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183화
가슴 앞에 올곧게 세운 검.
“따르겠습니다.”
강렬한 푸른 녹음의 눈동자.
목숨을 바쳐 싸워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망설임 없이 내 앞에서 다짐했던 기사.
엘리사 메이.
가장 어두웠던 새벽을 넘기고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한 햇빛 너머, 성벽 위에 서 있었던 모습을 기억한다.
그 마지막 경례와 함께 사라지던 모습 또한.
‘왜 생각을 못 했을까.’
내가 유령성에서 만났던 엘리사 메이가 감옥에 갇혀 있던 어린아이였다니.
아이를 보았을 때 강렬한 녹빛 눈동자가 매우 인상적이었고, 메이라는 이름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시스템을 통하게 되면 시간대가 꼬일 수도 있다는 것을 백록담 던전으로 이미 경험하긴 했지만, 그래도 상식적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으니.
하지만 되돌아보니 왜 몰랐는지 스스로도 의문일 정도였다.
그 어린 나이에 벌써 다른 사람들을 다루는 기질이나, 침착성 하며, 보통 아이가 아니라고도 생각했기에 더더욱 그랬다.
20년 후가 기대된다고는 했지만…… 설마 그렇게까지 훌륭한 기사로 자라났을 줄이야.
게다가…… 페트라 또한 그랬다.
메이, 그러니까 엘리사는 머리 색 때문에 곧바로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페트라는 내가 기억 파편 속에서 본 얼굴 그대로였다.
강한 의지가 드러나는 눈동자와 생김새.
만일 던전 공략 중에 거울을 볼 기회가 있었더라면 바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물론 공교롭게도 거울이 없었기에 나중에야 알아차렸던 것이지만.
그러나, 그들이 훌륭하게 성장한 것과는 별개로 그런 성장이 마냥 뿌듯하지만은 않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렇다면 내가 공략했던 유령의 성 던전이 바로 타르토스였다는 뜻이니까.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마치 어떤 강력한 운명이 나를 가지고 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따져 볼수록 상황이 맞아 떨어진다는 점이 더욱더.
‘신촌 던전도 애초에 오류였지.’
그때는 그저 이상한 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조한율 말로는 내가 한국에 돌아온 후 이제껏 발생한 ‘오류’는 나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그러니 그 신촌 던전이 내가 갔던 타르토스와 연결되었다는 건……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어 보였다.
게다가 또 하나.
당시 유령의 성 던전에 들어가 유령들과 처음 만났을 때…… 이상하게도 내 앙겔루스의 가호가 ‘필터링’이라는 특수 기능을 발휘했다.
이 필터링이란 사용자의 정신에 타격을 입을 만한 환상을 걸러 주는 용도로, 일종의 정신 방어 기능이다.
만일 릴리스와 싸울 때 이 앙겔루스의 가호가 없었더라면, 나는 끝까지 정소현이 사로잡혔다는 환상 마법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죽었을 것이다.
그런데 유령의 성에 맨 처음 진입했을 때, 이 앙겔루스의 가호가 가진 특수 기능이 발동되었다는 메시지가 떴었다.
당시에는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다 보니 왜 이런 메시지가 떠올랐는지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는데…….
‘목소리가 안 들렸었지.’
유령들이 내게로 다가와 무언가 말하려고 했지만 내 귀에는 들리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 유령들이 사실은 타르토스 대륙의 주민들이고, 그 상태에서 어느 정도의 이지를 갖고 있었다면 나를 알아보았을 확률도 높았다.
그래서 ‘앙겔루스의 가호’는 그 정보 자체가 내 정신에 지대한 타격을 줄 만한 말이라고 판단하고 ‘필터링’ 기능을 발휘한 것이다.
용사인 주제에 도와주지도 못했던 나를 원망하는 말이라도 쏟아 냈던 걸까?
억울한 죽음으로 던전의 유령이 된 만큼, 아마 좋은 소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니 앙겔루스의 가호가 알아서 특수 기능을 발휘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마음은 좋지 않았다.
‘……들어 주겠다고 해 놓고.’
유령성에 들어갈 때 거울 앞에서 그런 생각을 했었다.
언제나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의 손을 마주 잡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던 아리아드네처럼, 간절히 무언가를 원하는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 주고 싶다고.
그러나, 사실 나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그때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더라면 무언가 더 바꿀 수 있었을까?
그 생각이 계속해서 마음을 괴롭히고 있었다.
물론 머리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당시의 내가 유령의 성 던전의 진정한 정체를 알아차렸더라면?
솔직히 죽었을 확률이 높다.
아무리 나라도 그렇게 충격적인 일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할 수는 없었을 테고, SS급 몬스터와 십만의 군대는 정신이 나간 상태로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하지는 않았으니까.
또 설령 알았다고 한들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지금이야 시스템의 메인 퀘스트를 발견하고 ‘운명의 씨앗’을 통해 운명을 바꿀 수 있다지만, 그때는 이런 희망도 없었으니 더더욱.
그러니 당시 나에게 필터링이 걸린 건 분명히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을 감으면 그때 당시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비참하게 죽어 갔던 사람들, 명예를 지키지 못한 채 죽어 간 기사들, 엘리사와 페트라.
그들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은…….
아무리 그게 불가능했던 일이고, 비합리적인 생각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도 결코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정황을 따져 보았을 때 페트라와 엘리사는…… 루카스가 보호했을 확률이 높았다. 저번 던전의 막바지에서 만났듯, 루카스는 알리시아를 구하기 위해 달려오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페트라와 엘리사는 그대로 루카스의 보호를 받으며 기사로 성장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그 던전에서 휘하에 기사를 둘 수 있는 신분을 가진 인물은 단 두 명이었다.
성에서 산 채로 썩어 가던 성주와 ‘진실에 침식된 군주’.
그리고 만일, 정말로 루카스가 거기에 있었더라면 둘 중 어느 쪽이었을지는 명확했다.
그런 가능성을 점쳐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X발, 대체 무슨 짓을 당한 건데.’
절망이 지배하던 성.
그런 성에서도 가장 높은, 고립된 공간에 스스로를 가뒀던 성주.
만일 그게 루카스였다면, 그 꼴을 내가 모르고 지나쳤다는 사실만으로도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외에도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곳이 타르토스였다는 것을 알고 나니 납득되는 것도 있었지만,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점도 많았다.
그리고 가장 큰 의문은 이것이었다.
만일 그곳의 정체가 타르토스였다면…… 대체 왜 ‘시스템’이 사라진 것일까.
내가 타르토스로 넘어갔을 때는 시스템이 열린 지 이미 10년 남짓 되었을 때였다. 시스템을 통해 힘을 행사하는 게 당연해졌던 세계다.
나도 그 세계에서 상태창을 열고 용사라는 클래스를 개방했으니까.
그런데, 유령성에는 마법도 스킬도 없었다.
엘리사와 페트라로 추정되는 아이들이 열 살 남짓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유령의 성 시점에서는 최소 20년 정도는 흘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대체 그 20년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시스템이 사라진 걸까?
갖가지 의문이 머리를 지배했다.
‘아, 망할.’
그러니까, 이것도 머리로는 안다.
지금 생각해 봤자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애초에, 나는 이번 공략으로 알리시아를 구하면서 운명을 바꾸었다.
그러니 유령성에서 일어난 비극도 이렇게 운명의 씨앗을 통해 계속 바꾸어 나간다면 분명히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미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나비효과라는 것도 있지 않은가.
게다가 타르토스가 멸망했다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그 절망적인 운명이 내가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나타났었을 뿐이다.
결국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운명을 뒤집어서라도 구하러 가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니 내가 할 일은 여전했다.
서브 퀘스트를 달성해 시스템에게서 운명의 씨앗을 얻어 내고, 그걸로 타르토스의 정해진 운명을 바꾼다.
그것뿐이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
엘리사, 페트라, 알리시아, 루카스…… 모두의 얼굴이 잠깐 눈을 감아도 떠올랐다.
혹시, 설마, 어쩌면.
평소에는 별로 발휘되지도 않는 창의력과 상상력이 불안의 가면을 뒤집어쓰고 얼마나 사람을 괴롭히던지.
그렇게 여러 가능성을 검토하며 뜬눈으로 지새우다 보니 어느새 이틀이 지나 있었다.
덕분에 어울리지도 않게 심한 몸살을 앓았다.
그나마 어제는 이우연과 양태원이 방문해서, 그 쓸데없는 수다를 수면제 삼아 몇 시간 정도 잠들 수 있었다.
비록 의도치 않게 당근을 넣은 전복죽 같은 걸 먹기는 했지만…… 덕분에 최소한의 컨디션은 회복했다.
“하…….”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세상만사가 다 X같이 보인다.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수면이란 게 인성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이번 던전 공략은 저희 민트초코 길드에서 주도하겠습니다.”
물론 딱히 이런 상황이 아니더라도 저건 X같이 느껴졌겠지.
길드 이름이 왜 저따위야? 길드가 장난이냐?
나는 힐끗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를 바라보았다. 심지어 정식 길드명은 ‘민트초코와 파인애플피자’였다.
진짜 장난하나.
그 장난 같은 이름의 길드 소속 헌터는 꽤 흥분해 있었지만, 그에 맞서는 다른 헌터도 만만치 않았다.
“아뇨, 이번에는 저희 청운 길드에서 맡고 싶습니다. 아시다시피 저희 길드의 윤지운 헌터가 검사 클래스이고…….”
“하지만 청운 길드는 아직 S급 던전 공략을 주도해 본 적은 없지 않습니까? 경험도 없는 헌터에게 이렇게 중대한 공략을 맡길 순 없습니다.”
“그래도 또 영원 길드에서 공략을 주도하는 건 말도 안 되죠. 이번에야말로 우리 연화의 바람 길드에서 주도를…….”
그리고 그 과열된 토론에 끼어든 것은 역시 피곤한 얼굴의 공무원.
그러니까…… 이선 헌터였다.
“잠시만요. 이런 걸로 다툴 때가 아닙니다. 누가 주도할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레귤러 던전인 만큼 어떻게 공략할지를 먼저…….”
“이런 거라니요!”
“이래서 공무원이란!”
중재차 끼어든 이선 헌터를 향한 날카로운 말들이 쏟아졌다.
“이건 정부에서 나설 일이 아닙니다! 파밍하기 좋은 던전들은 큰 길드에서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는데, 이런 미공략 던전들까지 넘기라고요?”
“아니, 던전 공략은 정부에서 신청을 받아 언제나 공평하게 관리되고 있…….”
“법이야 그렇지만, 정부에서도 한 길드가 던전 하나를 맡아 관리하는 게 행정상 편하다는 이유로 은근히 공략권을 몰아주지 않습니까. 이거 길드 규모가 작으면 서러워서 살겠습니까?”
“맞습니다. 중소 길드한테도 성장할 기회를 주셔야죠!”
이선 헌터가 계속해서 무어라 반론하려 하고 있었지만, 중소 길드 소속 헌터들이 워낙에 흥분해 있는지라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나는 의자에 앉은 채 팔짱을 끼고 상황을 관망했다.
그야 여러 클래스의 헌터들이 모인다기에 공략 회의가 지지부진하게 돌아갈 것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이건 그냥…….
‘개판인데.’
나는 흘긋,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 있는 조한율을 향해 눈짓했다.
‘은의 장막’을 쓰고 있는 나와는 달리 표정이 훤히 드러난 조한율은 매우 피곤해 보였지만 곧 내 시선을 알아차리고 금방 툭툭, 하고 허공을 손가락으로 터치했다.
곧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 운영자, ‘조한율’이 플레이어, ‘방랑하는 구도자’에게 일대일 대화를 신청했습니다.
- 해당 일대일 대화를 위해 플레이어에게 일시적으로 가상 키보드를 제공합니다. 대화 신청을 수락하시겠습니까?
- Y/N
일대일 대화는 예상했다만…… 가상 키보드라고?
일단 하는 수 없이 Y를 터치하자, 정말로 내 무릎 위로 반투명한 형태의 키보드가 나타났다.
설마 이걸 두드려서 소통하는 건가?
한편 조한율의 두 손이 자연스럽게 테이블 밑으로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곧 눈앞에 조그마한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조한율 : 수업 시간에 선생님 몰래 핸드폰 하는 것 같아서 스릴 잇네요.
조한율 : 아, 오타 ㅈㅅ
“…….”
저번에 갑자기 일대일 채팅방에 소환되었던 때보다는 나은 것 같기는 하지만, 이건 이것 나름대로 불편했다.
시스템은 어떻게 보면 엄청나게 편리한 것 같다가도 이상한 부분에서 불편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던가, 그런 기능은 없는 건가?
어쨌든 현재 상황에서 다른 선택지는 없으니, 일단 남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무릎 위로 가상 키보드를 옮기고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방랑하는 구도자 : 도댜체 이 개판을 언쟈ㅐ까지 보고 있어야 해 모랴도 좀 해 바
현재 회의의 가장 큰 화제는 이번 미공략 던전을 누가 주도해서 공략하느냐, 하는 것이었고, 결국 이건 던전의 파밍권과 이어지는 문제다.
물론 중소 길드 입장에서는 중요한 문제겠지만, 솔직히 나로서는 이런 이권 다툼은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딱히 참견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지간한 던전에서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에이펙스의 광검’ 이나 ‘용사를 기리는 망토’ 같은 아이템보다 좋은 게 나올 리도 없고.
방랑하는 구도자 : 난 빨리 섭퀘를 깨고 싶다고
내 목적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서브 퀘스트를 깨서 운명의 씨앗을 얻는 것. 그 외는 모두 쓸데없는 일이다.
조한율 : 오타 장난 없네요ㅎㅎ 딱히 끼어들 것도 없어요. 곧 정리될걸요?
방랑하는 구도자 : 어ㅤㄷㅓㅎㄱㅔ ?
조한율 : 예나 씨 타자 잘 못 치는구나. 귀엽다 ㅎㅎ 이렇게 싸워 봤자 결국 저번 마석 던전 때와 비슷한 라인업으로 가게 될 거예요.
즉, 영원 길드 소속이거나 그 영향권 아래에 있는 헌터들과 정부 소속 헌터들의 조합이라는 이야기였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방랑하는 구도자 : 중소길드드리 저렇게 난린데 어떻게?
조한율 : 저 사람들도 그냥 말만 저러는 거예요. 미공략 던전에 뛰어들 만한 배짱이 있는 길드들도 아니고. 오히려 정말 가자고 하면 기겁할걸요? 공략 데이터도 없는데 뛰어들었다가 괜히 아까운 헌터 목숨만 날릴 수도 있잖아요.
방랑하는 구도자 : 그럼 왜 저 ㅈㅣ랄인데
조한율 : 저렇게 말해야 나중에 공략 데이터라도 받아 내니까요. 저러다가 그냥 자기들 길드에 있는 특수 클래스 몇 지원해 줄 테니 공략권을 달라고 할 거예요.
“그럼 우리 길드가 이번에 참여하지는 않더라도, 후에 공략 우선순위는 주셔야겠습니다. 공략 데이터도요.”
“맞습니다. 우리도 얻는 게 있어야 헌터들을 지원하죠!”
“적어도 영원 길드 쪽에서 공략 데이터는 모두 공유해 주셔야 합니다!”
막 키보드를 치려는데 아니나 다를까, 정말 조한율 말대로 상황이 돌아갔다.
무슨 연극 대본도 아니고.
나는 코웃음을 쳤고, 그걸 본 조한율이 테이블 너머에서 웃었다.
조한율 : 그래도 저 중소 길드들이 지원할 특수 클래스 플레이어가 도움이 되긴 할 거예요. 버퍼 계열 헌터가 몇 있어서. 물론 그래도 메인 딜러들은 저번 마석 던전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정예지만. 저기 있는 류세연 헌터라든가.
나는 그 메시지를 보고 커다란 테이블 한쪽을 흘깃 바라봤다.
테이블에는 거의 스무 명쯤 되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는데, 그 면면이 모두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이 아는 얼굴이기도 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류세연이었다.
얼굴에 커다란 흉터가 남아 있고, 귀 밑으로 똑 떨어지는 칼단발이 인상적인 여자.
저번 마석 던전에서 잠시 부딪혔던 적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류세연 헌터는 지금도 나를 잡아먹을 듯이 이글거리는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조한율이 고개를 갸웃할 정도였다.
조한율 : 예나 씨 인기 많네요.
방랑하는 구도자 : 끔찍한 소리 하지 마라
조한율 : 아, 그리고 백사현 헌터도 참여시켜야죠.
오랜만에 보는 백사현도 테이블 끄트머리에 앉아 주위를 주시하고 있었다. 아주 정신없이 눈을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 게 무슨 쫓기는 사람처럼 보였다.
조한율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조한율 : 저 사람 클래스가 상당히 특이해요ㅎ 들으면 놀라실걸요?
방랑하는 구도자 : 배우
조한율 : 예?!?3 어떻게 알았어요?!
막 키보드를 치면서 아닌 척 시선을 돌리다가 이번에는 백사현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자 백사현이 깜짝 놀라며 의자 위에서 펄쩍 뛰었다.
무슨 고양이 앞의 생쥐 같은 꼴이었다.
나한테 한 대 맞은 게 그렇게 트라우마였나.
“…….”
나는 굳이 내 옆에 앉은 이우연을 힐끔 쳐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이우연이 금붕어처럼 입을 끔벅였다.
‘왜?’
이 녀석은 나한테 매번 주먹으로 쥐어박혀도 내 눈치를 보기는커녕 당근 넣은 전복죽이나 한 솥 가득 끓이던데.
이 차이는 뭘까…… 능력치인가, 아니면 인성의 문제인가…….
“잠시만. 나도 발언을 좀 하고 싶은데.”
내가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였다.
여전히 과열되고 있었던 회의 중에 묵직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마치 달아오른 냄비에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분위기가 확 사그라졌다.
“이번 던전 공략은 꼭 내가 주도하고 싶군.”
물론, 김성연 헌터였다.
그 말을 들은 중소 길드의 헌터가 발끈하며 끼어들었다.
“아니, 영원 길드에서 또 독점을……!”
“오해야. 분명히 말해 두지. 이번 공략을 영원 길드가 주도하는 게 아니라, 내가 개인적으로 주도하겠다는 말일세.”
“예? 그게 무슨……?”
“물론 공략 데이터는 자네들에게도 꼭 넘겨줄 것이고. 다만 공략은 내가 메인으로 나서고 싶군.”
그렇게 말하면서 김성연은 나를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스무 명쯤 되는 인원이 넉넉히 둘러앉은 넓은 회의실인데도 모두가 그 강렬한 시선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뭐, 확실히 인기가 좋긴 하군.
그리고 반응은 반반으로 갈렸다.
공략 데이터 공유를 약속받아서인지 중소 길드 쪽은 대부분 표정이 밝아졌다. 반대로 이선 헌터를 위시한 정부 관계자들은 얼굴이 구겨졌고.
아마도 홍대입구역 사태 때는 가만히 있다가 여기서는 냉큼 나서는 게 어이가 없어서가 아닐까?
내내 갈렸던 공무원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김성연도 만만하지는 않았다. 그는 정부 소속 헌터들의 표정을 살피며 이렇게 말했다.
“저번 홍대입구역 사태 때는 내 부상이 회복되지 않아 돕고 싶어도 그러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내가 나서야지. 헌협 회장으로서도, 영원 길드의 길드장으로서도 국민들에게 굉장히 송구했었다네.
조한율 : 해석하자면, 간 좀 보려고 했는데 이러다 진짜 뒷방 늙은이 될 것 같아서 쫄린다.
조한율의 메시지에 나는 저도 모르게 풋, 하고 웃어 버렸다.
영 분위기가 좋지 않으니 김성연 나름대로는 저자세로 나온 것인데…… 그런 체면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가차 없는 해석이었다.
그야 틀린 건 아니지만.
“…….”
내가 너무 노골적으로 비웃은 탓인지, 김성연의 시선이 언뜻 스쳐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약간의 살기마저 느껴지는 게 아마 제대로 어그로를 끈 모양이다.
나는 다시 무릎 위의 키보드를 두드렸다.
방랑하는 구도자 : 그래도 김성연이랑 같이 가기는 싫은데. 이대로면 저번 마석 던전의 복사판이잖아. 김성연을 뺄 순 없어?
조한율 : 에이, 검사 클래스 중에서는 상위권이라 그래도 넣는 게 나을걸요. 예나 씨 혼자 검사로 가기에는 좀 그렇잖아요. 물론 실제로는 용사지만.
방랑하는 구도자 : 던전 안에서 분열 일어나는 것보단 혼자 하는 게 나아
조한율 : 아, 그건 괜찮아요. 이번에는 다를 테니까.
“나도 그건 찬성이야. 아무래도 이런 일엔 나이 많은 사람이 나서는 게 옳지. 위험한 일이지 않나.”
그리고 회의장 속, 차게 식은 분위기에 다시금 누군가가 불을 지폈다.
묵직한 목소리가 회의장을 가로지르는 순간, 김성연조차 표정을 굳히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었다.
그만큼 존재감이 확실한 사람의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나도 이번만큼은 키보드에서 손을 놓고 고개를 돌렸다.
회의 테이블의 가장 상석.
여느 때처럼 긴 검은색 가죽 코트를 입은 모습의 헌터가 있었다.
조한율 : 교수님이 가시잖아요.
“그러니 이번엔 나도 참여하겠네.”
그렇게 발언한 것은 김숙자 교수였다.
늘어질 대로 늘어져 개판이었던 회의에 단숨에 긴장감을 불어넣은 김숙자 교수가,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향해 스윽, 시선을 주었다.
준엄한 질책 같은 눈길이었다.
그 시선이 스치는 곳에 있는 모든 헌터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어깨와 허리에 힘을 주고 자세를 바로 했다.
김숙자 교수가 회의장의 모든 사람들을 향해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정말로 중요한 사항을 의논해 보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