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165화
아무리 다시 봐도 남은 숫자는 변함이 없었다.
정말로 남은 시간이 3시간밖에 없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봤던 남은 시간이 대략 스무 시간이었던 걸 생각하면 대략 17시간이 날아간 셈이다.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그야 조한율과 대화를 나누긴 했지만, 아무리 길어 봤자 30분도 채 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내가 조한율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타르토스 쪽 시간의 흐름이 그대로 흘러갔다고 치더라도, 그럼 대략 30분 정도만 흘렀어야 정상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
그리고 그때 다시 눈에 들어온 것이 막 소멸되려던 메시지였다.
- 경고! 당신의 생명력이 극도로 저하되어 있습니다. 안정을 취하십시오.
- 일정 생명력이 회복될 때까지 움직일 수 없습니다.
- 최소 안정화까지 00:00:00
‘잠깐만, 혹시 저게……?’
굳이 더 시간을 들여 살펴보지 않아도 유령의 성에서 보았던 메시지와 동일한 내용이었다.
그때는 시스템이 무슨 변덕을 부린 줄 알았지만, 조한율이 내게 준 정보에 따르면 저건 운영자가 개입해 띄우는 메시지였다.
그렇다면 이 잃어버린 17시간에 대한 해답은 간단했다.
‘운영자한테 행동 제어를 받았나 본데.’
물론 최소 안정화를 운운하는 저 제한 시간이 이미 지나 버린 터라 정확히 내가 얼마나 긴 시간 동안 움직임을 제한받았는지는 모르겠다만, 어쨌든 이게 아니고서는 내가 17시간이나 기절해 있었던 게 설명이 되지 않았다.
조한율이 운영자가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른다고 경고하자마자 이런 일이 터지다니.
그렇지만 대체 왜 이런 짓을 한 거지?
나는 의문으로 가득 찼다.
그야 이 메인 퀘스트의 목표가 알리시아의 생존인 만큼, 운영자가 퀘스트를 방해할 목적으로 내게 행동 제한을 걸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겠지만…… 나는 눈을 굴려 알리시아를 바라보았다.
‘잘 살아 있는데.’
알리시아가 내 입을 막으며 거의 감싸 안고 있다시피 한 덕분에 체온도 느껴졌다.
이 모습이 환상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또 조금 피곤해 보이기는 했지만 딱히 눈에 띄는 상처도 없었다.
그러니까, 알리시아는 17시간 동안 나 없이도 잘 살아 있었다.
즉 내가 받은 17시간의 제한이 딱히 이 퀘스트 성공 여부에 영향을 미친 것도 아니란 말이다.
‘그럼 제한을 건 목적이 뭐지?’
타르토스 쪽 운영자가 무언가 의도를 가지고 이 퀘스트에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해졌지만, 그 목적을 전혀 모르겠다는 게 문제였다.
이 퀘스트를 돕고 싶은 건지, 아니면 실패하길 바라는 건지 도저히 가늠이 되질 않았다.
설마 내 생명력이 저하된 상태라 강제로 휴식을 취하게 하려는 건 아니었을 테고…… 물론 현재 몸 상태가 가뿐하게 느껴지긴 했다만.
역시 조한율의 말대로 그냥 진짜 미친 새끼인 건가?
‘……이거 짜증 나네.’
머릿속으로 운영자의 의도를 가늠해 보던 나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망할.
조한율의 말이 옳았다.
의도를 파악할 수 없는, 동시에 거의 전능한 상대의 손아귀 속에 있다는 건 정말 끔찍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애써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 버렸다.
생각해 봤자 당장 어쩔 수 없는 일은 치워 버리자.
어쨌든 내 앞에는 멀쩡히 살아 있는 알리시아와 남은 3시간이 있었다. 지나간 일을 후회하느니 지금이라도 무언가를 시도해 보는 게 훨씬 낫다.
그러려면, 일단 이 묘한 상황을 파악해야 했다.
‘얘는 또 왜 이러고 있냐고.’
남은 시간이 워낙 충격적이라 그렇지, 사실 지금 내 입을 막고 있는 알리시아의 모습도 만만치 않게 이상했다.
주위를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강한 몬스터가 근처에 있기라도 한 건가?’
나는 곧장 기감을 퍼트려 주변을 확인해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 보아도 새소리나 동물의 발자국 소리가 들릴 뿐, 아무것도 감지하지 못했다.
당장 몬스터가 덮쳐 올 것 같지는 않은데.
하지만 방심할 수는 없었다.
자존심은 상하지만 현시점에서는 알리시아 쪽이 나보다 훨씬 능력치가 높았다. 내가 감지하지 못한 몬스터라도 알리시아는 감지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렇게 되면 일단, 알리시아와 대화를 나누는 게 급선무였다.
나는 내 입을 막고 있는 알리시아의 손을 떼어 냈다.
물론 알리시아가 다시 내 입을 틀어막으려고 했지만 그 전에 나는 손바닥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 무슨 일이야? 왜 마차를 멈춘 거지?
그리고 내가 글씨를 쓰는 걸 보고 알리시아가 무언가를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동시에 나도 깨달았다.
그래, 알리시아.
내 입을 막을 생각은 했는데 손바닥에 글씨를 써서 의사소통할 생각은 못 했구나…… 이 멍청이가 내 친구라니.
어쨌든 드디어 원시적인 소통 방법을 깨달은 알리시아도 내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물론 손바닥 글씨라는 걸 잊었는지 마구 갈겨 써서 알아듣기 힘들긴 했지만, 결론적으로는 이런 뜻이었다.
― 근처에 뭔가 있어.
― 뭐가?
― 모르겠어. 몬스터겠지? 넌 아무것도 안 느껴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알리시아의 표정이 한층 더 긴장으로 물들었다.
― 어쨌든 마차를 멈출 필요는 없지 않았어? 몬스터가 있다면 더 그렇지. 빨리 달려서 도망치는 게 낫잖아.
― 아니, 일단 상황을 살피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 소리를 듣고 쫓아오는 걸 수도 있고. 아이들한테도 최대한 조용히 하라고 했거든.
돌아온 대답에 나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음, 알리시아는 멍청하지만 그래도 그 감은 무시할 만한 것이 못 되었다.
사실 감이라는 것 자체가 보통, 지난 경험이 자연스럽게 체득되어 비슷한 상황에서 무의식적으로 정답을 찾아내는 것과 가깝지 않은가.
그리고 알리시아는 머리 쓰는 걸 싫어하지만, 어쨌든 이 대륙에서 가장 많은 상황을 겪어 본 용병 중 하나였다.
이럴 때 알리시아의 의견은 대부분 정답이다.
다만, 알리시아가 걱정하는 게 소리라면 내게 좋은 방법이 있었다.
나는 곧장 감옥에서 유용하게 썼던 아이템을 꺼내 들었다.
- 아이템, ‘소음 방지 부스’를 사용합니다.
- 제한 시간 01:00:00
아이템이 사용됨과 동시에 우리 주변으로 투명한 사각형의 막이 씌워졌다.
나는 알리시아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말해도 돼.”
알리시아는 빠르게 아이템의 용도를 깨달았다.
“뭐야. 차음이 되는 거야? 이런 건 또 어디서 났대?”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하여간에 나는 아무것도 안 느껴져.”
그러자 알리시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뭐라고? 이렇게 살기가 명백하게 느껴지는데?”
“살기고 뭐고, 진짜 안 느껴져. 네가 착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게 말이 돼? 레나, 너 나 모르는 사이에 레벨 1부터 시작하기라도 한 거야?”
의외로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굉장한 타격감이었다. 나라고 좋아서 허접 깡통이 된 건 아닌데.
왠지 억울해졌지만, 그런 걸 따질 때는 아니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안 느껴진다니까. 뭐지? 나 잠든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아니, 생각보다 무난했어. 나 봐. 멀쩡하잖아. 그나저나 나 네가 그렇게 오래 자는 거 처음 봐.”
그거야 정말 잠들었다기보다는 시스템상 행동 제어를 받은 거니까 그렇겠지.
어쨌든 교대로 쉬었어야 하는데, 내 의도는 아니었다고 해도 알리시아에게 미안해졌다. 솔직히 피곤함을 따지자면 쟤가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텐데.
“미안. 혼자 휴식 시간을 독차지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하지만 그렇게 말하자 알리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됐어. 아무리 그래도 열 살짜리 꼬맹이더러 나 대신 불침번 서라고 깨울 정도는 아니야. 게다가 침까지 흘리면서 푹 자던걸. 엄청 피곤했나 봐.”
“무슨 소리야. 내가 열 살짜리로 보이냐?”
“지금은 그렇긴 해. 능력치도 약해졌잖아. 이렇게 명백한 살기도 못 느끼는데 말 다했지.”
흠, 나는 생각에 잠겼다.
알리시아가 저렇게까지 확신에 차서 말하는 걸 보면 무언가가 우리 뒤를 쫓아오고 있다는 건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나는 그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이거지.
나는 곧 결론을 내렸다.
“내가 문제가 아니라, 네가 문제일 수도 있지.”
얼마 전 레비아탄이 나타난 던전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 특정 아이템을 지니고 있는 헌터들만이 새끼 몬스터의 살기를 감지했던 것이다.
이번에도 알리시아만 어떤 조건을 충족해 단독으로 어그로가 끌렸을 가능성도 있다.
또 모르지. 내가 잠든 사이에 지나가던 나무에서 새 둥지를 발견해 먹으려고 알이라도 훔쳤다가 원한을 샀을지.
그렇게 말하자 알리시아가 억울하다는 듯 두 손을 들고 외쳤다.
“나 정말로 아무것도 안 했어!”
그거야 두고 보면 알 일이었다.
하여간 알리시아가 몬스터의 기척을 느낀다면 큰일이었다.
앞으로 3시간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한시라도 빨리 알리시아를 안전한 곳에다 데려다 놔야 했다.
“그래서 지금 어디까지 왔어? 마을까지 도달하려면 얼마나 걸릴까?”
“바짝 달리면 두 시간? 그 정도면 넉넉하게 도착할 거야.”
그 대답에 나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많이 왔어?”
“응, 애초에 여기도 용병들이 자주 쓰는 야영지 터거든. 바닥을 봐.”
그렇게 듣고 보니 확실히 큰 돌 없이 바닥이 고르게 골라져 있는 것이 보였다. 한때 모닥불을 피운 흔적도 희미하게 보였다.
하기야 이제껏 쉬지 않고 또 17시간 즈음을 달린 거니, 슬슬 숲을 벗어날 때도 되기는 했다.
두어 시간만 더 가면 된다니, 간만에 들은 희망적인 소식에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나는 곧바로 알리시아에게 제안했다.
“그럼 이대로 마을까지 곧장 달리자.”
“뭐? 하지만 소리 때문에 몬스터가…….”
“어차피 몬스터들도 숲 외곽까지 나오는 건 꺼려 하잖아. 어떤 몬스터가 쫓아오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 전에 마을로 도망가면 그만이지.”
어차피 아이들을 보호하면서 싸우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또 겨울왕의 숲 인근에 있는 마을에는 보통 많은 숫자의 용병들이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의 협력을 받으면 어지간한 몬스터 토벌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알리시아는 용병왕이니 용병들의 협조를 구하는 것도 쉬울 테고.
즉 이렇게 정차해 몬스터의 기척을 쫓느니 그 시간에 빨리 도망쳐서 지원을 받는 게 낫단 말이다.
나는 알리시아를 재촉했다.
“자, 출발하자. 이럴 시간에 달리는 게 더 안전하다니까.”
“…….”
그런데 이상하게도 알리시아는 마차를 출발시키지 않았다.
“뭐야. 왜 그래?”
“……그, 레나. 네 말이 맞긴 한데…….”
말을 우물쭈물하는 알리시아라, 희귀한 광경이었다.
심지어 어쩐지 땀을 뻘뻘 흘리면서 고개를 돌린 채 내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아주 수상한 모습이었다.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나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너 지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
생각해 보면 정말로 이상했다.
강한 몬스터가 우리 뒤를 추격하고 있다면,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빨리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곳까지 도망치는 게 당연히 유리했다.
그게 지금까지의 우리 방침이기도 했고.
그런데 속도를 올리기는커녕 여기서 정차하며 시간을 잡아먹고 있었다?
뭔가 이상했다.
“아니, 그게…….”
알리시아가 말을 망설일수록 점점 더 불안감이 더해졌다.
나는 이를 악물고 물었다.
“당장 불어. 뭐야?”
“그게, 저기…….”
한참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웅얼대던 알리시아는 급기야 횡설수설대기 시작했다.
“이제 슬슬 용병들이 다니는 길이니까 이 마차로 마을에 가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그, 알지? 이 해골 말들이 사람들의 눈에 띄면 곤란해진다고.”
그 말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물론 알리시아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네크로맨서와 연이 있다는 사실은 보통 그리 환영받지 않는다.
그 점은 나도 생각했다.
하지만 알리시아가 그런 걸 신경 썼다면 처음부터 이 해골 말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들이 이미 뻔히 해골 말을 목격하기도 했고.
게다가 실질적으로 대안이 없는 상황이다.
그러니까, 저건 결국 형편없는 변명에 불과했다.
그래도 나는 일단 인내심을 갖고 물었다.
“그럼 어쩌자는 건데?”
“그, 내가 여길 지키고 있을 테니까 네가 마을로 가서 말이랑 수레를 좀 구해 오는 건 어때? 아이들을 싣고 갈 수 있게.”
너무 황당한 소리라 입이 떡 벌어졌다.
“나더러 뭘 어쩌라고?”
“너도 일 좀 해야지. 그리고 아무래도 용병들 손을 빌리면 더 좋고. 그러니까…….”
알리시아는 바보였다. 그리고 나는 바보가 아니었다. 내가 알리시아를 노려보자 어깨가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지금 저 녀석이 하려는 말은 명백했다.
알리시아는 마을로 향하는 걸 꺼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체 왜?
“장난하지 마.”
내게는 시간이 없었다.
나는 한시라도 빨리 이 몬스터 소굴에서 알리시아를 탈출시켜 안전한 곳에 놔두어야 했다.
“장난하는 게 아니……!”
쾅!
나는 이를 악물고 마부석의 의자를 주먹으로 쳤다.
그 단순한 위협에 알리시아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알리시아의 붉은 눈동자를 깊이 들여다보며 조용히, 한 글자 한 글자 씹어뱉듯 말했다.
“불어. 무슨 일이야?”
그렇게 대치하기를 몇 분.
결국, 알리시아가 그 말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마을에 못 들어가, 레나.”
“뭐? 대체 왜?”
다음으로 떨어진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지금 나는 전 대륙에 수배령이 떨어진 상태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