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168화
생각이란 걸 할 겨를도 없었다.
나는 순식간에 길게 늘어난 검을 휘둘러 눈앞의 몬스터를 베었다.
우지끈!
몬스터 대신 검에 베인 나무가 바닥에 부딪치며 커다란 소리를 냈고, 흙먼지가 일었다.
나는 몬스터가 바닥을 박차고 뛰어오기 전에 알리시아의 뒷덜미를 잡고 뒤로 크게 점프해 다른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숨바꼭질이라도 하자는 거야?”
괴물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 낄낄대는 소리와 함께 나무 뒤에 붙어 서 있는 나와 알리시아 옆으로 거대한 굉음이 일었다.
몬스터가 뛰어 오는 자리마다 깊은 발자국이 쿵, 쿵 하고 패였다.
콰콰쾅!
방금 전 내가 잘랐던 나무 둥치가 그대로 귀 옆을 날아가, 또 다른 나무에 부딪혀 박살을 냈다.
‘이런 X발.’
나는 알리시아의 팔을 잡은 채 이를 갈았다.
그야 SS급 몬스터 상대로 나무 뒤에 몸을 숨겨 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건 나도 아는데,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완전히 넋이 나갔네.’
등을 쿡쿡 찔러 보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알버트를 발견한 순간부터 알리시아의 시선은 허공 한구석을 더듬고 있었다.
멍한 동공을 보니 정말로 넋이 나갔다.
하지만 그걸 탓할 수도 없었다. 나 같아도 그럴 테니까.
아마 나처럼 메인 퀘스트 운운하는 창은 보이지 않겠지만, 어쨌든 몬스터가 출현했다는 창은 떴을 터.
그렇지 않아도 충격이 컸을 것이다. 하지만 당장 닥친 상황이 급박해서 어떻게든 대충 털고 넘어갔는데, 몇 시간 후에는 몬스터로 등장했다.
그것도 알리시아의 목숨을 노리면서.
알리시아만 몬스터의 살기를 느낀 것도 당연했다. 저 알버트라는 새끼의 목적은 알리시아, 오직 하나일 테니.
몬스터의 어그로를 끄는 조건 자체가 알리시아의 존재인 셈이다.
어린 시절의 친구가 몬스터까지 되어 가며 끝까지 자신의 목숨을 노린다, 라.
어딜 보나 상황이 미쳐 돌아가고 있었다.
다만, 문제는 그냥 넋을 빼놓고 있어도 될 정도로 만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거였다!
‘대체 뭐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인간이었던 알버트가 왜 몬스터가 된 거지?
나름대로 이 십여 년간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인간이 몬스터로 변하는 경우는 처음 본다.
게다가 거의 빈사 상태로 감옥 안 지하 던전 안에 들어간 거 아니었나?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난 걸로 봤을 때 일부러 던전 클리어에 실패한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나무 뒤로 살짝 얼굴을 내밀어 알버트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뭐, 시체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어디에 있니?”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숲 사이에 서서 햇빛을 받고 있는 알버트의 모습은 감옥 안에서 본 것과는 약간 다른 느낌이었다.
외관상으로 변한 부분은 그다지 없었다.
신체의 대부분이 개조된 터라 원래도 일반적인 인간보다 훨씬 컸었고, 신체를 구성하고 있는 부분 역시도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쿠쿵!
“아, 진짜 돌겠네…….”
파괴력이었다.
코뿔소의 형태를 한 다리로 바닥을 구를 때마다 땅이 진동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 땅이 거의 갈라지고 있었다.
흙뭉치와 함께 뽑혀져 나온 나무들이 쿵쿵 쓰러졌다. 동시에 마구 휘두르는 오우거의 팔이 나무를 스칠 때마다 무슨 진흙처럼 부서져 나갔다.
거의 숲의 파괴자 수준이었다.
본래도 몬스터의 신체를 달고 있어서 어지간한 검으로는 벨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파워와 강도를 갖고 있었는데, 지금 저걸 휘두르는 꼴을 보니 몇 배는 더 강해진 것 같았다.
하기야 그러니 SS급 판정이 떴겠지. 젠장.
그런데 왜 몬스터가 된 거냐고!
“나와 보라고, 알리시아!”
쾅!
저 자식은 숲을 파괴하는 일에 맛이 들리기라도 했는지, 계속해서 주변의 나무를 무슨 꽃처럼 꺾어 집어 던지고 있었다.
나는 알리시아를 잡아끌면서 머리를 굴렸다.
도대체 저 새끼가 어떻게 몬스터가 되어 나타난 건지는 나중에 살아남으면 조한율이라도 붙잡고 물어보기로 하고, 당면한 문제는 이거였다.
어떻게 죽이지?
“알리시아.”
“…….”
“알리시아!”
내가 작게 외친다는 소소한 위업을 달성하며 귓불을 잡아당기자 알리시아가 그제야 느린 반응을 보였다.
멍한 붉은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아까 전에 저 자식한테 썼던 검, 그거 나한테 줘.”
“뭐…… 뭐?”
“내 검으로는 상대가 안 되지만 네 검은 저 자식한테 먹혔었잖아. 그거 나한테 달라고!”
내 손에 들린 파트너가 불만의 표시를 했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아, 그…….”
알리시아가 멍하니 대답했다.
“다 썼는데…….”
“아, 진짜…….”
돌아 버리겠네. 정말로!
일리아스, 이왕 무기를 준비해 줄 거면 물량 공세를 했어야지! 네 동생을 그렇게 모르냐!
하지만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빨리 다른 생각을 해 봐야 했다.
나는 상태창을 열어 현재 내 스펙을 확인해 보았다.
플레이어명 : 방랑하는 구도자(상태 : 빙의)
LV.79 (LV.1)
특성 : 관철하는 아귀 (아직 발견되지 않음)
클래스 : 용사 (아직 발견되지 않음)
체력 : 1490 (+30)
근력 : 1085 (+12)
민첩 : 965 (+8)
마력 : 1050 (+10)
스킬 : 멸혼의 불꽃 lv.7, 기사회생 lv.6, 불굴의 의지-on
(스킬은 전이되지 않습니다.)
스펙 자체는 나쁘지 않다만, SS급 몬스터와 정면으로 붙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S급 정도야 현재 이 스펙에 내 경험으로 그나마 상대해 볼 만하지만, 사실 SS급쯤 되면 완전히 차원이 다른 괴물이 되어 버리니까.
‘용사를 기리는 망토…… 이건 쿨타임 때문에 망했고.’
망할 놈의 일주일 쿨타임.
이거 조한율한테 말해서 어떻게 쿨타임을 줄일 수는 없을까? 현재 어느 정도 능력치를 회복했다고 쳐도 상대방이 너무 강하니 도저히 먹히질 않는다.
어쨌든 이건 당장 사용할 수 없으니 제외.
그럼 남는 건 스킬을 이용하는 거지만…….
‘평소처럼 기사회생을 이용해서 방심한 틈을 노린다…… 이건 안 먹힐 것 같고.’
내가 나보다 강한 상대에게 자주 쓰는 방법이긴 하지만, 이게 먹히려면 상대방이 날 죽이는 데 완전히 몰입해야 했다.
하지만 알버트의 경우 내가 아니라 알리시아가 주요 목표였다.
게다가 목숨을 내주고 접근한다고 한들 저 두꺼운 외피를 한 방에 뚫을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다.
‘그렇다고 멸혼의 불꽃…… 저건 더 못 써먹는 놈이잖아.’
새삼 내 빈약한 스킬창이 열 받는다.
보통 이 정도 레벨이 되는 플레이어들은 스킬이 적어도 대여섯 개는 있기 마련인데, 나는 저놈의 미친 스킬 하나 때문에 다른 스킬은 발현하려다가도 다 잡아먹히고…….
괜히 상태창을 봤다가 절망만 맛보게 생겼다.
어쨌든 현재 내 스펙으로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놈이라는 결론만 나올 뿐이다.
‘그나마 다행히 마법은 쓰지 못하는 것 같긴 한데.’
유령의 성 보스 몬스터 같은 경우는 진언까지 쓸 줄 아는 마법사였는데, 알버트의 경우 외피 쪽에 모든 스펙을 몰아넣은 모양이었다.
“…….”
일단 침착하자.
어찌 됐든 이미 벌어진 일이고,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돌아가지 않는 머리라도 굴려 봐야 한다.
쾅!
그때, 나와 알리시아가 몸을 숨기고 있던 나무 밑동이 거대한 충격과 함께 우지끈, 하는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성인과 꼬마 두 명이 몸을 숨기고도 충분한 굵기의 나무가 매우 쉽게 부러진 것이다.
나무가 부러져 깨끗해진 시야 바로 앞에서 오우거의 팔로 나무를 부러트린 괴물의 얼굴이 보였다.
이상하게도, 그 피부는 마치 거울처럼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몬스터가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씨익 웃었다.
“여기 있었네, 알리시아.”
콧구멍이 벌름거리는 것이 보였다.
“이상한 냄새가 난다 싶더니 역시 이상한 걸 뒤집어쓰고 있었군. 덕분에 추적이 좀 늦었어. 너치고 머리를 굴렸잖아.”
콰쾅!
오우거의 팔이 알리시아의 머리가 있는 자리로 내리쳐졌다.
나는 아슬아슬하게 가만히 서 있었던 알리시아의 몸을 그 자리에서 빼냈다. 방금 전 알리시아가 서 있던 지반이 운석이라도 충돌한 것처럼 움푹 패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알버트가 흉폭한 웃음소리를 내며 뒤를 돌았고, 그에 따라오는 것은 흉악한 뿔이 줄줄이 달린 녹색의 꼬리였다.
꼬리에 부딪힌 나무들이 우수수 쓸려 나가고, 더 이상 알리시아를 데리고 도망칠 틈이 없었던 나는 결국 알리시아를 저 멀리로 밀쳐 버리고는, 검을 들고 휘둘러 오는 긴 도마뱀의 꼬리를 정면에서 막아 냈다.
카캉!
“윽……!”
손목에 가해지는 부하가 엄청났다. 심지어 검과 꼬리가 마주친 순간 생물이 아니라 금속끼리 맞닿은 듯한 소리가 사방을 울렸다.
실제로 내가 느끼는 감각도 속이 빈 금속과 마찰한 느낌이었다.
‘이거……!’
감옥 안에서 마주했을 때는 분명히 잘라 낼 수 있을 정도의 강도였는데. 게다가 검으로 직접 마주해 보니 알아차릴 수 있었던 사실이 있었다.
‘무겁다.’
몬스터의 무게 자체가 달라졌다.
어쩐지 달려올 때 땅이 푹푹 파인다 했더니, 파워도 파워지만 애초에 기본적인 중량 자체가 무거워졌던 것이다.
즉, 저 녀석이 휘두르는 게 나무 배트에서 쇠 배트로 업그레이드되었다는 말이다.
문제는 내가 그 배트에 맞는 볼 신세라는 것이고.
망할, 프로면 정정당당하게 승부해라!
게다가 발치로 휘둘러지는 꼬리를 막아야 했던지라, 평소 검을 잡는 자세와는 완전히 다른 것도 문제였다. 검을 지탱하고 있는 손목에 가해지는 고통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검을 거두고 물러나자니, 그럴 틈을 얻기도 전에 꼬리에 처맞아서 죽을 것 같고.
진퇴양난이었다.
- 에이펙스의 광검이 당신의 투지를 격려합니다!
파트너, 격려는 고맙지만 도움은 안 되는구나.
“오, 아직도 살아 있었군.”
검을 든 나를 발견한 괴물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젠장, 여유가 넘치는군.
나는 이를 악물고 꼬리를 막고 있는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꼬리에 돋아 있는 수십 개의 작은 뿔들이 금속성의 이채를 발했다.
“그러는 넌 왜 아직 살아 있지? 뒈진 거 아니었나? 그러려고 던전 안에 기어 들어간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내 비아냥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괴물의 입꼬리에 경련이 스쳤다.
“그 입을 언제까지 놀릴 수 있는지 궁금한데.”
끼기긱.
꼬리가 비스듬하게 기울면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칠판을 긁는 소리와도 비슷했다. 그렇지 않아도 고통스러운 와중에 청각적인 고통마저 더해졌다.
‘아, 망할…….’
게다가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힘에서 확연하게 밀리고 있었다. 알버트가 꼬리에 힘을 주면 줄수록 땅에 힘을 주고 버티고 있는데도 몸째로 옆으로 밀려가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발이 흙 속으로 깊숙이 파묻혀 가고 있었다.
자칫하면 이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이대로 짜부라지거나 산 채로 땅속에 묻히게 생겼다.
젠장.
“알, 리시아……!”
나는 비명처럼 알리시아의 이름을 외쳤다.
내 뒤에 선 알리시아가 멍하니 알버트를 올려다보며 겨우 입을 열었다.
“도대체 왜……?”
“하하하. 내가 살아 있는 게 그렇게 놀라운가 보지? 왜, 죽길 바랐나?”
“그래!”
벼락 같은 고함에 몬스터의 얼굴에 잠시 파란이 스치는 것이 보였다.
어두운 감옥 속이었다면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이렇게 빛이 비치는 숲속에 서 있으니 알버트의 표정이 아주 자세히 보였다.
나는 괴물의 눈동자 속 어딘가에서 상처받은 듯한 빛이 스쳐 지나가는 걸 놓치지 않았다.
알리시아의 목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차라리 뒈지지 그랬어. 그랬다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그냥 그쯤 하지 그랬어!”
그리고 알리시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저 상대방에게 증오를 토로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원망이고 배신감이었다. 기대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느끼는 감정이다.
“그깟 과거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망가지는 건데!”
그리고 역시, 상처이기도 했다.
거대한 바스타드 소드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검을 잡은 알리시아의 손이 떨리고 있는 것이다.
알리시아의 붉은 눈동자에서 기어코 눈물이 떨어져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그럴 가치가 없었어, 알버트.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다고.”
그건 알리시아가 자신과 같은 일을 겪었던 아이들에게 해 주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다 잊어버리고 그냥 인간답게 살아갈 수도 있었잖아, 알버트.”
본인이 복수에 인생을 던져 넣고 괴로웠던 만큼, 다른 사람들은 그런 일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
알버트와 알리시아가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의 교환 속에서 각자 무엇을 찾고 있는 건지, 혹은 바라고 있는 건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다만 내가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알버트의 목소리뿐이었다.
“어떻게 그리 살 수가 있었겠어?”
그와 동시에, 나는 오우거의 팔이 나를 향해 쇄도해 오는 것을 발견했다.
“이 꼴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인간답게 살 수가 있냐고!”
하지만 인지하는 것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뻔히 괴물의 공격이 나를 향해 날아오는 것을 보면서도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은, 꼬리에 실린 힘이 더해졌기 때문이었다.
‘망, 할……!’
이대로라면 저 주먹에 얻어맞는다!
내가 온몸에 힘을 주고 긴장한 순간이었다.
쿠콰쾅!
주먹이 땅속 깊이 박혔다. 거대한 폭탄이 터진 것처럼 주위에 충격파가 일어났고, 땅은 깊숙하게 파였다.
그리고 나는 알리시아의 품에 안겨 있었다.
한 팔로 나를 껴안고 뒤로 몸을 날려 알버트의 공격을 피한 알리시아가 어두운 눈동자로 어린 시절의 친구를 바라보았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경고하는 위협적인 목소리였지만, 내게 그건 차라리 애원처럼 들렸다.
“내가 정말로 너를, 사람을 미워하게 만들지 마.”
그 말에 알버트의 표정이 움찔하고 굳는 것이 보였다. 눈동자에 떠오른 것은 잠시간의 혼란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맙소사, 알리시아.’
아무리 어릴 때 친구라지만 그 알리시아가 이렇게 순진하게 굴 줄이야. 설마 이 지경까지 왔는데 저 녀석이 마음을 고쳐먹으리라고 믿고 있는 걸까?
사람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다.
나는 검을 고쳐 쥐며 손목의 고통을 억지로 털어 냈다.
‘틈을 봐서 바로 공격한다.’
그런데, 그때였다.
- ‘운명의 씨앗’이 반응합니다.
시야 한가득 황금색 글씨가 떠올랐다.
아니, 잠시만.
나는 경악했다.
여기서 이게 왜 나와?
설마, 정말로 저 괴물 자식이 이제 와서 마음을 고쳐먹을 가능성이 있다고?
나는 혼란에 빠진 채 알버트를 똑바로 보았다.
하지만, 그 표정을 보는 순간 나는 그 가능성이 완전히 틀렸음을 예감했다.
알버트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잔혹한 미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쭉 찢어지는 입 속에는 상대를 상처 입히고 싶다는 적의만이 가득했고, 그 칼날은 날카로웠다.
“이미 미워하잖아, 알리시아.”
그리고, 나는 그때 내 몸을 안고 있는 알리시아를 보았다.
동시에 깨달았다.
알리시아는 희게 질린 얼굴로 알버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얼굴에 배어나는 것은 짙은 피로감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제 그만 끝내고 싶어.”
“그리고 너도 이미 인간답게 살아갈 수는 없어.”
운명의 갈림길 앞에 선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