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175화
그러나 이선의 바람은 부질없이, 그대로 하루가 더 지났다.
그리고…… 정말이지 죽을 지경이었다.
오죽하면 어제 간이침대를 찾아서 들어가 그대로 하루를 꼬박 잠들어 버린 양태원이, 이선을 찾아왔다가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랄 정도였다.
“누나, 얼굴이 진짜 말이 아니에요. 빨리 주무세여!”
“괜찮아. 한숨 잤더니 아주 개운해.”
정말로 자기는 했다.
어젯밤, 결계를 유지하던 마법사 중 몇 명이 탈진한 터라 그 땜빵을 하느라 채 두 시간도 자지 못하기는 했지만.
그 말에 양태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닌 것 같은데. 지금 어깨가 엄청 무겁지 않아요? 누나 피곤한 틈을 타서 어깨 위에 이상한 놈이 하나 탔는데요.”
“어? 뭐, 뭐라고?”
“이리로 좀 와 보세요. 일단 저 녀석은 좀 떼야겠다.”
살짝 오싹해지는 경험 후, 이선은 한결 가벼운 어깨로 도로 한구석에 마련된 간이 화장실에서 대강 사람 꼴을 갖춘 후에 다시 도로로 나섰다.
“이게 지금 도대체 며칠쨉니까!”
그리고 그게 사실상의 전장이나 다름없었다. 차라리 밤새 결계 유지를 하는 게 낫지.
이선은 한숨을 쉬었다.
“아, 저기 있네! 마침 잘 만났네요!”
꼭두새벽부터 근처에 나타나 현 상황을 지켜보며 다른 사람들을 닦달하던 건물주가 이선을 발견하고 따지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 책임자 맞으시죠?”
정말 대답하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 김숙자 교수님이 부산에 내려가신 것만 아니었다면 내가 여기서 총대 멜 일도 없는데.
“예, 선생님. 이선이라고 합니다. 그건 그렇고 여긴 출입 통제 지역이라 자꾸 들어오시면…….”
“지금 저 몬스터가 내 재산을 침범하고 있는데 못 들어오는 게 말이 됩니까! 내가 직접 상황을 봐야지!”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긴 했다. 아무래도 저쪽 입장에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이기는 했으니.
건물주는 기다렸다는 듯 이선을 붙잡고 하소연을 쏟아 냈다.
“어제도 조금만 기다려 달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기다렸는데 꼴이 이게 뭡니까!”
그렇게 말하며 건물주가 결계 안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이무기를 가리켰다.
결계 자체는 계속해서 보강되고 있었지만, 이무기의 반항 또한 만만치 않았다. 덕분에 건물은 점점 더 손상을 입고 있었다.
지금 당장 몬스터를 처치하더라도 정상적인 사용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 선생님. 저희도 노력을 하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이보세요. 같은 말을 대체 며칠째 하는 겁니까? 벌써 나흘이 넘었어요!”
오른쪽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성량이었기에 이선은 왼쪽 귀로 흘려듣기로 했다. 하도 피곤해서 반쯤 꿈결에 듣는 소리 같기도 했다.
물론 악몽이겠다만.
“어제는 분명 이 상황을 해결할 헌터를 불러 주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근데 아무도 안 왔잖아요!”
그것도 사실이긴 했다.
어제 저녁 즈음, 정부 측에서는 도통 나설 생각을 하지 않는 김성연과의 협상은 포기하고,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다른 검사 플레이어들을 모아 공략을 해 보자는 결정이 났다.
하지만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는 않았다.
막상 김성연 대신 부른 타 검사 플레이어들은 모두, 이무기의 상태를 살펴보고 영 자신이 없다며 고개를 저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 나서기 좋아하는 백사현조차도 고개를 저었다.
“혹시 실패하기라도 하면 서울 절반은 작살이 나는 거잖아요. 그런 책임은 누구도 못 지죠. 건물 부서지는 건 어떻게든 감당하겠는데, 사람들 목숨을 걸고 모험은 못 하겠어요.”
아무래도 S급 몬스터이다 보니 공략에 실패했을 때를 생각하면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이도저도 못 하는 상황이 이어져, 오늘까지도 딱히 별다른 대책은 없는 상황.
“저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에요. 있는 거라곤 고작 저 건물 하난데 저게 잘못되기라도 하면 나는 죽어요, 죽어!”
그리고 오늘도 이선은 공무원인 죄로 욕받이를 담당하고 있었다.
랭킹 4위면 뭐 하나. 민원인 앞에서는 대거리 한마디 하지도 못하는데.
아니, 솔직히 하려면 할 수는 있었다.
이선 정도면 일반인에게 살짝 함부로 대한다고 한들 쉽게 경질당할 위치도 아니니까.
결국 힘 센 놈이 이기는 억울한 세상이다.
다만, 이선은 남에게 자신의 힘을 무기로 갑질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게 이 일을 시작할 때 세운 자신만의 철칙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오로지 자신만의 그 갸륵한 규칙을 지키고자, 이선은 최대한 친절하게 대답했다.
“저희도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워낙 전국적으로 비상 상황이라서요. 동원 가능한 인원이 없다 보니…….”
“아니, 그러니까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그 순간이었다.
“이선 헌터, 저기 좀 보세요!”
이선과 마찬가지로 공무원인 죄로 옆에 서서 멀거니 먼 산을 바라보고 있던 동료 헌터가 도로 저편을 가리켰다.
이선과 건물주는 덩달아 헌터가 가리키는 쪽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저 차는 뭐지?”
일반인 통제용으로 설치한 간이 검문소를 뚫고, 자동차 한 대가 이쪽을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딱 보기에도 누구나 이름 정도는 알 법한, 유명한 고급 외제차였다.
거침없이 통제된 도로를 달려온 자동차는 이선이 서 있는 곳 근처에서 멈추더니, 곧 여자 하나가 운전석에서 내렸다.
30대 정도로 보이는, 언뜻 보기에는 평범해 인상에 그리 남지 않는 얼굴이다.
특이한 점이라면 화려하게 염색한 머리칼 정도일까?
하지만 그 정체를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저 얼굴을 잊어버리지 않는다.
이선은 자신이 본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저 사람이 여길 왜 온 거지?
“조한율 씨?”
동료 헌터 또한 덩달아 놀랐다.
“조, 조한율이 왜 여기에 와……?”
그럴 만도 했다.
조한율은 절대 쉽게 만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현 대한민국에서도 손꼽히는 거물 중 하나로, 정부에서는 SS급으로 분류할 정도였다.
물론 랭킹만을 따지자면 현 시스템상으로는 5위로써, 4위인 이선보다도 한 단계 아래인 데다, 아이템 제작자인 만큼 업적치가 쌓여 5위가 된 것뿐. 무력으로는 비교할 바도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조한율의 영향력은 랭킹 따위를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대한민국에서 사용되는 포션의 대부분을 바로 이 조한율이 공급하고 있으니까.
즉, 눈앞의 이 사람은 대한민국 헌터의 생명줄을 잡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아, 이선 씨. 오랜만이네요.”
이선을 알아본 조한율이 웃는 얼굴로 악수를 청했다.
이선은 정부 소속으로서 어느 정도 위치가 있는 만큼, 조한율과도 공적으로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반갑습니다. 정말 정말 수고가 많으세요.”
“아, 예에.”
얼떨결에 손을 잡고 악수를 하면서도 이선은 약간 당황하고 있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조한율이 직접 던전 공략에 나서는 일은 아주 드물었다. 아이템 제작자인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여기는 무슨 일로……? 정부에서 요청한 건 아닐 테고요.”
게다가 사실, 이런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났을 때 가장 최우선으로 보호해야 할 중요 인원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렇게 위험한 곳에 오게 놔둘 리가 없는데……?
그렇게 묻자 조한율이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반대예요. 제가 정부에 요청했죠. 이건 한시라도 빨리 해결해야 할 상황이니까.”
“예?”
“아, 물론 제가 해결하겠다는 건 아니고요. 저는 배달만 하러 온 거예요.”
“네? 대체 뭘……?”
“그러니까 지금 시점에서 최강의 패를…… 아니, 그런데 왜 이렇게 안 내려?”
그렇게 말하며 조한율이 자신이 타고 온 자동차의 조수석 창문을 톡톡 두드렸다.
“뭐 해요? 빨리 나오지 않고.”
그 재촉과 함께.
빠각!
차 안에서 뭔가 부서지는 것 같은 거창한 소리가 났다.
창문 너머로 차 안을 보고 있던 조한율이 입을 딱 벌리는 것과 동시에 문이 거세게 열렸다.
하마터면 차 문에 이마를 찧을 뻔한 조한율은 깜짝 놀라 소리를 높였다.
“뭐 하는 거예요?”
“이거 대체 어떻게 푸는 거야?”
그리고 드디어, 누군가가 손에 무언가를 들고 조수석에서 내렸다. 보아하니 손에 들린 것은 부서진 안전벨트 장치였다.
조한율이 입을 떡 벌렸다.
“설마 제 차를 부순 거……?”
“미안, 고의는 아니었어.”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낯익었다.
어라.
그리고 다음 순간 이선은, 방금 조수석에서 내린 여자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얼굴을 전혀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시에, 머릿속에 번개가 떨어졌다.
분명히 예전에도 이런 현상을 마주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건 바로……!
“예…… 헙.”
이선은 급하게 제 입을 쳤다.
아차, 이름도 비밀이었지.
“아, 이선 헌터.”
그리고 얼굴이 보이지 않는 정체불명의 헌터는 이선을 향해 고개를 까닥여 인사했다.
안전벨트 부품은 차 안으로 던져 버린 후였다.
“오랜만에 보네요.”
무뚝뚝한 말투에 담백한 목소리.
비록 얼굴을 인식할 수는 없었지만 한 번 인지하니 확실히 알겠다.
“아니, 정말로……?!”
정말로, 강예나였다!
이선은 순간적으로 체면도 잊고 강예나를 껴안을 뻔했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도 반가웠던 것이다!
물론 차마 그럴 수는 없었기에 이선은 포옹 대신 강예나의 양손을 붙잡고 열렬하게 흔들기 시작했다.
“맙소사. 정말 너무 보고 싶었어요!”
강예나가 왔다!
며칠 전부터 정말이지 바라마지 않던 구세주가 나타났다.
거의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몬스터 공략하러 와 주신 거 맞죠?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선이 엄청나게 반가워하는 것에 비해, 강예나는 어딘가 떨떠름한 기색이었다.
“반겨 주셔서 감사하긴 하지만, 솔직히 제가 그런 말을 들을 입장은 아닌 것 같은데요.”
이상하게도 뭔가 꺼림칙해 보이기도 했다.
“사실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한 소리 들을 줄 알았는데.”
“아니, 절 뭘로 보고! 전 그렇게 염치 없는 사람은 아니라고요.”
김성연 같은 놈도 있고, 다른 플레이어들도 하나같이 몸을 빼는 판국에 여기에 와 준 것만으로도 감사한 게 당연했다.
“사실 목숨을 걸라고 강제할 수는 없으니까요. 나서 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죠.”
“……그거, 본인에게도 적용되는 말인 거 알고 있죠?”
“아, 전 입장이 다르죠. 저야 나라 녹을 먹고 사는 사람이니까.”
미우나 고우나 그게 자신이 택한 직업인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사적으로는 묻고 싶은 게 많기는 하지만…….”
가령 그간 도대체 어디에 있었길래 연락이 안 되었던 건지, 또 조한율과는 어떻게 알게 된 사이인지, 그리고 무엇보다 그놈의 이우연이랑은 대체 어쩌다 싸웠는지.
“나중으로 미뤄야 할 것 같네요.”
하지만 여러 사정을 고려해 볼 때, 지금은 사적인 대화를 나누기에 적합한 타이밍이 아니었다.
“바, 방랑하는 구도자다.”
“미친, 진짜 얼굴이 안 보여!”
“소문이 진짜였네. 대체 무슨 아이템이지?”
“조한율이랑도 아는 사이라고?”
“와, 라인업 대박. 랭커 잔치네.”
아니나 다를까.
각자 흩어져 있던 헌터들이 이 상황을 알아차리고 몰려드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자신에게로 몰려드는 숱한 시선을 느낀 강예나가 당황하는 것이 보였다.
“이게 무슨…… 다들 어떻게 날 알아보는 거야? 나 지금 아이템 쓰고 있는데.”
“못 알아보는 게 더 이상하죠.”
조한율이 뾰족한 말투로 대꾸했다.
이선도 한숨을 쉬며 맞장구를 쳤다.
“예, 아무래도 소문이 났으니까요.”
물론 현재 강예나는 아이템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가린 상태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저번 마석 던전에서 ‘방랑하는 구도자’가 얼굴을 인식하지 못 하게 하는 아이템을 썼다는 사실은 이제 딱히 비밀도 아니게 되었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얼굴을 인식할 수 없다는 점, 그 자체가 오히려 방랑하는 구도자의 시그니처가 되어 버린 것이다.
물론 인파 사이에 섞여 있다거나 하면 구분할 수 없겠지만, 이렇게 주목을 모으며 나타났을 땐 기감에 예민한 헌터들이라면 알아차리는 것도 당연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 특별할 것도 없는데…….”
“역시 김성연 길드장을 이겼다는 건 헛소문 아니야?”
물론 존재를 인식하는 것과는 별개로 몇몇 헌터들이 대놓고 도발하는 언사가 들리는 걸 보니, 아이템이 강예나 본연의 위압감을 죽이는 역할만큼은 톡톡히 하는 모양이었다.
강예나가 나지막하게 혀를 찼다.
“망할, 조용히 왔다 가려고 했는데.”
이선이 대꾸하기도 전에 조한율이 더 빠르게 한마디 참견을 했다.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한 점이 웃긴데요. 지금 ‘방랑하는 구도자’에게 쏟아지는 관심을 생각해 보면.”
……조한율이 저런 성격이었나?
의외로 까칠한 말투에 이선이 약간 의문을 가진 동안, 두 사람은 평온하게 대화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하여튼, 중요한 건 저런 송사리들이 아니에요. 그래서, 실제로 보니까 어때요?”
“뭐, 직접 부딪혀 봐야 알겠지만…….”
강예나의 시선이 이선의 어깨너머, 건물을 감싼 채 도사리고 있는 이무기에게로 옮겨지는 것이 느껴졌다.
투명한 결계 속, 고층 건물 한 채만 한 크기의 몬스터. 아무리 몬스터에 익숙한 헌터라고 해도 일단 보면 압도될 만한 크기였다.
“저걸 한 방에 처리하면 된다는 거지?”
그걸 보며 강예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게 어렵진 않을 것 같은데.”
어렵지 않다,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명백했다. 그리고 그 담백한 한마디의 말이 자리에 폭탄을 떨어트렸다.
“뭐, 뭐라고?”
“방금 이무기 공략이 쉽다고 이야기한 거야? 그래도 S급 몬스터인데?”
“한 방이라고 하지 않았어?”
“건물 피해 같은 건 신경도 안 쓰는 거겠지. 그렇게 할 거면 누가 못 한대?”
“저러다 큰코다치지.”
헌터들이 제멋대로 지껄여대는 소리는 이제 사실 수군거린다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였다.
무엇보다, 이쯤 되면 강예나더러 들으라고 하는 공격적인 말도 섞여 있었고 질시에 악의까지…… 아주 노골적인 발언이었다.
“저기요, 사람 면전에서 이게 무슨……!”
그리고 결국 듣다 못한 이선이 나서서 유독 공격적인 태도인 헌터 몇 명에게 한마디 하려던 순간, 강예나가 손을 들고 제지했다.
“내버려 두세요.”
“아니, 그래도……!”
“그래요, 이선 헌터. 그냥 내버려 두세요.”
그 자리에 끼어든 것은 또 다른 목소리였다.
함부로 입을 놀리던 헌터들이 제 등 뒤에서 들려온 빈정댐에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려 발화자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저렇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지금뿐일 텐데.”
썩 기분이 좋지 않은 듯,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는 모양을 만든 청년을 발견한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한두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워낙에 기척도 없이 접근한 데다, 기본적으로 그가 가지고 있는 일종의 위압감에 눌린 탓이었다.
그리고, 강예나 또한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이우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