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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180화 (181/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180화

그리고 나는 드디어 집으로 돌아왔다.

정말로, 길고 긴 한 주였다.

집에 돌아갈 때 이우연과 조한율이 각자 태워 주겠다고 했지만, 둘 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얼굴이 피곤에 절여져 있었던 만큼 나는 둘 모두의 제안을 거절했다.

나라고 그렇게 양심이 없지도 않고, 택시비 정도는 있었다. 애초에 여의도에서 공덕까지는 그리 먼 거리도 아니고.

나는 녹초가 된 몸으로 택시에서 내려 터벅터벅 걸었다.

타르토스부터, 서울 한복판에 나타난 이무기까지.

현실 시간으로 따지면 사실 그리 오래 되지 않았는데도 현관문에 설정해 둔 비밀번호가 한동안 생각나지 않아 애를 먹었다.

그만큼 긴 한 주였다.

솔직히 현관문에 들어서자마자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리고 싶었다.

‘못 이기는 척 조한율 집에서 자고 올 걸 그랬나.’

매트리스도 엄청 좋은 거라고 꼬드기던데.

하지만 곁에 누군가 있으면 푹 쉬지 못하고 신경이 곤두서게 될 것 같아서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나는 지금 감각이 예민해진 상태였다.

그래도 곧바로 샤워를 할 수 있다는 점은 고마웠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온수를 펑펑 쓸 수 있다는 것조차 상당한 호사였다.

당장 하루 전까지 내가 겪었던 타르토스의 환경을 떠올려 보면 더욱더.

샤워를 마친 나는 대충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고 매트리스 위로 엎어졌다.

이우연이 제 것도 아닌데 사야 한다고 고집했던 비싼 매트리스는 그 값을 했다.

몸이 거의 녹아드는 것 같았다.

이게 바로 현대 문명의 이기라는 걸까.

‘그런데도 타르토스 쪽이 돌아가야 할 곳이라고 느껴지는 게 이상하지.’

그건 아마도…… 내가 돌아가야 한다고 느끼는 것이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랑 같이 있어.”

나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몸이 이미 한계에 다다라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데도, 머리는 쉬이 잠들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잠들 수 있을 리가 있나.

생각지도 못하게 타르토스로 돌아갔고, 아무리 퀘스트에 성공해 운명을 바꾸었다고는 해도 알리시아가 죽을 위기에 처했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알리시아의 온기가 아직도 스치는 듯했고, 알리시아가 한 말은 여전히 귓가를 맴돌았다.

마지막으로 본 루카스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알리시아가 언급을 거의 하지 않았던 일리아스도, 불길한 언급뿐이었던 아리아드네도.

무슨 일이 있어도 구하러 가겠다고, 그 어떤 운명이라도 뒤집겠다고 큰소리를 쳐 놓고…… 그럼에도 잠들기 전이 되면 항상 불안이 불면증으로 돌아온다.

도대체 내 친구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이번 퀘스트 자체는 다행히 성공으로 끝났다지만 동시에 너무나 많은 의문이 남았다.

타르토스의 운영자부터 시작해서…… 대체 왜 알리시아의 생존 여부가 타르토스의 멸망을 뒤집을 수 있는 퀘스트로 걸린 건지도 의문이었다.

몸은 죽도록 피곤한데도 한번 발동이 걸린 생각은 마치 가시 세운 고슴도치처럼 뾰족해져 신경을 마구 찔러 댔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결국 몇 시간이 지나도 잠에 들지 못한 나는 수면을 포기하고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아직 덜 피곤한 모양이다.

어차피 잠도 자지 못할 거라면 이 시간에 뭐라도 하는 게 낫겠다.

‘아, 그러고 보니.’

잠시 방치해 두고 있던 시스템창이 구석에서 번쩍이고 있었다.

- 당신은 해당 인물로서 훌륭하게 행동하였습니다. 해당 인물의 기억 파편이 보상으로 주어집니다.

- 해당 퀘스트의 클리어 보상이 지급될 예정입니다. 이후 보상창을 확인해 보세요.

잠시 미루어 두고 있었던 보상을 받으라는 알람이었다.

하기야 과연 어떤 클리어 보상이 나올지 궁금하기는 했다. 어쨌든 SS급 몬스터를 처치한 셈이니, 그 클리어 보상도 상당히 좋은 것을 기대해 봄 직했다.

나는 곧장 보상창을 열었다.

시스템 알람이 떠올랐다.

- 클리어 보상을 확인하시겠습니까?

- Y/N

도대체 왜 이런 형식적인 창이 존재하는지 모르겠군.

나는 투덜거리며 Y를 눌렀다.

그러자 허공에서 상자가 떨어지더니 팟, 하고 빛이 터지며 허공에 무언가가 생겨났다.

나는 떨어지는 무언가를 잡아챘다.

그건…….

“양피지?”

아마도 내가 일전에 사용한 적이 있던 ‘금석맹약의 서’ 같은 아이템. 그러니까 주문서 종류인 듯했다.

나는 천천히 양피지의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 클리어 메인 보상

- 아라크네의 주문서

- 해당 아이템을 특정 아이템에 사용할 시 주문서의 효과가 적용됩니다.

- 주문서 효과 : 아이템의 사용 대기 시간을 절반으로 단축 할 수 있습니다.

- 강화 성공 확률은 100%입니다.

- 사용 제한 없음

심플한 설명이었지만, 강렬한 내용이었다.

나는 눈을 비볐다.

“뭐야, 이거.”

막판에는 SS급 보스 몬스터가 나온 만큼 과연 클리어 보상이 어느 정도로 나올까 궁금했는데, 설마 이 정도의 아이템이 나올 줄이야.

‘너무 좋은 게 나왔는데?’

간단하게 생각하자면, 그냥 다른 아이템을 강화할 수 있는 주문서였다. 하지만 보통 이런 주문서에는 강화할 수 있는 아이템에 제한이 있거나 혹은 실패할 확률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아라크네의 주문서’에는 그런 게 붙어 있지 않았다.

심지어 아이템 사용 대기 시간을 무려 절반이나 줄여 주는데도!

솔직히 이런 미친 강화 주문서가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이건 누가 봐도 ‘용사를 기리는 망토’에 안성맞춤인 아이템이었다.

용사를 기리는 망토.

한국에 돌아와 처음 랭킹 1위가 되었을 때 랭킹 보상으로 받았던 아이템이자, 아직 본 능력치를 회복하지 못한 나에게는 가장 강력한 조커였다.

그러나 이 조커의 약점은 활성화 시간이 겨우 10분이라는 것, 그리고 한 번 사용하면 대기 시간이 일주일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대기 시간이 3일로 줄어들면…… 꽤 쓸 만해지긴 하겠지.’

고위 몬스터가 나올수록 공략 기간도 길어지니, 대기 시간이 줄어드는 것 자체야 당연히 환영할 일이었다.

잘하면 두 번 정도는 사용 가능할 테니.

그렇지만, 이렇게 좋은 아이템을 받았는데도 어쩐지 영 기분이 찜찜했다.

‘이렇게까지 딱 들어맞는 아이템이 나온다고?’

마치 현재 내 상황에 맞추어 아이템을 제공한 것 같지 않은가.

시스템 운영자의 존재를 몰랐던 예전이라면 모를까, 운영자라는 게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아무래도 의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혹시 이 보상이라는 것에도 타르토스 쪽 운영자가 간섭한 것은 아닌지.

한국 서버에 개입할 정도로 제 권한을 막 쓰는 녀석이다. 그러니 이 정도 권한은 아무렇지도 않게 휘둘렀음이 분명했다.

문제는 그 목적이 무엇이냐, 인데.

‘그냥 날 도와준다고 하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점이 너무 많아.’

대한민국 서버를 공격한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저번 던전 막판에 재등장했던 알버트가 마음에 걸렸다.

던전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던 그가 갑작스럽게 SS급 몬스터로 재등장했으니까.

일반적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인간이 어떻게 몬스터로 변이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일반적이지 않은 무언가가 개입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한국에 돌아와 조한율을 만나자마자 시스템 운영자 권한으로 그런 짓이 가능한지 물었다.

조한율은 단박에 대답했다.

“플레이어가 동의하면 가능할 것 같긴 하지만…… 어지간한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그런 짓을 할까요? 적어도 저는 못 해요.”

“그렇지만 그쪽 입으로 저쪽 운영자는 미친 새끼라며.”

“하긴, 그것도 그러네요.”

즉, 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정말이지, 생각보다 시스템 운영자 권한이 너무 막강했다. 아무리 고통이 따른다고 한들, 일단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무서운 일이지 않은가.

게다가 조한율 말에 따르자면 이런 막강한 권한이 있는 자리가 랜덤으로 정해진다는 건데…… 물론 원래 세상이란 게  태어날 때부터 랜덤이고 불공평하기 마련이긴 했다.

그저 귀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남의 머리 위에 서려는 꼬락서니는 애초에 많이 보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운영자 자리가 랜덤으로 정해지는 것도 뭐,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몰랐다.

다만 내가 가끔 느끼곤 했던 시스템의 정체 모를…… 깊은 악의 같은 것의 정체가 시스템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뒤에 있는 누군가라는 생각을 하니 소름이 돋긴 했다.

시스템은 천재지변 같은, 어떻게 보면 초자연적인 힘 그 자체라지만 그걸 다루는 것은 결국 인간인 것이다.

‘그래도 상대가 인간이라면 결국 어떻게든 할 수 있다는 뜻도 되겠지만.’

실체 없는 시스템의 악의를 상대한다고 생각했을 때보다는 나은 것 같기도 했다.

물론 여전히 그 운영자의 정체도, 목적도 모른다는 점에서는 변한 게 없지만.

그렇다면 결국, 지금 제일 중요한 것은 타르토스에 대한 정보였다.

‘……기억 파편을 보긴 해야겠지.’

지난 경험에 비추어 보자면, 이번에 내가 얻은 기억 파편이라는 것도 아마 내가 빙의했던 ‘77호’의 기억일 것이다.

여기에 무언가 도움이 될 만한 정보가 담겨 있기를 바라는 수밖에.

- ‘77호’의 기억이 담긴 파편을 수령하시겠습니까?

- Y/N

역시 이번에도 남의 일기장을 엿보는 것 같다는 죄책감이 들긴 했지만, 타르토스의 상황을 파악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속으로 아이에게 사죄하며 Y를 눌렀다.

- ‘77호’의 기억이 재생됩니다.

그리고 시야가 잠시 희게 물들었다.

잠시 후, 나는 어느새 방 한구석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건 방이 아니라…….

‘도서관?’

주위를 둘러보니 과연 도서관이었다.

그것도 꽤 규모가 큰, 제대로 된 장서를 갖추어 놓은 도서관이었다.

이 기억의 주인이 ‘77호’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었다. 타르토스에서 이렇게 책을 많이 갖춘 곳은 드물기 때문이다.

설마 그 꼬마 아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기억을 받은 건 아니겠지?

“아직도 멀었어?”

그때였다.

어쩐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게 대체 몇 시간째야?”

도서관 구석에 있는 한 책상에 엎드린 채 부루퉁한 목소리로 말한 것은…… 아이였다.

영 힘이 없이 새어 버린 희끗한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래 보았자 열 살은 되었을까 싶은 어린애. 야윈 얼굴에 이상할 정도로 강렬한 녹음의 색을 품은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메이!”

그러니까, 메이었다.

그 끔찍한 감옥에 갇혔다가 탈출하면서도 끝까지 다른 아이들을 지키고, 그 자신도 포기하지 않았던 강렬한 의지를 가진 아이.

순간적으로 너무 반가워서 이름을 불렀지만, 물론 메이는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메이는 책상 건너편에 앉은 누군가를 향해 불퉁하게 말했다.

“이름으로 할 만한 게 그렇게 없어?”

그리고 나는 그제야, 메이의 건너편에도 한 아이가 앉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서관 구석에 나 있는 창문의 빛에 의지해 책을 읽고 있는 아이.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내가 몸을 빌린 것은 이 아이다.

나는 속으로 신음했다.

‘이렇게 작았구나.’

알리시아가 이런 몸을 한 ‘나’를 어떻게 알아봤는지 의문일 정도로 작디작은 아이였다.

꽤 작은 체격의 메이보다도 훨씬 야위었고, 허름한 옷 사이로 드러난 손마디는 앙상했다. 그래도 검은 머리칼은 단정하게 빗은 상태였고, 책에 파묻힌 눈동자는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빼 아이의 얼굴을 보려고 노력했지만, 책에 가린 그림자 때문에 아직 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아이는 책에 파묻힌 채 대꾸했다.

“그렇게 재촉하지 마. 본래 이름이란 신중하게 정해야 하는 거라고 했어.”

“이름을 너무 급하게 정한 것 같아요. 이거 바꿔도 돼요?

그러고 보니 메이가 마지막에 그런 말을 했었지.

아마도 두 아이가 머리를 맞대고 책을 찾아보며 스스로 이름을 정하고 있는 듯했다.

아니, 그런데 어른들은 어딜 가고 아이들끼리 제 이름을 정하고 있지?

‘77호’의 이름을 지어 주기로 했던 알리시아도 그렇고, 루카스도 사정을 들었다면 이렇게 방치해 둘 성격은 아닌데.

영 위화감이 느껴졌지만 내가 아이들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그저 아이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메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냥 듣기 좋은 걸로 정하면 되는 거 아닌가?”

“아니야, 사람은 이름과 걸맞은 삶을 살게 되어 있다고들 하잖아.”

메이를 타이르는 것 같은 어투는 나이에 맞지 않게 무척이나 어른스럽고 진중했다.

‘77호’가 이런 성격의 아이였구나.

하긴 그렇게 어린 나이에 끔찍한 일을 겪었는데도 자신과 같은 처지의 아이들을 구하고 싶다는 간절한 의지를 품고, 결국 나를 통해 그 목적을 이룬 작은 용사.

또래보다 훨씬 어른스럽다는 건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물론 그게 이 아이 자신에게 좋은 일은 아니겠지만.

“그러니까 너도 다시 생각해 봐.”

얼마 알고 지내지는 않았지만, 긴급한 상황에서도 언제나 또래 아이들을 이끌며 놀라울 정도로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던 메이가 오히려 어린아이처럼 입을 비죽이고 있었다.

“나도 충분히 신중하게 정했거든?”

또래 친구에게 보이는 모습은 다른 걸까?

하기야 이 두 아이는 유별나게 친한 것 같았으니 그럴 법도 했다. 이렇게만 보아도 서로를 믿고 의지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내가 그렇게 흐뭇한 표정으로 두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알리시아’라는 이름은 너무 과해.”

갑작스럽게 나온 이름에 나는 깜짝 놀랐다.

아니, 이름을 바꾼다더니 설마 알리시아의 이름을 따서 제 이름을 짓겠다는 건가?

“뭐가 과하다는 거야? 난 알리시아라는 이름이 좋아. 알리시아 님도 좋고. 그분이 아니었더라면 우리 둘 다 죽었을 거야.”

그렇게 말하는 메이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아이답게 별을 올려다보듯 동경하는 눈동자였지만, 동시에 아이답지 않게 무언가 강렬한 의지로 빛나고 있었다.

“나도 나중에 크면 알리시아 님처럼 남을 돕고 싶어. 그러니까 내 이름은 알리시아로 할 거야.”

그리고 그 말을 듣는 나는 어쩐지 마음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알리시아는 제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고 이 생면부지의, 과거의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였던 아이들을 구하러 달려왔다.

물론 보상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겠으나, 그럼에도 무언가 가슴에 와닿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감동적인 순간도 잠시.

여전히 책 속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아이가 대꾸했다.

“그래, 나도 알아. 하지만 알리시아 님은 결국 그 탑에서 돌아가셨잖아.”

뭐?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리고 잠시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었지만, 77호는 끝까지 말을 이었다.

“난 네가 그렇게 되는 건 싫어. 그렇게 많던 애들도 다 죽었고 이제 우리 둘밖에 없는걸.”

알리시아가 탑에 남아서 죽어? 그리고 다른 애들은 또 왜 죽었다는 거야?

분명히 알리시아는 루카스와 합류했고, 다른 아이들도 마차에 태워서 마을에 도착했다고 했는데…… 들을수록 뭔가 이상했다.

하지만 당황한 것도 잠시, 나는 곧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아, 잠시만.’

그래, 그렇지.

이건 ‘기억의 파편’이다. 77호라는 아이가 본래 가지고 있던 기억.

그러니 즉, 이건 내가 운명을 바꾸기 전…… 본래의 시간대를 살았던 ‘77호’의 기억인 것이다.

즉, 본래 운명대로 알리시아가 죽었던 시간대의 기억 파편이다.

왜 진작 이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나는 눈을 꾹 감았다.

‘젠장, 망할 놈의 기억.’

그래, 행복하거나 도움이 될 만한 기억을 쉽게 보여 줄 리가 없지.

그나마 내게 위안이 되는 것은 본래의 시간대에서도 이 두 아이들은 살아남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두 아이가 자신들을 구하며 목숨을 바친 알리시아에게 감사하고 있다는 점도, 또 그런 끔찍한 기억에도 알버트가 아니라 알리시아처럼 살겠노라 다짐한 것도.

아마 알리시아라면…… 알았다면, 기뻐했을 것이다.

“그래도 난 그 사람처럼 할 거야.”

메이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아이가 책을 탁, 하고 덮었다.

그러자 그때까지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작은 얼굴이,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에 드러났다.

고집스러운 눈매에, 검은 눈동자.

나는 순간적으로 눈을 크게 떴다.

어, 라…….

“그래, 그럼 알았으니까 끝 철자라도 좀 바꾸자. 아니면 발음이라도. 사실 알리시아는 우리 왕국보다는 저 남쪽 이름에 가깝잖아. 우리 왕국식으로 바꾸면…….”

책상에 철자를 몇 번 써 보던 아이가 입속으로 웅얼대듯 몇 번 이름을 발음해 보더니, 곧 번뜩 떠오른 듯 하나의 이름을 말했다.

“엘리사.”

심장이 쿵 떨어졌다.

메이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엘리사? 그렇게 발음하는 거야?”

“그래, 그럼 이렇게 부르면 되겠네.”

검은 머리카락에, 고집스러운 검은 눈동자를 가진 여자아이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엘리사 메이.”

- ‘77호’의 기억의 재생이 종료됩니다.

그리고 악몽에서 깨어난 나는, 내 몸이 식은땀에 흠뻑 젖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머리가 멍했다.

나는 방금 전 일어난 일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내가 뭘 본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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