들어간 펀치에 괴물이 아주 약간 주춤하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꿈쩍도 하지 않은 괴물의 입가가 양옆으로 찢어지는 것이 보였다.
“이제 너는 내 상대가 안 돼!”
그리고 괴물은 오히려 자신을 후려친 팔을 도로 잡고, 피할 길이 없어진 알리시아의 몸을 한 방 크게 위로 올려쳤다.
알리시아가 아직도 내 몸을 잡고 있었던 터라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커헉!”
알리시아가 멈칫한 순간 괴물의 공격이 연속해서 명중했다. 얻어맞은 알리시아의 몸이 이번에야말로 높이, 높이 솟구쳤다.
그리고 두들겨 맞아 허공으로 떠오른 알리시아는 이어질 공격을 방어하는 대신, 반사적으로 내 몸을 잡은 팔을 놓으며 필사적으로 멀리 밀쳐 냈다.
동시에 괴물이 땅을 박찼다.
쾅!
흙먼지가 일었다.
괴물이 허공으로 솟구쳐 알리시아를 향해 돌진해 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알리시아의 몸은 완전히 무방비해졌다.
괴물의 공격을 방비할 수 있었던 마지막 순간을 내 몸을 다른 쪽으로 밀쳐 내는 데 썼기 때문이었다.
‘멍청이!’
저거 바보 아니야?!
나는 님페의 바람을 사용해 벽을 박찼고, 알리시아를 향해 뛰어오른 괴물에게 돌진하며 검을 휘둘렀다.
알리시아 쪽만 신경 쓰고 있었던 터라 괴물 쪽도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다.
그 덕분에 알리시아의 배를 후려치려던 괴물의 몸통에 검이 정확히 처박혔다.
펑!
마치 가죽으로 만든 북을 치는 것 같았다. 손으로 전해지는 타격감이 장난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나는 님페의 바람으로 한 번 더 벽을 박차며 괴물을 향해 날아가 팔을 크게 휘둘렀다.
콰쾅!
한 번 더 공중에서 내 검에 얻어맞은 괴물은 그대로 감옥의 철창을 뚫고 날아가 벽 한 면에 처박혔다.
어지간하면 죽었을 만한 일격이었는데, 대신 베이는 감촉은 없었다. 검날은 피부를 베고 생명을 끊는 대신 마치 야구 방망이처럼 괴물을 후려쳤을 뿐이다.
하지만 일단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막 괴물의 공격에서 벗어난 알리시아의 몸이 무방비하게 바닥으로 떨어져 기침을 내뱉었다.
“커헉!”
바닥을 짚는 팔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보니 상당히 타격을 입은 모양이었다.
“괜찮아?”
나는 님페의 바람을 사용해 천천히 알리시아 옆에 착지하면서 부상을 살폈다.
알리시아가 허탈하게 돌아누우며 한 번 더 기침을 했다. 다행히 내장 파열은 없는지 피를 토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타격을 입은 건 분명했다. 바닥을 긁는 손가락에 하얗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다. 저 괴물에게 제대로 얻어맞았으니.
‘피부 강도가 장난 아니야.’
나도 얻어맞아 봐서 안다.
저 괴물이 자신의 몸에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반적인 인간과는 기본적인 내구도 자체가 달랐다. 도자기로 만든 화병을 아무리 강한 힘으로 휘둘러도 콘크리트 바닥에 내려치면 결국 깨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체감상으로는 얼마 전 상대했던 S급 몬스터, 레비아탄과도 비견될 정도였다.
알리시아는 레벨 자체가 높은 데다 신체가 보통 인간은 아닌 만큼 그나마 버티는 모양이지만, 하여튼 나나 쟤나 일반적인 근력만 사용해서는 승산이 없었다.
‘게다가 능력치 회복은 했어도 결국 내 본 능력치의 반밖에 못 따라잡았어.’
나는 내게 한껏 얻어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감옥 한구석에서 슬슬 기어 나오려 하는 괴물을 노려보며 우리의 승산을 가늠했다.
별로 높지는 않군.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막 일어서려는 알리시아를 바라보며 나는 툭 내뱉었다.
“방금 건 어설프게 나를 보호하려고 들어서 얻어맞은 거야.”
다소 냉정하게 들려도 어쩔 수 없다.
그래, 가장 큰 문제는 알리시아가 나를 전력으로 계산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방금 괴물이 달려들었을 때 나를 들고 피하는 대신, 잠깐이나마 나에게 괴물 상대를 맡기고 빈틈을 찾아 공격을 한다는 선택을 했었더라면 이야기는 제법 달라졌을 것이다.
괴물은 무시무시한 재생력을 갖고 있는 듯했지만, 알리시아의 검은 내 성검과는 달리 괴물의 피부를 베어 냈으니까.
“나도 싸울 수 있어. 같이하자고 했잖아.”
하지만 돌아온 알리시아의 대답은 실망스러웠다.
“아니, 넌 여기서 싸우면 안 돼.”
역시나.
기침을 연이어 내뱉은 알리시아가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목소리는 무척 단호했다.
“어떻게 그 검을 손에 넣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는 어린애가 있을 곳이 아니야. 이런 싸움에 말려들 필요 없어.”
“나는…….”
“그래, 네게 무언가 있다는 건 알겠어.”
알리시아가 내 손에 들린 검을 향해 눈짓했다.
“그 성검을 보고도 네가 평범한 어린애라고 생각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아. 충분히 강하다는 것도 알겠어.”
“그런데 왜?”
“넌 너무 어려. 몇 살이야? 열 살은 됐어?”
몇 번 더 기침을 하면서 알리시아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아주 조심스러운 동작이었다.
“솔직히 묻고 싶은 게 아주 많아. 특히, 도대체 어디서 내 친구의 검을 손에 넣은 건지, 무척 궁금해.”
그렇게 말하는 알리시아의 표정에 걸린 것은 씁쓸한 웃음이었다.
“너무 보고 싶은 친구의 검이라서 말이야.”
“…….”
“그래도 여기는 내가 맡을게. 저 녀석은 어린애가 상대할 수 있는 놈이 아니야. 해서도 안 되고.”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저렇게 나올 줄 알았지.
알리시아가 이 싸움에서 생존하지 못한 것은 놀랄 일도 아니었다. 저 녀석의 최우선 목표는 자신의 목숨이나 승리가 아니라, 아이들의 보호였다.
게다가 답답하긴 해도……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알리시아의 입장이었어도 저렇게 나왔을 것이다.
아무리 성검이 있어도, 강하다고 해도, 이건 다른 문제였다.
내가 지금 진짜 ‘강예나’라면 모를까, 지금 나는 열 살이나 넘었는지 의심스러운 아이의 몸을 빌리고 있었다.
아무리 내 능력치를 빌렸다고는 해도 겉모습이 이런 이상에야.
“아니, 그렇지만…….”
그러나 여기에서 빠질 수는 없었다. 어차피 알리시아 혼자서는 승산이 없다. 그건 애초에 메인 퀘스트가 알리시아의 생존인 시점에서 정해진 일이었다.
내가 함께 싸워야만 한다.
내가 막 알리시아의 말에 반박하려는 순간이었다. 문득, 속에서 무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분노와 억울함이었다.
그리고 그건 내 감정이 아니었다.
내가 억누르기도 전에 말이 튀어나왔다.
“어린애라서, 그게 뭐?”
거칠고 두려움에 떨리는, 어린애다운 말투였다.
그러니까, 내가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건 메이가 ‘77호’라고만 부르던, 이곳에 갇혀 학대받던 아이의 목소리였다.
갑작스러운 감정 변화를 마주한 알리시아가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치밀어 오른 감정은 자제할 수 없었다.
그간 내게 가려져 있었던 어린아이가 크게 소리쳤다.
“여기에 멋대로 잡아 와서 가둘 때는 어린애라고 봐주지 않았잖아요.”
파도처럼 밀려온 감정이 가슴속에서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간 쌓여 있던 두려움, 그리고 울분이었다.
“아무도 우리를 구해 주지 않았다고!”
나는 아이가 간수들 앞에서 느끼던 본능적인 두려움을 기억했다. 그 두려움에 가려져 있던 억울함이 드디어 송곳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오고 있었다.
아이가 갖은 증오를 담아 저 위쪽, 감옥 한구석에 처박힌 괴물을 노려보았다.
“이제 겨우 힘을 얻었는데, 싸울 수 있게 됐는데…… 어린애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물러나 있으라고요?”
“그건……!”
시퍼런 불같은 외침이 뒤를 이었다.
“드디어 저 괴물을 해치우고, 다른 놈들도 다 죽여 버릴 수 있게 됐는데!”
분노가 몸을 잠식하고 있었다. 몸을 다 불태울 것처럼 압도적인 감정이 밀려왔다.
마치 저 괴물이 알리시아에게 향하던 것과 같은 분노였다.
나는 숨죽이고 오랫동안 억울하게 당해야만 했던 한 어린아이가 외치는 비명을 들었다.
억울함, 분노, 증오…… 그 모든 감정이 집약된 끝에 튀어나온 말은…….
“그러니까, 내가 할 거야.”
방금 전까지 사정없이 떨리던 목소리와는 달리,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바위처럼 단호했다.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 온 것을 내뱉은 사람처럼, 그 어떤 떨림도 없었다.
같은 고통을 겪었지만, 전혀 다른 길을 택한 아이가 한 번 더 외쳤다.
“이번에야말로 내가 모두를 구해 줄 거야!”
“…….”
그 말을 들은 후 아이의 의식 뒤에 숨은 나도, 그리고 알리시아도 입을 다물었다.
그게 이 아이가 가진 감정의 전부이고, 분노에 범벅된 사고 과정을 통해 내린 하나의 결론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자신을, 그리고 함께 갇혀 있는 다른 아이들을 구하고 싶었다.
그것만이.
그 외침을 듣는 순간 나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 해당 인물은 플레이어와 가장 비슷한 성향을 따라 무작위로 선택됩니다.
……그래, 그렇겠지.
사실 이 던전에 들어왔을 때부터 이제껏, 왜 하필 이 아이의 몸을 빌리게 되었던 건지 의문이었다.
가장 비슷한 성향을 따라 선택된다지만, 아이는 그저 아이였으니까.
그렇지만 내 생각이 틀렸다.
유령의 성에서 기사단장의 몸을 빌렸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페트라와 마찬가지로 이 아이는 자신이 손쓸 수 없었던 상황을 처절하게 후회하고 있었다.
자신이 겪은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 고통에 매몰되는 대신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고자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구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와 마찬가지로.
그와 동시에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껏 시스템 따위, 인간을 시험하는 심술궂은 놈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딱히 논리를 세워 말할 수 있는 명확한 사실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시스템 덕분에 다른 세계에 있는, 강인한 의지를 가졌지만 그저 힘이 없었을 뿐인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건 아닐까.
그런 한심하기 짝이 없는 나약한 감상이 가슴 어딘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후…….”
옆에서 깊은 한숨이 들렸다.
알리시아의 것이었다.
“그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하지만 한숨을 쉰 것치고 그 목소리는 경쾌했다.
말은 하지 않아도 알리시아의 심정에 공감한 나는 알리시아의 얼굴을 바라보는 대신 고개를 들었다.
아직도 깜깜한 어둠 속.
부슬거리는 흙먼지가 바닥을 향해 떨어지고, 이윽고 감옥의 복도 너머로 괴물이 머리를 내밀었다.
나는 괴물을 향해 검을 들었다.
“들었지?”
이 꼬맹이가 너를 해치울 거란다.
그리고 알리시아가 내 옆에 섰다.
정돈된 숨소리가 들렸다. 바스타드 소드를 두 손으로 든 알리시아가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같이 해보자.”
나는 무의식중에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거 내가 방금 한 소리잖아, 멍청아.
그리고 나와 알리시아는 동시에 땅을 박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