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189화
“와, 이거 내가 사고 싶었던 모델인데.”
류세연이 지하 주차장 한구석에 보관되어 있던 오토바이 한 대를 찾아내며 감탄했다.
이선은 그걸 보며 혀를 끌끌 찼다.
“너 능력치 올려 봤자 운동 신경은 최악이잖아. 오토바이는 무슨.”
저번 마석 던전에서, 아무리 수로 밀렸다지만 손도 쓰지 못하고 해변가에 엎어져 버렸던 일로 류세연은 이선에게 두고두고 놀림을 받고 있었다.
물론 김하현이 보기에는 이선이 류세연의 완드를 걷어찬 것부터가 문제 아니었나, 라고 생각했지만…… 현명하게도 입을 다무는 것을 택했다.
“닥쳐, 이 자식아!”
그리고 어지간히 수치스러운 기억인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류세연이 완드를 휘둘렀지만, 이선은 쉽게 피하며 오토바이를 살폈다.
“그나저나 이거 깨끗한데? 지하 주차장 쪽엔 멀쩡한 게 꽤 있네.”
지상 주차장에 주차된 자동차들은 대부분 몬스터들에게 한 번씩은 짓밟힌 탓인지 거의 다 파손된 상태였는데, 지하 주차장에 있는 것들은 그래도 좀 더 멀쩡한 것들이 많았다.
“이 정도면 해 볼 만하겠다.”
이선과 류세연보다 먼저 자동차들을 둘러보던 김하현이 눈을 반짝이며 소매를 걷어 올렸다.
“너희들은 이제 빠져. 이제 내가 기술자의 저력을 보여 준다.”
“오오, 김하현 헌터! 당신이 이 던전의 진정한 에이스입니다.”
“드디어 그 전설의 스킬을 보는 거야?”
이선과 류세연이 동시에 과장되게 감탄했다.
김하현은 친구들의 반응을 보면서 씩 웃었다.
기술자라고는 했지만, 실제로 김하현의 클래스는 마법사다.
하지만 이 두 사람과 달리 진언을 깨우치지도 못했고, 스킬도 던전 공략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건 없었다.
사실 엄연히 따져 보자면 마법사라는 클래스 자체로는 이 친구들보다 한참 뒤처지는 셈이다.
물론 마법사는 마법사라 주문으로 마력을 움직이는 공통 마법은 어느 정도 사용이 가능하지만, 랭커 수준으로 강력한 마법을 사용하려면 결국 진언을 깨우쳐야 한다.
그리고, 진언을 깨우치는 데에는 노력뿐 아니라 타고난 재능이 필요했다.
김하현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더라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꽤 많은 회한의 밤과 술을 통해 배웠다.
아무리 시스템이 생기고, 몬스터 따위가 나타나도 어쩔 수 없이 변하지 않는 일도 있다.
결국 이 세상은 천재보다는 범재가 대다수인 세상이 아닌가.
다만 김하현이 보통의 사람들과 하나 다른 점이 있었다면, 거기서 손 놓고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
‘나도 할 수 있는 게 있을 거야.’
모두가 1등이 될 수는 없는 법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분야를 찾으면 된다.
김하현은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러기를 5년.
이선과 류세연이 대범위 공격 마법에 특화된 것과 반대로, 현재 김하현이 가지고 있는 스킬은 대부분 잡다한 계열이었다.
타인의 마법 시전 시 효과를 배가시켜 준다든가, 부족한 마력을 옮겨 줄 수 있는 스킬 등.
이선이 김하현을 향해 물었다.
“얼마나 걸릴 것 같아?”
“3, 40분 정도?”
김하현은 먼지가 쌓인 차체를 손가락으로 쓸며 대답했다.
“자동차 엔진 구조 정도는 눈 감고도 외운다고.”
이 몇 년간 김하현이 깨우친 잡다한 스킬 중 가장 특이한 ‘만능 복원가’.
본인이 구조를 이해한 사물이라면, 원 상태로 복구시킬 수 있는 스킬이다.
덕분에 김하현은 최대 업적자가 될 정도는 아니지만, 어디서나 환영받고 인정받는 헌터가 됐다.
특히 던전 내 체류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더더욱.
현장에서 부서진 아이템의 정비나 수리가 가능한 인재를 인정해 주지 않으면 대체 누구를 인정해 준단 말인가.
게다가 능력치 수련도 게을리하지 않아 체근민 수치도 좋은 편이라 고위 던전에서도 제 몸을 챙길 정도는 되고.
덕분에 현시점에서 김하현은 버퍼 계열 헌터 중 가장 이상적인 플레이어였다.
그래서 그 조한율이 김하현을 아끼는 것이기도 했다.
팔목을 걷어붙인 김하현을 향해 류세연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친구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개 멋있어. 이번엔 진짜 네가 에이스다.”
그냥 본인이 오토바이를 몰고 싶어서 하는 아부겠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실제로 이 던전에서 활약할 수 있는 분야가 생겨 좀 기쁘기도 했다.
이선도 한마디 거들었다.
“혹시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고.”
“물론이지. 철저하게 부려 먹어 주겠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돌아온 대답에 이선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거 잘못 걸렸네?”
그렇게 대략 삼십 분 정도가 흐른 후.
김하현은 자신이 호언장담한 대로 다섯 대의 자동차를 확보했다.
그리고 그사이 이선이 빠르게 다른 헌터들을 동원해 주변 주유소를 찾아서 기름을 조달했다.
아주 일사천리였다.
“교수님, 끝났습니다!”
당당하게 복귀한 김하현의 어깨를 김숙자 교수가 두드려 주었다.
“정말 수고했네, 김하현 헌터. 덕분에 이 나이에 자전거 타고 서울 일주할 일은 없어졌군.”
“네? 자전거요?”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는 김하현을 향해, 옆에서 시큰둥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자전거가 뭐 어때서요. 건강에는 좋으실 텐데.”
김하현은 그 말에 옆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방랑하는 구도자가 서 있었다.
김숙자 교수가 헛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누구나 자네처럼 검사 클래스인 건 아니라네.”
“……그건 그렇죠.”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김하현은 눈치를 살폈다.
‘이, 인사해도 되려나? 나 기억하려나?’
저번 마석 던전에서 잠깐 같은 조로 이동했었던 터라, 당시 통성명은 했던 사이였다. 물론 곧장 떨어져서 제대로 된 대화는 나누어 보지도 못했지만.
사실 김하현은 개인적으로 이 정체불명의 랭킹 1위에게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보조 역할을 하는 김하현에게 강한 헌터는 일종의 동경하는 대상이기도 했고.
물론 친구인 이선과 류세연도 강한 헌터들이었지만, 마법사와 검사는 그 느낌이 전혀 달랐다.
S급 몬스터를 향해 두려움 없이 검 한 자루를 들고 돌진하는 그 용맹함!
어릴 적 만화 영화를 볼 때나 느꼈던 감동이 여전히 느껴질 정도였다.
“김하현 헌터…… 맞으시죠?”
어떻게 말을 꺼낼지 고민하던 김하현은 흠칫 놀랐다.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아, 네. 다시 뵙네요, 방랑하는 구도자 헌터.”
“저번에는 제대로 알 기회가 없었는데…… 확실히 인상적이네요. 마법사 클래스에서 이런 제작 계열의 스킬을 발현하는 건 드문데요.”
심지어 그 사람이 자신에게 먼저 대화를 거는 데다, 자신의 스킬을 칭찬하기까지 하지 않는가!
평소 전혀 내향적이거나 소극적인 성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대화의 흐름에 김하현은 버벅댔다.
솔직히 말해 상당히 감동스러웠다.
은근히 동경하고 있는 랭킹 1위의 헌터가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 주다니.
“어, 가, 감사합니다. 별건 아닌데…….”
“아뇨, 굉장히 유용한 스킬이니 자랑스러워하셔도 될 것 같은데요. 전 교수님 말대로 자전거나 타려고 했으니.”
“그거야 자네가 아직 한국 헌터들을 잘 모르니 그런 거지.”
김숙자 교수가 대화의 흐름을 잡아챘다.
“그러게 두루두루 알고 지내면 좋지 않은가. 자네도 너무 이우연 헌터랑만 어울리지 말고, 다른 헌터들과도 어울려 보게.”
김하현은 눈을 깜박였다.
‘뭐지, 이 분위기?’
아주 익숙했다.
먼저 취업한 선배를 불러다, 아직 취업 준비 중인 후배한테 소개를 시켜 주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교수님 주선의, 인맥을 만드는 자리였나?
방랑하는 구도자도 같은 것을 느낀 건지 고개를 기울였다.
“아, 저 인맥 만들어 주시는 거였나요?”
“그렇게 거창할 것까진 없어. 그냥 서로 알아 두면 좋지 않나. 공략 때마다 자주 얼굴을 마주치게 될 텐데.”
“그래 봤자 저는 어차피…….”
무언가를 말하려던 방랑하는 구도자가 갑자기 흠칫, 하며 입을 다물었다.
“……네, 알고 지내서 나쁠 건 없죠. 잘 부탁합니다.”
여전히 어딘가 심드렁한 태도이기는 했지만, 먼저 김하현을 향해 악수를 청하기까지 했다.
“어,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결국 얼떨결에 악수까지 마쳤다.
김하현으로서는 바라마지 않던 이야기였지만, 솔직히 의외기는 했다.
소개를 받은 방랑하는 구도자 쪽이 아니라, 김숙자 교수님의 태도가.
김하현은 김숙자 교수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교수님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시는 건 드문데.’
김숙자 교수님이 방랑하는 구도자에게 개인적인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명백해 보였다.
게다가 특이한 것은, 이게 김하현에게 랭킹 1위라는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헌터를 소개해 주는 자리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에 가까웠다는 것.
김하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혹시 랭킹 1위의 기반을 키워 주시려는 걸까?’
본인 입으로 말하기에는 뭐하지만, 김하현은 헌터 업계 내에서 제법 발이 넓은 편이었다.
그도 그럴 게 버퍼 계열의 헌터인 만큼, 오히려 이선보다도 많은 공략 지원 요청을 받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인맥이 넓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스킬 자체도 다양해 여러 클래스의 헌터들과 안면을 터놓은 상태이기도 하고.
사실상 헌터 업계의 인맥왕인 셈.
하기야 랭킹 1위는 아직도 소속이 없다.
본인의 놀라운 실력과는 별개로 솔로 플레이로는 한계가 있기 마련. 게다가 영원 길드의 길드장이자 헌터 협회 회장인 김성연과 적대하는 입장에서야 더욱 그렇다.
이런 상태에서 방랑하는 구도자가 한국 헌터 업계에서 자리를 잡으려면, 어쨌든 본인의 세력을 만드는 건 필수적인 일이었다.
또 다른 사람은 몰라도 김숙자 교수와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김하현은, 김숙자 교수가 슬슬 본인의 은퇴를 고려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정년도 가까우시고.’
물론 본인의 철학은 정년에 상관없이 힘이 닿는 한 사회에 봉사하다가 죽는 게 의무라고 생각하신다지만, 아무래도 던전 공략은 체력이 필요한 일이라 언제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기는 했다.
그리고 만일 현재 상황에서 김숙자 교수가 은퇴한다면…….
‘아무래도…… 한국 헌터계에서 중심을 잡아 줄 만한 사람이 없긴 하지.’
모든 헌터들이 고귀한 사명감을 가지고 일을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몬스터를 공략하는, 그래서 일종의 폭력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는 헌터들은 일반인보다 좀 더 견고한 도덕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김숙자 교수의 지론이었다.
그러나 그런 도덕론은 지극히 옳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빛을 보기 어렵다.
당장 김성연 길드장만 해도 그랬다.
그가 헌터 업계를 이끌어 간다는 점은 부정하지 않지만, 헌터 일을 단순히 사업으로 보고 있어서 수익성을 따지기 마련이고, 그건 곧 도덕성의 와해로 이어진다.
저번 마석 던전이 좋은 예였다.
“저렇게 제 이득만 추구하는 인간이…… 본인 외의 인간을 버리지 말라는 법은 없어.”
문득, 당시에 방랑하는 구도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
확실히…… 김숙자 교수와 비슷한 결의 사람이다.
김하현은 저 멀리서 자신과 방랑하는 구도자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류세연을 발견했다.
‘아이고, 저 멍청이.’
말이 걸고 싶어서 안달복달하고 있는데, 저래서야 그렇잖아도 류세연을 이상하게 보고 있을 랭킹 1위가 잘도 받아 주겠다.
그러나, 아무리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많아도 류세연은 김하현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나름대로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닐 수 있는 헌터임에도, 현재 본인이 속한 중소 길드와의 의리를 못 버리는 멍청한 친구였다.
지난번 마석 던전 때 일조차 제대로 항의 한번 못 하고 끙끙 앓고 있는 꼴을 보느라, 요 몇 개월 간 얼마나 속을 썩였는지 모른다.
능력과 더러운 성깔에 비해 이상한 곳에서 순진하다, 이 말이다.
여하튼, 지금도 이 모양 이 꼴인데 만일 김숙자 교수님이 은퇴를 하고, 이대로 김성연 길드장만 세를 불려 나간다면 앞으로의 한국 헌터 업계는 보나 마나였다.
김성연 길드장에게 잘 보이냐, 마느냐로 모든 게 결정되겠지.
김하현은 문득 이를 악물었다.
‘내가 그 꼴은 절대 못 보지.’
저런 속물이 권력을 차지하는 꼴이나 보자고 이 몇 년간 열심히 스킬을 연구하고, 능력치를 올리려고 발악한 게 아니란 말이다.
설령 검 한 자루로 마왕을 잡는 용사가 될 수는 없을지라도, 적어도 그 용사를 도울 수 있는 파티원 1 정도는 되고 싶었다.
그러려면 일단 마왕에 대적할 용사가 필요하긴 했다.
‘김숙자 교수님 픽이라면 방랑하는 구도자도 믿을 수 있을 것 같고.’
다만 문제라면, 방랑하는 구도자 본인은 딱히 흥미가 없어 보인다는 건데…….
더 이어지려던 상념은 곧 김숙자 교수의 말에 깨졌다.
“그럼, 이제 슬슬 출발하지. 자네는 누구랑 같이 탈 건가?”
김숙자 교수가 그렇게 묻자 방랑하는 구도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누구라도 딱히 상관없습니다. 아, 몬스터가 나타나면 대응해야 하니 운전은 다른 사람이 하면 좋겠지만요.”
“참고하겠네.”
“네, 정해지면 알려 주세요. 그럼 전 이만.”
그리고 교수님과 김하현을 향해 고개를 까닥여 보이더니, 곧 저편에 서 있는 이우연과 양태원을 향해 걸어갔다.
충분히 떨어졌다는 판단이 섰을 때, 김하현은 목소리를 낮추어 김숙자 교수에게 물었다.
“방금 그거, 제가 생각하는 그런 건가요?”
“이미 말했듯이,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야.”
상당히 적극적이었던 태도와는 달리 김숙자 교수는 의외로 부정했다.
“그냥 보험 정도라고 해 두지. 보다시피, 본인이 그리 의욕적인 건 아니거든.”
“음…… 제가 뭘 해 보려고 해도 본인이 저래서야 아무런 소용도 없을 텐데요.”
“그거야 그렇지. 자네도 너무 부담은 가지지 마. 정말로 단순한 보험이니까.”
그렇게 말한 김숙자 교수의 뜻을 알 수 없는 까만 눈동자가 방랑하는 구도자의 뒷모습에 잠시 머물렀다.
“물론 성공하길 바라기는 하지만…… 나는 이제 도전보다는 실패를 대비하는 사람이니까 말일세.”
영 아리송하게 돌아온 말에 김하현은 고개를 기울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뭐, 또 금연 프로젝트라도 시작하셨어요?”
“그건 시도도 않으니 걱정하지 마.”
“아니, 적어도 시도는 하시라고요. 몸에도 안 좋은 걸 뭘 그렇게…… 아, 여튼. 그래서 무슨 성공을 바라시는 거냐고요.”
하지만 아무리 대답을 졸라 보아도 김숙자 교수는 무어라 시원하게 말을 하는 대신, 그저 평소처럼 날카로운 눈빛만 빛낼 뿐이었다.
결국 대답을 듣는 것을 포기한 김하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에라, 모르겠다. 나중에 때 되면 알려 주시겠지.’
어쨌든 저 방랑하는 구도자와의 관계도, 개인적으로 진행 중인 일명 꼰대 파멸시키기 프로젝트도, 일단 이 공략부터 성공하고 나서 차차 생각해 볼 일이었다.