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176화
허공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붙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의 등장에 주변 헌터들이 자연스럽게 긴장하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싸, 싸움 나는 거 아니야?”
“튈 준비해야 하나?”
헌터들 사이에서 그런 속삭임이 들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랭킹 1위인 ‘방랑하는 구도자’와 랭킹 2위인 이우연.
세간에서는 시스템이 나타난 이후 근 5년간 한국에서 가장 열심히 던전을 공략한 헌터인 이우연이, 갑자기 나타난 ‘방랑하는 구도자’에게 1위 자리를 빼앗겼다는 점에 자존심이 상했을 거라는 추측이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방랑하는 구도자’가 영원 길드의 길드장을 발길질로 까 버렸다는 소식이 헌터 업계에 퍼진 후로는 더더욱.
소문 자체는 다들 반신반의했지만, 하여간 방랑하는 구도자와 김성연 길드장 간에 갈등이 있었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렇기에 영원 길드의 간판인 이우연이 랭킹 1위를 적대하면 적대했지, 호의적인 시선으로 볼 리는 만무하다…… 라는 추측은 더욱 신빙성을 더해 갔다.
하지만 세간의 추측과는 달리 강예나와 이우연, 두 사람이 사적으로 제법 친하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이선은 별 긴장감 없이 고개를 갸웃했다.
‘싸운 건 아닌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이야 두 사람의 대립에 긴장하고 있기는 했지만, 이선은 딱히 적대적인 분위기는 느끼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두 사람 성격상 정말로 싸웠다면 당장 검을 뽑아 들든 마법을 쏘아 대든 했을 테니까.
물론 분위기가 평소랑은 좀 다르기는 했다.
뭐랄까, 둘 다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회식 3차쯤 갔을 때 술에 취해서 할 말 못 할 말 다하고, 그다음 날에 출근해서 어색하게 맞부딪힌 아침의 풍경 같기도 하고.
이선이 그렇게 지극히 회사원스러운 시점에서 두 사람을 바라보는 동안, 또 다른 관점에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자, 자. 못다 한 해후는 나중에 알아서들 하시고.”
두 사람이 이어 나가던 긴장 사이로 아무렇지 않게 끼어든 조한율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부담스럽게 느낄 법도 한데 역시 보통 담은 아닌 건지, 그 주목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넘긴 조한율은 어깨를 으쓱였다.
“당장 할 일부터 좀 하죠. 저 몬스터, 길게 둬 봤자 좋을 게 없어요.”
그러자 이제껏 이우연에게 시선을 두고 있던 강예나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애초에 그러려고 온 거니까. 그럼 어떻게 시작하지?”
“일단 저 몬스터를 가두고 있는 결계를 해제한 후, 당신 쪽으로 유인할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지.”
이우연도 곧장 바뀐 화제를 따라왔다.
내심 둘의 갈등을 기대하고 있던 사람들은 약간 김이 샌 듯했지만, 이선은 안심했다.
‘심각한 건 아닌가 본데.’
하기야 두 사람 다 사적인 관계가 어떻든 간에, 이런 상황에서 굳이 그런 주제를 오래 끌고 갈 성미도 아니다.
이우연의 말에 누군가가 손을 들고 말했다.
“저, 그냥 어그로 스킬을 쓰면 되는 거 아닌가요? 백사현 헌터를 부르면…….”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죠.”
그리고 이제 공략 회의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이선이 앞으로 나서 회의를 주도했다.
“S급 몬스터라 어그로 스킬을 써도 걸리지 않을 확률을 생각해야 합니다. 게다가 저 결계 안에서 벌써 며칠을 보냈으니 성질도 엄청 예민해졌을 테고.”
이곳이 던전 안이라면 걸릴 때까지 어그로 스킬을 쓰는 방법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여기는 서울 한복판이었다.
결계가 풀린 순간 어그로 스킬이 먹히지 않아, 저 S급 몬스터가 강예나가 있는 곳 대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 그대로 튀어 버린다면 그거야말로 참사였다.
“그럼 스킬 외에 대체 무슨 방법으로 저 몬스터를 유인해야…….”
“그럼 제가 하죠.”
이우연이 시원하게 나섰다.
“비행도 가능하고, 마법도 쓸 수 있으니까요. 제가 적임일 것 같은데.”
이우연 말이 옳았다.
사실 적임이다 뿐인가. 이무기가 비행이 가능한 시점에서 이우연 외에는 그 역할이 가능한 사람이 없다고 보는 게 맞았다.
게다가 저렇게 선뜻 나서 준다면 안심이었다. 공략에 집착하는 성질머리로 미뤄 보건대, 몬스터의 대가리를 주먹으로 후려쳐서라도 어그로를 끌어오겠지.
그래서 이선은 반색하며 대꾸했다.
“자원 감사합니다. 그럼 이우연 헌터가 미끼를…….”
“잠깐만요, 이선 헌터. 이우연, 정말 괜찮겠어?”
그런데 이선이 곧바로 오케이 사인을 낸 것과 반대로, 이번에는 의외로 강예나 측에서 태클이 들어왔다.
이선은 흠칫했고, 이우연조차 강예나가 그렇게 물어본 것이 의외였는지 고개를 갸웃하는 게 보였다.
“무슨 문제라도……?”
“그렇게 되면 일은 네가 다 하고 업적치는 내가 다 먹을 텐데.”
듣고 보니 그럴 법한 말이었다.
강예나 입장에서는 가장 위험한 미끼 역할을 할 이우연이 업적치를 전혀 가져갈 수 없다는 게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그러자 이우연이 피식 웃었다.
“오, 세상에. 지금 S급 몬스터 공략을 단독으로 시도하면서 걱정한다는 게 겨우 업적치 문제야?”
“……됐다. 내가 괜한 말을 했네.”
“하하. 그렇게 신경 쓰이면 이번에야말로 빚 하나로 달아 두든가.”
“웃기고 있네. 네 쌓인 빚을 차감해 줄 수는 있다.”
“하여간 한마디도 안 져 준다니까.”
어영부영 주위에 모여 얼떨결에 이 대화를 듣게 된 사람들은 다시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다.
‘뭐야. 사이 나쁜 거 아니었어?’
‘친해 보이는데?’
‘아니, 도대체 왜 친한 건데?’
“자, 두 분. 합의하셨으면 이야기는 계속 진행할게요.”
두 사람이 의견을 정리하자, 이선은 박수를 쳐서 잠시 어수선해진 분위기를 수습하고 사람들의 시선을 다시 모았다.
“뭐, 사실 이렇게 되면 더 의논할 것도 없긴 하네요. 이우연 헌터가 미끼 역할을 하고, 방랑하는 구도자 헌터가 공략한다. 기본은 이렇게 가고, 이제부턴 위치 선정과 결계 해제 타이밍을 맞춰 봅시다.”
사실 이 경우에는 특별한 작전이랄 것도 없었다.
어차피 현재 저 S급 몬스터는 물리적 공격 외에 다른 공략 방법이 없고, 그런 전제에서는 결국 공략의 대부분을 검사 클래스인 강예나에게 맡겨야 하는 상황이니까.
이렇게 되면 이선이 할 일이라고는 주위 건물을 더 이상 훼손시키지 않도록 몬스터를 유인할 위치를 정하는 것과, 이우연과 결계 해제 타이밍을 의논하는 것 정도밖에 남은 게 없었다.
‘예나 씨한테 거의 다 떠넘기는 꼴이라는 게 한심하지만…….’
그렇지만, 잘 해내겠지.
이선은 지금도 눈만 감으면, 성벽 위에서 창백한 달빛을 배경 삼아 환상적으로 검을 휘두르던 강예나의 뒷모습을 선명하게 그려 낼 수 있었다.
그건 정말로…… 이야기 속에서나 나오던 용사, 그 자체였다.
그때도, 지금도 강예나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나섰다.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렇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은 강예나를 믿고, 듬직한 뒷모습을 보면서, 든든하게 뒤를 받쳐 주는 것이다.
‘그리고 김성연은 엿이나 먹어라.’
이선은 이대로 공략이 속 시원하게 성공하면 가장 엿 먹을 인간을 떠올리며, 벌써부터 사이다를 반쯤 들이켠 기분이었다.
절로 의욕이 났다.
“그럼 주축이 될 두 헌터와 결계를 마지막까지 유지할 헌터 외 나머지 헌터들은…….”
이선은 주위에 둘러서 있는 헌터들을 둘러보았다.
거의 대부분 이선과 같은 정부 소속 헌터들로,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직감한 듯 하나같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공략 전에 주위 건물 실드 치는 작업 시작합시다. 하나하나 꼼꼼히 쳐야 합니다.”
그렇다.
아주 지루하고도 지루한 작업이 남은 것이다.
으아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든 사람들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나중에 부서진 건물들 보험 처리하려면 얼마나 귀찮은지 아시죠? 우리 과실로 재판까지 갈 일 만들지 않게 다들 알아서 잘하도록 합시다. 자, 이제부터 구역 나눕니다. 부르는 대로 곧장 작업 시작해 주세요!”
뭐, 화려한 모습 뒷면에는 이렇게 개미처럼 일하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 * *
“누, 누나아아아아!”
현 대한민국 최강의 헌터가 처음으로 한자리에 4명이나 모였던 역사적인 모임이 끝난 후에야, 아침 식사를 하느라 타이밍을 놓친 청소년은 그제야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달려왔다.
무슨 일주일간 자리를 비운 주인을 반기듯 달려오는 대형견 같은 모습에, 주변을 돌아다니며 헌터들의 작업을 지휘하고 있던 이선조차 순간 실소했다.
“태원아.”
그리고 강예나는 말할 것도 없었다.
공략 전 준비가 될 때까지 대기하는 동안, 다른 헌터들과는 딱히 말도 섞지 않으려고 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너도 여기 있었구나.”
물론 그래 봤자 워낙 담백한 성격이라 그런지 그리 티가 나지는 않는데, 적어도 양태원 본인은 그 차이를 잘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누나, 대체 그동안 어디에 있었어요? 제 전화도 다 씹고!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이렇게 보자마자 따져 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는다고, 저렇게 해도 강예나가 받아 줄 걸 아니 투정을 부리는 것이다.
누가 무당 아니랄까 봐 눈치는 귀신같다.
“아, 핸드폰. 확인 못 했어. 미안. 던전 공략 중이었거든. 꼬박 4일 걸렸지.”
성실한 대답에 양태원의 표정이 금세 풀어졌다.
“아, 어쩐지! 청룡 님께 아무리 물어도 누나가 무사한지 아닌지도 안 알려 주는 거예여! 던전에 들어가 있어서 그랬나?”
“……그랬어?”
“네, 그래서 정말 무슨 일 있는 건가 싶어서 걱정했다니까요. 그나저나 누나가 4일 걸렸을 정도면 엄청 등급이 높은 던전이었나 봐요?”
“응, 제법.”
“그럼 업적치도 엄청 높게 받을 수 있겠네요. 그럼 나중에 저도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그러려면 농땡이 치지 말고 체근민 수치 올리는 것부터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은데. 너 자꾸 게으름 피운다며?”
“아니, 누가 그런 소릴…… 이우연이죠?”
양태원은 씩씩대며 벌써 일찌감치 하늘에 떠올라 이무기의 동태를 살피고 있는 이우연을 노려보았다.
“아, 진짜 저게 누나한테 쓸데없는 소리를 다 하고…… 아, 맞다. 그럼 저번에 그러고 나서 화해는 하신 거예여?”
화해?
그때 주위를 돌아다니느라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된 이선의 귀가 쫑긋해졌다.
목격자가 나타났으니 확실해졌다.
둘 사이에 정말로 무슨 일이 있기는 있었던 모양이다.
“딱히…… 사실 그러고 나서 처음 보는데.”
강예나가 어쩐지 씁쓸하게 들리는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뭐, 지금은 그런 거에 신경 쓸 시간 없어. 일단 몬스터 공략이 우선이지.”
그러자 양태원이 눈살을 찌푸렸다.
“누나 그거 입버릇 같아요. 일단 공략부터, 하는 거.”
“그런가?”
“네, 그래여.”
양태원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런 거 보면 이우연이랑 뇌트워크 공유라도 하는 것 같아요. 1위랑 2위쯤 하려면 이래야 하나?”
“…….”
“어쨌든 이거 끝나면 맛있는 거라도 먹으러 가요. 누나 몸보신이라도 해야겠다. 장어 어때요?”
“……설마 이무기 보고 장어를 떠올린 건 아니지?”
“왜 아니겠어요. 물론 이무기랑 청룡 님이 좀 비슷…… 아야!”
양태원이 갑자기 허공의 무언가에게 머리를 맞은 것처럼 허리를 숙였다.
익숙한 풍경이기는 했지만, 어쩐지 무서웠다.
“왜 애한테 성질이야. 대충 비슷하게 생긴 건 맞구만.”
그리고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하는 강예나의 모습도 제법 무섭다.
……
…
그렇게 대략 한 시간 후.
“실드 작업 끝났습니다!”
번화가인 만큼 건물이 워낙 많은 터라 실드 작업에 시간이 오래 소요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 정도면 상당히 빨리 끝난 축이었다.
이선은 헌터들을 각자 건물에 준비시킨 후, 여전히 대기 중인 강예나에게로 다가갔다.
“이쪽은 준비 끝났어요. 위치 확인은 하셨나요?”
“네.”
이우연이 이무기를 직접 유인해 끌어들이기로 한 것은, 거리의 커다란 사거리. 도로 한복판이었다.
본래는 교통량이 많아 복잡했을 도로는, 통제로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이 비어 있었다.
일단 이무기의 덩치가 워낙 크니, 건물 사이로 끌어들이는 것보단 그나마 공간이 있는 도로 위가 나을 거란 판단 때문이었다.
그래서 도로 양옆 건물에는 꼼꼼하게 실드를 쳐 둔 상태.
“그래도 S급 몬스터가 몸부림을 치면 오래는 못 버틸 거예요. 길어 봤자 2, 30분 정도?”
그러니까 강예나는 그 짧은 시간 안에 S급 몬스터를 혼자 공략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솔직히 누가 들어도 무리한 이야기였다.
괜히 다른 검사 플레이어들이 나서지 않는 게 아니었다.
스릉.
그리고 그 사실을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강예나는 대답 없이 허리춤에 매고 있었던 검을 뽑아 들었다.
이제 슬슬 정오로 넘어가기 시작한 시간.
날카로운 은빛의 검날이 햇살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검을 뽑아 든 강예나가 나직하게 말했다.
“그렇게 길게 끌 생각 없습니다.”
“네?”
“빨리 시작하시죠.”
그게 신호였다.
건물을 휘감고 있는 이무기가 괴성을 쏘아 올리고 있었다.
사실 저걸 가두고 있는 결계도 이제 거의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근처에 몰려 있는 마법사들의 위치, 그리고 하늘에서 이무기를 유인할 준비를 하고 있는 이우연의 위치를 파악하며 이선은 마지막으로 조한율을 돌아보았다.
“조한율 헌터, 무슨 일이 있어도 제 뒤에서 벗어나시면 안 됩니다.”
사실 이선은 진작 조한율에게 대피를 권했었다. 정부 지정 SS급 헌터라 이런 위험 지역에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조한율은 굳이 고집을 피웠고, 대한민국 최고 거물 중 하나인 조한율의 고집을 꺾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그래서 이선이 조한율을 호위하기로 한 것이다.
솔직히 짜증이 날 수밖에 없는 상황.
하지만 조한율은 이 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태평해 보였다.
“네, 그러죠.”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공략은 도중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요.”
“그거야 저도 알아요. 하지만…….”
조한율은 씩 웃었다.
“여기에 대한민국 최강의 플레이어가 있는데,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걸요.”
이선이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이었다.
- 결계 해제하세요.
귀에 장착한 리시버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그 신호와 동시에 마법사들이 결계를 유지하던 마력을 끊었다.
건물 전체를 둘러싸고 있던 희뿌옇고 둥그런 결계가 서서히 사라졌다.
그리고 이 며칠간 자신을 가둔 결계를 깨기 위해 요동치던 이무기는 결계가 사라지자마자 대가리를 번쩍 쳐들었다. 드디어 자신을 옭아매던 답답한 사슬에서 풀려난 것을 느낀 것이다.
긴 혀를 날름거리며, 발 없는 뱀은 건물을 스르륵 한 바퀴 감고 돌아, 이제껏 자신을 가두고 있었던 인간을 내려다보았다.
- 감히 나의 승천을 방해해?
- S급 몬스터 : 용이 되지 못한 뱀
- 몬스터의 사념을 언어로 출력하여 전달합니다.
본래 인간의 귀로는 들을 수 없는 괴성이 사람 하나 없는 거리에 울려 퍼지며,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몰려든 먹구름이 햇빛을 가리고, 구름 사이로는 푸른 번개가 번쩍였다.
툭, 투툭.
동시에 빗방울이 하나둘씩 내리기 시작했다.
이선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무기는 본래 폭풍우를 동반하면서 승천한다지.’
그리고 승천하는 순간을 인간에게 목격당하면 다시는 하늘에 오르지 못한다고도 한다.
그러니 그 원한을 알 만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해 줄 수는 없단 말이야!’
이선은 한 손에 마력을 담고 하늘로 붉은 불꽃을 쏘아 올렸다.
그것이 이우연에게 보내는 신호였다.
붉은 불꽃이 높이 올라가 하늘에서 폭죽처럼 터지는 것과 동시에.
콰아앙!
커다란 불꽃이 이무기의 머리에 작렬했다.
이무기의 시선이 천천히 하늘로 향했다.
비와 번개를 품은 구름이 가린 하늘.
그 하늘에 홀로 떠 있는 것은, 역시 거대한 흰 날개를 펼친 이우연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오르지 못한 하늘에 인간이 더 높이 닿아 있다는 걸 인지한 순간, 오연한 눈동자에 증오가 스쳤다.
- 인간 따위가!
S급 몬스터가 내뿜는 살기다.
겁을 먹을 만도 한데, 이우연은 그런 기색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다.
펑! 퍼퍼펑!
숨 쉴 틈도 없이 다음 공격이 이어졌다. 화려한 불꽃이 터지고, 이무기는 괴로워하며 머리를 비틀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불꽃이 지나간 후 이무기의 비늘에는 아무런 상처도 보이지 않았다.
몬스터가 인간을 비웃었다.
콰르릉!
이무기가 조종하는 구름 사이에서 번개가 내리쳤다.
곧장 이우연을 향해 내리꽂힌 번개는 깃털 하나 차이로 이우연을 비켜 갔다. 각자 자신이 맡은 구역에 실드를 치고 있던 헌터들조차 절로 비명을 지를 정도로 아슬아슬했다.
- 이 미천한 것이!
약이 오른 몬스터가 이를 갈며 또 한 번 번개를 내리꽂았지만, 이번에도 이우연은 아주 근소한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그 공격을 피하며 되레 이무기에게로 한 번 더 마법을 날렸다.
퍼펑!
불꽃이 마치 놀리듯 이무기의 시야를 가렸다.
번개와 불꽃이 오가는 어두운 하늘은 마치 악몽의 한 장면처럼 번쩍이고 있었다.
그런 아슬아슬한 공방이 얼마나 더 오갔을까.
-내가 직접 잡아 죽여 주마!
드디어, 건물을 휘감은 채 번개를 쏘아 대던 몬스터가 직접 몸을 움직였다. 거대한 몬스터가 빛과 같은 속도로 건물에서 풀려나 공기를 가로질렀다.
그 기세에 거센 바람이 텅 빈 거리를 가득 메웠다.
가로수가 뿌리채 흔들리고, 더 이상 버티지 못한 간판들이 날아가며 도로를 박살 냈다.
스르륵 움직이는 뱀의 비늘이 스칠 때마다 건물의 외벽이 떨어져 나가 땅을 강타했지만, 그 이상으로 S급 몬스터는 위협적이었다.
사아아아!
하늘을 떠다니는 먼지 같은 존재를 잡으려 이무기가 이우연을 향해 날아들려던 순간.
그때 이우연은 이무기의 시선을 끈 채로 방향을 틀어 밑으로 급하강했다.
- 놓치지 않겠다!
이우연을 노리던 이무기는, 날카로운 독니가 드러난 아가리를 벌리고 그대로 조그마한 인간을 쫓았다.
그리고.
이우연이 날아가는 방향.
텅 비어 버린 거대한 검은 도로 위, 검을 들고 서 있는 한 명의 인간이 있었다.
거대한 흰 날개를 펼친 이우연이 빠른 속도로 그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날았다.
그리고 이제, 이우연 대신 아가리를 벌린 이무기의 앞에 선 인간은, 강예나는 설핏 웃었다.
제각기 맡은 건물의 실드 뒤에서 그런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헌터들은 너나할 것 없이 긴장하며 숨을 죽였다.
검을 들고 선 인간은 몬스터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아 보였고,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강예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신을 향해 미친 듯한 속도로 날아오는 이무기의 열린 아가리를 끝까지 바라보았다.
그대로 잡아먹힐 것만 같은, 그 직전까지.
너무도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강예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저, 저거 말려야……!”
“누나!”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모두가 답답함에 비명을 내지를 때.
강예나가 드디어 검을 뻗었다.
흔한 기합 소리나 두려움 따위의 흔적도 없이, 검을 쥔 팔은 그대로, 막 인간을 집어삼키기 직전이던 이무기의 아가리 속으로 뻗어졌다.
그저 한낱 자살 행위로밖에 보이지 않던 그 동작은……
햇빛이 사라진 어두운 하늘 아래, 모두의 눈을 멀게 할 만큼 강력한 빛을 폭발시켰다.
콰콰콰쾅!
그리고, 다음 순간.
도로가 완전히 아작 나며 내려앉았다.
거대한 이무기의 몸이 그대로 도로 위에 털썩, 내려앉았기 때문이다.
“…….”
비명도, 절규도 없었다.
그저 정적만이 맴돌았다.
죽음 같은 침묵만이 자리하는 도로 위에 남은 것은, 아가리를 벌린 채 검에 관통당해 그대로 죽어 버린 이무기의 시체와, 몬스터 앞에 홀로 선 여자 하나뿐이었다.
그 거대한 이무기의 몸체를 꿰뚫고도 남을 만큼 길게 뻗은 빛의 검과 함께.
모두가 자신의 눈을 의심할 때, 그 광경에 못을 박는 것처럼,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 S급 몬스터, ‘용이 되지 못한 뱀’을 처치하였습니다.
- 최대 업적자 : 방랑하는 구도자
그건 공략 시작 후, 겨우 20분이 경과한 시점이었다.
모두의 경악하는 시선 앞에서, 이무기의 시체 앞에 홀로 선 헌터가 도도하게 검을 회수해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것이 ‘방랑하는 구도자’라는, 랭킹 1위 헌터가 대한민국에 공식적으로 처음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