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163화
순간적으로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나는 곧 정신을 차렸다.
주위 풍경이 이상했다.
나는 마부석에 앉아 있지 않았다. 내가 있는 곳은 숲속조차 아니었다.
완전히 다른 어딘가.
모든 시야가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다. 마치 우주에 홀로 남겨진 것 같은 감각이 덮쳤다.
위, 아래, 좌, 우…… 모든 방향 감각이 상실될 정도로 압도적인 공간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볼 수 있는 건 내 몸뿐이었다.
“이건…….”
분명 입을 열어 말을 했지만, 그 소리는 내 귀에도 닿지 않고 스러져 버리는 것 같았다.
이 공간에 들어 있는 것은 밀도 높은 공허뿐이었다.
광활한 어둠 속에서 나는 그냥 둥둥 떠 있었다. 아무것도 감각하지 못하고, 내 존재조차 잊어버릴 것 같은 공간.
그대로 넋을 빼고 어둠에 몸을 맡길 뻔했지만, 나는 마지막 순간 의식의 끈을 잡았다.
‘잠깐만.’
확실히 예전에도 이런 공간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몇 개월 전 일이었다.
서울 강남에서 갑작스러운 던전 브레이크를 경험했을 때다. 보스 몬스터를 처치한 후 갑작스러운 지진이 일어났고, 나는 옵타티오가 나타나는 환상을 보았다.
‘생각해.’
그래야 나 자신을 보존할 수 있다.
나는 필사적으로 생각을 거듭했다.
그래, 옵타티오를 보았지. 하지만 보았다고 생각한 순간 그건 사라졌고…… 나는 이런 곳에 처박혔다.
그때도 분명히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어둠 속을 헤메다가…….
- 제 목소리 들려요?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 때문에 나는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미친!”
- 어, 된 건가?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뭐야, 이건?”
빛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손톱만 한 크기의 흰빛 덩어리가 어둠 속에서 둥둥 떠올라 있었던 것이다.
‘……마리모?’
기분이 좋으면 수조에 둥둥 떠오르는 녹조류의 식물을 떠올리게 하는 생김새였다.
나는 손가락을 뻗어 그 빛을 툭 건드려 보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덩어리가 반응을 보였다.
- 방금 화면이 흔들렸는데. 뭐 한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모양새가 어딘지 익숙했다. 하지만 그리 친근한 목소리는 아니어서, 나는 확신하지는 못하고 물었다.
“조한율?”
그러자 구체가 파르르 몸을 떠는 것이 보였다.
- 네, 조한율이에요.
그리고 그게 정답이었다.
- 신호를 찾는 데 너무 오래 걸려서 걱정했는데 연결이 되어서 다행이네요.
조한율은 계속해서 무어라 말했는데 귀에 잘 와닿지 않았다. 감각이 아직 부유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주 같은 공간은 전혀 변함이 없었지만, 감각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이 광활한 어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크기였지만, 빛은 빛이었다.
내 눈앞에서 빛나고 있는.
나는 구체를 손으로 한 번 더 건드려 보았다.
손가락이 따끔했다. 약간의 스파크가 튀는 것이 보였다.
“아야.”
그건 충분한 자극이었다.
그러니까, 정신을 차렸단 이야기였다.
정신이 든 순간 나는 헉, 하고 놀랐다.
어떻게 된 거지? 나는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타르토스에서 알리시아와 함께 있었는데, 왜 갑자기 이런 곳에 있단 말인가.
“이게 무슨 짓이야?”
조한율은 내 물음에 아주 간단하게 대답했다.
- 일대일 채팅방에 소환했어요.
그 대답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나는 멍하니 되물었다.
“……뭐?”
“시스템 운영자 전용 기능 중 하나예요. 특정 플레이어랑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의사소통을 할 수 있거든요.”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내 의사와 상관없이 그런 걸 할 수 있단 말이야?”
- 어, 솔직히 그런 생각은 못 해 봤네요. 흠, 긴급한 상황에서만 쓰겠다고 약속할게요.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만 참기로 했다. 대신 가장 중요한 것부터 묻기로 했다.
“……그래서 여기가 어디지?”
- 그러니까 채팅방…….
“이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채팅방이라고? 차라리 감옥이라면 믿겠는데. 그쪽에서 여기가 보이긴 해?”
나는 한 손을 흔들어 아무것도 걸리적거리지 않는 허공을 보여 주었다.
“이거 보여? 여긴 무슨 우주 같아. 이런 데 오래 있다간 미쳐 버리고 말 거라고.”
그렇게 말하자 흰빛을 내는 구체가 곤란한 것처럼 파르르 떨었다. 이상하게 들리지만, 어쨌든 그런 감정이 읽히는 움직임이었다.
- 음, 사실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긴 해요. 원래 이 기능을 활성화하면 강예나 씨가 제가 있는 곳으로 왔어야 하는데, 지금 강예나 씨가 있는 곳은 대한민국이 아니라서요. 그러다 보니 소속 서버를 약간 벗어난 곳에서 연결된 것 같은데…… 서버 간 간격 같은 곳? 차원 사이의 여백?
횡설수설하는 걸 보아하니 나를 부른 조한율도 여기가 어딘지 모른다는 거로군.
그러고 보니 악마 새끼가 세계를 이동할 때 차원의 균열이 어쩌고, 하는 말도 했었지. 어쩌면 여기가 그 차원 간의 균열 사이인 건지도 몰랐다.
던전에서 운명의 씨앗 아이템을 활성화하면서 내가 타르토스라는 세계로 넘어왔으니 그럴 법한 이야기였다.
나는 머리를 꾹꾹 눌렀다.
슬슬 두통이 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결국 무슨 일이야?”
물론 시스템에 대한 문제는 나중에 시간을 들여 차차 생각해 볼 만한 가치가 있을 듯했지만, 어쨌거나 나는 당장 알리시아부터 살려야 했다.
“지금 엄청나게 중요한 퀘스트 중인데. 이렇게 이야기하는 동안 현실의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갑자기 거기서 사라지는 건가?”
만일 그렇다면 알리시아는 분명 당황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힘든 상황에서 겨우 만난 내가 사라진다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 그건 아니에요. 채팅방 활성화 중에는 서버 내 시간과는 유리되어서 문제가 없어요…… 아마?
“아마?”
애매한 대답이었다.
잠깐의 침묵 후 되돌아오는 목소리에는 어쩐지 확신이 없었다.
- 근데 생각해 보니까 지금 강예나 씨는 대한민국에 있는 게 아니라서 확실하지는 않네요…… 신호도 잘 안 잡힐 정도니까.
이제는 정말로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아니, 사실은 짜증보다는 조급함에 가까웠다. 조한율이야 이쪽 사정을 모르니 저렇게 태평하게 말할 수 있는 거겠지만, 나는 정말이지 마음이 급했다.
“그럼 빨리 돌아가야 할 것 같은데. 데드라인이 있어서 시간을 낭비하게 되면 곤란해. 나중에 이야기해도 되는 일이라면…….
- 아, 기다려요!
하지만 조한율이 붙잡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게 일반적인 전화였다면 진작 끊었거나, 혹은 아예 받지 않았겠지만, 시스템 운영자 전용 기능은 플레이어 쪽에서 차단할 수 없는 것 같았다.
결국 내 쪽에서는 이 공간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팔짱을 낀 채 빛나는 구체, 그러니까 조한율을 바라보았다.
정말 중요한 말이어야 할 것이다.
“말해. 뭐야?”
- 놀라지 말고 잘 들어요, 강예나 씨.
“이미 충분히 놀랐어.”
- 그쪽 세계 운영자가 미친 짓을 했어요.
나는 눈을 깜박였다.
순간적으로 조한율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뭐라고?”
-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완전히 미친 새끼예요. 이전에 만나 본 적은 없죠?
“타르토스의 시스템 운영자? 만나 본 적 없어. 애초에 그쪽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다고.”
반사적으로 그렇게 대답하다가,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잠시만.”
그러니까 지금 조한율은 타르토스의 시스템 운영자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건가?
그 존재 자체에 놀란 것은 아니었다.
그야 대한민국에도 시스템 운영자인 조한율이 있으니, 타르토스에서도 누군가가 시스템 운영자를 맡고 있었으리라는 생각은 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일반적인 거고.
하지만.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는데.”
그 세계 자체가 망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나?
물론 예전에는 타르토스에도 시스템 운영자 역을 맡은 사람이 있었을 수 있다.
하지만 타르토스는 이미 멸망했고, 나는 그 운명을 바꾸려고 여기에 있으니…… 현시점에서 타르토스에 운영자가 있을 수는 없다.
그렇지 않은가?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하지만 조한율의 대답은 단호했다.
- 있어요. 분명히.
“근거가 뭔데?”
- 저랑 하루 전에 싸웠거든요.
하루 전이라니, 내가 막 알리시아를 만났을 때쯤 이야기였다.
그 시점에서 조한율이 타르토스 쪽의 시스템 운영자와 접촉했다고?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싸우다니, 그럼 직접 만났단 소리야?”
- 아뇨, 물론 시스템상의 이야기죠. 그때 저는 강예나 씨를 지켜보다가, 글쎄, 약간 오지랖을 좀 부려 보려고 했는데…….
나를 왜 지켜본 건지, 오지랖을 부린다는 건 무슨 소린지 추궁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일단 참기로 했다. 혼란스럽기는 해도 이야기를 끊기 좋은 시점이 아니었다.
조한율은 약간 횡설수설하는 어조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 결론적으로 아무것도 못 하고 오히려 제가 된통 당했어요. 저쪽 운영자가 보복성으로 이쪽…… 한국에 바이러스를 대량으로 투하했다고요.
“바이러스?”
- 던전을 감염시켜서 변형시켰으니까 바이러스나 다름없죠. 덕분에 대한민국 서버는 지금 난장판이에요.
“난장판이라니?”
계속 반문하는 내가 멍청하게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조한율의 말에서 제대로 이해되는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타르토스의 시스템 운영자가 조한율과 싸운 끝에 대한민국의 던전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내가 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자 조한율이 끙끙 앓는가 싶더니, 곧 수를 냈다.
- 내가 보는 지도 공유 가능한가? 흠, 되네요. 이걸 봐요.
갑자기 내 눈앞으로 투명한 홀로그램창이 떠올랐다.
익숙한 대한민국의 지도에 수많은 점이 찍혀 있었다. 푸른색부터 빨간색까지. 그중 붉은색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리고 그 모든 수백 개의 붉은 점은 불길하게 점멸하고 있었다.
- 지금 깜박이는 모든 점이 현재 난리 난 던전이에요. 돌았죠?
“이게 무슨…….”
- 현재 홍대에 S급 이무기가 나타나서 빌딩 위에 또아리 틀고 있다면 믿을래요?
그냥 개소리 같았지만 확연한 피로가 드러나는 목소리에는 그게 사실이라고 믿게 하는 힘이 있었다.
- 하여튼 그 덕에 수습하느라 개 같은 상황이에요. 내가 미쳤지, 왜 그런 짓을 해서.
“아니, 대체 뭘 한 건데?”
조한율이 약간 망설이는가 싶더니 곧 포기한 어투로 사실을 털어놓았다.
- ……강예나 씨를 좀 도와주려고 했죠.
“뭘 어째? 나를? 왜?”
- 아, 몰라요. 어차피 헛수고였으니까 길게 말할 것도 없어요. 그냥 내가 도와주려고 했지만 다 망쳤고, 다시는 그런 짓 안 할 거란 것만 알면 됩니다. 다시는!
조한율의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짜증이 섞여 있었다.
솔직히 나로서는 조한율에게 도와 달라고 말한 적도 없으니 억울한 울분이었다만, 그 점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상황을 보아하니, 조한율 나름대로는 나를 도와주려고 했는데 일이 꼬인 듯했다. 게다가 그 후회는 본인이 철저하게 맛보고 있는 모양이고.
대체 뭘 도우려고 했다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날 싫어하는 것 같은데 희한하네.’
무슨 짓을 하려고 하다가 이렇게 된 건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난리가 나긴 났네.’
어쨌든 현재 눈앞에 나타난 대한민국 지도 전체에서 점멸하는 불빛이 압도적으로 시야를 점령했다.
게다가 조한율이 말한 게 사실이라면 홍대 근처. 그러니까 헌터들이 가장 안전을 우선시할, 인구 밀집도가 높은 번화가에서도 던전 브레이크가 터졌다는 말이 된다.
그만큼 인력이 부족하다는 뜻이겠지.
“그런데 나랑 이야기할 시간은 있는 건가? 엄청 바쁜 것 같은데.”
- 이쪽 서버 시간과는 유리되었다니까요. 어쨌든, 내가 실수한 거니까 경고는 하는 게 도리 같아서.
그렇게 말하는 것과 파지직, 하고 흰빛의 구체가 살짝 흔들렸다.
“경고라고?”
- 네, 경고하러 왔어요. 조심하라고요.
그러니까 경고가 조한율의 목적이었다는 건가?
하지만 여전히 의아했다.
“난 던전 공략 중이야. 당연히 조심하고 있지. 그런 뻔한 소리를 하려고 불러낸 건가?”
- 뻔한 상황이 아니니까 그렇죠. 퀘스트와는 별개로 그쪽 상황을 좀 더 주의 깊게 생각할 필요가 있을 거예요. 타르토스인지 타르타르인지, 거기 운영자는 제정신이 아니니까.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 담긴 것은 적대라기보다는 약간, 공포에 가까웠다. 마치 미지의 생물을 접한 것과 같은 공황 같기도 했다.
그래서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알아듣게 말해 주겠어?”
- 운영자라고 해서 모든 걸 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저번에도 이야기했죠? 특히나 기본적으로 각 서버 간 간섭은 금지되어 있어요. 그나마 내용 변경 정도는 요령껏 가능하지만…… 그래도 페널티가 붙어요. 가령 제가 그쪽의 던전 내용을 조금 쉽게 고친다면, 그만큼 제 소속 서버의 던전 내용이 어려워지는 식으로.
나는 가만히 듣다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러니까 즉, 조한율이 하려던 짓이 저건가.
- 그렇지만 서버 간 공격은 또 완전히 다른 문제예요. 애초에 시스템상으로 금지되어 있기도 하고, 페널티 자체는 비교도 안 돼요.
“어느 정돈데?”
- 제가 이런 짓을 했다면 바로 죽었을 거예요.
조한율이 냉정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 혹은, 적어도 영구적인 손상을 입었겠죠.
“영구적이라면 어떤?”
- 뭐, 시스템 과부하로 영원히 불길에 타는 것 같은 고통을 느낀다든가, 하여튼 몸이든 정신이든 버틸 수 없을 정도의 고통? 하여간 정상적인 인간이 할 짓이 아니에요.
진심이 느껴졌다.
아마도 조한율의 공포는 이 불가한 상황에서 오는 듯싶었다.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고통을 감수한 누군가에 대한 공포.
그리고 나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조한율의 말은…… 운영자라도 다른 서버를 의도적으로 공격한다면 손해를 감수해야만 하고, 그런데 타르토스의 운영자는 그 손해를 감수해 가며 대한민국을 공격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역시 이상했다.
멸망한 세계에 아직 운영자가 있다는 것도 이상한데, 심지어 그런 개인적인 페널티를 감수하면서까지 대한민국을 공격했다니.
나는 혼란스러운 심정으로 물었다.
“도대체 왜 타르토스 쪽 운영자는 그런 짓을 한 거지?”
- 저야 모르죠. 다만 적어도…… 제가 강예나 씨를 도우려는 걸 원하지 않는 건 확실해요.
조한율이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 그리고 더 확실한 건, 지금 강예나 씨는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운영자의 세계에 있다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