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158화 (159/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158화

“죽…….”

죽을 것 같다.

나는 결국 휘두른 검을 회수하며 마차 천장 위에 후들거리는 무릎을 꿇었다.

“숙여!”

그때 알리시아가 몸을 굽힌 내 위로 바스타드 소드를 휘두르는 것이 느껴졌다.

검풍이 세차게 불었다.

알리시아가 휘두른 검에 막 덮쳐 오던 고블린 한 무더기가 휘말려 날아갔다.

철퍽!

내가 방금 동강 냈던 마지막 지네의 몸뚱어리 위에 고블린들이 떨어지고, 그 위를 다시 작은 두꺼비들 수천 마리가 덮었다.

그 모습을 보며 겨우 일어서려는데, 갑작스럽게 시야가 어지러워졌다. 제대로 일어서지 못하고 엎어진 어질한 시야 한구석으로 시스템 메시지가 보였다.

- 메인 퀘스트 클리어 조건 : ‘알리시아’의 생존

- 남은 시간 29:10:28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아직도 29시간이나 남았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그래, 지금 우리는 거의 12시간째 쉴 새 없이 숲을 달리는 중이었다.

감옥을 떠날 때만 해도 새벽이었는데 이제는 늦은 오후를 지나고 있었다.

‘체력 딸린다, 진짜.’

이 던전에 들어오기 전보다는 체근민 수치가 비약적으로 상승하긴 했지만 그래 봤자 결국 내 본래 능력의 반 정도밖에 회복하지 못한 셈이니, 몬스터 무리들을 열두 시간 넘게 연속으로 상대하는 게 벅찬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이제껏 몇 마리나 상대했지?’

지네만 봐도 장난 아니게 벤 것 같은데.

클리어 조건에 마릿수가 포함되는 게 아니라 볼 수 없는 게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아마 내 십 년의 역사를 통틀어 보더라도 손에 꼽을 정도로 많은 숫자였을 텐데.

- 앙겔루스의 가호가 당신을 보호합니다.

그리고 시간도 시간이지만, 맨 처음 만났던 몬스터 무리가 지네였던 것이 문제였다.

처음부터 그놈들이 독무를 뿜는 것을 정면으로 맞고 시작했기 때문이다.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은 했다만.’

하지만 당시에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지네는 미세한 안개 형태로 독을 분사한다.

내가 나서서 막지 않았더라면 마차 안의 아이들이 그 독을 고스란히 뒤집어썼을 테고, 그렇지 않아도 허약해진 신체 상태에 독은 치명적일 거였다.

어쨌든 나는 앙겔루스의 가호가 있어 독을 좀 맞는다고 해도 즉사할 정도는 아니고, 실제로도 죽지는 않았다.

지네의 독은 원래 상대를 즉사시킨다기보다는 천천히 몸을 마비시키다가 발작시키는 종류기도 하고…….

‘그나저나 애들 상태도 말이 아니겠네.’

그야 몬스터들과 싸우며 마차를 지키고 있는 나랑 알리시아도 죽을 맛인 건 당연하지만, 약해질 대로 약해진 아이들의 몸으로 12시간째 미친 듯이 질주하는 마차를 타는 것도 편한 일은 아닐 것이다.

사실 몇 시간 전부터 마차 안에서는 비명조차 들리지 않고 있었다. 가끔 억눌린 울음소리, 코 훌쩍이는 소리나 들릴 뿐이었다.

그렇다고 한가하게 애들 상태를 들여다볼 수도 없고,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잠시라도 몬스터들의 습격이 멈추면 포션이라도 풀겠는데, 공격은 잠시도 끊이지 않았다.

게다가 이제는 따로 숨겨 놓은 비장의 한 수 같은 것도 없었다.

‘용사를 기리는 망토’는 쿨타임이 일주일이나 남았고, 조한율 카드로 긁었던 폭발물들은 진작 다 쓴 지 오래다.

정말로 믿을 것이라곤 내 몸뚱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X발, 아까부터 팔이 저린 것 같아.’

이제까진 기합으로 버텼는데, 이제 체력이 떨어지니 도저히 속일 수가 없었다.

아니, 체력이 떨어져서 독을 밀어내는 게 불가능해진 건가? 검을 휘두르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그나마 아까 전 알버트를 상대하면서 체근민 수치를 올렸으니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벌써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쓰러지면 편해질지도 모르지.

눈앞이 가물거리기 시작했다. 검을 휘두를 힘조차 빠지고 있었다.

진짜 피곤…….

“집중해야 돼!”

알리시아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 나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순간 아찔했다.

알리시아가 부르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정신을 잃고 그대로 땅으로 떨어졌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하, 여기서? 말도 안 돼.’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일어나라, 강예나. 죽더라도 나중에 죽어!

목에서 비릿한 피 맛이 났지만 이를 악물고 손끝에 마력을 흘려 넣었다.

검을 못 쓰면 뭐?

내 클래스는 검사가 아니라 용사라고. 이를 못 쓰면 잇몸으로라도 씹을 수 있는 법이다.

펑!

퍼펑!

손에서 날아간 마력구에 두꺼비 수백 마리가 날아가고, 그렇지만 뒤이어 튀어나오는 놈들이 더 많았다.

나는 무릎을 일으킬 생각도 하지 못하고 천장에 엎드린 채 계속해서 마력구를 날려 댔다.

마력의 낭비였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게 최선이었다.

검을 휘두르고 회수하기 전에 벤 것보다 더 많은 몬스터들이 덮쳐 오고 있는 상태였으니.

쿠에에엑!

한 번 더 날아간 마력구를 머리에 정통으로 맞은 커다란 오우거 한 놈이 폭사했다. 그 시체에 엉겨 붙는 하급 몬스터들을 보니 헛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숨을 몰아쉴 겨를조차 없다.

빽빽이 우거진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 때문에 눈이 따가웠다. 후덥지근해진 기온 때문인지, 혹은 긴장해서인지 계속해서 식은땀이 나고 있었다.

쾅!

두 번째 마차가 크게 덜컹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하늘을 날아다니며 계속 마차를 노리고 있던 와이번이 하강해 발톱으로 마차를 건드린 것이다.

하지만.

“어딜!”

키에에엑!

알리시아가 와이번이 날아든 것을 보자마자 마차 천장을 박차고 뛰어올라, 바스타드 소드로 그 대가리를 곧장 동강 내며 머리와 분리된 몸을 걷어차 냈다.

“야!”

그리고 나는 비명을 질렀다.

그도 그럴 것이 알리시아가 차 버린 와이번의 몸체가 뒤를 향해, 그러니까 마지막 마차에 올라탄 나를 향해 날아왔던 것이다!

나는 몸을 굴려 마차 끝에 매달리며 간신히 몸체를 피했다.

알리시아가 소리쳤다.

“아, 미안!”

그러니까 생각 좀 하고 행동하랬지!

땅바닥으로 굴러떨어진 와이번의 몸체가 달려오는 몬스터 무리 한복판에 떨어졌다. 뼈와 살점이 흐트러지는 소리에 마차를 쫓는 몬스터들이 더욱 광분했다.

그 와중에 내 다리를 노리고 달려드는 오크 한 마리를 발로 차며 나는 겨우겨우 마차 위로 다시 올라갔다.

막 일어서려는데, 어느새 다시 마지막 마차 위로 이동해 온 알리시아가 손을 뻗어 몸을 일으켜 세워 주었다.

“괜찮아?”

“괜찮겠냐?”

그나마 다행인 건 방금 전 와이번의 몸체가 굴러떨어지면서 뒤쫓던 몬스터들을 날려 버린 덕분에 약간 거리가 생긴 것이다.

숨 쉴 정도의 틈은 생겼군.

알리시아는 잠시 나를 보더니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러게, 힘들 거라고 했잖아.”

패배감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나는 알리시아를 힐끗 쳐다보았다.

거의 반죽음 상태인 나에 비해 비교적 멀쩡한 편이었지만, 붉은 눈동자 밑에는 검은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아마도 내 꼴을 보고 영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

뭐,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저 녀석 입장에서는 생면부지의 열 살짜리 어린애 도움을 받아 겨우 이 상황을 헤쳐 나가고 있는데 그 꼬맹이는 만신창이가 되었으니…….

하지만, 만일 내가 여기 없었더라면 알리시아는 진작 죽었다.

일단 숫자가 너무 많았다.

몬스터도, 지켜야 할 아이들도.

이제까지 우리가 상대했던 몬스터의 등급 자체는 그리 높지 않았다.

하지만 숫자가 상상 이상으로 많았다.

겨울왕의 숲이 몬스터가 많기로 유명한 곳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렇지.

‘뭔가 이상해.’

고정형 던전 브레이크란 게, 원래 클리어하지 않는 이상 몬스터가 계속 나오는 건 맞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몬스터의 생성도 멈추고, 대개 던전 주위에서 자생지를 꾸리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12시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 우리를 특정하고 쫓아온다고?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건 확실했다.

‘알리시아가 혼자 못 버틴 것도 당연하지.’

심지어 사방에서 튀어나오는 몬스터로부터 지켜야 할 마차는 여섯 대나 되고.

알리시아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몬스터가 전방위로 덮쳐 오는데 혼자서 아이들을 완벽히 지켜 내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 일을 해내려고 했겠지.

아이들 대신 본인이 모든 공격을 받아 내면서, 한 명이라도 더 구하려고 끝까지 애쓰다가 죽었을 게 뻔하다.

망할.

그나마 지금은 내가 있어서 다행이지만 그래도 갈 길이 멀었다. 이대로 어떻게 남은 시간을 버텨야 할지…….

“이거 받아.”

그때였다. 알리시아가 갑작스럽게 내 손에 무언가를 억지로 쥐여 주었다.

“이건……?”

알리시아가 내게 건넨 것은 검은색의 마석이었다. 흑요석처럼 보이는 육각형의 보석 속에서 검은색의 마력이 태풍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알리시아를 바라보니 사뭇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네크로맨서의 오더석. 이게 있으면 말들은 네 명령을 들을 거야. 그러니 이걸 가지고 애들이랑 같이 도망가.”

나는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알리시아가 다시 한번 말했다.

“도망가라고. 잠깐 틈을 만들어 줄게. 슬슬 숲 외곽과 많이 가까워졌어. 너 정도 실력이라면 가능할 거야.”

“그게 뭔 개…….”

“뒤는 걱정하지 마.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끝까지 지킬 테니까.”

나는 입을 떡 벌렸다.

그러니까 지금, 혼자 여기 남겠다는 소린가?

본인이 여기서 몬스터를 막는 동안 애들을 데리고 도망가라고?

“웃기고 있네.”

미친 새끼.

나는 바닥에 침을 뱉었다.

내가 지금 그걸 막으러 여기까지 왔는데 헛소리를 하고 자빠졌다.

“왜 그딴 말을 하는 거야?”

“죽는 건 나 혼자면 되니까.”

심지어 알리시아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나는 이쯤 되니 정말로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아까 알버트가 죽었을 때도 넋을 빼더니, 알리시아의 자꾸 포기하려는 저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한테 천 명, 만 명을 상대로 하더라도 결코 검을 꺾지 말라던 말을 했던 게 누군데!

“웃기지 말라고 했지!”

“고집 부리지 말고.”

내 앞의 붉은 눈동자가 어둡게 반짝였다. 알리시아는 우리가 지나온 길 저 너머, 숲의 어딘가를 응시했다.

“처음부터 뭔가 이상했어. 이렇게 오랫동안 몬스터들이 쫓아오는 거, 정상적인 일이 아니야.”

“그거야 고정형 던전이 터졌으니까…….”

“이 몬스터들이 모두 다 그 던전에서 나온 놈들이라기엔 우리가 제법 거리를 벌렸어.”

알리시아가 고개를 저으며 이어 말했다.

“게다가 아무리 몬스터라도 이렇게 압도적으로 강한 상대를, 그것도 같은 종족도 아닌데 힘을 합쳐서 한나절도 넘게 쫓는 건 자연스럽지 않아.”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건…… 그랬다. 나도 정확히 같은 부분에서 이상하다고 느끼던 차였으니까.

“그런데 그게 왜 여기에 남겠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건데?”

“내가 표적일 테니까.”

내 앞에서 무거운 바스타드 소드가 휘둘러졌다. 덮쳐 오던 몬스터들이 일제히 학살당했다.

그런 압도적인 강함을 보였음에도 여전히 마차를 쫓아오는 몬스터들의 속도는 줄지 않았다.

피가 흐르는 검날을 털어 내며 알리시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감옥에 있던 놈들이나, 아니면 알버트가 뭔가를 했어. 그래서 몬스터들이 이렇게 집요하게 쫓아오는 거고.”

가장 끔찍한 건 알리시아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그 뜻을 정말, 진정으로 이해했다는 것이었다.

감옥에서 들었던 아이의 말이 떠올랐다. ‘간수들이 숲속이 유리하다.’라고 말했었다지.

나는 속으로 신음했다.

그 감옥 자체가 오로지 알리시아만을 노리고 만들어진 함정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래, 알리시아의 추측이 옳을 가능성이 컸다.

알리시아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이건 내 탓이야.”

하지만, 이해와는 별개로 알리시아의 말에 공감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말 한번 잘했다. 그래, 이게 뭐든 간에 그놈들이 한 짓이잖아! 네가 아니라!”

“아니, 내가 했어.”

대꾸하는 목소리는 놀랍도록 무심했다.

“내가 죽였어.”

“너는……!”

“몇 년 전에, 내가 실험과 관련된 놈들은 다 죽였어. 적어도 그렇다고 생각했지. 그러니까 나한테 복수하려는 놈들이 있는 건 이상한 게 아니야. 예상했어. 그렇지만…….”

바로 반박하려던 나는 문득, 검을 잡은 알리시아의 손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옵타티오를 죽였을 때…….”

그 이름에 나는 잠시 움찔했다.

우리가 설정했던 최후의 목표, 최후의 적. 그건 사실 희망이기도 했다.

“모든 게 끝날 줄 알았어. 믿지 않는다고 말했으면서, 우습게도 믿고 있었지.”

그리고 헛된 것으로 밝혀진 것이기도 했고.

“그런데 끝이 나질 않아. 몬스터들도 개 같지만, 인간들은 더 개 같고.”

알리시아가 조용히 다음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제 그만 끝내고 싶어.”

그 목소리에 담긴 것은 완연한 실망이었다. 그 어떤 기대도 담지 않고, 희망도 없다는 듯 무의미한 목소리.

“…….”

그리고 나는 그걸 듣는 순간 도저히 더 참아 줄 수가 없었다.

뻐억!

“악!”

나는 주먹으로 알리시아의 뺨을 후려갈겼다.

거하게 얻어맞은 알리시아가 마차의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휘청였다.

물론 열 받았다고 마차에서 떨어트릴 수는 없었기에, 나는 알리시아의 멱살을 잡았다.

“컥!”

부들부들 떨리는 손에 힘을 주고, 멱살을 잡은 채 알리시아의 고개를 확 끌어당겼다.

그리고.

쾅!

오히려 내 눈에 별이 튀었다.

미친 돌대가리 같으니.

“뭐, 뭐……?”

머리로 박치기를 먹은 알리시아가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내 쪽을 응시했다.

나는 이를 갈았다.

“듣자 듣자 하니까 이게……!”

- 당신은 해당 인물로서 행동해야 합니다.

경고창이 떠올랐지만 그래도 주먹을 들었다.

몬스터고 메인 퀘스트고 이젠 다 모르겠고, 지금 당장 알리시아를 죽어라 쥐어 패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끝내고 싶다고?

누구 마음대로!

그게 지금, 너네들 낯짝 한 번 더 보겠다고 목숨 걸어 가며 여기까지 온 나한테 할 소리냐?

“아, 그래. 그렇게 죽고 싶으면 내 손에 죽어, 이 새끼야!”

정말 진심이었다.

그때, 알리시아가 눈을 깜박였다.

눈동자에는 의혹이 서렸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레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